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주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네 아내는 네 할아버지께서 정해주신 거잖아. 그래서인지 확실히 괜찮은 여자이긴 하네. 얌전하고 말도 잘 듣고 네가 밖에서 여자 몇 명을 만나든 신경 쓰지도 않고 말이야. 이렇게 좋은 아내가 있는데 왜 기분이 안 좋다는 거냐?”여이현은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얌전하고 말 잘 듣는 건 확실히 아내로서 좋긴 하지.”“그런데 왜 네 신경은 온통 저 여자한테 쏠린 거냐. 너 혹시 진짜 좋아하게 된 거 아니지?”최주하는 그의 모습이 이상했다. 아무리 온지유가 괴롭힘당했다고 해도 여이현이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창밖을 내다보니 온지유는 다른 직장 동료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네 아내 인기 많은 거 같아. 누구랑도 다 잘 지내잖아. 너 예전에 언젠가 이혼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이혼하게 되면 줄을 설 남자들이 가득해 보이네.”최주하의 말에 여이현은 미간을 확 구겼다. 온지유에겐 사람과 어울려 지내는 일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최주하의 말대로 그녀는 누구와도 잘 지냈다.그의 목소리는 더욱 가라앉았다.“너도 온지유는 좋은 아내라며. 그럼 계속 좋은 아내로 남게 해줘야 하지 않겠냐.”모든 생수를 나눠주고 나니 온지유의 옷은 땀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그녀는 직원들과 사무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온 비서님, 완전 의외네요. 힘이 그렇게 셀 줄은 몰랐어요. 저희 남자들에게 전혀 뒤처지지 않는 힘이었어요!”그들은 온지유와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에 대해 잘 몰랐다.온지유가 그들에게 주는 첫인상은 차갑고 도도하고 힘도 없는 나약한 사람이었다.설령 그들과 함께 일한다고 해도 그저 가만히 있는 꽃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막상 그녀와 함께 일하고 보니 차갑고 도도한 느낌은 없었고 오히려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지냈다.“뭘요. 정말로 힘이 필요한 일들은 여러분들이 해주고 계시잖아요. 전
“아니요.”그때의 그녀는 겉옷을 입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었다.엘리베이터 기다리면서 겉옷을 벗으려던 때 그가 그녀를 비상계단으로 확 끌고 오게 된 것이다.“지금 가려봤자 늦었다는 거 알아?”여이현은 차갑게 웃으며 욕망에 휩싸인 눈빛으로 그녀를 보면서 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에 올렸다.온지유는 그런 그의 눈빛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여자로 보는 듯했다. 그의 이런 눈빛을 처음 보았다.위험을 감지한 그녀는 얼른 도망가려고 애를 썼다.그러나 여이현은 그녀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계속 그녀를 구석으로 몰았다.“온지유, 이게 네가 말한 행복을 되찾을 권리라는 거야?”온지유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네?”여이현은 그녀에게 바싹 다가가며 차갑게 비웃었다.“네 목표는 한둘이 아닌가 보네. 나랑 이혼하고 바로 다른 남자랑 재혼할 생각인 거지?”온지유는 그의 손이 자신의 옷 속으로 점차 들어오자 느껴지는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전 그런 생각한 적 없으니까 이것 좀 놔요. 우리 대화로 풀어요. 이러면 다른 사람한테 들킨다고요!”여이현은 얼굴이 붉어진 그녀를 보았다. 셔츠가 젖어 몸매가 보이는 채로 남자직원들 사이에 있던 그녀를 떠올리기만 하면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바닥에 웅크려 앉았다.여이현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풀었다. 옷차림이 흐트러진 온지유를 보니 욕망이 불타올랐다.“다른 사람한테 들키고 싶지 않은 거라면 급한 불부터 꺼야 하지 않겠어?”온지유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야에 그의 정장 바지가 들어왔고 순간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안 할 수가 없었다. 해주지 않으면 그는 절대 그녀를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으니까.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반 시간 뒤.온지유는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을 씻은 후 입안을 헹구었다.고개를 들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처참했다. 잔뜩 헝클어진
