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의 말에 온지유는 다소 당황했다.“몰라요.”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대해 아는 것마저도 이상하게 생각되었다.노석명은 이미 급류에 휩쓸려 폭포 속으로 사라졌다.그들은 아무리 수색해도 그를 찾지 못할 것이다.그랬기에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실험실 안은 처참했지만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여이현은 안에 있던 물건들이 떠올라 뜸을 들이며 말했다.“넌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왜요?”온지유가 물었다.“조금 전까지 저한테 안에 있는 함정에 대해 아느냐고 묻지 않았어요? 저도 들어가 봐야 알 것 같아요.”여이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실험실 안은 난장판이야. 딱히 볼 거 없어.”“그게 걱정되었군요. 괜찮아요, 이미 많은 일을 겪어서 이젠 딱히 아무렇지도 않아요. 두려울 것도 없고요.”그녀는 여이현의 걱정을 털어내 주었다.사실 그녀의 멘탈은 아주 강했다.안으로 들어가니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실험실에 있는 물건들이 이렇듯 잔인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포르말린에 담긴 인체 기관을 보니 무언가 인체 실험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게다가 실험에 실패한 변이된 동물도 있었다.케이지에 갇혀 계속 소리를 내고 있었고 손가락이 잘려 피 흘리고 있는 원숭이도 있었다.실험실 안에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비릿한 피 냄새와 여러 가지 약 냄새가 섞여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 나오게 했다.“명진 씨.”온지유는 실험실 한가운데 서서 하얀 장갑을 낀 채 시험관을 들고 있는 인명진을 발견했다.인명진은 고개를 돌렸다. 무사한 온지유의 모습을 보니 그제야 마음이 놓인 그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하지만 나쁜 소식이 있어요. 이곳에 있는 시험관 안에는 진짜 약이 없어요. 전부 가짜 약이에요.”“가짜라고요.”무표정하던 여이현의 얼굴이 엄숙하게 변했다.“늙은 여우 같으니라고!”인명진이 말했다.“노석명의 실험실엔 약이 하나도 없어요. 아마 다른 곳에 숨겨두었을 거예요. 제 생각엔 근처에 숨
온지유는 앞쪽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꼭 그녀에게 방향을 인도하는 불빛인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그녀를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불빛 같기도 했다.그녀는 벽을 만졌다. 예상대로 볼록 튀어나온 무언가가 있었고 바로 눌렀다.하나의 화살이 슉 날아가더니 벽에 꽂혔다.그러더니 지하 통로 안에 불빛이 켜졌다.온지유도 놀랐다. 조금 어두운 불빛 아래 양쪽은 전부 돌로 만들어진 벽이었고 아주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이곳 곳곳에 함정이 있었다.여이현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정말 알고 있구나.”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본능에 이끌려 움직였다.그 덕에 많은 함정을 피할 수 있었다.함정으로 가득한 길을 지나고 나니 눈앞엔 밀실이 나타났다.“이 안에 분명 귀한 것이 있을 겁니다!”뒤에 있는 사람이 말했다.“위에 뭐라고 적힌 겁니까?”밀실 문 위쪽에 문자가 한 줄 적혀 있었다.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너무도 이상한 문자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온지유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그녀가 밀실 문을 열자 안에서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눈앞에 보인 것은 또 다른 실험실이었다.안에는 모든 설비가 갖춰져 있었고 벽에는 여러 가지 약이 진열되어 있었다.인명진은 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노석명이 진짜 약을 숨겨둔 곳이라는 느낌이 한 번에 들었다.“여기에요.”인명진이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여이현이 물었다.“찾을 수 있어요?”인명진이 말했다.“실험을 해봐야 하니 이곳은 저한테 맡기세요.”“그래요. 그럼 부탁할게요.”여이현이 진지하게 말했다.“부탁이라니요, 이곳은 저한테 소중한 경험을 주는 곳인데 부탁하실 필요 없어요.”인명진도 의사였다. 아무리 조직과 연관된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약들에 그는 관심이 아주 많았고 의학적 방면에서 그에게 엄청난 경험을 줄 수 있었다.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알고 싶었다. 이 약들은 도대체 어떤 성분으로 만든 것인지 말이다.법로의 통제에서 벗어나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주고 싶었다.“이곳은 음습
