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은 그 사람밖에 없다.여이현은 온지유가 점점 야위어 가는 모습을 보며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여기서 지유를 지켜봐 줘, 어디 좀 다녀올게.여이현은 온지유의 아파트로 가기로 결심했다.그는 그 남자가 그곳에 있을 것임을 확신했다.지석훈은 여이현이 어디로 가려는지 몰랐지만 일단 대답했다."그래."분명 납치 당시 온지유는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온지유가 독에 중독된 것을 알아채고 그 독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현재로서는 어떠한 희미한 희망이라도 놓칠 수 없었다.여이현은 아파트로 돌아와 온지유의 옆집을 바라보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서둘러 문을 두드렸다.1분도 채 되지 않아 문이 열렸다.인명진은 집에 있었다. 그는 여이현이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을 알고 있었는지 전혀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들어와요”여이현은 그의 창백한 얼굴과 쇠약한 몸을 보며 말했다."그 구슬은 당신이 온지유에게 준 건가요?"인명진은 여이현에게 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그 구슬은 원래 온지유의 것이었어요."여이현은 다시 물었다.“전 온지유의 친구 중에서 당신을 본 적이 없어요."인명진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난 친구로 여길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본디 빛을 볼 수 없는 존재니까요."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그렇게 정의하고 있었다.그는 항상 어둠 속에 있어야 했고 누구와도 떳떳하게 친구가 될 수 없었다.그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더 이상 친구가 필요하지 않았다.하지만 온지유만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여이현은 그 손목의 상처와 피를 흘린 흔적을 발견했다. 자기 피를 사용한 것일 테다."왜 병원에 가지 않는 거죠?""내가 바로 의사이기도 하니까요."인명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나보다 내 몸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여이현이 말했다."그렇다면 당신도 온지유가 중독된 것을 이미 알고 있었군요. 그 구슬은 온지유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죠."인
그 이름은 부대에 있을 때부터 이미 들어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 사람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당신도 그를 본 적이 없나요?"여이현이 물었다.인명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는 진짜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아요. 바이러스를 연구하며 몸도 꽤 강하죠.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건 이 정도에요."이 범죄 조직에 얽히면 일이 심각해진다.온지유도 과거에 그 사건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그녀가 고등학교 시절 한여름 동안 실종된 것과도 일치한다. 그 당시 범죄 조직 하나가 잡혔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지금 그중 하나가 다시 나타나려고 하고 있다.그리고 그 '법로'라는 사람은 여전히 법을 피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여이현은 인명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걸 내게 털어주고, 조직의 보복은 두렵지 않나요?"인명진이 웃으며 말했다."이미 말했잖아요, 내가 살아가는 목적은 그녀를 위해서예요. 그리고 나는 약인이에요. 약인을 하나 키우는 데는 많은 정력이 필요하니 나를 쉽게 건드리지는 못할 거예요."그는 온지유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이런 충성심은 여이현마저 놀라게 했다. 둘 사이에는 그가 관여하지 못한 다른 어떤 인연이 있었다.조금은 질투가 났다."지금도 의식이 없나요?"인명진이 물었다."갑자기 쓰러졌어요."인명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걱정했다.여이현이 결심했다."당신이 온지유를 도왔으니, 나도 당신을 자유롭게 해줄 방법을 찾아보죠. 지금은 해독제를 찾아야 해요."인명진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해독제라면, 아마도 그녀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누구죠?"...온지유는 하루 밤낮을 내리 잠만 잤다.여이현도 하루 밤낮을 그녀 곁을 지켰다.그녀가 잠에서 깨지 않는 한 여이현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고, 잠도 자지 않았다.온지유가 깨어난 것은 정오였다.온지유는 눈을 뜨면서도 여전히 피곤함을 느꼈다.손가락을 움직여 보니, 누군가가 손을 잡고 있었다.온지유
온지유는 더 이상 격한 감정을 보이지 않고 차분해졌다.여이현이 자신을 오랫동안 걱정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더 이상 상처 주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말했다."이제 다투지 말아요. 무슨 일이든 잘 이야기해 봐요, 네?""그래야지."여이현이 조용히 대답했다.온지유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왜 한마디만 해요? 혹시 기분이 안 좋은 거예요?""아니야."여이현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다투지 말자고 하는데 어떻게 기분이 나쁠 수 있겠어."온지유는 그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만약 이미 나와 헤어지려고 마음먹었다면, 이제 와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다 무의미한 거 아니에요?""그럴 리 없어."여이현이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우리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야.""정말 나랑 이혼하지 않을 거예요?"이 문제로 둘은 여러 번 다투었었다.온지유도 이혼을 여러 번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여이현이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을 생각해 보니, 그녀도 이해하게 되었다.모든 상황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앞으로도 여이현 같은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그를 놓지 못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배 속의 아기도 아빠가 필요했다.건강한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혼자서 키우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하지만 그래도 여이현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었다.더 이상 일방적으로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이혼하지 않을 거야."여이현이 조용히 말했다."생각해 봐, 계속 이혼하자고 떠들었던 건 너야. 나는 한 번도 그런 말 한 적 없어."온지유는 그가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당신이 내게 그런 생각을 심어줬잖아요. 우리의 결혼은 그저 하나의 거래라고 했고, 무정한 말들을 했잖아요. 내가 아무리 자존심이 없어도, 거기에 대고 죽을힘을 다해 매달릴 수는 없어요. 당신도 나랑 잘해보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 아니에요?"온지유는 처음에는 그와 잘해보려는 생각이 있었다.지금은 그가