그녀의 말에 주소영은 충격받은 표정을 짓더니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그러니까 온지유 씨가 여이현 씨 아내라고요?”주소영은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만약 여이현이 정말로 온지유의 남편이었다면 그녀가 모를 리가 없다고, 두 사람이 결혼 사실을 숨길 리도 없다고 생각했다.“네, 맞으니까 얼른 이 손 좀 놔요.”온채린은 손을 빼냈다.“제 형부는 여이현이에요.”주소영은 두 사람을 보았다. 여전히 의심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지금 저한테 거짓말하시는 거죠? 온지유 씨는 여이현 씨 비서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내인 거예요?”“거짓말할 게 뭐가 있어요.”장수희가 말을 이었다.“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두 귀로 직접 들은 건데. 우리 조카사위는 심지어 우리 아주버님도 만나러 갔다고요. 우리 아주버님이 온지유 아빠죠. 조카사위는 여이현이고요.”두 사람의 말은 들은 주소영은 다시 충격에 빠졌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정리하곤 말했다.“혹시... 예전에는 모르고 계셨어요?”장수희는 그런 그녀가 의아하면서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도 최근에 알게 되었어요. 일찍 알았다면 우리 집은 부자가 되어 있었겠죠!”여씨 가문은 온경준에게만 20억이라는 돈을 주었다.이 돈은 평범한 집안에서 평생을 일해도 모을 수 없는 돈이었다.만약 일찍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도 돈을 달라고 요구했을 것이다.많이 바라지는 않고 그들은 좋은 집을 하나 마련해줬으면 했다.“여씨 가문이 그렇게 큰데 결혼식은 물론이고 뷔페도 못 가봤다니까요! 둘이 결혼한 것도, 심지어 저렇게 좋은 가문에 시집갔으면서 친척인 우리한테 알려주지도 않고 말이에요. 만약 내가 아주버님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었다면 평생을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장수희는 말하면서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댔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온지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우리 조카도 참 대단하네요. 행여나 내가 그 떨어지는 콩고물을 조금이라도 받아먹을까 봐 숨기
주소영은 원래부터 긴장하고 있었다. 온지유에게 밀려날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의 말을 들으니 다시 자신이 생겼다.온지유는 여씨 가문 안주인의 자리에 앉고 있긴 했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게다가 나중에 이혼할 가능성이 아주 컸다.그녀는 두 사람을 보더니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말했다.“두 분 성급하게 들어가지 마세요. 여진 그룹은 들어가기 쉽지 않거든요. 아마 들어가 보기도 전에 문 앞에서 쫓겨날 거예요.”주소영이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난 여이현의 숙모라고요. 누가 감히 날 막아요!”장수희는 숙모라는 명분으로 들어가 심지어 대접받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러자 주소영이 말했다.“온지유 씨가 두 분을 경계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요. 온지유 씨는 여이현 씨의 비서예요. 두 분의 출입 소식은 온지유 씨가 제일 먼저 듣게 된다고요. 그런데 정말로 쫓겨나지 않을 거로 생각하세요?”장수희는 그제야 생각을 하며 다소 불쾌한 듯 말했다.“듣고 보니 그렇네요. 병원에 있을 때부터 따박따박 말대꾸했으니까 분명 우리를 쫓아내려고 하겠네요!”“조카라는 년이 어른을 공경할 줄 하나도 모르고 대체 학교에서 뭘 배운 건지, 쯧!”온채린은 그녀의 말에 불안한 듯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요?”장수희는 높게 솟은 건물을 보았다. 건물 제일 위쪽엔 여진 그룹의 로고가 걸려 있었다.이 건물 전체가 여씨 가문의 소유였으니 분명 돈은 차고 넘쳐 흐를 것이었다.그녀는 자신의 가족 중 부잣집으로 시집갈 사람이 있으리라곤 전혀 상상조차 못 해봤다.“제게 방법이 있어요! 그런데 두 분 동의하실지 모르겠네요.”주소영이 말랬다.장수희는 고개를 돌려 주소영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아이고 아가씨, 참 좋은 사람이네요. 어떤 방법이 있는데요?”반 시간 뒤.여진 그룹 문 앞에서는 소란이 일어났다.장수희는 로비 직원에게 온지유를 찾으러 왔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분명 그들은 온지유의 친척이었지만 온지유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로비 직원은 온지유가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모두에게나 친절하고 욕심도 없는 사람이었고 장수희가 말한 것과 다른 사람이었다.장수희가 계속 난동을 부리니 오히려 장수희가 무례하고 막무가내인 사람으로 느껴졌다.그녀는 보안 요원을 불러 내쫓고 싶었다.하지만 마침 기자 스티커를 붙인 차가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게다가 문 앞에는 환경미화원들이 있었다.기자들은 전부 사회부 기자였고 그들을 취채하러 온 것이니 이런 난동을 그들에게 보일 수 없어 그녀는 장수희에게도 손을 대지 못했다.그때 장수희도 로비 직원이 무엇을 신경 쓰는지 눈치채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기자가 있었다.이것은 그녀에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장수희는 더는 난동을 부리지 않았고 밖으로 나갔다.“빨리 막아요!”로비 직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보안 요원들에게 장수희를 막으라고 소리를 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사람을 이렇게 막 붙잡아도 되는 거예요?!”장수희는 보안 요원들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소리를 쳤다.“온지유가 나 붙잡으라고, 내 입 막으라고 시킨 거죠! 그렇죠!”온채린은 장수희가 곧 붙잡힐 것 같아지자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 여기 무고한 사람을 때리려고 해요! 사람 때려요!”