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사장님은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터라 총을 쏘기도 전에 몸을 피하고 있었다.“배 비서, 명중했어요?”여이현은 신경이 온통 다른 곳에 쏠린 듯한 모습으로 물었다.“...”배진호는 안색이 창백해진 여이현을 보며 말했다.“명중할 뻔했어요!”나민우는 온지유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이렇듯 즐겁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다정하게 물었다.“이젠 감 잡은 거야?”“응, 감 잡았어. 너무 재밌어.”온지유가 웃었다.사장님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음을 지었다.“아이고 젊은이 대단하네요. 저 뒤엣것을 맞추는 사람은 아주 드물거든요!”그는 얼른 도레미몽 인형을 온지유에게 건넸다.온지유는 인형을 끌어안았다. 뭔가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편안한 것이 아주 만족스러웠다.“남은 건 어떻게 할 생각이야?”나민우가 물었다.“흐음, 그냥 다 맞춰보지 뭐. 그러다가 또 맞출 수 있으면 더 좋고.”“응, 알았어.”나민우는 그녀의 말대로 남은 것을 전부 던져 시도했다. 신기하게도 그가 던지는 족족 맞춰 들어갔다. 비록 아무것에도 쓸데가 없는 작은 물건들이었지만 즐겁긴 했다.그러나 옆은 난리판이었다.사장님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얼른 입을 열었다.“아이고 젊은 양반, 내가 환불해 줄게요. 환불해 줄 테니까 그만 해요!”배진호는 얼른 사장님을 달랬다.“사장님 괜찮아요. 저희가 망가뜨린 건 이따가 전부 살게요.”탕 소리가 나고 장난감 총의 탄알이 옆에 있던 도자기 인형에 맞춰졌다.도자기 인형은 순간 깨져버렸다.“이보게 젊은이, 풍선을 쏘는 거 아니었나요? 왜 자꾸 여기로 쏴요!”사장은 기분이 나쁜 듯 이내 장난감 총을 제공한 사장한테 화를 냈다.“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에요? 제 장사가 잘되니까 질투해서 손님한테 여기로 쏘라고 시킨 거죠?!”그러자 장난감 총 가게 사장님도 불쾌한 듯 말했다.“아니, 그쪽이 장사 잘된다고 나도 장사 잘되지 말란 법 있어요? 여기 줄 수 있는 손님들 안 보여요
배진호는 땀을 삐질 흘렸다. 여이현은 그의 밥줄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여이현의 좋지 못한 안색을 발견한 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대표님, 화내지 마시고 온 비서님도 계속 놀고 싶은 것 같은데 함께 하자고 할까요?”여이현은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누가 같이 놀고 싶다고 했죠.”그의 말에 온지유는 아쉬운 것이 없다는 듯 나민우에게 말했다.“저쪽에 재밌는 거 더 많아 보이니까 우리 저쪽으로 가자.”“그래.”나민우는 고개를 돌려 여이현을 보았다.“그럼 여 대표님, 전 이만 가볼게요.”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여이현은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더니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고 누가 들어도 불쾌함이 느껴지는 어투로 말했다.“배 비서, 저 두 사람이랑 같이 놀고 싶어요?”“네, 네!”배진호는 바로 그들을 불렀다.“온 비서님, 전 함께하고 싶어요.”말을 마치자마자 여이현도 따라갔다.두 사람은 나민우와 온지유의 뒤에서 걷고 있었고 시선은 당연히 도레미몽을 품에 꼬옥 안고 있는 온지유에게로 향했다.“흥, 고작 인형 하나 가지고 뭘 저렇게 좋아하는 건지.”방금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은 꼭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의 모습 같았다.분명 하잘것없는 싸구려 인형을 안고 있었음에 말이다!그가 거액을 주고 낙찰받은 에메랄드 보석 팔찌를 그녀에게 주었을 때도 방금처럼 기뻐하지 않았다.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온지유의 머릿속엔 무엇이 있는지 말이다.값비싼 물건보다 노력해서 얻은 싸구려 인형을 그녀는 더 좋아했다.“여기는 표창을 던질 수 있나 봐.”온지유는 꼭 자객처럼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신기한 듯 말했다.그들이 내놓은 1등 선물은 20번의 기회 중 10번만 지정한 곳을 맞추면 얻을 수 있다고 했다.아직 1등 선물을 받아간 사람은 없었다.이것은 아주 큰 도전이었다.흥미를 느낀 온지유는 시도해보고 싶었다.여이현은 관심을 보이는 온지유의 모습에 배진호에게 시켜 결제하라고 했다.배진호는 이번이 여이현이 실력을 보여줄 기회인
“이거면 충분한가?”여이현이 물었다.“네 손에 든 것보다 더 귀여운 것 같은데?”“...”온지유는 여이현보다 더 큰 인형을 보았다. 그녀가 들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분명 땅에 질질 끌릴 것이었기에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너무 커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인형은 아니에요.”여이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난 이것이 네가 들고 있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니까 이거 들고 있어!”그는 그녀가 안고 있던 인형을 빼서 휙 던졌다.온지유는 자신의 품에 안긴 커다란 인형을 보았다. 너무나도 커서 숨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여이현 씨, 그만 해요!”온지유는 이 커다란 인형마저 바닥에 던져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겨우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말했다.