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호는 땀을 삐질 흘렸다. 여이현은 그의 밥줄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여이현의 좋지 못한 안색을 발견한 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대표님, 화내지 마시고 온 비서님도 계속 놀고 싶은 것 같은데 함께 하자고 할까요?”여이현은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누가 같이 놀고 싶다고 했죠.”그의 말에 온지유는 아쉬운 것이 없다는 듯 나민우에게 말했다.“저쪽에 재밌는 거 더 많아 보이니까 우리 저쪽으로 가자.”“그래.”나민우는 고개를 돌려 여이현을 보았다.“그럼 여 대표님, 전 이만 가볼게요.”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여이현은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더니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고 누가 들어도 불쾌함이 느껴지는 어투로 말했다.“배 비서, 저 두 사람이랑 같이 놀고 싶어요?”“네, 네!”배진호는 바로 그들을 불렀다.“온 비서님, 전 함께하고 싶어요.”말을 마치자마자 여이현도 따라갔다.두 사람은 나민우와 온지유의 뒤에서 걷고 있었고 시선은 당연히 도레미몽을 품에 꼬옥 안고 있는 온지유에게로 향했다.“흥, 고작 인형 하나 가지고 뭘 저렇게 좋아하는 건지.”방금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은 꼭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의 모습 같았다.분명 하잘것없는 싸구려 인형을 안고 있었음에 말이다!그가 거액을 주고 낙찰받은 에메랄드 보석 팔찌를 그녀에게 주었을 때도 방금처럼 기뻐하지 않았다.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온지유의 머릿속엔 무엇이 있는지 말이다.값비싼 물건보다 노력해서 얻은 싸구려 인형을 그녀는 더 좋아했다.“여기는 표창을 던질 수 있나 봐.”온지유는 꼭 자객처럼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신기한 듯 말했다.그들이 내놓은 1등 선물은 20번의 기회 중 10번만 지정한 곳을 맞추면 얻을 수 있다고 했다.아직 1등 선물을 받아간 사람은 없었다.이것은 아주 큰 도전이었다.흥미를 느낀 온지유는 시도해보고 싶었다.여이현은 관심을 보이는 온지유의 모습에 배진호에게 시켜 결제하라고 했다.배진호는 이번이 여이현이 실력을 보여줄 기회인
“이거면 충분한가?”여이현이 물었다.“네 손에 든 것보다 더 귀여운 것 같은데?”“...”온지유는 여이현보다 더 큰 인형을 보았다. 그녀가 들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분명 땅에 질질 끌릴 것이었기에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너무 커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인형은 아니에요.”여이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난 이것이 네가 들고 있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니까 이거 들고 있어!”그는 그녀가 안고 있던 인형을 빼서 휙 던졌다.온지유는 자신의 품에 안긴 커다란 인형을 보았다. 너무나도 커서 숨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여이현 씨, 그만 해요!”온지유는 이 커다란 인형마저 바닥에 던져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겨우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말했다.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해진 얼굴로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그녀를 보았다.‘인형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내가 더 큰 인형을 안겨주었으니 그럼 더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왜 화를 내는 거지?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온지유는 자신의 심한 말에 여이현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을 것을 알고 다시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이건 너무 크고 무거워서 들고 있기 버거워요.”“내가 도와줄게.”이때 나민우가 렛소 인형을 안으며 말했다.“이러면 되잖아.”“고마워.”온지유는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배진호는 싸늘해진 분위기를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여이현의 몸에서는 어두운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이미 그에게도 그 어두운 기운이 닿고 있었다.게다가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관심이 없어 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그는 심지어 여이현이 불쌍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여이현을 향해 박수를 쳐주었지만 온지유만은 그러지 않았으니 말이다.“목마르지 않아? 저기 밀크티 가게가 있는데.”나민우가 온지유에게 물었다.“응, 가자. 마침 목이 말랐거든.”온지유가 답했다.두 사람이 자리를 옮기려던 순간 배진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상처 소독약으로 상처를 소독한 뒤 붕대로 감아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가 차를 끌고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왔다.온지유는 여이현을 부축하며 차에 태우곤 나민우를 보았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던 여이현은 그녀가 정말로 나민우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나민우가 먼저 입을 열어 다정하게 말했다.