밖에 있던 기자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회사 안을 보았다.여진 그룹 안에서 일어난 난동에 중요 뉴스감을 잡은 듯 기자들은 바로 달려 들어왔다.그런 기자들을 입구 보안 요원들이 막고 있었지만, 그들은 생방송으로 찍고 있었다.그들은 마침 환경미화원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던 차였다.온채린은 그런 기자들을 보곤 바로 달려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여러분들 보세요! 저희는 이 회사 비서인 온지유의 친척이에요. 온지유에 대해 밝힐 것이 있습니다...”그녀의 말에 기자들은 눈을 반짝였다.온지유라는 비서에 대해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수행 비서였다. 게다가 금방 환경미화원의 입에서 온지유의 좋은 평가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은 여진 그룹의 스캔
“온 비서님, 큰일 났어요!”온지유는 마침 화장실에서 매무새를 정리하고 나오던 참이었고 다급하게 달려오는 이윤정의 모습에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왜 그렇게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는데요.”“온 비서님의 일이에요!”이윤정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저요?”온지유는 이해가 되지 않아 담담하게 물었다.“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요.”“온 비서님 숙모랑 사촌 여동생이라는 분이 찾아왔어요.”그녀의 말에 온지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두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엄청 골치 아픈 일이 생겼으리라 생각했다.이윤정은 핸드폰을 꺼내 생방송을 보여주었다.그녀의 숙모와 사촌 동생은 그녀의 가족에게서 돈을 뜯어내지 못하자 기자들 앞에서 불쌍한 사람인 척 이미지를 만들고 있었다.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심지어 그들은 피땀을 흘려 번 돈으로 그녀의 대학 등록금까지 내주었다고 말했다.겨우 대기업에 입사했는데 조금 살만하니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삼촌과 숙모를 모르는 사람 취급한다고, 자신들에게 일전 한 푼 준 적이 없다고, 그녀의 대학 등록금을 부담한 탓에 집안의 재산을 전부 탕진해 온채린이 좋은 학교에 갈 수 없었다고 했다.지금은 집안에 큰일이 생겼지만 온지유는 그럼에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고 가만히 삼촌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무정하고 냉정하며 배은망덕한 이미지를 그녀에게 만들어주고 있었다.실시간으로 방송하고 있었던 터라 많은 댓글이 달렸다.[대박,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이런 일이 있다니. 정말 인간도 아니네!][이 두 사람도 참 불쌍하네요. 옷차림도 소박한 것을 보아 평소에 돈을 아주 아끼며 살았겠네요. 제가 아까 온지유라는 사람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는데 비싼 것만 입고 있더라고요. 심지어 명품 가방까지 들고 있고 말이에요. 참, 이번에 여진 그룹 자선 활동에 한 벌에 몇억 하는 옷을 입고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여자랑 이 두 사람을 비교해보니 참 하늘과 땅 차이네요!][아, 온지유요? 저 알아요. 저랑 같은 학교 다녔는데
온지유는 로비로 내려가자마자 문 앞에 있는 수많은 기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앞으로 들이민 카메라를 향해 장수희는 울면서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하고 있었다.온채린의 심지어 눈물에 부어버린 눈으로 카메라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여러분들의 관심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있으니 저희는 곧 억울함을 풀 수 있겠네요.”“어떤 억울함?”온지유가 싸늘한 얼굴로 나오며 말했다. 그녀는 두 사람처럼 연기하는 것을 싫어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연기를 한다고 내가 두려움을 느끼고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줄 거로 생각했어요?”그들은 모두 온지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온지유는 그들이 다가와도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그러자 장수희는 더욱 히스테릭하게 울면서 온지유를 향해 손가락질도 했다.“온지유, 이 양심 없는 것. 난 네 숙모야. 네 숙모한테 어떻게 매정할 수가 있는 거니! 네가 어릴 때부터 내가 그렇게 예뻐해 주고 그렇게 잘해주었는데 어떻게 우리한테 그럴 수가 있는 거니!”“언니, 양심에 찔려서 나온 거죠? 지금이라도 저랑 우리 엄마를 도와준다면 전처럼 다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온채린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기자는 온지유를 보더니 마이크를 건네며 물었다.“온지유 씨, 이 두 분이 사촌 여동생과 숙모라고 주장하시는데 사실인가요?”온지유는 카메라를 보며 담담하게 답했다.“네.”그러자 댓글창이 또 한 번 난리가 났다.[세상에, 전부 사실인가 보네. 그런데도 이렇게 뻔뻔하게 대답하다니, 정말이지 배은망덕한 사람이었어!][인간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돼요. 아무리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가족을 버리다니요. 심지어 대학교도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게 도와준 숙모인데 대학교에서 헛공부를 했나 보네요.][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짜증이 나네요. 저도 삼촌이랑 숙모 품에서 자랐는데 너무 공감되네요. 절대 키워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죠!][우리 가서 신고합시다. 저 여자 여진에서 해고당해야 마땅하다고요! 우리가