"내가 가르쳐줄 수 있어."여이현이 말했다.온지유는 기분이 좋아져 말했다."좋아요, 그럼 선생님을 따로 찾을 필요 없이 바로 당신을 선생님으로 모시면 되겠네요.""그래, 나중에 이야기하자."여이현이 말했다."요즘 계속 병원에 있었더니 답답했지? 데리고 나가 놀아줄게."온지유는 그렇게 말하는 여이현의 팔짱을 끼며 귀엽게 말했다."그러면 난 밀크티도 마시고 싶고, 탕후루도 먹고 싶어요.""어쩜 이렇게 단 걸 좋아할까.""임산부잖아요, 입맛이 자주 변해요."여이현과 함께 있는 시간은 드물었지만, 온지유는 지금의 순간이 매우 기뻤고, 행복을 느꼈다.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행복이었다.이런 행복이 오래 지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용경호가 차를 몰고, 둘은 뒷자리에 앉았다.차를 탄 온지유는 금세 피곤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이현의 어깨에 기대기 시작했다.이를 본 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받쳐 더 편하게 잠들 수 있도록 한 후,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이전 같았으면 온지유는 분명히 깨어났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깊이 잠든 것 같았다.이 점이 또 여이현을 걱정하게 했다.어느 날 잠들고 나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여전히 걱정스러웠고, 그랬기에 그녀를 더욱 꽉 안았다."대장님, 도착했습니다."용경호가 말했다.여이현은 온지유가 깨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 깨우기가 미안해졌다."몇 바퀴 더 돌아 줘.""네."근처를 세 번을 더 돌고 나서야 온지유가 깨어났다."도착했어요?"온지유는 깨어나자마자 물었다."응, 도착했어."온지유는 시간을 보더니 말했다."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길이 막혔어.""그럼 우리 내려요."온지유는 차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광장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작은 가게들도 많았다. 대로의 3D 스크린에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탕후루 있다!"온지유는 한눈에 발견했다.여이현은 온지유가 기뻐하는 표
앞에 있던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비웃기 시작했다."아내를 사랑하면 돈을 잘 번다고? 헛소리, 난 전혀 믿지 않아요! 그럼, 당신은 돈 많이 벌었어요? 하하하.""그렇게 오래 같이 살았는데,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돈을 벌기나 하겠어요?"뒤에 있던 사람도 말했다."먹고 마시는 데에 돈 아끼는 게 중요하지, 임신한 걸 생각 안 했으면 나도 여기 안 왔을 거예요!"앞에 있던 남자와 뒤에 있던 남자는 서로 비슷한 부류였다."믿지 않으면 그만이죠."여이현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차가움이 묻어났다.그들의 말에 그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자기 아내가 돈을 얼마나 함부로 쓴다고?처음 결혼할 때는 왜 이런 말을 안 했을까?정말 믿지 않는다면, 결혼을 왜 했나?두 남자는 여이현의 냉랭한 표정을 보고, 자신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여이현이 돈을 많이 번다는 걸 더욱 믿지 않았다."믿지 않는다고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아직 신혼기라 그렇지. 쯧쯧, 결혼한 지 1년이 넘어 봐요. 쌀 기름 문제로 고민하게 될 거니까. 좋은 아내를 만나서 알뜰하게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나 해요!""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알뜰한 아내를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매일 돈 쓸 생각만 안 해도 내 월급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건데 말이요!"여이현이 말했다."그럼 본인들 능력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봐야겠네요.""당신은 한 달에 얼마나 버는데?"그들은 약간 화가 나서 물었다."난 한 달에 15만 벌어요, 나 혼자 살 땐 여유롭게 살았는데, 결혼하고 나니 빠듯하게 살게 됐어!"여이현은 그들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한 달에 15씩 벌면서, 아내가 천 원짜리 간식을 먹는 게 큰돈이라고 생각해요?""그건 돈 아닌가?"남자가 말했다."매일 먹는 것도 아니고.""몸에서 담배 냄새가 나네요, 하루에 한 갑은 피우죠?"여이현이 냉랭하게 말했다."아내가 천 원짜리 간식을 먹으면 돈 낭비고, 당신이 오천 원짜리 담배를 피우
하지만 손이 여이현에게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용경호가 그 손을 막아내고 손목을 꺾었다.남자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아악, 아파, 아프다고...!”용경호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 누군가가 그들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면 누구보다도 먼저 감지하고 상대에게 행동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대장님, 괜찮으세요?”용경호가 물었다.“괜찮아.”그들은 용경호가 입고 있는 군복과 그의 비범한 몸놀림을 보고 바로 여이현을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이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두 사람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급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형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건데!”“아내를 사랑하면 돈을 번다,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형님, 용서해 주세요. 우리가 뭘 몰라서 그랬습니다!”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이미 덜덜 떨기 시작했다.