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온지유에 노석명은 냉정하게 사고할 수가 없었다.“넌 대체 귀신이야, 사람이야!”바람이 불어오며 온지유의 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거기에다 거리에다 창백한 그녀의 안색까지 더해지니 더 귀신처럼 보였다.노석명은 미간을 찌푸렸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었다.온지유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행여나 말실수할까 봐 말이다.그러면서도 노석명이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엄청난 약점이 될 비밀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았다.노석명은 냉정함을 되찾은 후 생각했다. 그가 알고 있는 그 여자는 이미 죽었다. 그랬기에 눈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온지유의 얼굴을 빤히 보던 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아니지, 네가 온지유구나? 감히 혼자 내 앞까지 찾아오다니, 내가 널 죽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처녀 귀신인 척하려던 것은 결국 들키고 말았다.그럼에도 그녀는 대범하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 이런 들켰네요. 그런데 처음 만난 사이인 것 같은데 제 이름을 알고 계시네요. 노석명 씨, 저희 전부터 알던 사이였나 봐요.”노석명은 그녀가 또 거짓말을 하는 줄 알고 말했다.“아는 사이? 우리가 아는 사이라고?”온지유가 말했다.“어둡고 작은 방, 그쪽이 날 가둔 곳이잖아요!”노석명은 놀랐다.“너, 기억이 돌아온 거냐?”온지유는 그저 추측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진짜일 줄이야.그녀와 그들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하지만 온지유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됐다.“왜, 왜 나한테 접근했던 거죠?!”이치대로라면 그때의 그녀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손쉽게 대낮에 납치당해 이런 곳에 올 리가 없었다.그녀는 이곳이 왜 이토록 익숙한지 몰랐다.“너 지금 또 날 속이고 있는 거지!”노석명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이곳에 둘만 있었고 그와 심리 싸움을 해야 한다.그랬기에 더욱 마음을 단단히 먹
‘탕, 탕탕!'이내 연이은 총소리가 들려왔다.노석명의 탄알은 온지유의 몸에 박히지 않았다.온지유도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총소리는 들렸지만, 탄알은 그녀의 몸이 아닌 볼을 스쳐 지나가며 뒤에 있던 나무에 박혔다.그녀가 눈을 떴을 때 노석명은 모든 물건을 던지곤 망설임도 없이 물속으로 풍덩 들어갔다.그는 그녀를 향해 총을 쏘지 않았다.어쩌면 그 순간 그녀에게 쏠 엄두가 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온지유는 멍하니 서서 노석명이 있는 곳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강의 끝은 급류였다.아주 큰 폭포가 있을 뿐 아니라 물살도 빨라 떨어지면 사망이거나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었다.그러나 노석명에겐 이 길뿐이었다.“온지유!”여이현이 달려왔다. 온지유가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본 그는 얼른 그녀의 팔을 잡아 돌린 뒤 몸을 살펴보았다.“다친 데는 없어?”온지유는 너무 긴장한 탓에 숨 쉬는 것이 힘들어졌고 안색도 창백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요.”하지만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노석명이 자신을 향해 총을 쏘지 못할 거로 생각했기에 이런 위험한 모험을 한 것이었다.비록 노석명이 그녀를 조준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쐈다면 노석명에게도 엄청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온지유는 잘 몰랐다. 노석명의 눈빛에서 그녀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다.그는 그녀를 죽이고 싶어 했다.그러나 엄청난 두려움에 결국 그러지 못했다.특전사들이 바로 뒤를 쫓아갔다. 준비해 두었던 배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폭포가 있는 쪽까지 수색해 보았지만 노석명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대장님, 도망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끝은 폭포이니 무사하지는 못할 겁니다!”“그래도 주위를 계속 수색해. 살아있는 한 무조건 잡아야 해!”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 이번으로 노석명을 철저히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수 있다.말을 마친 그는 시선을 돌려 온지유를 보며 엄숙하게 말했다.“여긴 왜 왔어?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몰라? 왔으면 얌전히 차에 있어야 할
여이현의 말에 온지유는 다소 당황했다.“몰라요.”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대해 아는 것마저도 이상하게 생각되었다.노석명은 이미 급류에 휩쓸려 폭포 속으로 사라졌다.그들은 아무리 수색해도 그를 찾지 못할 것이다.그랬기에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실험실 안은 처참했지만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여이현은 안에 있던 물건들이 떠올라 뜸을 들이며 말했다.“넌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왜요?”온지유가 물었다.“조금 전까지 저한테 안에 있는 함정에 대해 아느냐고 묻지 않았어요? 저도 들어가 봐야 알 것 같아요.”여이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실험실 안은 난장판이야. 딱히 볼 거 없어.”“그게 걱정되었군요. 괜찮아요, 이미 많은 일을 겪어서 이젠 딱히 아무렇지도 않아요. 두려울 것도 없고요.”그녀는 여이현의 걱정을 털어내 주었다.사실 그녀의 멘탈은 아주 강했다.안으로 들어가니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실험실에 있는 물건들이 이렇듯 잔인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포르말린에 담긴 인체 기관을 보니 무언가 인체 실험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게다가 실험에 실패한 변이된 동물도 있었다.케이지에 갇혀 계속 소리를 내고 있었고 손가락이 잘려 피 흘리고 있는 원숭이도 있었다.실험실 안에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비릿한 피 냄새와 여러 가지 약 냄새가 섞여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 나오게 했다.“명진 씨.”온지유는 실험실 한가운데 서서 하얀 장갑을 낀 채 시험관을 들고 있는 인명진을 발견했다.인명진은 고개를 돌렸다. 무사한 온지유의 모습을 보니 그제야 마음이 놓인 그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하지만 나쁜 소식이 있어요. 이곳에 있는 시험관 안에는 진짜 약이 없어요. 전부 가짜 약이에요.”“가짜라고요.”무표정하던 여이현의 얼굴이 엄숙하게 변했다.“늙은 여우 같으니라고!”인명진이 말했다.“노석명의 실험실엔 약이 하나도 없어요. 아마 다른 곳에 숨겨두었을 거예요. 제 생각엔 근처에 숨