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해진 얼굴로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그녀를 보았다.‘인형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내가 더 큰 인형을 안겨주었으니 그럼 더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왜 화를 내는 거지?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온지유는 자신의 심한 말에 여이현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을 것을 알고 다시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이건 너무 크고 무거워서 들고 있기 버거워요.”“내가 도와줄게.”이때 나민우가 렛소 인형을 안으며 말했다.“이러면 되잖아.”“고마워.”온지유는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배진호는 싸늘해진 분위기를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여이현의 몸에서는 어두운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이미 그에게도 그 어두운 기운이 닿고 있었다.게다가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관심이 없어 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그는 심지어 여이현이 불쌍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여이현을 향해 박수를 쳐주었지만 온지유만은 그러지 않았으니 말이다.“목마르지 않아? 저기 밀크티 가게가 있는데.”나민우가 온지유에게 물었다.“응, 가자. 마침 목이 말랐거든.”온지유가 답했다.두 사람이 자리를 옮기려던 순간 배진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상처 소독약으로 상처를 소독한 뒤 붕대로 감아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가 차를 끌고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왔다.온지유는 여이현을 부축하며 차에 태우곤 나민우를 보았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던 여이현은 그녀가 정말로 나민우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나민우가 먼저 입을 열어 다정하게 말했다.“먼저 가 봐. 여 대표 다쳤잖아. 아픈 사람을 보살피는 게 더 중요하지.”그는 온지유의 입장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여이현은 그녀의 상사이니 당연히 보살펴야 했다.온지유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럼 난 먼저 가볼게. 오늘 같이 놀아줘서 고마워.”“응, 그래.”나민우가 답했다.차 문이 닫혔다.배진호는 원래 다시 차에 타려고 했지만 무언가 생각났는지 웃으면서 나민우의 앞으로 다가갔다.“나 대표님, 고마웠습니다.”그는 예의 있게 감사 인사를 하곤 그가 들고 있던 렛소 인형을 가져왔다.여하간에 이 인형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이 오늘처럼 열심인 모습은 처음 보았다.차는 서서히 떠나가고 나민우는 그들이 탄 차를 빤히 보았다. 그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군가가 문자를 보낸 것이다.[저녁 이미 차려놨는데 언제 와?]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집에 도착한 뒤 온지유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행여나 표창 때문에 세균에 감염되기라도 했을까 봐 주치의도 집으로 불렀다.의사는 그에게 파상풍 주사를 놓아주었다.여이현은 틈이 날 때마다 나민우와 함께 있던 온지유의 모습이 생각나 떠보듯 물었다.“이번에도 나민우와 우연히 만난 거야?”정말로 우연이었다.온지유가 답했다.“저랑 민우는 그냥 친구예요. 친구끼리 만나는 게 뭐가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퇴근하고 만난 것이니 업무에도 지장 주지 않았어요.”여이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정말로 그 사람이랑 친구라고 생각하는
마침 여이현이 외출하고 돌아왔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직원이 내뱉는 말을 듣고 있었다.“대표님, 오늘 오후 한 시에 그쪽으로 보내라고 이미 말해두었습니다.”여이현은 멀지 않은 곳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온지유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온 비서.”온지유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네, 대표님.”“오후에 일정이 없으면 따라가죠.”그가 말을 마치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그런 일은 아주 힘들어 여직원들이 아주 꺼렸다. 그래서 전부 남자직원에게 배정된 일이었다.온지유는 이곳의 유일한 여직원이었다.게다가 바깥은 해가 쨍쨍 내리쬐고 있었고 온지유는 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있어 앉기도 불편할뿐더러 그곳을 걸어 다니기도 힘들었다.그러나 여이현의 지시이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온지유는 바로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래요.”여이현은 더는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담담히 자신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온 비서님, 제가 도와드릴게요.”