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이 무릎을 꿇자 그의 뒤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이 놀라운 장면에 사람들은 상당한 압박감을 받았다.정미리는 깜짝 놀라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온지유도 충격을 받았다.정미리는 더 말을 보태고 싶었지만 여이현의 모습에 그 기세가 누그러들었다. "이현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서 일어나!"여이현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어머니, 지유를 제게 맡겨 주세요!"여이현은 다른 사람들에겐 냉정할지는 몰라도 온지유의 가족들 앞에서는 항상 온화하고 예의 발랐다.정미리가 아무리 여이현에게 불만이 많고 그와의 결혼에 대해 회의적일지라도, 자존심 강한 여이현이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자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정미리는 고민에 빠졌다."미리야."임수경이 그들의 상황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을 보고 말했다."지유는 이혼한 게 아니었어?"정미리는 당황한 듯 임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곧 이혼할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괜찮아 이해해. 이분도 꽤 성의가 있어 보이네."임수경은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하며 말했다."만약 아직 두 사람이 되돌아갈 생각이라면 우리도 강요하지는 않을게. 모든 건 지유의 뜻에 달려 있어. 인연이 없다면 우리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임수경은 복잡한 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정미리는 미안한 마음에 황급히 말했다."돌아가게? 정말 미안해.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라서 괜히 폐를 끼쳤네.”"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 마. 두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하지."임수경의 가족은 이 상황이 두려워 얼른 떠나고 싶었다.혹시라도 폭력배와 얽히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정미리는 연신 사과하며 그들을 배웅했다.이 상황에 정미리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아직도 일어나지 않을 거니? 사람들 다 떠났잖아.""어머님 화가 풀릴 때까지 여기서 무릎을 꿇고 있을게요."여이현이 말했다.정미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여이현이 최선을
그 말에 여이현의 표정이 복잡해지며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온지유는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상대의 가슴을 에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한번 결심한 일은 결코 몇 마디 말로는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침착하게 식당을 떠났다.여이현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식당을 나서자 온지유는 마음속에 있던 억눌림이 한순간에 풀리며 시원해졌다.여이현을 떠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을까?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말에 얼마나 진심이 담겨 있을까.한 남자의 입에서 나온 사랑을 믿는다면 나중에는 그 사랑으로 더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대표님, 따라 안 가시는 건가요?"배진호는 여이현이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을 보고 오히려 더 초조해졌다.여이현이 말했다."얼마나 싫어하는지 봤잖아요. 여기서 더 쫓아가도 정만 더 떨어질 뿐이겠죠.""그러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정말로 사모님을 포기하시겠어요?"배진호가 물었다.여이현은 당연히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KTBC에서 인터뷰를 요청했었죠?""네?"배진호는 순간 여이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여이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안에 남아있을 정미리를 먼저 떠올렸다."사람을 보내서 어머님을 먼저 모셔다드려요."막 정미리의 신뢰를 조금 되찾았는데 또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온지유는 집으로 돌아오다 인명진의 집 앞을 지나며 잠시 멈춰 섰다.온지유는 빨간 머리 여자가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인명진이 키운 딸기는 다른 사람은 절대 건드릴 수 없다고 했다.그가 딸기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인명진은 딸기를 먹지 않는다.먹지 않으면서도 온지유에게 줬다는 점이 이상했다.문을 두드려 물어볼까 하다 시간을 보니 지금은 인명진이 아직 집에 없을 것 같았다.온지유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열쇠로 문을 돌리던 참에 마침 인명진이 돌아왔다."인명진 씨."온지유가 그를 불렀다.인명진은 기운이 없어 보였지만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바로 고개를 들었다.그 목
