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금방 회사 앞을 떠났다. 점점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온지유는 주먹을 꽉 쥐었다.“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대표님과 아는 사이였던 거예요?”“저렇게 안고 갔는데 모르는 사이일 리가 없죠. 대표님이 저희 책임을 물으면 어떡하죠?”직원들의 말소리를 듣고 온지유는 저도 모르게 우울해졌다. 그녀는 여이현이 여자에게 매정한 모습도, 다정한 모습도 전부 본 적 있다. 기준은 여이현이 그 여자에 대한 마음에 있었다.여이현은 노승아를 좋아한다. 그래서 자그마한 상처도 용납하지 못하고 당장 병원에 데려갔다. 주소영도 마찬가지다. 사고가 나기 바쁘게 그녀는 병원에 가고 있다.직원은 잔뜩 당황한 표정이었다. 자신 때문에 주소영이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직원은 온지유가 아직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다가갔다.“온 비서님, 만약 대표님이 책임을 물으시려고 한다면 대신 설명 좀 해주세요.”온지유는 정신 차리고 감정을 다잡았다.“사고는 우연히 일어난 거예요. 여러분이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대표님이 나중에 책임을 물으시면 제가 설명할게요.”“고마워요, 온 비서님.”직원들은 안심하며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여이현이 주소영을 데리고 나간 지 10분도 안 돼서 사무실에는 온통 그 소식뿐이었다.사람들은 여이현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고 떠들어댔다. 그는 여전히 그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한다면서 말이다.온지유는 여이현이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노승아와 주소영은 어떤 유형인지, 그리고 자신은 그들과 얼마나 다른지 생각했다.‘언제쯤이면 나도 대표님의 취향이 되어서 사랑을 받을까?’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 순진하게 느꼈다.타고난 성격은 이미 정해져 있다. 성격을 바꾼다고 해도 잠깐의 관심만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럴 바에는 자신답게 사는 게 나았다.퇴근 후, 온지유는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강태규를 찾아갔다. 온경준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뿐더러 정미리가 돌봐주고 있어서 가지
강태규는 윗세대와 공감할 수 있었다. 전쟁 끝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막강한 실력이 있어야만 다른 나라에서 무시하지 않아. 정말 어렵게 얻은 평화인데 잘 지켜내야지.”온지유는 윗세대의 잔혹함을 직접 겪지 않았다. 그래도 강태규의 벨 에포크가 젊은 시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는 나이가 들어도 나라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열정적인 사람이다. 지금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강태규는 눈가가 붉어졌다.온지유는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그의 다리에 남아 있는 총상 자국을 보았다. 그것만 봐도 그들의 고생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어르신, 우리나라는 충분히 강해요. 더군다나 인재도 많으니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을 거예요.”온지유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강태규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너무 자만해서는 안 된다.”이때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그래도 인재가 많은 건 사실이야. 이현이 같은 녀석도 있고. 젊은 나이에 벌써 큰 공을 세웠잖니. 그 녀석은 원래 내 후계자였어. 고집스러운 늙은이가 가업을 잇게 한다고 데려가지만 않았어도... 이현이가 나를 따랐었다면 아마 나보다 더 대단한 공을 세웠을 거야.”온지유는 깜짝 놀랐다. 여이현이 회사를 물려받기 전이라면 아마도 그녀가 처음 여이현과 만났던 시기일 것이다.‘혹시 그때 임무 집행 중이었을까?’“지유야, 난 널 믿으니까 하는 말이야.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네, 알겠어요.”언젠가 여이현이 두 가문이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것은 의심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강태규가 여이현과의 사이를 비밀로 하려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온지유는 그의 말을 마음에 새겼다.그녀는 강태규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담요를 덮어 주었다. 다행히 바람은 따뜻했다. 강태규의 안색도 좋아 보였다.온지유는 강태규가 단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은 치아가 받아 주지를 않아서 못 먹는 것으로 알
강태규는 온지유를 경고하고 싶었다. 여이현을 잘 단속해야 한다고 말이다.강태규가 아픈 몸으로 자신까지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온지유는 미소 지은 얼굴로 대답했다.“알았어요. 이번에는 저도 이미 아는 일이라 괜찮아요. 시간이 늦었는데 이만 들어갈까요? 이러다가 감기 걸리시겠어요.”“그래.”강태규도 눈치껏 입을 닫았다.강태규를 병실에 바래다준 다음 온지유는 산부인과에 가봐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했다. 이때 마침 주소영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유 씨, 병원에서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저 할 얘기가 있어요.”온지유는 바로 주소영의 병실로 향했다.병실 밖에 서 있던 배진호는 온지유가 온 것을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오면 안 되는 곳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사모님이 어떻게 오셨어요?”억지 미소를 지은 배진호와 달리 온지유는 아주 무덤덤했다.“무슨 일 있어요?”“아... 저 일단 대표님한테 와보시라고 할게요.”배진호의 반응에 온지유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저한테 숨길 일이라도 있어요?”배진호는 말할지 말지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러다가 병실에 있는 주소영을 힐끗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냥 직접 들어가서 확인하세요.”온지유는 병실 안의 주소영을 힐끗 봤다. 