이윤정이 그녀를 도와주려고 했다.“괜찮아요. 일손은 부족하지 않으니 그냥 사무실에 남아 있어도 돼요.”오후 한 시는 해가 제일 뜨겁게 내리쬘 때였다.길을 청소하던 환경미화원들도 쉬지 않고 청소하고 있었다.온지유는 생수 상자를 들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어느새 그녀는 땀을 가득 흘리고 있었다.그렇게 한 상자 옮기고 난 뒤 환경미화원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들은 나이가 많았던지라 그녀가 생수를 주니 고맙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아가씨, 자선활동 하는 김에 우리한테도 생수 나눠주는 게 어때요.”이때 몇 명의 길 가던 남자들이 치마와 스타킹을 신은 온지유를 보고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생수를 달라는 핑계로 다가왔다.온지유도 그들의 불손한 시선을 느끼고 뒷걸음질을 치며 인상을 구겼다.“이 물은 환경미화원분들께 나눠드리는 겁니다.”“아, 특별대우를 하시겠다는 거네요.”남자들은 온지유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온지유는 그런 시선을 아주 혐오했기에 단호하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주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네 아내는 네 할아버지께서 정해주신 거잖아. 그래서인지 확실히 괜찮은 여자이긴 하네. 얌전하고 말도 잘 듣고 네가 밖에서 여자 몇 명을 만나든 신경 쓰지도 않고 말이야. 이렇게 좋은 아내가 있는데 왜 기분이 안 좋다는 거냐?”여이현은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얌전하고 말 잘 듣는 건 확실히 아내로서 좋긴 하지.”“그런데 왜 네 신경은 온통 저 여자한테 쏠린 거냐. 너 혹시 진짜 좋아하게 된 거 아니지?”최주하는 그의 모습이 이상했다. 아무리 온지유가 괴롭힘당했다고 해도 여이현이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창밖을 내다보니 온지유는 다른 직장 동료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네 아내 인기 많은 거 같아. 누구랑도 다 잘 지내잖아. 너 예전에 언젠가 이혼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이혼하게 되면 줄을 설 남자들이 가득해 보이네.”최주하의 말에 여이현은 미간을 확 구겼다. 온지유에겐 사람과 어울려 지내는 일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최주하의 말대로 그녀는 누구와도 잘 지냈다.그의 목소리는 더욱 가라앉았다.“너도 온지유는 좋은 아내라며. 그럼 계속 좋은 아내로 남게 해줘야 하지 않겠냐.”모든 생수를 나눠주고 나니 온지유의 옷은 땀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그녀는 직원들과 사무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온 비서님, 완전 의외네요. 힘이 그렇게 셀 줄은 몰랐어요. 저희 남자들에게 전혀 뒤처지지 않는 힘이었어요!”그들은 온지유와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에 대해 잘 몰랐다.온지유가 그들에게 주는 첫인상은 차갑고 도도하고 힘도 없는 나약한 사람이었다.설령 그들과 함께 일한다고 해도 그저 가만히 있는 꽃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막상 그녀와 함께 일하고 보니 차갑고 도도한 느낌은 없었고 오히려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지냈다.“뭘요. 정말로 힘이 필요한 일들은 여러분들이 해주고 계시잖아요. 전
“아니요.”그때의 그녀는 겉옷을 입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었다.엘리베이터 기다리면서 겉옷을 벗으려던 때 그가 그녀를 비상계단으로 확 끌고 오게 된 것이다.“지금 가려봤자 늦었다는 거 알아?”여이현은 차갑게 웃으며 욕망에 휩싸인 눈빛으로 그녀를 보면서 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에 올렸다.온지유는 그런 그의 눈빛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여자로 보는 듯했다. 그의 이런 눈빛을 처음 보았다.위험을 감지한 그녀는 얼른 도망가려고 애를 썼다.그러나 여이현은 그녀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계속 그녀를 구석으로 몰았다.“온지유, 이게 네가 말한 행복을 되찾을 권리라는 거야?”온지유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네?”여이현은 그녀에게 바싹 다가가며 차갑게 비웃었다.“네 목표는 한둘이 아닌가 보네. 나랑 이혼하고 바로 다른 남자랑 재혼할 생각인 거지?”온지유는 그의 손이 자신의 옷 속으로 점차 들어오자 느껴지는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전 그런 생각한 적 없으니까 이것 좀 놔요. 우리 대화로 풀어요. 이러면 다른 사람한테 들킨다고요!”여이현은 얼굴이 붉어진 그녀를 보았다. 셔츠가 젖어 몸매가 보이는 채로 남자직원들 사이에 있던 그녀를 떠올리기만 하면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바닥에 웅크려 앉았다.여이현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풀었다. 옷차림이 흐트러진 온지유를 보니 욕망이 불타올랐다.“다른 사람한테 들키고 싶지 않은 거라면 급한 불부터 꺼야 하지 않겠어?”온지유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야에 그의 정장 바지가 들어왔고 순간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안 할 수가 없었다. 해주지 않으면 그는 절대 그녀를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으니까.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반 시간 뒤.온지유는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을 씻은 후 입안을 헹구었다.고개를 들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처참했다. 잔뜩 헝클어진
