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온지유는 여전히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여이현이 아주 가볍게 한 이 한마디는 다소 차가우면서도 허탈하기도 했다.‘내가 너무 많이 생각한 거겠지.’온지유는 이 습관을 고칠 수 없었다. 그녀는 항상 여이현의 말에서 그의 감정을 분석하려고 했다.그녀는 그의 희로애락이 신경 쓰였다.사실 그녀는 그 정도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강태규 집에 들어서자 이미 많은 사람이 도착해 있었다.대략 열몇 분 되어 보였다.정장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몹시 위풍당당해 보였다.강태규는 새 옷이 아닌 세월의 흔적이 있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여이현이 말했던 것처럼 강태규는 절약 정신이 있는 사람이었다.강태규는 사람들이랑 얘기를 잘 나누고 있다고 여이현과 온지유가 온 것을 보고 얼굴에 미소를 활짝 띠었다.“이야, 이현이 왔구나. 지유도 왔네.”강태규는 지팡이를 짚으며 연신 일어서며 그들을 반겼다.온지유는 강태규가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게 하려고 무의식적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어르신!”“지유야.”강태규는 온지유를 보더니 말했다.“오늘 이쁘게 입고 왔네. 이현이 이 자식 드디어 네게 이쁜 옷을 사줬나 보네!”강태규의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온지유는 웃으며 대답했다.“지난번에 뵀을 때 두 번 다 제가 일하고 있어서 좀 심플하게 입었던 거예요. 사실 이현 씨가 많이 사줘요.”온지유는 그래도 여이현을 감싸며 예쁜 말을 해댔다.이건 이미 그녀에게 습관처럼 되었다.강태규가 말했다.“그러면 됐어. 아내를 아낄 줄 아는 남자가 잘 되는 거야.”여이현을 바라보는 강태규의 눈빛도 호호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어르신.”여이현은 매우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몸은 좀 나으셨어요?”강태규가 대답했다.“이미 나았어. 걱정하지 마. 난 네 할아버지보다 몇 년 더 살았으니 이젠 충분해!”여이현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돼요.”여이현의 안색이 변한 것을 보자 강태규는 또 경쾌하게 말
‘왜 전에 이현 씨가 말한 걸 들은 적 없었던 거지?’하지만 두 사람 사이가 원래 계약서로 묶여있어서 상대방을 너무 간섭하지 않는 것은 제일 기본이었다.그리고 그도 남김없이 전부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온지유는 얼른 자기의 시선을 거두었다.갑자기 누군가가 수습하는 소리가 들렸다.“어르신, 저희도 어르신의 뜻을 다 이해해요. 저희도 군말할 생각이 없어요. 그저 사실이 그런지라 전 부대장님도 어르신을 위해 불평하는 거예요. 어르신도 어쨌든 윗사람인데 안 지 얼마 안 됐죠? 제가 보기엔 이현이 쟤, 어르신도 안중에 없는 거 같아요.”온지유는 이 사람들이 여이현을 잡고 안 놔주는 것을 들으면서 다시 여이현을 올려다보았지만, 그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예전의 여이현 성격대로 라면 그는 이 사람들이 이렇게 대놓고 앞에서 비난하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었다.아마도 강태규의 체면을 봐서 가만히 있는 것 같았다. 필경 이 사람들은 다 강태규랑 친한 사람들이었다.“이현아,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탓하지 마. 아무래도 같이 생사를 나눈 사이인데 아무리 겸손하게 처사한다고 해도 결혼 같은 대사를 우리한테 통지하지 않은 건 너무 하잖아. 아니면 설마 너 결혼을 억지로 한 거야?”전세봉은 입가에 씩 미소를 지으며 이번 연회에서 여이현을 골탕 먹이지 않으면 가만히 있을 기세였다.온지유는 비록 이 사람들이 도대체 왜 여이현을 겨냥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여이현이 마치 그들의 눈에 든 가시가 된 것을 보면서 왜 그동안 여이현이 주동적으로 강태규랑 왕래하지 않았는지를 대충 알 것만 같았다.여이현이 아무리 강태규의 곁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고 해도 아마 이 사람들 때문에 기피한 것 같았다.온지유는 이 사람들이 호시탐탐하게 여이현을 노려보는 것을 보며, 그녀는 주동적으로 여이현의 손을 잡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여러분들 오해하신 거예요. 이현 씨는 저를 존중해 준 것뿐이에요. 제가 공개하지 말자고 했어요. 제가 이 사람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제수씨, 이 한잔은 제수씨께 드려요.”동시에 전세봉은 온지유에게 술 한잔을 따라서 건네주었다.여이현은 한 손으로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세봉이 건네 술잔을 받았다.“우리 아내가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서 이 잔은 제가 대신 받을게요.”여이현은 동작이 아주 빠르게 손에 든 술을 한꺼번에 마셔버렸다.다른 사람들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쯧쯧! 여이현 이놈 봐라. 전에 부대에 있을 때는 온갖 고생을 다 받으며 그렇게 용감하고 사나이답던 놈이 오늘은 와이프를 위해서 술까지 막다니. 이야, 참으로 다정한 남자네!”“그러게, 말이야.”“이현아, 우리에게 소개해 준 김에 언제 다시 결혼식을 안 올리냐? 두 사람 아직 결혼식을 안 했지? 우리가 나중에 축의금 톡톡히 챙겨 넣어줄 테니 결혼식에 술이나 얻어먹으러 가야지!”온지유는 웃고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았다.