“우리 자주 보네요? 또 볼지는 모르겠지만 이웃인 것 같으니 잘 부탁드려요, 홍혜주예요.”“온지유예요.”온지유는 홍혜주의 흐트러진 옷차림에 자연스럽게 그쪽 방향으로 생각이 갔다.하지만 그렇게 큰 소리가 날 일은 아닐 텐데.홍혜주는 가슴 앞에 양손을 꼬아 안고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당신이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네요.""무슨 일인데요?"온지유가 한 마디 덧붙였다."아까 두 분 괜찮았던 거예요?"홍혜주가 되물었다."어머, 소리가 많이 컸나요?""조금요.""미안해요, 시끄럽게 굴어서."홍혜주가 웃으며 말했다."다 끝났으니, 이젠 편히 잘 수 있을 거예요."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홍혜주는 온지유를 한번 바라보고는 천천히 돌아섰다.옆집에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온지유도 문을 닫았다.낮에 인명진의 손에는 상처가 나 있었고, 밤에는 홍혜주가 와서 큰 소란을 일으켰다.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남의 일인데 온지유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온지유는 다시 침대로 가서 잠을 청했다.다음 날, 온지유는 편집장으로부터 인터뷰를 맡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보통은 취재기자가 맡는 일이다.안정희는 아침 일찍부터 부서에 와서 온지유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지유가 도착하자 안정희가 웃으며 말했다."성운그룹에 대해 들어봤죠? 그곳의 대표가 마침내 우리 KTBC와의 인터뷰를 수락했어요. 정오 12시에 약속이 잡혀 있으니 지유 씨와 아영 씨가 다녀와 줘요."온지유는 성운그룹에 대해 당연히 들어본 적이 있었다.비록 여진그룹과는 협력한 적이 없지만 성운그룹이 외식 업계에서 손꼽히는 기업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성운그룹의 대표는 올해 50대 중반으로, 기사에서 그의 이야기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회사를 설립한 인물이었다."저와 아영 씨만 가나요?"온지유는 자신이 없었다."저는 방송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경험이 부족해요. 경험이 있는 다른 사
온지유는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공아영은 기자로서 성공하고 싶은 순수한 열망이 있는지도 모른다.하지만 온지유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자의 일이 흥미로웠을 뿐이었다.어떠한 성취를 이루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야망이 없었다.공아영의 순수한 모습을 보며 온지유는 미소 지었다."아직은 생각해 본 적 없네요. 아영 씨랑 저는 다르잖아요.""그러네요, 지유 씨는 저와 달라요. 지유 씨는 여기 오기 전에 이미 많은 걸 이뤘다는 걸 까먹고 있었어요. 여이현 씨의 전속 비서였고 여진그룹의 일은 다 지유 씨 손을 거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잖아요. 그런 일을 그만두고 나왔으니, 당연히 저보다 훨씬 먼 곳을 보고 있겠죠?"공아영은 늘 온지유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온지유는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완벽했고, 미숙한 공아영을 이끌어 함께 나아갔다.공아영은 그런 온지유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자 했다."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너무 높이 평가하지 마세요."온지유가 말했다."전 아영 씨보다 훨씬 더 오래 일했잖아요. 아영 씨도 경험을 더 쌓고 성숙해지면 꼭 저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지유 씨는 어쩜 겸손하기까지 하지."공아영이 웃으며 말했다."지유 씨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건 정말 내 행운이에요. 같이 있다 보면 왠지 운도 더 좋아지는 것 같다니까요.""그럼 앞으로도 계속 운이 좋아지길 바랄게요."온지유는 장난스레 공아영에게 말했다.그 말에 공아영은 온지유의 어깨를 치며 해맑게 웃었다.온지유는 성운그룹 대표에 대한 자료를 거의 다 조사했다.성운그룹 대표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한 후 두 사람은 출발했다.공아영은 처음으로 가는 외부 취재에 긴장했다. 성운그룹에 도착하자 옷매무새를 다듬고 몇 번이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차에서 내리기 전에 공아영이 물었다."지유 씨, 저 괜찮아요? 지유 씨 발목 잡거나 그러진 않겠죠?""이미 충분히 예쁘고 단정해요."온지유의 인정을 받고
온지유는 당황스러웠다. 왜 이런 곳에 수영장이 있는 걸까.온지유가 아직 멍해 있던 그때, 수영장 안에서 첨벙 소리가 나며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온지유는 튀어 오르는 물을 채 피하지 못해 급히 손으로 얼굴을 막았다.첨벙대는 소리가 사그라들고 나서야 온지유는 손을 내렸다. 풀 안에서 누군가가 수영을 하고 있었다. 일렁이는 물속에 있는 사람은 큰 키에 오랜 운동으로 단련된 탄탄한 근육을 가진 뛰어난 몸매의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성운그룹의 대표는 50대가 넘은 사람이 아니었나? 어떻게 이런 젊은 몸을 갖고 있는 거지?'온지유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동안 그 남자의 실루엣이 점점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그리고 남자가 다가와 물 위로 올라왔을 때, 온지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이현 씨? 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거죠?"남자는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며 자신에 찬 눈빛으로 온지유를 바라보았다."왜 내가 있으면 안 되는 거지?"