온채린이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언니를 위해서 집안의 돈을 다 쓴 탓에 제 대학 등록금도 부모님이 여기저기서 빌린 돈으로 내고 있다고요.”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그들의 거짓말은 점점 더 켜졌다. 더는 주위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았다.“배은망덕한 년!”“뻔뻔한 더러운 년!”이때 누군가가 갑자기 온지유를 향해 달걀을 던졌고 그녀의 앞에 툭 떨어졌다.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보았다. 그쪽에는 이미 몇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손에는 달걀과 밀가루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전부 온지유를 향해 던졌다.온지유는 급히 손으로 막았다. 보안 요원도 얼른 그들에게 다가가 막아섰다.“뭘 막아요! 애초에 뻔뻔하고 사악한 사람인데! 남의 가정을 파탄 낸 것도 모자라 비서인 척 누군가의 내연녀 짓이나 하고 있고 말이에요!”그녀를 향해 달걀을 던진 사람이 말했다.그녀의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어딘가 준비된 사람 같기도 했다.장수희가 찾아오고 사람들이 달걀을 던진다는 건 꼭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이런 상황을 꾸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장수희를 보았다. 기세등등한 것이 그녀가 굴복하는 모습이 보고 싶은 듯했고 여론의 힘을 이기지 못해 얌전히 자신들에게 돈을 주기를 바란 것 같았다.기자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물었다.“온지유 씨, 저분들의 말이 사실인가요? 계속 누군가의 내연녀로 살아오면서 남의 가정을 파탄을 냈나요?”온지유는 화가 치밀었다. 기자들이면서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기삿거리를 위해 막무가내로 취채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여기서 이성을 잃고 화를 냈다간 저들의 말이 사실로 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당장 저 사람들 잡으세요!”온지유가 차갑게 말했다.“카메라에 찍혔으니 끝까지 책임을 지게 할 겁니다.”“네, 온 비서님!”보안 요원들은 사람들을 둘러쌌다.온지유가 강경하게 나오자 그들은 더는 소란을 피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다시 마음을 다잡은 온지유는 기자를 보면서 네티즌들
그러나 곧 인명진의 시선이 은서우에게로 향했다.“뭐 생각나는 거 있나요?”은서우는 고개를 저었다가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생각은 있지만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생각이 단지 생각일 뿐이죠. 원장님, 그건 원장님이 가르쳐준 거예요.”고개를 든 그녀의 두 눈은 초롱초롱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인명진은 그런 은서우를 바라보며 눈부신 그녀의 모습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인명진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럼 지금 바로 짐을 챙겨서 저를 따라오세요.”그 말을 들은 은서우가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은서우 씨가 말했잖아요. 실제로 만나기 전에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말이에요. 그럼 지금 바로 가서 봐야죠.”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아니, 놀라움보다는 충격에 가까웠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은서우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랐다.‘멸균 장갑과 도구, 그리고 노트도 가져가야 하나?’“거기 다 있으니 이것들은 필요 없어요.”인명진은 이 말과 함께 은서우의 노트만 챙기고 떠났다.“아.”은서우는 자신의 머리를 탁 치며 왜 그렇게 간단한 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기쁨에 겨워서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환자는 병원이 아닌 병원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한 요양원에 있었다.겉보기에는 요양원이었지만 실은 연구소였다. 단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요양원으로 위장한 것뿐이었다. 실제로 요양을 받는 노인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곳에는 오직 멸균 복이나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만이 있었다.요양원으로 들어가려면 신원 확인이 필요했다.인명진이 목에 걸고 있는 카드를 책임자에게 보여줄 때 은서우가 사진을 힐끔 훔쳐보았다.카드에는 인명진의 증명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 속의 그는 단정하고 정직해 보였으며 또한 날카롭고 과묵해 보였다.