그녀의 말에 주소영은 충격받은 표정을 짓더니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그러니까 온지유 씨가 여이현 씨 아내라고요?”주소영은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만약 여이현이 정말로 온지유의 남편이었다면 그녀가 모를 리가 없다고, 두 사람이 결혼 사실을 숨길 리도 없다고 생각했다.“네, 맞으니까 얼른 이 손 좀 놔요.”온채린은 손을 빼냈다.“제 형부는 여이현이에요.”주소영은 두 사람을 보았다. 여전히 의심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지금 저한테 거짓말하시는 거죠? 온지유 씨는 여이현 씨 비서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내인 거예요?”“거짓말할 게 뭐가 있어요.”장수희가 말을 이었다.“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두 귀로 직접 들은 건데. 우리 조카사위는 심지어 우리 아주버님도 만나러 갔다고요. 우리 아주버님이 온지유 아빠죠. 조카사위는 여이현이고요.”두 사람의 말은 들은 주소영은 다시 충격에 빠졌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정리하곤 말했다.“혹시... 예전에는 모르고 계셨어요?”장수희는 그런 그녀가 의아하면서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도 최근에 알게 되었어요. 일찍 알았다면 우리 집은 부자가 되어 있었겠죠!”여씨 가문은 온경준에게만 20억이라는 돈을 주었다.이 돈은 평범한 집안에서 평생을 일해도 모을 수 없는 돈이었다.만약 일찍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도 돈을 달라고 요구했을 것이다.많이 바라지는 않고 그들은 좋은 집을 하나 마련해줬으면 했다.“여씨 가문이 그렇게 큰데 결혼식은 물론이고 뷔페도 못 가봤다니까요! 둘이 결혼한 것도, 심지어 저렇게 좋은 가문에 시집갔으면서 친척인 우리한테 알려주지도 않고 말이에요. 만약 내가 아주버님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었다면 평생을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장수희는 말하면서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댔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온지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우리 조카도 참 대단하네요. 행여나 내가 그 떨어지는 콩고물을 조금이라도 받아먹을까 봐 숨기
그러나 곧 인명진의 시선이 은서우에게로 향했다.“뭐 생각나는 거 있나요?”은서우는 고개를 저었다가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생각은 있지만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생각이 단지 생각일 뿐이죠. 원장님, 그건 원장님이 가르쳐준 거예요.”고개를 든 그녀의 두 눈은 초롱초롱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인명진은 그런 은서우를 바라보며 눈부신 그녀의 모습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인명진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럼 지금 바로 짐을 챙겨서 저를 따라오세요.”그 말을 들은 은서우가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은서우 씨가 말했잖아요. 실제로 만나기 전에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말이에요. 그럼 지금 바로 가서 봐야죠.”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아니, 놀라움보다는 충격에 가까웠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은서우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랐다.‘멸균 장갑과 도구, 그리고 노트도 가져가야 하나?’“거기 다 있으니 이것들은 필요 없어요.”인명진은 이 말과 함께 은서우의 노트만 챙기고 떠났다.“아.”은서우는 자신의 머리를 탁 치며 왜 그렇게 간단한 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기쁨에 겨워서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환자는 병원이 아닌 병원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한 요양원에 있었다.겉보기에는 요양원이었지만 실은 연구소였다. 단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요양원으로 위장한 것뿐이었다. 실제로 요양을 받는 노인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곳에는 오직 멸균 복이나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만이 있었다.요양원으로 들어가려면 신원 확인이 필요했다.인명진이 목에 걸고 있는 카드를 책임자에게 보여줄 때 은서우가 사진을 힐끔 훔쳐보았다.카드에는 인명진의 증명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 속의 그는 단정하고 정직해 보였으며 또한 날카롭고 과묵해 보였다.