그녀는 어두운 안색과 반대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지유 씨, 왔어요.”그녀는 침대에서 내리려다가 다시 발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죄송하지만 제가 침대에서 내릴 수 없어서요. 대표님이 조심해야 한다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고 갔어요. 괜찮죠?”배진호는 주소영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거슬렸다. 없는 말을 지어내는 능력이 이토록 뛰어난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온지유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어디 다쳤어요?”“피부가 살짝 까진 게 전부여서 큰 문제는 없어요.”‘그런데도 입원했다고...?’“하지만 알고 보니 제가 임신했더라고요.”이 말을 들은 온지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는 허락을 구하는 듯 온지유를 힐끗 봤다.“나가요.”배진호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주소영은 이제야 이불을 거두고 몸을 일으키더니 기대하는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었다.“대표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온지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주소영은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제가 그분을 닮아서 대표님이 좋아해 주시는 거라면서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제가 바라는 것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는 것뿐이에요.”말을 마친 주소영은 온지유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계속 말했다.“지유 씨도 알죠? 그분 이름 승아라고 하던데?”온지유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주소영이 이것까지 알 줄은 몰랐던 것이다.“대표님이 알려줬어요? 자기는 승아라는 사람을 좋아하고, 주소영 씨는 대용품이라고요?”“대용품이고 뭐고, 저는 신경 쓰지 않아요. 제 출신에 이 정도 사랑받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죠.”여이현이 직접 말하지 않은 한 주소영은 절대 알지 못할 일이다.마음이 차갑게 식은 온지유는 손톱이 살에 박힐 정도로 힘껏 주먹을 쥐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노승아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지유 씨는 대표님한테 이런 사랑 받아본 적 없죠?”주소영은 대놓고 온지유를 자극했다. 온지유는 절대 자신의 위치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자신감이 담긴 눈빛으로 말이다.“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저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온지유는 피식 웃었다.“아니에요. 지구는 누구 한 명 사라져도 계속 돌아요. 대표님한테서 벗어나면...”그녀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가볍게 말했다.“나는 오히려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네요.”주소영은 살짝 놀랐다. 그녀가 이토록 덤덤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법이다. 이게 바로 주소영이 생각하는 사랑이다.‘무슨 포기가 이렇게 빨라? 그래, 내 앞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게 틀림없어.’어찌 됐든 주소영은 현실에 만족스러웠다. 아이라는 보험이
“뭐라고요?”주소영은 사색이 된 얼굴로 현실을 부정했다.“아닐 거예요.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요. 시간이 전부 맞아떨어져요. 그 사람은 대표님이 틀림없어요.”“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그쪽에서 여자를 찾기 시작한 걸 보도 나도 네가 계 탄 줄 알았다고, 이 년아. 근데 우리가 착각했어. 네가 그날 밤 만난 남자는 여이현 대표가 아니라... 웬 50대 아저씨야.”주소영의 안색은 삽시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배를 바라보면서 언성을 높였다.“그러니까 지금 제가 그 50대 아저씨의 아이를 가졌다는 거예요?”엄청난 소식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의 기쁨도 헛되고 말았다.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았으면 실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날 밤 만난 남자가 여이현이라는 것을 안 순간 그녀는 인생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믿었다.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 덕분에 팔자를 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 남자가 여이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니... 그녀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소영아, 우리 정신 차리자. 그 남자 나이가 많아도 돈은 꽤 있어. 너 하나 평생 먹여 살리는 건 얼마든지 가능해.”마담은 이미 현실을 받아들인 듯했다. 그녀도 실망하기는 했지만, 현실을 부정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돈뿐이다. 50대 남자에게서도 돈은 빼먹을 수 있기에 크게 걱정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주소영은 아니었다. 전화를 끊은 다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꿈에서 살고 있었다.“아, 아니야. 나는 대표님의 아이를 가졌어. 남들은 다 부러워서 거짓말하는 거야. 믿으면 안 돼!”그녀는 배를 끌어안으며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병원에서 나간 온지유는 바로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거리를 따라 걸으며 밤바람을 쐬었다. 기분은 여전히 저조했다. 만약 두 사람이 그날 밤에 만난 것이라면 주소영의 아이는 절대 여이현의 아이일 리가 없다. 그 전부터 만나는 사이였다면 모를까...그녀가 알기로 주소영은 우연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여진숙이 답했다.“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그런 뜻 아니에요.”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허.’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