온지유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성운그룹의 대표는 어디에 있죠?"온지유는 이곳에 인터뷰를 하러 온 것이지 여이현과 놀음하러 온 것이 아니다.여이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넓은 어깨를 수영장 벽에 기대며 옆에 놓여있던 와인을 가볍게 홀짝였다.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온지유는 다시 물었다."대답하세요. 왜 여기 있는지 물어봤잖아요. 저는 일을 하러 온 거지 당신과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러 온 게 아니에요."여이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넌 정말 일에 있어선 항상 성실하네. 나를 보고 처음 입 밖에 낸 말도 일이라니."온지유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상황을 파악했다."설마..."방금 리셉션 직원이 대표가 이 안에 있다고 했던 말을 떠올린 온지유는 성운그룹이 여이현에게 인수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네 추측이 맞아. 이제 성운그룹은 내 거야."여이현은 온지유의 의심을 알아차리고 바로 말했다."너희가 인터뷰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야."온지유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
여이현은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와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물방울이 턱을 타고 목을 지나 가슴으로 스며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비록 온지유가 여이현과 7년을 알고 지내고 3년을 부부로 지냈다 해도 이런 장면을 보면 여전히 어색함을 느꼈다.온지유는 겉으로는 차분한 척했지만 여이현 쪽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며 말했다."먼저 말씀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전의 일은 다른 사람이 먼저 맡아갔어요. 편집장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잖아요."온지유의 말을 들은 여이현은 더 이상 따지지 않는 대신 물었다."이번에는?""제가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여대표님도 제가 이번 일에 진심이었다는 걸 아시겠죠."온지유가 말했다.온지유는 항상 둘은 부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했다.아니, 애초에 그들은 부부였던 적이 없었다. 결혼 관계는 있었지만, 결코 행복이나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다.여이현은 말했다."그렇다면 시작하지."여이현은 여전히 수영장에 있었고, 옷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온지유가 다시 말했다."대표님, 수영장에서 나와서 옷을 입으시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요?""온지유 기자의 전문성이 아직 부족해 보이네."여이현은 오히려 온지유의 직업정신을 의심하며 말했다."기자는 언제 어디서나 인터뷰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온지유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다른 누가 수영장에 있더라도 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방송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문적인 기자들과 비교하면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온지유는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여이현은 두 손을 수영장 밖에 걸쳤다. 그의 팔은 길고,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으며, 손가락 사이로 혈관이 도드라져 강한 남성미를 뿜어냈다."그럼 이리 와."여이현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온지유는 잠시
온지유는 깜짝 놀라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다행히도 완전히 물속에 빠지지는 않았다.여이현은 한 손으로 온지유의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등을 지탱했다. 덕분에 온지유의 머리는 물 밖으로 나와 있어 숨이 막히지는 않았지만, 온몸은 다 젖어 버렸다.수영장의 물은 따뜻해서 춥지는 않았으나, 온지유는 분노와 수치심에 크게 뜬 눈으로 여이현을 똑바로 노려보았다.물속으로 완전히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본능적으로 온지유의 두 손은 여이현의 어깨를 감싸야 했다."무슨 짓이에요?!"온지유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여이현은 온지유를 수영장 가장자리로 밀어붙이며, 두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고 눈을 맞췄다."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가 가까이 와주지 않잖아."온지유는 여이현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돌처럼 단단한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아까는 진지하게 일할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이게 뭐예요? 인터뷰는요? 여 대표님의 마음이 일에 있지 않다면 나도 그만두겠어요!"온지유는 몸을 일으켜 물에서 나가려 했다.그러나 여이현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일은 당연히 해야지. 온 기자는 너무 일에만 몰두하네. 때로는 마음을 좀 편히 할 필요도 있어."