“먼저 가 봐. 여 대표 다쳤잖아. 아픈 사람을 보살피는 게 더 중요하지.”그는 온지유의 입장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여이현은 그녀의 상사이니 당연히 보살펴야 했다.온지유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럼 난 먼저 가볼게. 오늘 같이 놀아줘서 고마워.”“응, 그래.”나민우가 답했다.차 문이 닫혔다.배진호는 원래 다시 차에 타려고 했지만 무언가 생각났는지 웃으면서 나민우의 앞으로 다가갔다.“나 대표님, 고마웠습니다.”그는 예의 있게 감사 인사를 하곤 그가 들고 있던 렛소 인형을 가져왔다.여하간에 이 인형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이 오늘처럼 열심인 모습은 처음 보았다.차는 서서히 떠나가고 나민우는 그들이 탄 차를 빤히 보았다. 그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군가가 문자를 보낸 것이다.[저녁 이미 차려놨는데 언제 와?]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집에 도착한 뒤 온지유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행여나 표창 때문에 세균에 감염되기라도 했을까 봐 주치의도 집으로 불렀다.의사는 그에게 파상풍 주사를 놓아주었다.여이현은 틈이 날 때마다 나민우와 함께 있던 온지유의 모습이 생각나 떠보듯 물었다.“이번에도 나민우와 우연히 만난 거야?”정말로 우연이었다.온지유가 답했다.“저랑 민우는 그냥 친구예요. 친구끼리 만나는 게 뭐가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퇴근하고 만난 것이니 업무에도 지장 주지 않았어요.”여이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정말로 그 사람이랑 친구라고 생각하는
마침 여이현이 외출하고 돌아왔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직원이 내뱉는 말을 듣고 있었다.“대표님, 오늘 오후 한 시에 그쪽으로 보내라고 이미 말해두었습니다.”여이현은 멀지 않은 곳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온지유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온 비서.”온지유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네, 대표님.”“오후에 일정이 없으면 따라가죠.”그가 말을 마치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그런 일은 아주 힘들어 여직원들이 아주 꺼렸다. 그래서 전부 남자직원에게 배정된 일이었다.온지유는 이곳의 유일한 여직원이었다.게다가 바깥은 해가 쨍쨍 내리쬐고 있었고 온지유는 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있어 앉기도 불편할뿐더러 그곳을 걸어 다니기도 힘들었다.그러나 여이현의 지시이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온지유는 바로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래요.”여이현은 더는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담담히 자신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온 비서님, 제가 도와드릴게요.”이윤정이 그녀를 도와주려고 했다.“괜찮아요. 일손은 부족하지 않으니 그냥 사무실에 남아 있어도 돼요.”오후 한 시는 해가 제일 뜨겁게 내리쬘 때였다.길을 청소하던 환경미화원들도 쉬지 않고 청소하고 있었다.온지유는 생수 상자를 들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어느새 그녀는 땀을 가득 흘리고 있었다.그렇게 한 상자 옮기고 난 뒤 환경미화원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들은 나이가 많았던지라 그녀가 생수를 주니 고맙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아가씨, 자선활동 하는 김에 우리한테도 생수 나눠주는 게 어때요.”이때 몇 명의 길 가던 남자들이 치마와 스타킹을 신은 온지유를 보고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생수를 달라는 핑계로 다가왔다.온지유도 그들의 불손한 시선을 느끼고 뒷걸음질을 치며 인상을 구겼다.“이 물은 환경미화원분들께 나눠드리는 겁니다.”“아, 특별대우를 하시겠다는 거네요.”남자들은 온지유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온지유는 그런 시선을 아주 혐오했기에 단호하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주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네 아내는 네 할아버지께서 정해주신 거잖아. 그래서인지 확실히 괜찮은 여자이긴 하네. 얌전하고 말도 잘 듣고 네가 밖에서 여자 몇 명을 만나든 신경 쓰지도 않고 말이야. 이렇게 좋은 아내가 있는데 왜 기분이 안 좋다는 거냐?”여이현은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얌전하고 말 잘 듣는 건 확실히 아내로서 좋긴 하지.”“그런데 왜 네 신경은 온통 저 여자한테 쏠린 거냐. 너 혹시 진짜 좋아하게 된 거 아니지?”최주하는 그의 모습이 이상했다. 아무리 온지유가 괴롭힘당했다고 해도 여이현이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창밖을 내다보니 온지유는 다른 직장 동료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네 아내 인기 많은 거 같아. 누구랑도 다 잘 지내잖아. 너 예전에 언젠가 이혼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이혼하게 되면 줄을 설 남자들이 가득해 보이네.”최주하의 말에 여이현은 미간을 확 구겼다. 온지유에겐 사람과 어울려 지내는 일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최주하의 말대로 그녀는 누구와도 잘 지냈다.그의 목소리는 더욱 가라앉았다.“너도 온지유는 좋은 아내라며. 그럼 계속 좋은 아내로 남게 해줘야 하지 않겠냐.”모든 생수를 나눠주고 나니 온지유의 옷은 땀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그녀는 직원들과 사무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온 비서님, 완전 의외네요. 힘이 그렇게 셀 줄은 몰랐어요. 저희 남자들에게 전혀 뒤처지지 않는 힘이었어요!”그들은 온지유와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에 대해 잘 몰랐다.온지유가 그들에게 주는 첫인상은 차갑고 도도하고 힘도 없는 나약한 사람이었다.설령 그들과 함께 일한다고 해도 그저 가만히 있는 꽃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막상 그녀와 함께 일하고 보니 차갑고 도도한 느낌은 없었고 오히려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지냈다.“뭘요. 정말로 힘이 필요한 일들은 여러분들이 해주고 계시잖아요. 전