인명진이 먼저 들어가며 말했다.“뭐해요?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따라오세요.”그 말에 정신을 차린 은서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원장님은 그녀에게 그렇게 잘해주시는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평소 인간관계에 둔감했던 은서우는 드디어 자신의 이상함을 깨달았고 인명진에 대한 감사로 생긴 친근감이 순식간에 크게 줄어들었다.심지어 물러나고 싶은 충동까지 생겼다.인명진은 그녀에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왜 말을 안 하죠?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지금 말해도 돼요. 마침 같이 해결할 수 있으니깐요.”인명진은 그녀를 위하는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하지만 은서우가 어떻게 감히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리겠는가!인명진이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된 후 그 차가운 얼굴에 떠오르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상상하자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다.인명진의 의혹이 담긴 눈빛을 마주한 그녀는 마음을 애써 안정시키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온지유 씨는 그날 저와 아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어요.”말을 마치자 남자의 미간이 펴지는 것을 본 은서우는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원장님에게 거짓말을 했고 진실 반 거짓 반으로 그를 속여넘겼다.인명진은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여성의 마음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다가와서야 비로소 이상함을 느낄수 있을 정도로 둔감한 스타일이었다.게다가 그는 은서우를 믿고 있었다.인명진은 그녀가 온지유의 행동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으세요. 이것도 한번 보세요. 최근 검사 결과에요.”인명진이 건넨 것은 혈액 검사 보고서였다.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은서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검사 결과지를 보고 또 보았다. 여러번 훑어본 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 고개를 저었다.“이상해요, 이건 너무 이상해요. 이 세포 수가 왜 또 몇 배나 늘어난 거죠?”인명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게 바로 제가 은서우 씨
은서우는 상황을 보고 급히 말했다. “제가 가서 남은 게 있는지 한번 찾아볼게요.”“괜찮아요, 그냥 장난이었어요.”온지유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무의식적으로 매력을 발하며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장선영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저는 이제야 왜 사람들이 그 소문을 믿는지 알 것 같아요.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정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겠죠. 제가 원장님이라면 저도 반했을 거예요.”그 말에 은서우는 목구멍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그저 인명진의 마음에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이유 없이 막히고 불편했다.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선영은 조금 전 온지유를 직접 보고 그녀의 대화와 표정에서 사실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 이상 사생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그녀는 그 일에 깊이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의 수다에 참여하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간호사가 해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외 없이, 모두 사생아에 관한 소문을 퍼뜨렸던 사람들이었다.장선영도 그 소문을 퍼뜨린 적이 있었기에 은서우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서우 씨가 저에게 알려줘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저도 해고되었을 거예요.”은서우는 감사하다며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장선영을 큰일 아니니 괜찮다고 거절했다.이때 갑자기 모르는 간호사가 달려와서 말했다.“은 선생님, 원장님께서 부르십니다.”은서우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인명진이 이때 그녀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서둘러 물건을 정리하고 원장실로 찾아갔다.은서우가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원장님, 저예요. 들어가도 될까요?”안에서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은서우가 들어갔을 때 인명진은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그는 고개를 들고 은서우를 바라보았다. 약간 옅은 눈동자는 그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