온지유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나를 물속으로 끌어들이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 생각해요?""잠깐 수영이나 하자고."온지유는 단호히 말했다."이번 인터뷰에 쓴 계약서에 그런 항목은 없어요. 여자와 함께 수영을 즐기고 싶다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부르도록 하세요. 저는 수영을 좋아하지 않아요."온지유의 거절에도 여이현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장난스럽게 물었다."많은 사람들이 나를 한 번 보려고 애를 써도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하는데 잠깐 같이 수영하자고 한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못 보던새에 온 기자가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됐나 보네.""이 시간에 단둘이 함께 있는걸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대표님은 더 이상 대중의 눈치를 볼 필요 없다고 해도, 저는 아직 필요해요.
그 말에 드디어 여이현은 표정을 굳혔다.온지유의 말이 그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굳이 지금 그 얘기를 해야겠어?여이현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정확히 짚고 가는 게 서로가 덜 상처 받는 방법이에요."여이현은 온지유를 응시했다. 겨우 이 모든 것을 잊으려 노력했는데, 온지유는 기어코 이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여이현이 말했다."아이는 지우면 될 거 아니야.""그러고 싶지 않아요."여이현은 입술을 꽉 깨물고 한 걸음 양보했다."생각할 시간을 줄게. 네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난 기다릴 수 있어."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더 이상 시간이 없어요."여이현이 다시 물었다."그러면 말해봐, 아이의 아빠는 누구야?""전에 말했잖아요, 석이라고요."여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마에는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도대체 그 석이라는 남자가 누군데?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하긴 해?""물론이죠."온지유는 여이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석이는 내 마음속의 영웅이에요. 나를 구해준 영웅이요!"여이현은 열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온지유의 입에서 수없이 들었던 그 이름,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 사람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여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만약 그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석이가 가상의 인물이라면? 영원히 네 앞에 나타날 리 없다면? 너 혹시 누구한테 속아서 돈까지 주고 있는 건 아니야?"이 말을 듣고 온지유는 순간 충격에 빠져 여이현을 쳐다보았다.온지유의 상처 받은 눈빛을 마주한 여이현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채찍질 당하는 것 같았다.그녀의 꿈을 깨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온지유에게 그렇게 소중한, 온지유를 지탱해 주던 그 성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아니라 해도 네 말만 들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여이현은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네가 말하는 석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온
단미주는 담담히 말했다.“아무도 안 배워줬다면 지금 배우면 되겠네요. 전에 서비스업 할 때 어땠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나도현 씨랑 결혼했다고 태도를 바꾸겠다는 거예요? 사람은요, 초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나도현은 클럽 안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양시은이 거절하고 그를 밖에 세워뒀다. 그걸 모르는 단미주는 그녀 혼자 있는 게 만만해 보였는지 처음부터 줄곧 막말을 쏟아냈다.“단미주 씨, 제가 오늘 왜 여기 왔을 것 같아요?”양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리한 시선으로 단미주를 바라봤다.단미주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제가 그것도 알아야 해요? 여기 온 이상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갑이고, 양시은 씨는 을이에요.”갑과 을이라는 표현에 양시은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협력이 성사됐나요? 제가 협력 얘기는 없던 거로 하자면 어떡할 건데요. 저도 단미주 씨랑 꼭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양시은은 단미주의 거만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단미주가 조금은 자중하다가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야 빈정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전혀 자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양시은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협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어요. 