“아니요.”그때의 그녀는 겉옷을 입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었다.엘리베이터 기다리면서 겉옷을 벗으려던 때 그가 그녀를 비상계단으로 확 끌고 오게 된 것이다.“지금 가려봤자 늦었다는 거 알아?”여이현은 차갑게 웃으며 욕망에 휩싸인 눈빛으로 그녀를 보면서 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에 올렸다.온지유는 그런 그의 눈빛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여자로 보는 듯했다. 그의 이런 눈빛을 처음 보았다.위험을 감지한 그녀는 얼른 도망가려고 애를 썼다.그러나 여이현은 그녀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계속 그녀를 구석으로 몰았다.“온지유, 이게 네가 말한 행복을 되찾을 권리라는 거야?”온지유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네?”여이현은 그녀에게 바싹 다가가며 차갑게 비웃었다.“네 목표는 한둘이 아닌가 보네. 나랑 이혼하고 바로 다른 남자랑 재혼할 생각인 거지?”온지유는 그의 손이 자신의 옷 속으로 점차 들어오자 느껴지는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전 그런 생각한 적 없으니까 이것 좀 놔요. 우리 대화로 풀어요. 이러면 다른 사람한테 들킨다고요!”여이현은 얼굴이 붉어진 그녀를 보았다. 셔츠가 젖어 몸매가 보이는 채로 남자직원들 사이에 있던 그녀를 떠올리기만 하면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바닥에 웅크려 앉았다.여이현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풀었다. 옷차림이 흐트러진 온지유를 보니 욕망이 불타올랐다.“다른 사람한테 들키고 싶지 않은 거라면 급한 불부터 꺼야 하지 않겠어?”온지유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야에 그의 정장 바지가 들어왔고 순간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안 할 수가 없었다. 해주지 않으면 그는 절대 그녀를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으니까.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반 시간 뒤.온지유는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을 씻은 후 입안을 헹구었다.고개를 들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처참했다. 잔뜩 헝클어진
그녀의 말에 주소영은 충격받은 표정을 짓더니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그러니까 온지유 씨가 여이현 씨 아내라고요?”주소영은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만약 여이현이 정말로 온지유의 남편이었다면 그녀가 모를 리가 없다고, 두 사람이 결혼 사실을 숨길 리도 없다고 생각했다.“네, 맞으니까 얼른 이 손 좀 놔요.”온채린은 손을 빼냈다.“제 형부는 여이현이에요.”주소영은 두 사람을 보았다. 여전히 의심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지금 저한테 거짓말하시는 거죠? 온지유 씨는 여이현 씨 비서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내인 거예요?”“거짓말할 게 뭐가 있어요.”장수희가 말을 이었다.“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두 귀로 직접 들은 건데. 우리 조카사위는 심지어 우리 아주버님도 만나러 갔다고요. 우리 아주버님이 온지유 아빠죠. 조카사위는 여이현이고요.”두 사람의 말은 들은 주소영은 다시 충격에 빠졌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정리하곤 말했다.“혹시... 예전에는 모르고 계셨어요?”장수희는 그런 그녀가 의아하면서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도 최근에 알게 되었어요. 일찍 알았다면 우리 집은 부자가 되어 있었겠죠!”여씨 가문은 온경준에게만 20억이라는 돈을 주었다.이 돈은 평범한 집안에서 평생을 일해도 모을 수 없는 돈이었다.만약 일찍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도 돈을 달라고 요구했을 것이다.많이 바라지는 않고 그들은 좋은 집을 하나 마련해줬으면 했다.“여씨 가문이 그렇게 큰데 결혼식은 물론이고 뷔페도 못 가봤다니까요! 둘이 결혼한 것도, 심지어 저렇게 좋은 가문에 시집갔으면서 친척인 우리한테 알려주지도 않고 말이에요. 만약 내가 아주버님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었다면 평생을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장수희는 말하면서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댔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온지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우리 조카도 참 대단하네요. 행여나 내가 그 떨어지는 콩고물을 조금이라도 받아먹을까 봐 숨기