은서우는 한숨을 내쉬며 때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윤별이가 일부러 자신을 도와준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 어른들의 생각을 적용할 수는 없으니까.하지만 실제로 윤별은 어린 나이에 철이 들었다.온지유는 귤을 손에 쥔 윤별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입만 살았구나. 너를 데리고 온 건 병원에서 먹을 것을 찾으라고 한 게 아니야.”은서우가 급히 손을 저으며 온지유를 말렸다.그 후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바닥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는 온지유는 말이 없을 때 아주 차분해 보였다. 말로 표현하자면 가을 낙엽처럼 고요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은서우는 그녀 앞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이렇게 앉아만 있어도 끊임없이 매력을 풍기는 사람을 마주하니 정말 자신이 초라해지지 않기가 어려웠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열었다.“정말 죄송해요. 온지유 씨가 오실 줄 몰라서 미리 준비를 해놓지 못했어요. 일단 여기 앉아 계세요. 제가 나가서 뭐라도 좀 사 올게요.”온지유가 그녀를 불러세우며 부드럽고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괜찮아요, 저는 그냥 친구를 보러 온 것뿐이에요.”그 말을 마친 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은서우는 고개를 숙이고 몰래 온지유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온지유도 지금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두어 번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었지만 눈에 띄지 않게 보았기에 은서우는 알아채지 못했다.은서우를 바라보는 온지유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온지유는 은지우가 예쁘기도 하고 착하다고 생각했기에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은서우는 점점 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이번에 병원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온지유도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인명진이 너무 큰 소동을 일으켜서 여론이 일자 곧바로 여이현에게 부탁해 상황을 수습하고 사람을 찾아 사실을 밝히도록 해서 모르기가 어려웠다.온지유는 테이블 아래에서 은밀히 손가락으로 빠르게 휴대폰을 두드렸다. “
은서우는 장선영의 말에 문득 그 아이를 데리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곧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바로 그때 장선영이 흥분된 표정으로 다가와 속삭였다.“저도 원래는 믿지 않았죠. 원장님이 그런 사람일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정말로 본 걸요!”은서우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신경이 곤두섰다.“뭘 봤는데요?”“그 소문 속의 사생아요.”“원장님께 사생아 같은 건 없어요. 장선영 씨가 잘못 본 거겠죠.”은서우는 인명진의 체면을 지키려고 애썼다.그녀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인명진에게 지금까지 연애 상대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들의 말대로 몇 살짜리 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장선영은 은서우가 믿지 않는 것을 보고 더욱 열을 내며 그 아이를 보여주겠다고 했다.결국 은서우는 그녀의 손에 끌려갔다.“저기 봐요, 저 아이라니까요. 제가 거짓말한 게 아니라고요. 오늘 아침에 이 아이가 원장님을 찾아오는 걸 제가 직접 봤거든요. 지금은 곁에 어떤 여자분이 같이 있는데 원장님 부인인지 아닌지 모르겠네요.”장선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바로 그날 만났던 온지유였다. 온지유는 아직 은서우를 발견하지 못했다.이때 장선영이 더욱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다들 구석에서 몰래 보고 있어요. 서우 씨는 원장님이랑 친하죠? 저분 지금 원장님 사무실로 가는 것 같은 데 가서 물어볼래요?”은서우는 그 아름다운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대답했다.“제가 뭘 물어봐요? 물어본다 해도...” 그녀에게 무슨 자격이 있겠는가?이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은서우는 깜짝 놀랐다.다행히 장선영은 그녀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고 은서우도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은서우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그녀는 구경하고 있는 장선영을 끌고 자리를 떴다.은서우가 그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을 보자 장선영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신기하네요. 어떻게 관심이 없을 수 있죠?”