단미주 씨, 앞으로 저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퇴로는 마련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그 한마디를 남기고, 양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찰나 나도현이 문간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다. 양시은은 그가 분명 단미주에게 따지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얼마 전 연회장에서, 나도현은 단미주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단미주는 전혀 자중하지 않고 또다시 양시은을 건드렸다.나도현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협력이라는 것도 결국 내 아내를 곤란하게 하려는 속셈 아니었나요? 근데 왜 이어가지 않아요?”단미주는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생각했지, 직접
그날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나도현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양시은을 무시했다. 하물며 그가 없는 틈을 노려 양시은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우리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됐는데 내가 널 지키고 싶은 마음도 알아줘. 무슨 일을 겪든 나한테 꼭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르고 지나갈 테고, 그럼 너 혼자서 괜한 고생할 거잖아.”차분하고도 따뜻한 나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네 마음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협력은 정말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해.”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의 곁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그 여자랑 협력한다고 해서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시은아, 내가 있으면 굳이...”나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양시은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도현의 생각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단미주 씨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 기회에 단미주 씨의 기를 꺾으면 아무도 날 얕볼 수 없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양시은의 의도는 너무나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감정을 품은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꿀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딴지를 걸 거야. 넌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돼. 굳이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그의 부모만 해도 양시은에게 엄청난 편견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편견을 내려놓고 하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말이다.어찌 됐든 유언비어는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라, 양시은이 모든 공격을 다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아니, 난 이미 마음먹었어. 말리지 말아 줘.”양시은은 결심이 확고했다. 나도현도 억지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그래. 그렇다면 내가 차
“그냥 집에서 하민이를 돌봐 주면 안 돼? 하민이 너랑 있으면 나도 마음이 한결 편하거든. 돈은 내가 많이 벌 테니까 넌 걱정 말고 편히 지내면 돼. 평생 널 먹여 살릴 수 있어.”나진 그룹의 규모가 워낙 크고, 변호사 시절부터 받았던 수임료도 억대였으니, 나도현은 한 가족이 평생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는 생각이었다.하지만 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전에 내가 하던 일도 이것저것 뒤죽박죽이었잖아. 근데 넌 그때부터 나한테 마음껏 해 보라고 응원해 줬어. 그런데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양시은이 다시 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 나도현이 크게 응원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집에서 하민을 돌보라고 하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집에서 아이만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좋은 기회를 얻어 자기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시기였다.“그런 뜻은 아니야. 네가 여기저기 다니는 게 힘들어 보여서 그래. 너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네가 고생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아.”나도현은 그녀를 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따뜻한 말과 함께 그의 눈길은 온통 양시은에게 쏠려 있었다.