비록 아까는 여이현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강태규가 몇 마디 한 후, 불만도 사그라든 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어떤 분들은 정말 진심이 가득 찬 말투였다.온지유는 시종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여이현은 천천히 입을 떼며 말했다.“확정이 되면 제일 먼저 알려드릴게요.”“꼭 그래야 해! 결혼은 일생일대의 큰일이야. 아무리 겸손하다고 해도 여자가 손해 보게 해서는 안 돼.”그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여이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이 없었다.이때 갑자기 발랄한 목소리가 전해왔다.“할아버지.”사람들은 다들 말소리가 나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묘령의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야. 내 보배단지 손녀가 왔구나.”강태규는 고개를 돌려 보더니 순간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띠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어가며 두 팔을 쭉 벌렸다.강윤희는 강태규의 앞까지 걸어와 그를 와락 안았다.“할아버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강태규는 강윤희를 안으며 눈에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할아버지도 네가 보고 싶었어.”온지유는 순간 눈동자가 흔들렸다.‘이 여자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강윤희는 그대로 여이현의 곁으로 걸어와서 말했다.“지난번에 고모네 무도회 때, 오빠랑 제대로 몇 마디 얘기하지도 못했는데 오빠가 바로 갔잖아요. 이번에는 여러 날 머무를 거죠?”강윤희의 손은 주동적으로 여이현에게 팔짱을 끼면서 온지유를 뒤로 내팽개쳤다.강윤희가 무도회에서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 온지유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였다.그리고 그때 강윤희는 고모한테 여이현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다년간 그녀는 여이현을 자기 친오빠라고 생각했기에 도와드릴 의향이 있었다.여이현에게 아내가 생겼으니, 강윤희는 그녀를 형수라고 여기면서 잘 대해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하지만 그녀는 온지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강윤희는 친구한테서 온지유가 드센 캐릭터라는 것을 전해 들었다.온지유가 업무상 지신의 직무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심지어 총애를 믿고 교만하기까지 하다고 들었다.그리고 여이현의 어머니도 온지유를 싫어한다고 들었다.여이현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강윤희는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자신이 앞으로 이렇게 드센 형수를 상대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 강윤희는 결코 그런 억울함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이혼하면 더 좋고.’“오래 못 머물러.”여이현은 손을 내빼면서 강윤희를 살짝 밀어내고 그녀에게 귀띔을 해주었다.“사람도 많은데 주의 좀 해줘.”강윤희는 또 말했다.“왜요. 당신은 내 오빠잖아요. 어릴 때 나랑 얼마나 친했는데, 결혼했다고 달라져요!”강윤희는 눈길을 온지유에게 돌렸다.온지유도 어떻게 된 일인지 여이현과 결혼을 한 뒤로부터 동성 인연이 안 좋아졌다는 것을 느꼈다.누구나 온지유를 못마땅하게 느끼곤 하였다.그녀도 당연히 강윤희가 자기를 못마땅해하는 눈빛을 알아보았다.마치 자기가 그녀의 이현 오빠를 가로채 간 것처럼.하지만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온지유는 별말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 장면을 눈에 담은 강태규는 비록 강윤희가 여이현에 대한 건 그저 오누이 간의 정이라는 것
강윤희는 바로 강태규의 품에 기댄 채, 위로가 시급한 모양을 했다.강태규는 강윤희의 얼굴을 부둥켜 잡고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저 조금 긁힌 것이어서 살갗이 조금 찢어졌고 얼굴이 망가질 정도는 아니었다.“상처가 작아서 괜찮을 거야. 윤희야 보는 사람도 많은데 그만 울어.”“할아버지.”강윤희는 코를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꼭 나를 위해 정의를 밝혀주세요.”강태규가 말을 하기도 전에 전세봉이 소리를 내서 말했다.“윤희가 다쳤다니. 우리 윤희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강 어르신께서 고생을 하나도 안 하게 곱게 키웠는데. 누가 감히 윤희를 괴롭혀? 내가 제일 먼저 그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온지유는 덩치가 우락부락한 전세봉을 보면서 정말 전세봉이 자신을 때리기라도 하면 자기는 그저 작은 개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온지유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꼭 잡고 전세봉을 보며 냉랭하게 말했다.“당신은 우리 지유 뒤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온지유는 조금 의외였다는 듯이 여이현을 바라보았다.