눈가에 미소가 어린 인명진의 모습은 평소보다 친근해 보였다.“두 날 전부터 소태훈이 마약을 했다는 소식을 퍼뜨렸어요.”은서우는 순간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깨달았다.인터넷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어서 서로 생각이 달랐지만 신기하게도 마약에 대해서는 모두 일치하게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소태훈이 유언비어를 퍼뜨린 데다가 마약까지 했으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더는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 댓글에서는 그녀를 나무라던 사람들이 돌아서서 소태훈을 비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은서우가 제일 신경 쓰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백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가 그녀의 무고함을 밝혀주었다.그녀는 마음속에 가득한 감동과 감사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절대로 원장님을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그날 이후로 은서우는 밤낮으로 자료를 연구했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일에 미쳐버린 것 같다고 했다.평소에 대화를 좀 나눴던 간호사 장선영은 점심시간이 다 됐는데 여전히 머리를 묻히고 열심히 일하는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서우 씨, 그만 보세요! 지금 몇 시인지 봐봐요!”은서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네?”“그만 보세요! 이젠 점심시간인데 식당 안 갈 거예요?”“선영 씨 먼저 가요. 전 이거 끝내고 가야 해서요.”은서우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볼펜을 놀리며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장선영이 다가와 힐끔 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있잖아요. 서우 씨 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은서우가 고개도 들지 않자 장선영은 그녀가 묵인한 것으로 생각하고는 말을 이어갔다.“요즘 모두 원장님이 서우 씨를 그 무슨 프로젝트에 참여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요. 이름이 생명나무 프로젝트라고 하던데요?”그 말에 은서우는 동작을 멈추었다.생명나무 프로젝트, 바로 인명진이 그녀에게 맡긴 프로젝트의 이름이었다.이건 기밀 프로젝트였기에 그녀는 손에 든 자료를 덮고 장선
인명진은 은서우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은서우 씨가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나요?”은서우는 인명진이 이미 자신에게 충분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거절하려던 말을 꺼내기 직전 그녀는 마음속으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그건 야망의 목소리였다.어떤 사람들은 그냥 안정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아가고 싶어 한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은서우는 아니다.그녀의 자신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 마음 덕분에 지난 몇 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어떤 사장님들은 그녀의 고용 기간이 끝나면 아쉬워하며 그녀를 붙잡기도 했다.은서우는 잠시 망설인 후 과감히 자신의 마음에 따라 결정했다.“아니요. 전 할 수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제가 잘할 수 있어요.”은서우는 그 진단 기록을 오랫동안 연구했고 과거에도 이런 증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적이 있었기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대답을 들은 인명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좋아요, 은서우 씨가 그렇게 말했으니 이번 수술은 은서우 씨한테 맡깁니다. 하지만 저는 은서우 씨를 도와주지 않을 거니까 열심히 해보세요.”은서우는 이미 이를 예상하였다.이 질병은 매우 희귀했다.환자는 몸속의 세포 분열 속도가 너무 빨라서 노화가 느려졌고 이상을 느껴서 병원에 와서 검사를 받았지만 병원에서도 이런 병을 본 적이 없었다.소문은 마치 바람을 타고 퍼지는 불꽃처럼 퍼져나갔고 이 병은 의학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병원은 이 병을 연구 프로젝트에 추가했고 치료를 진행하는 동시에 연구를 시작했다.주목할 만한 점은 이 프로젝트가 시작될 당시 여러 방면에서 방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정확히 누가 한 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이 프로젝트를 막으려 했고 환자를 치료하는 대신 연구만 하려 했다.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인명진이 어떤 큰 인물을 불러들였기에 이 프로젝트가 통과