온지유는 성재민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말했다.성재민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따라갔다.노승아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도 차에 올라탈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어떻게든 여이현을 만나고 싶었다.주위를 두리번대며 여이현을 찾고 있다가 온지유를 발견했다.그 순간 노승아는 다소 충격에 빠졌다.‘뭐야, 쟤가 왜 아직 살아있는 건데!'‘흉터 가득한 놈한테 죽었어야 했잖아! 왜 살아있는 거냐고!'그녀는 더 화가 치밀어올랐다.“온지유!”“온지유!!!”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밀쳐내고 미친 듯이 온지유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그러자 성재민이 온지유의 앞을 막아서며 노승아를 붙잡으려고 했다.온지유는 거절했다. 그저 그에게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 달라고만 했다.노승아는 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질렀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 왜 안 죽은 거냐고! 넌 죽었어야 했다고!!!”그녀는 온지유를 향해 달려왔다.그러나 온지유의 표정은 차가웠고 서늘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노승아가 그녀를 다치게 하려던 순간 온지유는 힘껏 노승아의 머리채를 잡았다.이내 또 손을 들어 노승아의 뺨을 힘차게 갈궜다.“아악!”노승아는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온지유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그녀를 때리고 싶었던지라 차갑게 말했다.“다들 보셨죠. 이 여자가 먼저 저를 때리려고 했으니 전 정당방위인 거예요!”모든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온지유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노승아는 여전히 씩씩대며 고개를 홱 들더니 그녀를 보았다.“감히 날 때렸어? 이현 오빠한테 전부 이를 거야! 이현 오빠는 내 편이라고!”온지유는 처참한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미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에 차갑게 픽 웃었다.“아직도 이현 씨가 그쪽 편을 들어줄 거로 생각하는 거예요? 정말로 이현 씨가 그쪽 편이었다만, 그쪽이 이 꼴이 되었을 거로 생각해요?”노승아는 자신의 모습을 보
온지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노승아를 보았다.노승아는 기세등등한 모습이었다. 입꼬리를 올린 채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해댔다.“넌 오래 살지 못할 거야. 누구도 널 구해주지 못해. 이건 네 운명이니까. 나야말로 이 싸움의 승자야. 난 오래오래 살 거든. 그런데 넌 저 땅속에 파묻히게 되겠지. 하하하하...”말을 마친 노승아는 더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온지유는 이렇게 미친 듯이 웃는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노승아의 사악한 저주를 들은 온지유의 안색이 변했다. 조금 불안해지기도 했다.이때 여이현이 싸늘한 얼굴로 사람들을 이끌고 다가왔다.“이현 오빠.”노승아는 여이현을 보자마자 웃음을 멈추고 가련한 모습을 꾸며냈다. 두 눈에 눈물도 그렁그렁 달며 갈망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이현 오빠, 날 구하러 온 거지?”그녀의 말에 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여이현을 보았다.여이현은 노승아를 지나쳐 온지유의 곁으로 왔다. 노승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온지유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차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나? 왜 또 나왔어.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온지유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바람 좀 쐬려고 나왔어요.”그녀는 시선을 돌려 노승아를 보며 물었다.“노승아 씨는 어떻게 하려고요?”여이현은 그제야 노승아를 보았다.노승아는 소리를 질렀다.“이현 오빠, 지금 이게 무슨 태도야?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오빠를 살린 건 분명 나잖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여이현은 매정한 눈빛으로 담담하게 말했다.“절차대로 처리할 거야.”노승아의 안색이 변했다.“뭐? 내가 뭘 잘못했는데! 여이현, 내가 널 살렸다고! 잊은 거야?”요이현은 노승아의 눈빛을 빤히 보면서 싸늘하게 말했다.“이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날 데리고 노석명 만나러 왔겠어?”노승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실을 알게 된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원래부터 빨갰던 눈가는 더욱 빨개지며 눈물이 흘러나왔다.“뭐? 그럼 모든 게 전부 가짜였다고?”노승아는 붉어진 눈으로