인명진이 먼저 들어가며 말했다.“뭐해요?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따라오세요.”그 말에 정신을 차린 은서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원장님은 그녀에게 그렇게 잘해주시는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평소 인간관계에 둔감했던 은서우는 드디어 자신의 이상함을 깨달았고 인명진에 대한 감사로 생긴 친근감이 순식간에 크게 줄어들었다.심지어 물러나고 싶은 충동까지 생겼다.인명진은 그녀에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왜 말을 안 하죠?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지금 말해도 돼요. 마침 같이 해결할 수 있으니깐요.”인명진은 그녀를 위하는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하지만 은서우가 어떻게 감히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리겠는가!인명진이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된 후 그 차가운 얼굴에 떠오르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상상하자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다.인명진의 의혹이 담긴 눈빛을 마주한 그녀는 마음을 애써 안정시키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온지유 씨는 그날 저와 아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어요.”말을 마치자 남자의 미간이 펴지는 것을 본 은서우는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원장님에게 거짓말을 했고 진실 반 거짓 반으로 그를 속여넘겼다.인명진은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여성의 마음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다가와서야 비로소 이상함을 느낄수 있을 정도로 둔감한 스타일이었다.게다가 그는 은서우를 믿고 있었다.인명진은 그녀가 온지유의 행동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으세요. 이것도 한번 보세요. 최근 검사 결과에요.”인명진이 건넨 것은 혈액 검사 보고서였다.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은서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검사 결과지를 보고 또 보았다. 여러번 훑어본 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 고개를 저었다.“이상해요, 이건 너무 이상해요. 이 세포 수가 왜 또 몇 배나 늘어난 거죠?”인명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게 바로 제가 은서우 씨
은서우는 상황을 보고 급히 말했다. “제가 가서 남은 게 있는지 한번 찾아볼게요.”“괜찮아요, 그냥 장난이었어요.”온지유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무의식적으로 매력을 발하며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장선영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저는 이제야 왜 사람들이 그 소문을 믿는지 알 것 같아요.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정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겠죠. 제가 원장님이라면 저도 반했을 거예요.”그 말에 은서우는 목구멍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그저 인명진의 마음에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이유 없이 막히고 불편했다.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선영은 조금 전 온지유를 직접 보고 그녀의 대화와 표정에서 사실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 이상 사생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그녀는 그 일에 깊이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의 수다에 참여하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간호사가 해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외 없이, 모두 사생아에 관한 소문을 퍼뜨렸던 사람들이었다.장선영도 그 소문을 퍼뜨린 적이 있었기에 은서우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서우 씨가 저에게 알려줘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저도 해고되었을 거예요.”은서우는 감사하다며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장선영을 큰일 아니니 괜찮다고 거절했다.이때 갑자기 모르는 간호사가 달려와서 말했다.“은 선생님, 원장님께서 부르십니다.”은서우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인명진이 이때 그녀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서둘러 물건을 정리하고 원장실로 찾아갔다.은서우가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원장님, 저예요. 들어가도 될까요?”안에서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은서우가 들어갔을 때 인명진은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그는 고개를 들고 은서우를 바라보았다. 약간 옅은 눈동자는 그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