양시은이라고 어찌 그 마음을 모르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잡은 이 기회를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다. 세상 모두에게 자신은 나도현과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알았어, 알았어. 더는 말 안 할게. 그럼 오늘은 일단 푹 쉬는 게 어때? 내일 회사 가야 하잖아.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지금 주문해 줄게. 아니면 뭐 마실래?”나도현은 양시은을 마치 아이 대하듯 온갖 걸 다 챙겨 주려 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해결해 주고 싶다는 표정이었다.양시은도 그런 그의 마음을 알지만 오늘 밤에는 다른 고민이 있었다. 단미주와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 표정이 어두운 걸 눈치챈 나도현이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면 무슨 문제 있어?”“아픈 건 아니고... 사실 이따가 협력할 사람이랑
단미주는 임다혜를 면회했다. 임다혜의 상태는 역시나 좋지 않아 보였다.“일이 이렇게 된 거 후회 안 해?”만약 임다혜가 나도현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지도 않았을 것이다.임다혜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인생사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잖아. 난 이제 후회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아.”그러면서 그녀는 단미주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나를 본보기로 삼아. 너는 절대 널 사랑하지 않는 사람한테 목매지 마. 그러다가 멍청한 짓을 저지르게 되는 거야.”임다혜는 아주 정형적인 본보기였다.단미주는 임다혜를 대신해 복수해 주고 싶었으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전에 양시은에게 시비를 걸려다가 오히려 당한 적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쓰렸다.“미안해. 내가 네 억울함을 풀어 주지 못했어. 근데 나도 잊진 않았어.”“네가 날 찾아와 주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굳이 나를 위해 나도현을 건드리거나, 양시은을 상대로 무리수를 두지 말아 줘. 넌 걔네 상대가 안 돼.”특히 나도현은 전직 변호사로서 아주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건 변호사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단미주는 한숨을 깊이 쉬었다.“알지. 그래서 더 미안해. 아무튼 이제 나오면 다시 당당하게 살아. 기다리고 있을게.”“응.”단미주는 임다혜와 오래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자리를 떴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단미주는 어느 날 양시은과 협력을 논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 과정에서도 단미주는 여전히 양시은을 깔보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당신 같은 사람을 나도현 씨가 아니면 누가 알아줬겠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거예요?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양시은 씨, 설마 사람들이 조금 치켜세워 준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단미주는 비웃듯이 웃었다.사람들이 양시은을 높이 평가하는 건 오로지 나도현이 뒤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나도현은 나진 그룹의 경영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변호사 시절에 쌓은 인맥도 상당했다. 게다가 그의 절친한 친
양시은은 나도현이 자신을 위로하는 걸 알고 한숨을 쉬었다. 잠시 우울했지만 곧 기분을 추스르고 괜찮아졌다.하지만 두 아이가 차 안에서 조잘조잘 나누던 비밀이 식당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밥을 먹을 때도 두 아이는 얼굴을 맞대고 귓속말하느라 음식에 손도 별로 대지 않았다.결국 양시은은 더 이상 봐줄 수 없어서 테이블을 톡톡 쳤다.“식사 시간에는 조용히 밥부터 먹어야지. 학교에서도 밥 먹을 땐 떠들지 말라고 배웠을 텐데?”하민은 그녀가 화가 좀 난 것 같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그래서 바로 바른 자세로 돌아앉아 젓가락을 들고 말했다.“네, 이제 조용히 먹을게요.”양시은은 별이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별이도 은근히 그녀가 무서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먹겠다고 했다.두 아이가 순식간에 얌전해지자 양시은은 내심 흐뭇해졌다. 그 모습을 본 나도현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과일 주스를 한 잔 더 따랐다.“기분이 좋아 보이네?”양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소곤소곤 말했다.“아까 차 안에서 하민이한테 한 소리 들었잖아. 그냥 복수하는 거지, 뭐.”나도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귀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너 아직도 애 같다는 거 알아? 왜 애한테 앙심을 품고 그래.”양시은은 나도현이 뭘 말하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큰 문제도 아니니 아이들 장난처럼 넘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놀리고 장난치는 맛이 없으면 육아의 절반은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지 않나.한편, 별이는 저녁을 먹고 나서 온지유가 데리러 왔다. 온지유는 오늘 도와줘서 고맙다며 거듭 인사했다.“별거 아니에요. 고맙긴요. 저 별이 좋아하잖아요.”양시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온지유의 품에서 잠 들어 버린 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랑스러웠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요한 거실 한편을 둘러봤다. 그러다 마침 나도현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딱 봐도 양시은을 찾으러 오는 기색이었다.그걸 알아챈