온지유는 앞쪽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꼭 그녀에게 방향을 인도하는 불빛인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그녀를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불빛 같기도 했다.그녀는 벽을 만졌다. 예상대로 볼록 튀어나온 무언가가 있었고 바로 눌렀다.하나의 화살이 슉 날아가더니 벽에 꽂혔다.그러더니 지하 통로 안에 불빛이 켜졌다.온지유도 놀랐다. 조금 어두운 불빛 아래 양쪽은 전부 돌로 만들어진 벽이었고 아주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이곳 곳곳에 함정이 있었다.여이현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정말 알고 있구나.”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본능에 이끌려 움직였다.그 덕에 많은 함정을 피할 수 있었다.함정으로 가득한 길을 지나고 나니 눈앞엔 밀실이 나타났다.“이 안에 분명 귀한 것이 있을 겁니다!”뒤에 있는 사람이 말했다.“위에 뭐라고 적힌 겁니까?”밀실 문 위쪽에 문자가 한 줄 적혀 있었다.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너무도 이상한 문자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온지유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그녀가 밀실 문을 열자 안에서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눈앞에 보인 것은 또 다른 실험실이었다.안에는 모든 설비가 갖춰져 있었고 벽에는 여러 가지 약이 진열되어 있었다.인명진은 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노석명이 진짜 약을 숨겨둔 곳이라는 느낌이 한 번에 들었다.“여기에요.”인명진이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여이현이 물었다.“찾을 수 있어요?”인명진이 말했다.“실험을 해봐야 하니 이곳은 저한테 맡기세요.”“그래요. 그럼 부탁할게요.”여이현이 진지하게 말했다.“부탁이라니요, 이곳은 저한테 소중한 경험을 주는 곳인데 부탁하실 필요 없어요.”인명진도 의사였다. 아무리 조직과 연관된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약들에 그는 관심이 아주 많았고 의학적 방면에서 그에게 엄청난 경험을 줄 수 있었다.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알고 싶었다. 이 약들은 도대체 어떤 성분으로 만든 것인지 말이다.법로의 통제에서 벗어나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주고 싶었다.“이곳은 음습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여진숙이 답했다.“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그런 뜻 아니에요.”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허.’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지유 언니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면서 오기 싫다고 해서 내가 올 수밖에 없었어요.”승아는 얼른 손에 난 덴 자국을 일부러 보여주며 말했다.“오빠도 지유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일을 그르친 건 아니죠?”지유가 회사의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이현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지만 승아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살짝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야.”이현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왔으니 앉아.”이현의 말에 승아는 내심 기뻤다. 그녀를 받아준다는 건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회의하러 간다면서요?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이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말했다.“회의 시간 뒤로 30분 미루세요.”승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에 인사도 없이 떠나서 혹시나 이현이 원망하면 어쩌지 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메꾸면 된다.소파에 앉은 승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해명하려 했다.“오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그때 내가 인사도 없이 떠난 거 잘못한 거 알아요. 근데 지금은 다시 돌아왔으니까...”“먼저 일 처리 좀 할게.”이현이 승아의 말을 잘라버렸다.승아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빠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승아는 별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오빠 일 끝나는 거 기다릴게.”승아는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반 시간 중 얼마나 더 앉아 있어야 마주 보고 앉아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약간 이현의 속내를 맞히기 어려웠다.진호가 안으로 들어와서야 이현은 하던 일을 멈췄다.이현이 걸어오자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오빠, 나...”“손은 아직도 아파?”그녀의 상처를 발견했다는 건 그녀를 걱정한다는 걸까?승아가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제 안 아파요.”“응.”이현이 가볍게 대답하더니 진호의 손에서 한약을 받아왔다.“귀국해서 계속 속이 안 좋다며,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