은서우는 한숨을 내쉬며 때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윤별이가 일부러 자신을 도와준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 어른들의 생각을 적용할 수는 없으니까.하지만 실제로 윤별은 어린 나이에 철이 들었다.온지유는 귤을 손에 쥔 윤별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입만 살았구나. 너를 데리고 온 건 병원에서 먹을 것을 찾으라고 한 게 아니야.”은서우가 급히 손을 저으며 온지유를 말렸다.그 후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바닥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는 온지유는 말이 없을 때 아주 차분해 보였다. 말로 표현하자면 가을 낙엽처럼 고요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은서우는 그녀 앞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이렇게 앉아만 있어도 끊임없이 매력을 풍기는 사람을 마주하니 정말 자신이 초라해지지 않기가 어려웠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열었다.“정말 죄송해요. 온지유 씨가 오실 줄 몰라서 미리 준비를 해놓지 못했어요. 일단 여기 앉아 계세요. 제가 나가서 뭐라도 좀 사 올게요.”온지유가 그녀를 불러세우며 부드럽고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괜찮아요, 저는 그냥 친구를 보러 온 것뿐이에요.”그 말을 마친 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은서우는 고개를 숙이고 몰래 온지유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온지유도 지금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두어 번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었지만 눈에 띄지 않게 보았기에 은서우는 알아채지 못했다.은서우를 바라보는 온지유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온지유는 은지우가 예쁘기도 하고 착하다고 생각했기에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은서우는 점점 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이번에 병원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온지유도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인명진이 너무 큰 소동을 일으켜서 여론이 일자 곧바로 여이현에게 부탁해 상황을 수습하고 사람을 찾아 사실을 밝히도록 해서 모르기가 어려웠다.온지유는 테이블 아래에서 은밀히 손가락으로 빠르게 휴대폰을 두드렸다. “
은서우는 장선영의 말에 문득 그 아이를 데리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곧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바로 그때 장선영이 흥분된 표정으로 다가와 속삭였다.“저도 원래는 믿지 않았죠. 원장님이 그런 사람일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정말로 본 걸요!”은서우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신경이 곤두섰다.“뭘 봤는데요?”“그 소문 속의 사생아요.”“원장님께 사생아 같은 건 없어요. 장선영 씨가 잘못 본 거겠죠.”은서우는 인명진의 체면을 지키려고 애썼다.그녀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인명진에게 지금까지 연애 상대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들의 말대로 몇 살짜리 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장선영은 은서우가 믿지 않는 것을 보고 더욱 열을 내며 그 아이를 보여주겠다고 했다.결국 은서우는 그녀의 손에 끌려갔다.“저기 봐요, 저 아이라니까요. 제가 거짓말한 게 아니라고요. 오늘 아침에 이 아이가 원장님을 찾아오는 걸 제가 직접 봤거든요. 지금은 곁에 어떤 여자분이 같이 있는데 원장님 부인인지 아닌지 모르겠네요.”장선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바로 그날 만났던 온지유였다. 온지유는 아직 은서우를 발견하지 못했다.이때 장선영이 더욱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다들 구석에서 몰래 보고 있어요. 서우 씨는 원장님이랑 친하죠? 저분 지금 원장님 사무실로 가는 것 같은 데 가서 물어볼래요?”은서우는 그 아름다운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대답했다.“제가 뭘 물어봐요? 물어본다 해도...” 그녀에게 무슨 자격이 있겠는가?이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은서우는 깜짝 놀랐다.다행히 장선영은 그녀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고 은서우도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은서우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그녀는 구경하고 있는 장선영을 끌고 자리를 떴다.은서우가 그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을 보자 장선영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신기하네요. 어떻게 관심이 없을 수 있죠?”