주소영은 원래부터 긴장하고 있었다. 온지유에게 밀려날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의 말을 들으니 다시 자신이 생겼다.온지유는 여씨 가문 안주인의 자리에 앉고 있긴 했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게다가 나중에 이혼할 가능성이 아주 컸다.그녀는 두 사람을 보더니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말했다.“두 분 성급하게 들어가지 마세요. 여진 그룹은 들어가기 쉽지 않거든요. 아마 들어가 보기도 전에 문 앞에서 쫓겨날 거예요.”주소영이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난 여이현의 숙모라고요. 누가 감히 날 막아요!”장수희는 숙모라는 명분으로 들어가 심지어 대접받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러자 주소영이 말했다.“온지유 씨가 두 분을 경계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요. 온지유 씨는 여이현 씨의 비서예요. 두 분의 출입 소식은 온지유 씨가 제일 먼저 듣게 된다고요. 그런데 정말로 쫓겨나지 않을 거로 생각하세요?”장수희는 그제야 생각을 하며 다소 불쾌한 듯 말했다.“듣고 보니 그렇네요. 병원에 있을 때부터 따박따박 말대꾸했으니까 분명 우리를 쫓아내려고 하겠네요!”“조카라는 년이 어른을 공경할 줄 하나도 모르고 대체 학교에서 뭘 배운 건지, 쯧!”온채린은 그녀의 말에 불안한 듯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요?”장수희는 높게 솟은 건물을 보았다. 건물 제일 위쪽엔 여진 그룹의 로고가 걸려 있었다.이 건물 전체가 여씨 가문의 소유였으니 분명 돈은 차고 넘쳐 흐를 것이었다.그녀는 자신의 가족 중 부잣집으로 시집갈 사람이 있으리라곤 전혀 상상조차 못 해봤다.“제게 방법이 있어요! 그런데 두 분 동의하실지 모르겠네요.”주소영이 말랬다.장수희는 고개를 돌려 주소영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아이고 아가씨, 참 좋은 사람이네요. 어떤 방법이 있는데요?”반 시간 뒤.여진 그룹 문 앞에서는 소란이 일어났다.장수희는 로비 직원에게 온지유를 찾으러 왔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분명 그들은 온지유의 친척이었지만 온지유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신무열은 Y국에서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지만 나라의 미래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격을 낮추고 직접 약초를 가르치고 재배법을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그 시간 동안, 신무열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아린에게도 작은 선물을 챙겨주었다. 신무열은 어떤 사람인가?그는 한 번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지금 이런 행동을 한다면 오히려 신무열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망칠 뿐이었다.신무열은 그녀를 계속 싫어할 것이고 아린은 혼자서 그를 바라만 보는 삶을 살게될것이다.그럼에도 아린은 지금은 그들에게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아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무열 씨를 좋아하는 여자는 많은데 왜 저를 선택한 거죠? 저는 작은 인물이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데요.”“바로 네가 작은 인물이기 때문이지. 그래야 의심받지 않아. 정말 신무열을 영원히 네 곁에 두고 싶지 않나? 신무열은 뛰어난 사람이고 너와 그의 아이라면 최고의 유전자를 가질 텐데.”아린이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계속 그녀를 부추겼다.남자의 말들은 아린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어졌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신무열과 함께하는 것보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계획이 뭐죠? 말해줘요. 계획대로 따를게요.”그녀는 자신이 왜 선택되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작은 인물이기 때문에 조종하기 쉽고 조금의 이익으로도 매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계획은 내가 알려줄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너의 충성심을 위해...”‘푹!’남자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아린은 피부에서 느껴오는 찌릿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아린은 자신에게 독이 주입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남자는 아린에게 위협하듯 말했다.“내 말을 어기기만 해봐. 이 독은 널 죽기보다도 못한 고통을 줄 테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린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머리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