나도현은 고개를 숙여서 양시은이 꼭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지만 눈빛 속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양시은은 그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해 괜히 조바심이 났다. 어떻게 달래야 좋을지 몰라서 결국 그의 손을 계속 붙잡고만 있었다. 그게 바로 나도현이 원하던 바였다.“이제 슬슬 하민이 데리러 갈 시간이네.”양시은이 자료를 전부 훑어본 뒤 기지개를 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오후 네 시가 되었다. 유치원은 네 시 반에 끝나니 지금 출발하면 딱 맞게 도착할 터였다.나도현은 이미 차 키를 들고 있었다.“가자.”마침 길이 막히지 않아 금세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양시은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말했다.“지유 씨가 오늘 일이 있어서 별이를 못 데리러 간대. 우리 보고 대신 좀 가달라네.”둘은 시선을 마주쳤다.나도현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하나 더 데리러 가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양시은은 집 냉장고 사정을 떠올리고는 조금 고민스러운 얼굴이 됐다.“집에 식재료가 그리 많진 않은데...”아이가 둘이면 조금 모자랄 수도 있었다.온지유가 평소에도 도움을 준 걸 생각하면 별이를 대충 대접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럼 나가서 먹자.”나도현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양시은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하민을 유치원에서 태운 뒤, 저녁에 별이도 함께 있을 거라고 말하자 그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진짜요? 엄마, 그럼 빨리 별이 형아 만나러 가요!”“일단 앉아. 안전벨트부터 매고.”시동을 걸기 전에 양시은이 하민의 자세를 바로잡았다.별이는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유치원과 가까운 덕분에 금방 태울 수 있었다.두 아이가 차에 함께 타자마자 온 세상이 시끌벅적해졌다. 하민과 별이는 서로 보고 싶었다며 눈을 반짝였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양시은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 살짝 귀
식당에 있던 대부분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남자의 말만 듣고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남자가 뻔뻔하게 되묻자 자연스레 의심의 시선이 양시은 쪽으로 향했다.“요즘 애들은 망상증이 심한가 봐.”“아니지, 자기가 예쁘다고 착각하는 거겠지. 자신감도 병이라잖아.”“에이, 너무들 하네. 난 저 여자가 꽤 예뻐 보이는데? 오히려 저 남자가 진짜 훔쳐본 것 같아. 아까부터 묘하게 수상했잖아.”마침 누군가가 중립적으로 말을 거들자, 양시은은 그 사람에게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말을 해준 이는 젊은 여대생으로 보였는데, 양시은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져 서둘러 고개를 떨구었다.양시은은 다시 그 남자와 맞섰다.“제가 언제 저를 봤다고 했어요? 제 손에 들린 서류를 봤다고 했죠.”“헛소리하지 마요!”양시은은 짧게 한숨을 쉰 뒤 미소를 띤 채 단호하게 말했다.“헛소린지 아닌지, 여기 CCTV 영상 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저쪽에 카메라가 하나 달려 있거든요. 떳떳하다면 확인 정도 해봐도 되죠?”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 보니 희미하게 빨간불이 켜진 카메라가 있었다. 남자는 그제야 카메라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양시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잡아주세요! 저 사람 변태예요!”하지만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주변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허둥대느라 반응을 못 했다. 양시은 역시 한발 늦어 속만 탔다.그때 갑자기 남자가 달려간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뭐야, 네가 뭔데 내 손을 꺾어! 아악!”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만 들어도, 그를 붙잡은 사람이 꽤 강하게 제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도현이었다.언제부턴가 문가에 서 있던 나도현을 발견한 양시은은 눈을 깜빡이며 리셉션 쪽을 흘끗 봤다. 혹시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 싶어서다.“너 언제 온 거야? 아까는 여기 없었잖아...”“전화가 와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어.”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