눈가에 미소가 어린 인명진의 모습은 평소보다 친근해 보였다.“두 날 전부터 소태훈이 마약을 했다는 소식을 퍼뜨렸어요.”은서우는 순간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깨달았다.인터넷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어서 서로 생각이 달랐지만 신기하게도 마약에 대해서는 모두 일치하게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소태훈이 유언비어를 퍼뜨린 데다가 마약까지 했으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더는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 댓글에서는 그녀를 나무라던 사람들이 돌아서서 소태훈을 비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은서우가 제일 신경 쓰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백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가 그녀의 무고함을 밝혀주었다.그녀는 마음속에 가득한 감동과 감사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절대로 원장님을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그날 이후로 은서우는 밤낮으로 자료를 연구했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일에 미쳐버린 것 같다고 했다.평소에 대화를 좀 나눴던 간호사 장선영은 점심시간이 다 됐는데 여전히 머리를 묻히고 열심히 일하는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서우 씨, 그만 보세요! 지금 몇 시인지 봐봐요!”은서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네?”“그만 보세요! 이젠 점심시간인데 식당 안 갈 거예요?”“선영 씨 먼저 가요. 전 이거 끝내고 가야 해서요.”은서우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볼펜을 놀리며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장선영이 다가와 힐끔 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있잖아요. 서우 씨 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은서우가 고개도 들지 않자 장선영은 그녀가 묵인한 것으로 생각하고는 말을 이어갔다.“요즘 모두 원장님이 서우 씨를 그 무슨 프로젝트에 참여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요. 이름이 생명나무 프로젝트라고 하던데요?”그 말에 은서우는 동작을 멈추었다.생명나무 프로젝트, 바로 인명진이 그녀에게 맡긴 프로젝트의 이름이었다.이건 기밀 프로젝트였기에 그녀는 손에 든 자료를 덮고 장선
인명진은 은서우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은서우 씨가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나요?”은서우는 인명진이 이미 자신에게 충분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거절하려던 말을 꺼내기 직전 그녀는 마음속으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그건 야망의 목소리였다.어떤 사람들은 그냥 안정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아가고 싶어 한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은서우는 아니다.그녀의 자신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 마음 덕분에 지난 몇 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어떤 사장님들은 그녀의 고용 기간이 끝나면 아쉬워하며 그녀를 붙잡기도 했다.은서우는 잠시 망설인 후 과감히 자신의 마음에 따라 결정했다.“아니요. 전 할 수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제가 잘할 수 있어요.”은서우는 그 진단 기록을 오랫동안 연구했고 과거에도 이런 증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적이 있었기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대답을 들은 인명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좋아요, 은서우 씨가 그렇게 말했으니 이번 수술은 은서우 씨한테 맡깁니다. 하지만 저는 은서우 씨를 도와주지 않을 거니까 열심히 해보세요.”은서우는 이미 이를 예상하였다.이 질병은 매우 희귀했다.환자는 몸속의 세포 분열 속도가 너무 빨라서 노화가 느려졌고 이상을 느껴서 병원에 와서 검사를 받았지만 병원에서도 이런 병을 본 적이 없었다.소문은 마치 바람을 타고 퍼지는 불꽃처럼 퍼져나갔고 이 병은 의학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병원은 이 병을 연구 프로젝트에 추가했고 치료를 진행하는 동시에 연구를 시작했다.주목할 만한 점은 이 프로젝트가 시작될 당시 여러 방면에서 방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정확히 누가 한 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이 프로젝트를 막으려 했고 환자를 치료하는 대신 연구만 하려 했다.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인명진이 어떤 큰 인물을 불러들였기에 이 프로젝트가 통과