그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시종 침묵을 지키면서 반박의 말 한마디 없던 여이현은 온지유가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상대가 누구든 항상 첫걸음에 달려와 그녀를 위해 나서서 맞서 싸우곤 하였다.전세봉도 똑같이 여이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 밑에는 분노가 조금 서렸지만, 말이 없었다.여이현의 눈빛도 싸늘했다. 그는 이런 장면이 정말 지겨울 정도여서 차갑게 말을 꺼냈다.“어르신, 다들 우리를 반기지 않는 눈치인데 우리는 이만 가볼게요.”여이현은 온지유를 잡으면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거기서.”강태규는 이번에 강윤희를 안으며 손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반대로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아직 내 얘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왜 너희끼리 먼저 싸우는 거야!”그는 눈길을 강윤희에게 돌리고는 신중하게 말했다.“윤희야, 이런 재미없는 장난은 그만 해. 지유가 어떤 애인지 내가 모를까 봐? 아니 근데 너, 어디서 배운 나
온지유는 더 말하지 않았다. 강태규의 말이 맞는 말이었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쉬웠지만 그 대가는 엄중했다.“죄송해요. 형수님.”강윤희가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용서해요!”온지유는 아주 대범하게 말했다.옆에 있던 강태규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다행히 이번 일에서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어서 말했다.“잘못을 알면 되었어. 하지만 잘못인 것을 모를까 봐 그게 걱정이었어. 이제야 체면 있는 사람 같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마.”강윤희는 기특하게 대답했다.“네, 알겠어요. 할아버지, 앞으로는 형수님과 잘 지내볼게요.”그리고 강윤희는 또 덥석 온지유의 팔짱을 꼈다.그녀는 강태규에게 자기가 온지유랑 사이좋게 지낼 수 있으며 앞으로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이에 강태규는 웃음을 지었다.“그래, 그래. 사이좋게 지내.”하지만 온지유는 살짝 불편했다.갑작스럽게 닥친 친근함에는 무조건 꿍꿍이가 있는 법이었다. 다행히 강윤희는 별짓을 벌이지 않았다.그저 강태규 앞에서 쇼하면서 강태규 기분을 풀어주었다.“할아버지, 오늘 할아버지의 70세 잔치인데 기분이 상하면 안 되죠. 손녀딸인 제가 축복의 말 한마디 할게요. 우리 할아버지 앞으로 건강하고 오래오래 장수하세요!”강윤희는 입에 꿀을 바른 것처럼 예쁜 말을 하고는 또 강태규를 향해 세배를 올렸다.강태규는 아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애를 많이 썼어. 그렇게 큰절할 필요까지는 없으니 얼른 일어나. 무릎이라도 찢어지면 어쩌려고.”강윤희는 두세 번에 바로 강태규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까 일도 그냥 넘어가게 되었다.“아직 식사도 시작 안 했네요. 식사합시다. 식사해요.”전세봉이 옆에서 말했다.“아이고, 배고파 죽겠네. 다들 자리에 앉고, 너무 격식 차리지 말고.”“밥 먹자.”강태규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현아, 지유야. 너네도 얼른 앉거라.”여이현도 당연히 강태규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네.”강태규는 온지유에게 말했다.“내
여이현이 다가와 그녀와 함께 바람을 쐬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익숙해졌어요. 그래서 바꿀 생각도 안 해요. 어차피 다 똑같아요.”똑같아?무엇이 똑같다는 걸까.온지유는 자신이 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많은 비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에도 그들이 당신을 이렇게 대했어요? 왕따 시킨 거예요?”왜 그럴까?분명 이 사람들은 여이현보다 나이가 많다.그들은 그렇게 강윤희를 애지중지 여기면서 왜 여이현에게는 너그럽지 못한 걸까.그가 군대에 있을 때 아마도 아주 어렸을 것이다.여이현이 대답했다. “앞으로 그들과 만날 일은 별로 없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당신 군대에 있었던 거 한 번도 나한테 말한 적 없잖아요.”여이현은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대에 있었던 것뿐이에요. 정식으로 입대한 것도 아니고 그때는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강태규가 나를 받아주신 거예요.”온지유는 조금 놀라며 말했다. “왜요? 집에서는 당신을 돌봐주지 않았어요?”여이현은 무심하게 말했다. “다들 바빠서 시간이 없었어요.”온지유는 입술을 깨물며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그는 여씨 가문에 있었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강태규가 잠시 돌봐줘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게다가 그의 부모가 돌보지 않았더라도 고모가 있었잖아.“그럼 당신... 많은 사람을 구했겠네요.” 온지유는 호기심에 물으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여이현은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때는 어렸고 겨우 10대였어요. 뭘 알았겠어요. 그냥 임무를 완수하는 것뿐이었고 몇몇 사람은 구했어요.”온지유의 추측은 맞았다.그는 많은 사람을 구했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온지유가 다시 물었다. “당신 몸에 있는 상처들도 그때 생긴 거예요?”“네.”그 말을 듣고 온지유는 여전히 약간의 마음이 쓰렸다. 10대라면 아직 아이인데 말이다.분명 그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그런데도 그는 이미 많은 일을