가뜩이나 하얀 피부라 붉은 손바닥 자국이 얼굴에 아주 선명하게 생겨났고 이 장면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다.이때 기세등등했던 연희진이 갑자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은서우의 눈빛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너 그게 무슨 눈길이야? 넌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니?”“아닙니다.”은서우는 얼굴에서부터 전해져오는 아릿한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아주 평온해 보였다. 그 통증이 그녀를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했기에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다.“제가 오히려 엄마에게 고마워해야 하죠.”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그녀가 가족에 대한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나게 해주었다.연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은서우가 약해 보일 때엔 마음대로 손찌검을 할 수 있었는데 은서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예전처럼 괴롭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은서우는 연희진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 기억 속의 연희진은 항상 이런 모습이었다. 소심하고 겁이 많으며 본분만을 지키는 사람.연희진은 그저 옛 세대의 방식대로 살아왔을 뿐이었다.남편과 아들의 말은 절대적이었고 아이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저는 한때... 엄마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은서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엄마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도 맞지만 그중 일부는 엄마가 자초한 거예요.”소상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는지 헐떡이며 달려오더니 소리쳤다.“내 아들을 풀어줘!”은서우는 아무 표정 없이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그녀의 대답에 화가 난 소상태가 손찌검을 들려 했다.그의 손이 은서우의 얼굴에 닿으려던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인명진이 그 손을 잡았다.인명진의 얼굴은 평소와는 달리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가 이 정도로 화가 나 있는 모습은 처음
소태훈의 그날 증상은 마약의 부작용으로 판명되었고 이로써 은서우에게 씌워졌던 혐의는 완전히 벗겨졌다.하지만 소태훈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이건 조작이야! 은서우, 우리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러고도 사람이야?”경찰이 그를 끌어가려 했지만 소태훈은 끝까지 버티며 저항했다.그 소란에 병원 전체가 떠들썩해졌다.복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수많은 시선이 은서우와 소태훈에게 쏠렸다.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은서우는 이제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단단한 눈빛으로 소태훈을 바라보았다.“그래, 소씨 집안이 날 길러준 건 맞지.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1200만 원은 이미 다 갚았어.”부유한 집안에 놓고 말하면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은서우에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평생 모아도 그런 돈을 마련할 수 없을 정도였다.‘소씨 가문 가족들이 나한테 써준 돈이 과연 1200만이나 될까? 아니, 100만이라도 될까? 학비도, 생활비도 다 내가 스스로 벌었는데... 소씨 집안 사람들이 날 조금이라도 챙겨준 적이 있었던가?’소씨 가문 사람 중에 그녀가 미련을 가졌던 건 오직 소태연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소태연도 세상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소태훈은 소리를 질렀다.“그럼 내 동생은? 내 동생이 죽은 것도, 내 다리가 이렇게 된 것도 다 너 때문이야! 그것도 네가 갚아야 할 빚 아니야?”소태연을 떠올리는 순간, 은서우의 가슴속 깊은 상처가 다시 한번 아려왔다. 순간,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인명진을 떠올리는 순간, 그 불안한 감정은 점점 사라지는 것이었다.사실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온서우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소태훈을 끌고 가 검사를 강제로 받게 하는 것쯤은 그녀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인명진은 나서서 그렇게 했다.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서 곱씹어보면 그는 온서우에게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