가뜩이나 하얀 피부라 붉은 손바닥 자국이 얼굴에 아주 선명하게 생겨났고 이 장면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다.이때 기세등등했던 연희진이 갑자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은서우의 눈빛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너 그게 무슨 눈길이야? 넌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니?”“아닙니다.”은서우는 얼굴에서부터 전해져오는 아릿한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아주 평온해 보였다. 그 통증이 그녀를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했기에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다.“제가 오히려 엄마에게 고마워해야 하죠.”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그녀가 가족에 대한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나게 해주었다.연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은서우가 약해 보일 때엔 마음대로 손찌검을 할 수 있었는데 은서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예전처럼 괴롭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은서우는 연희진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 기억 속의 연희진은 항상 이런 모습이었다. 소심하고 겁이 많으며 본분만을 지키는 사람.연희진은 그저 옛 세대의 방식대로 살아왔을 뿐이었다.남편과 아들의 말은 절대적이었고 아이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저는 한때... 엄마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은서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엄마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도 맞지만 그중 일부는 엄마가 자초한 거예요.”소상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는지 헐떡이며 달려오더니 소리쳤다.“내 아들을 풀어줘!”은서우는 아무 표정 없이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그녀의 대답에 화가 난 소상태가 손찌검을 들려 했다.그의 손이 은서우의 얼굴에 닿으려던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인명진이 그 손을 잡았다.인명진의 얼굴은 평소와는 달리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가 이 정도로 화가 나 있는 모습은 처음
소태훈의 그날 증상은 마약의 부작용으로 판명되었고 이로써 은서우에게 씌워졌던 혐의는 완전히 벗겨졌다.하지만 소태훈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이건 조작이야! 은서우, 우리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러고도 사람이야?”경찰이 그를 끌어가려 했지만 소태훈은 끝까지 버티며 저항했다.그 소란에 병원 전체가 떠들썩해졌다.복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수많은 시선이 은서우와 소태훈에게 쏠렸다.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은서우는 이제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단단한 눈빛으로 소태훈을 바라보았다.“그래, 소씨 집안이 날 길러준 건 맞지.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1200만 원은 이미 다 갚았어.”부유한 집안에 놓고 말하면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은서우에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평생 모아도 그런 돈을 마련할 수 없을 정도였다.‘소씨 가문 가족들이 나한테 써준 돈이 과연 1200만이나 될까? 아니, 100만이라도 될까? 학비도, 생활비도 다 내가 스스로 벌었는데... 소씨 집안 사람들이 날 조금이라도 챙겨준 적이 있었던가?’소씨 가문 사람 중에 그녀가 미련을 가졌던 건 오직 소태연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소태연도 세상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소태훈은 소리를 질렀다.“그럼 내 동생은? 내 동생이 죽은 것도, 내 다리가 이렇게 된 것도 다 너 때문이야! 그것도 네가 갚아야 할 빚 아니야?”소태연을 떠올리는 순간, 은서우의 가슴속 깊은 상처가 다시 한번 아려왔다. 순간,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인명진을 떠올리는 순간, 그 불안한 감정은 점점 사라지는 것이었다.사실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온서우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소태훈을 끌고 가 검사를 강제로 받게 하는 것쯤은 그녀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인명진은 나서서 그렇게 했다.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서 곱씹어보면 그는 온서우에게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