“윤희야, 고마워. 네가 이렇게 잘해줄 줄은 몰랐어.” 상대방이 감사의 말을 전했다. “네가 이렇게 고생할 줄은 몰랐어.”강윤희가 말했다. “고맙긴. 널 괴롭히는 사람은 당연히 나도 괴롭히는 거니까. 친구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야지, 나쁜 사람이 이기는 걸 두고 볼 수 없잖아.”“그냥 너에게 한 번 말했을 뿐인데 너는 마음에 두었구나. 네가 이렇게 해주니 정말 감동이야.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정말 좋다.” 상대방은 감동하며 말했다.강윤희는 언제나 그랬다.친구에게 진심을 다해 대했다.어릴 때부터 그녀는 항상 소중히 여겨졌고 큰 어려움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악한 사람들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친구가 괴롭힘을 당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그녀는 먼저 나서서 도와주려 했다.비록 결국 자신이 불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지만 말이다.그래도 후회하지 않았다.다음번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상대방은 계속 말했다. “최근에 시간 있니? 밥 한번 사주고 싶어, 제대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시간 있어.” 강윤희는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언제든 좋아, 네가 시간만 있으면 돼. 하지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우리는 친구잖아. 친구는 서로 돕는 게 당연하지.”두 사람은 한참 동안 통화를 했다.상대방은 강윤희에게 많은 험담을 했다.강윤희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녀는 화가 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집에 돌아온 온지유는 화장을 지우고 샤워를 하고 그 드레스를 옷장에 넣었다.그녀는 그 드레스를 꽤 좋아했다.드레스라는 것이 대부분 한 번 입고 마는 것이지만 말이다.그녀는 다음번에도 입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침실에는 여이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녀는 침실 문을 열고 그가 밖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미 한참 동안 통화하고 있는 듯했다.그는 그녀가 문을 여는 것을 보고는 전화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신이 졸리면 먼저 자요.”온지유는 오늘 그를 더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
“있어요! 내일 아침 출발하는 건데, 초원에서 말을 타고 마유주를 마시는 일정이에요. 총 7박 8일이고 모든 비용은 전부 저희가 책임집니다!” 여대생은 너무 기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아르바이트 첫날 만에 벌써 계약을 성사시키다니!급여를 받으면 바로 외할머니 치료비에 보탤 수 있었다.“그럼 그걸로 할게요.”어차피 어디든 상관없었다.여기를 떠나기만 하면 됐다. 더 이상 배진호와 남태건을 마주치지 않는 걸로 충분했다.권다솔은 가이드의 연락처를 추가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출발지 근처의 호텔에 묵기로 했다.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뒤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었다.“저 내일 여행사 패키지로 여행 가려 해요. 다음 주쯤 돌아올게요.”“좋지! 네 나이에는 이곳저곳 다니며 세상을 봐야 해. 만 권의 책을 읽으려면 만 리를 걸어야 한다잖니. 짐은 다 챙겼니?”김영은은 딸이 여행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다만 여행길이 불편할까 걱정될 뿐이었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 비록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지만 괜찮았다.“요즘 세상이 얼마나 편한데요. 필요한 건 현지에서 사면 돼요.”“다른 건 밖에서 사도 되지만 침구류는 우리가 보내줄게. 네 피부가 워낙 예민해서 호텔 이불 덮었다가 알레르기라도 나면 어쩌려고.”권용민이 덧붙였다.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집의 침구와 비길 순 없었다.그는 아직도 권다솔이 어릴 적 피부 알레르기로 한밤중에 병원에 가서 약을 사고 주사를 맞으며 한바탕 난리를 겪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저 지금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요. 굳이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어요. 너무 번거롭잖아요.”권다솔은 부모님이 늦은 시간까지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그러나 딸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녀의 마음보다 더 깊었다.권용민은 끝내 직접 가겠다고 고집했고 권다솔은 결국 그들을 이기지 못해 승낙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문득 배진호를 떠올렸다.‘지금쯤 석규리와 단둘이 집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다만