누군가를 잘못 건드려서 밥줄을 잃는다면 돈을 벌기는커녕 굶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일 것이다.여이현도 이제는 성격이 아주 좋아져서 그들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다.단지 용경호에게 손을 놓으라고 하고 빵을 사러 가는 것으로 충분했다.그들은 손이 거의 탈구될 뻔했다.용경호가 그들을 놓아주자, 둘은 여이현이 줄을 서서 빵을 사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리고 온지유의 존재도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다.하지만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여이현이 떠난 후, 둘은 조용히 속삭였다.“돈 많은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와서 빵을 사지? 비현실적이네.”“내게 그런 돈이 있다면 절대 여자한테 쓰지 않을 거야.”“돈이 많으면 여자가 수도 없이 많아지는데 굳이 한 사람에게 쓸 필요가 어디 있어!”옆에 서 있던 여학생이 두 남자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참을 수 없어 말했다.“그래서 당신들이 평생 큰돈을 벌지 못하는 거예요!”그 말에 둘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온지유는 여이현이 다가오자, 빵을 받아서 들었다.“아까 무슨 일 있었어요? 거의 싸울 뻔한
"아..."온지유는 그 소녀를 불러 세우고 싶었지만, 순간 하얗고 통통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뒤로 물러섰다.온지유는 비둘기의 부리에 걸린 반지 같은 물체를 보았다.온지유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비둘기가 물고 있던 물건은 여이현의 손으로 들어갔다.온지유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제야 그녀는 여이현의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햇빛 아래에서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며 그녀의 눈을 찌를 듯이 빛나고 있었다.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보았지만, 여이현은 그 반지를 그녀의 약지에 끼워주었다.짝짝짝--갑자기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온지유가 고개를 돌리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되자 온지유는 갑자기 긴장하며 당황했다."이... 이게 무슨 일이에요?""정말 로맨틱하네요. 여기서 청혼하다니, 이렇게 많은 장미꽃과 헬리콥터까지, 너무 멋져요!""공주와 왕자의 이야기 같아.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서프라이즈를 해준다면 상대가 못생겼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걸. 하물며 이렇게 잘생긴 남자라니!""사람과 사람은 다르네. 언제쯤 나도 이렇게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날 수 있을지!"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서야 온지유는 이게 청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리고 주인공이 자신이라니?온지유는 놀라움에 빠졌다. 둘은 장미꽃 바다에 둘러싸여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퍼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여이현은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나와 결혼해 줄래?"여이현이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는 당황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전 이미 결혼했잖아요? 벌써 이렇게 오래됐는데 이제 와서 이러는 거예요?"여이현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나와 결혼한 지 3년이 됐는데 너에게 제대로 청혼조차 하지 않았어. 미안해."온지유는 약지에 끼워진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며, 그가 한 말을 듣고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마음이 아프기
“하고 싶은 말이 뭐야?”여이현이 되물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온지유가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설사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고 해도 말이다.“그런데 왜 이러는 거예요? 걔한테 프러포즈하고, 선물도 주고! 난 안중에도 없어요?”노승아는 분노가 치밀어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녀는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받아야 할 걸 온지유가 받았다는 것을 말이다.여이현과 결혼할 사람은 그녀다. 성대한 프러포즈의 주인공이 돼야 했을 사람도 그녀다. 그러나 현실 속 눈앞에 펼쳐진 건 서로 마주 본 채 세상 다 가진 미소를 지은 여이현과 온지유였다.그토록 행복해 보이는 여이현은 처음이었다. 전에는 항상 온지유를 뒷전에 놓았던 그 여이현이 말이다. 한 번도 결혼 생활을 즐겨본 적 없는 그가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었다.그는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진심 어린 미소가 나오게 된 것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그는 어두운 안색으로 핸드폰을 꽉 잡은 채 말했다.“너한테 약속한 것도 어기지 않을 거야.”노승아는 눈물을 머금은 채 말했다.“난 오빠랑 결혼식을 올릴 거야. 걔랑 한 것보다 백배 천배 화려해야 해! 세상 사람 전부 다 알게 할 거야!”“알았어.”여이현은 주저 없이 허락했다.“해독제만 준다면 뭐든 들어줄게.”여이현이 노승아에게 원하는 것은 해독제,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해독제를 받아서 온지유를 살려주고 싶었다.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도 노승아는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여이현이 온지유를 위해 이런 것까지 허락한다는 게 기가 찼다.“좋아요!”노승아는 눈물을 닦으며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거짓말로 마무리했다.“이번에는 용서해 줄게요. 같이 살날이 별로 없으니까 잘해주는 거잖아요. 언젠가 끝날 계약 결혼이에요. 난 그딴 거 신경 쓰지 않아요. 앞으로 나한테 더 잘해줘야 한다는 것만 기억해요.”결혼식도 아닌 프러포즈일 뿐이다.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노승아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앞으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온지유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