분명 감정에서 노승아는 상처를 받았었다.태어난 순간부터 부모에게 버림받고 노석명에게 맡겨졌다.하지만 그녀는 가소롭게도 사랑을 믿고 있었다.여이현이 그녀에게 보여준 미래가 너무나도 달콤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도 사랑받을 자격 있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전부 착각이었다.여이현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노승아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럼에도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었다.“날 위해 목숨을 바친 것도 전부 가짜라고! 날 속이기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은 거였어?!”이치대로 말하면 목숨은 목숨으로 갚을 수 없었다.그녀의 아버지인 노석명마저 속았다.독에 중독되어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태였던지라 분명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 생각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힐끗 보았다. 온지유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그는 노승아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얼른 데려가.”노승아는 다시 웃기 시작했고 눈물마저 흘러나왔다.하지만 여이현을 보는 그녀의 눈빛엔 원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아니, 원망할 수 없었다.그녀는 정말로 여이현이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처음에 조직에서 나왔을 때 확실히 여이현을 이용해 다른 신분을 얻으려고 했었다.그때의 여이현은 그녀에게 정말로 잘해주었으니까.순수한 마음으로 말이다.그녀는 살면서 그렇게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그랬기에 설령 지금 상황이라도 그녀는 그를 원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여전히 집념이 남아 있었다.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집념이.그녀는 최정상의 자리까지 앉은 뒤에 그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노승아는 이번에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끌려가 차에 올라탔다.문이 닫히자 그녀와 여이현의 사이도 끝나게 되었다.사람은 왜 항상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일까.설령 꿈이라도 해도 이렇게 빨리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그랬기에 그녀는 그래도 원망하고 있었다.왜 그와 자신의 사이에 온지유가 끼어있는지를 원망했다.만약 애초에 해외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
여이현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설령 노승아의 목숨으로 도박을 건다고 해도 여이현은 노승아가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겁났다.그의 말을 들으니 온지유는 마음이 아팠다.오랫동안 이어진 싸움을 그녀 혼자 상대하고 버텨왔다고 생각하니 여이현은 그녀가 너무 고생했다고 생각되었다.설령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신경 쓰지 않는 척해도 이미 그녀에게 푹 빠진 그는 여전히 그녀가 연약하게만 느껴졌다.이어진 그가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온지유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눈물이 저도 모르게 주르륵 흘러내렸다.그간 속상하고 서러웠던 마음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여이현은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가 이렇게 눈물을 흘릴 줄 알았던지라 바로 품에 끌어안았다.“미안해.”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동안 널 고생하게만 해서.”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간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그랬기에 미안했다.하지만 그녀의 목숨을 생각하면 그는 이렇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사랑으로 보상할 수 있으니까. 목숨은 하나이지 않은가.온지유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울면서 주먹으로 그를 콩콩 때렸다.“왜, 왜 나랑 같이 맞서 싸우지 않은 거예요? 왜 혼자 모든 걸 떠안고 있었냐고요! 우리 부부 아니었어요? 부부가 뭔지 알기는 해요? 부부는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힘을 합쳐 견디고 맞서 싸우는 게 부부예요. 그런데 이현 씨는 날 버리고 혼자 영웅이 되었네요. 그런데 난 싫어요, 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요!”여이현은 그녀가 때려도 가만히 있었다. 그녀를 보는 그의 두 눈엔 사랑스러움만 가득했다.설령 온지유가 그를 향한 원망으로 흉기를 들고 달려들어도 이렇듯 다정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뼛속까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난 네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그랬어. 설령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난 네가 조금이라도 편했으면 해서 그랬던 거야. 날 원망하는 게 네가 혼자 죽음을 맞서는 것보다 더 나았어. 지유야, 난