할머니는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아이고,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여기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여자 친구가 아직도 너를 만나주지 않니? 이 할미가 한 가지 충고를 해주고 싶은데 들어볼 생각 있니?”배진호는 당연히 할머니가 그만 포기하라고 할 줄 알았다.만약 여기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배진호 역시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건 당사자만 알 수 있는 법이다. 사랑은 보잘것없는 먼지가 아니기에 바람에 날려 사라질 수 없었다.다만 할머니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나도 젊었을 때 우리 집 할아버지를 엄청 쫓아다녔단다. 그때 할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집안 사람들 또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 내가 시골 출신이라 배운 게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니? 나는 그저 그 사람 자체가 좋았어. 그렇게 오랫동안 쫓아다녔고 결국 내 사람으로 만들었단다.”할머니는 눈꼬리를 휘어 올리며 말했다.배진호는 본능적으로 물었다.“그러면 두 분이 함께하신 후에도 할아버지 집안 사람들은 여전히 할머니를 예전처럼 대하셨나요?”“그럴 리가 있겠니? 부모는 그저 자식이 좋은 짝을 만나길 바라는 것뿐이야. 일부러 방해하려는 건 아니지. 결혼 후엔 날 친딸처럼 대했단다. 집안의 돈까지 전부 나한테 맡겼으니. 설령 그 집안에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도 두려울 게 없었어. 어차피 내가 그들보다 오래 살 텐데.”할머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당당하게 말했다.“적어도 99살까지는 살 거 같아.”배진호는 할머니의 말에 크게 동요했다.그는 권다솔의 부모님이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결혼 전에는 반대했지만 결혼 후에는 축복해 줄 사람들이었다. 그의 어머니처럼 계속해서 방해할 분들이 아니었다.그의 어머니 역시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이미 수술을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 강력히 반대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결국 병문안 갈 때 적당히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할머니,
왜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권다솔의 태도가 다시 이전처럼 차가워진 걸까?“저를 때리든 욕하든 심지어 문밖에서 밤새 무릎 꿇고 있으라 해도 전 한 마디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다솔 씨, 제발 절 무시하지는 말아줘요.”배진호는 간절히 애원했다.그는 누구에게도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군 적이 없었다.아무리 까다로운 고객이라도 그는 이런 식으로 자세를 낮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독 권다솔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도 상관없었다. 오직 그녀만은 잃을 수 없었다.권다솔은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다.그러나 배진호의 목소리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발이 마치 바닥에 붙은 것처럼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뒤돌아봤다가는 다시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진호 씨, 우린 이미 끝났어요. 만약 다시 만나더라도 여긴 아니에요.”둘의 마지막은 구청이어야 했다.이혼 절차를 밟고 나서야 비로소 각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우리가 끝났다고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다솔 씨 마음속에 제가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어요.”배진호는 집착했고 고집스러웠다.권다솔이 그를 뻔뻔하다 욕하든 귀찮다 욕하든 전혀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았다.“우리가 어떻게 다시 돌아가요? 돌아갈 수 없어요. 아이도 없고... 그리고 며칠 전 술을 마시다가...”권다솔은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다.이미 남태건과 관계를 맺은 사실이 그녀의 마음속 깊이 박힌 가시가 되어버렸다.하지만 정작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망설였다.이혼까지 가는 마당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이 사실을 배진호가 알게 되면 그는 분명히 그녀를 경멸할 것이다. 천한 여자라고 생각할 테니.그녀는 한편으로 선을 긋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가 자신을 경멸할까 봐 두려웠다.‘사랑’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그날 다솔 씨가 취했을 때 저도 같은 술집에 있었어요. 그리고 다솔 씨가...”“그
김영은도 이번 일로 남태건이 막무가내로 느껴졌다.하지만 남태건의 인성에 문제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태건이는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걸 거야.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는 거지.”“마음이 급하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쨌든 전 태건 씨랑 결혼할 수 없어요. 그날은 제가 술에 잔뜩 취해서 실수한 거예요. 누군가 제 술잔에 약을 탔거든요. 그래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에요. 전 절대 하룻밤의 실수로 제 평생을 누군가에게 보상으로 주려는 생각은 없어요.”권다솔은 계속 자기 생각을 말했다.아무리 김영은이 설득한다고 해도 그녀는 절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 없었다.뛰어드는 건 쉬웠지만 빠져나오는 건 어려웠으니까.더구나 남태건이 이토록 일러바치는 것을 좋아하니 그녀는 더더욱 그와 결혼 할 수 없다. 다 큰 어른이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굴고 있기 때문이다.“다솔아, 네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우린 그냥 네가 태건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꼭 결혼하라는 뜻은 아니었어.”뜻밖에도 김영은은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권용민은 옆에서 줄담배를 피우다가 꺼버린 후 김영은의 옆으로 다가왔다.“설령 네가 평생 혼자 산다고 해도 괜찮다. 너 하나쯤은 평생 먹고 살게 해줄 돈은 있으니까. 나랑 네 엄마는 네가 행복한 게 더 중요해. 행복할 방법은 아주 많지. 그중에서 네가 좋아하는 일만 해.”권다솔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흘러나왔다.그녀는 이렇게나 좋은 부모님을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이해해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편을 들어주니까.동시에 그녀는 두렵기도 했다.만약 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정말로 억지로 남태건과 결혼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아마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정말 고마워요, 엄마, 아빠. 역시 저한테는 두 분밖에 없네요.”권다솔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물은 계속
결혼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김영은은 딸 대신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권용민에게 눈짓했다. 권용민은 얼른 차를 따라주었다.“태건아, 아직 차 한잔도 못 마셨지? 얼른 한잔하면서 좀 쉬어.”“아버님, 어머님. 전 진심으로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저희는 급도 맞잖아요. 다솔이와 결혼하게 해주신다면 평생 잘해줄 거예요. 저희 부모님께서도 다솔이를 딸처럼 예뻐하고 계시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허락해주세요.”남태건은 찻잔을 받았지만 마시지 않았다.기대하는 얼굴로 권용민과 김영은을 보았다.권용민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태건아, 난 이 일을 우리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결혼 전에 먼저 약혼부터 해야 하잖니. 약혼 전에 상견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모든 걸 절차대로 마쳐야 결혼을 할 수 있는 거란다. 일단 이 물건들을 가져가. 그리고 다음에 내가 집사람과 함께 찾아가마.”남태건은 그의 말에서 거절의 의미를 눈치챘다.하지만 이미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그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권다솔을 억지로 끌고 가서 혼인신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는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가져온 예물과 금붙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기고 가려고 했다.“태건아, 네가 우리한테 준 선물은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 하지만 예물은 도로 가져가는 게 좋겠구나.”권용민이 허리를 굽혀 짐을 정리하는 순간 남태건은 이미 현관까지 가버렸다.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권용민은 손에 든 쇼핑백을 내려놓았다.“일단 다솔이한테 연락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김영은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권다솔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권다솔은 전화를 받기 전 특별히 거울을 보며 차림새와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혈색 없는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아빠, 엄마. 전 혼자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너랑 태