인명진의 표정이 굳어졌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그는 여이현이 해독제를 손에 넣은 줄 알았다.중독된 후에 다시 깨어날 수 있었다는 것은 노석명이 그에게 해독제를 주었다는 의미와 같았으니까.그랬기에 이런 상태가 될 수 없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여이현은 괜찮을 거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몸에서 격렬한 반응이 일어났다.“아마 노석명이 진짜 해독제를 준 건 아닌가 보네요.”노석명처럼 간사한 사람은 당연히 자신을 위해 여지를 남겼을 것이다.인명진은 그를 부축하며 옆에 앉았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여이현 씨 증상은 지유 씨랑 달라요.”그는 여이현의 증상으로만 온지유가 중독된 독과 다르다는 것을 추측해냈다.여이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모르지만, 신체장애가 있을 수 있고 독이 온몸으로 퍼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맹목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이 아닐 수도 있었다.증상은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던지라 여이현은 자신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래도 자신의 최후는 알고 싶었다.“만약 해독제가 없으면 전 어떻게 되는 거죠?”인명진은 여전히 엄숙한 표정이었다.그는 수많은 독약을 봤었다. 어떤 독은 바로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어떤 것은 죽게 하지는 않았지만, 독에 중독된 사람을 엄청 고통스럽게 했다.온지유가 중독된 독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이었다. 온몸에서 천천히 퍼지며 피부까지 썩게 하는 그런 독이었다.지금 상태로 봐서는 여이현의 독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은 아닌 것 같지만 나중에 구체적으로 어떤 증상이 나타날지는 그도 여이현의 몸을 자세히 검사해봐야 알 것 같았다.“이따가 채혈 한번 해보죠.”인명진이 말했다.“그래요.”여이현은 그와 함께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인명진은 바삐 움직였다. 실험실에서 가져온 약을 연구해야 했을 뿐 아니라 여이현이 중독된 독이 어떤 독인지 알아내야 했다.여이현은 채혈했다.하지만 인명진이 그에게 말했다.“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할 거예요. 하지만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어요. 제가
“그렇긴 하지만, 괜히 지유 씨까지 신경 쓰이게 했네요.”“그런 말 하지 마세요. 우린 친구잖아요. 다희 씨 때문에 힘들었던 것도 아닌데요. 오히려 다희 씨가 제 일에 신경 써준 게 더 많은데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아직도 제가 불편하신 건 아니죠?”장다희는 웃으며 말했다.“아, 아직 못 보셨을 텐데 좋은 소식이 있어요! 저희 드라마가 대성했어요!”이 소식은 온지유에게 큰 서프라이즈였다.“정말이에요?”장다희가 계속 말했다.“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성과가 보이네요. 시청률이 역대 최고치를 넘었어요. 시간 되면 꼭 봐 보세요. 그리고 또 하나 좋은 소식! 초반에 잘 나가던 ‘요골’이 지금은 시청률이 뚝 떨어졌어요. 후반부 내용이 엉망이라고 완전 망작 될 기세예요. 시청률도 계속 떨어지는 중이니 결국 우리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네요!”“진짜 잘됐네요.”온지유가 말했다.“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요.”온지유는 이 드라마에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비록 초반에는 큰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성공할 거라고 믿었다.시청자 반응이 다소 미적지근해도 적어도 본전은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큰 성공을 못 이뤘다 하더라도 좋은 경험을 한 셈이라 생각하기로 했었다.결국 창의적인 시도는 성공으로 입증됐다.반면 노승아의 드라마는 제작비가 많이 들었고, 촬영, 편집, 특수 효과까지 모두 완벽히 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단기간에 완성하려다 보니 노승아는 품질을 포기해야 했고 그 결과로 커리어마저 망치게 되었다.자초한 일이었다.노승아의 능력은 좋았지만 승부욕이 강한 그녀는 결국 자신의 앞길을 망쳐버린 것이다.온지유는 장다희와 잠시 더 대화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마침 여이현이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방에 들어 온 여이현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며 미소를 지었다.“오래 기다렸지?”온지유는 일어서며 말했다.“괜찮아요. 일은 다 끝났어요?”“거의 끝났어.”여이현이 말했다.“이제 집에 가자.”그리고 손을 내밀어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