남태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는 권다솔의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사이즈를 알 리가 없었다.“크기 조절 가능한 팔찌는 없어요?”“있긴 한데요. 디자인이 몇 개뿐이라서요. 인기 많은 제품들은 전부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직원은 그를 힐끗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예비 신부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예물을 전부 최고급을 골랐잖아. 그렇다고 해서 또 예비 신부한테 잘해준다고 하기엔 애매해. 어떻게 여자친구 팔목 사이즈도 모를 수가 있는 거지?'‘꼭 결혼까지 앞뒀는데 동거는커녕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것 같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네.'“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남태건은 제일 무거운 팔찌를 골라 쟁반에 올려두었다.“그리고 이거, 봉황이 있는 금목걸이도 주세요.”남씨 가문에 남아도는 것이 돈이었다. 권다솔의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었다.그가 가게에서 나왔을 때 직원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남태건 덕분에 한 달 업적을 하루 만에 달성했기 때문이다.곧이어 남태건은 권용민이 좋아할 만한 비싼 술과 담배를 산 후 권씨 가문 본가로 운전했다.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남태건의 모습에 김영은은 어안이 벙벙했다.“태건아,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처음도 아니고 이게 다 뭐니?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면서 오면 되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아버님, 어머님. 전 오늘 손님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남태건은 자신이 사 온 것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었다.그는 물건만 사 온 것이 아니었다. 한 가방의 현금과 예물까지 준비해왔다.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볕에 금붙이들은 반짝반짝 빛났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은 아주 신경 써서 선물을 준비해온 것이 그들의 눈에도 보였다. 정말로 권다솔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 두 사람이
“다솔아... 너 정말로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야?”남태건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설렌 적 없어?”그는 그동안 아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다솔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게다가 우린 함께 밤까지 보냈잖아. 난 정말로 진심으로 널 책임지고 싶어. 그냥 잠만 자고 버리는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솔아, 다시 한번 생각해줘. 우린 이미 밤까지 보냈다고!”“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전 태건 씨를 이해할 수 없네요.”권다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가 질척이면 질척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앞으로 친구로도 지낼 수 없겠다고 말이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마지막으로 말했다.“그날 밤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제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요. 만약 태건 씨의 말대로 함께 한번 잤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라면, 이미 아이까지 한 번 있었던 저와 진호 씨는 영원히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하는 거겠네요?”남태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이도 빠득 달았다.“권다솔, 그딴 말로 날 자극하지 마.”두 사람이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남태건은 기분이 불쾌해졌다.권다솔은 말을 이었다.“전 태건 씨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예시를 들어 알려준 거죠. 그러니까 나가요. 앞으로 더는 찾아와 문도 두드리지 말고요. 방금 같은 일 또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다솔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매정할 수가 있어! 차 한잔도 내어주지 않고 지금 날 쫓아내는 거야? 적어도 물 한 잔 마시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나 힘들어 죽겠다고.”남태건은 꼬리를 내렸다.물 한잔쯤 대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권다솔은 그에게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예의상 했던 행동이 남태건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 한 번 타협한다면 두 번째도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