아린이 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신무열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나는 이미 헤연에게 약속 했어. 남자로서 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지. 게다가 난 혜연에게 특별히 불만도 없어.”아린은 숨이 막혔다.책임감 때문에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았던 신무열. 그리고 김혜연에게는 불만이 없다는 말에 더해 김혜연이 늘 신무열 곁에 있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다는 점에 속이 검게 타들어 갔다.“가까이 있는 자가 먼저 기회를 얻는다”는 말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참으로 딱 들어맞았다.아린의 마음은 아팠다. 그녀는 평민일 뿐이었고 김혜연과는 신분 자체가 달랐다.신무열이 원하는 건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우수한 여성이자 내조자였지 빈민가 출신의 이름 없는 소녀는 아니었다.아린은 여러 해 동안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 사이의 신분 격차는 변할 리 없었다.“선생님, 당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축복할게요. 당신이 늘 행복하길 바라요.”이것이 아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고마워.”신무열도 그녀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아린은 돌아섰다.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목표가 사라진 지금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신무열의 거처를 벗어난 아린은 얼마 가지 않아 무리에게 가로막혔다.그녀보다 키도 크고 체격이 다부진 남자들이 점점 다가왔다.아린은 본능적으로 총을 꺼내려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총구가 그녀의 머리에 겨눠지며 차갑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렸다.“죽기 싫다면 조용히 우리 말을 듣고 따라와라!”전쟁 중 매일 총탄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았던 그녀였다. 몸은 총구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여긴 신무열의 구역이었다. 그녀 같은 작은 존재가 신무열에게 폐를 끼칠 순 없었다.아린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순응했다.얼마나 걸었는지 모른 채 끌려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꺼내 그녀를 겨눴다.“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세요. 괜히 쇼하지 말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혜연은 신무열을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 왔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렵게 얻은 결과를 지키려고 해야 하는 게 아닐까?하지만 김혜연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태도였다.여인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만약 내가 무열 씨의 마음을 얻어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김혜연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대답했다.“왜 그런 걱정을 하는 거죠? 만약 당신이 신무열의 마음을 얻는다면 그건 당신의 능력이에요. 오히려 축복해야겠죠.”김혜연이 신무열을 붙잡으려 애썼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신무열의 곁에 다른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신무열의 곁에 다른 여자가 생긴다면 지금처럼 그녀도 그 관계를 축복했을 것이다.여자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그런 말로 날 속이려는 거죠? 사실은 내가 당신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당신도 곧 제 실력을 알게 될 거니까요!”김혜연은 이해했다.“선전포고라는 뜻이군요.”김혜연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그 여자는 곧장 신무열을 찾아갔다.신무열은 그녀를 보고 곧바로 시선을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날 찾아온 이유가 뭐죠?”“선생님, 저를 잊으셨나요? 저 아린이에요. 5년 전...”아린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급한 마음을 드러냈다.그 말을 들은 신무열이 그녀를 기억해 냈다. 아린은 5년 전 북부에서 온지유와 갈등을 빚었던 소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 케빈도 떠올랐다.“아린? 무슨 일로 온 거야?”신무열은 그녀를 기억해 냈지만 여전히 말투에서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의 태도에서는 큰 반가움이 보이지 않았다.아린은 신무열이 Y국을 책임지고 있으며 많은 일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신무열과 김혜연의 결혼 소식을 듣고 발길을 멈출 수 없었다. 이 결혼식은 Y국 전체가 주목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아린은 그가 김혜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신무열이 김혜연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김혜연이
김혜연은 믿기 어렵다는 듯 물었다.“제가 했어도 탓하지 않는다고요?”자신의 노력이 드디어 그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은 걸까? 자신이 그의 삶에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는 것을 허락한 걸까?“그래.”신무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김혜연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왜죠? 그건 저랑 결혼할 생각이 있다는 말인가요?”신무열은 김혜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그동안 네가 나의 곁에서 어떻게 해왔는지 난 다 보고 있었어. 넌 정말 훌륭한 내조자였어. 지금 모든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알고 있는데 너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너에게 너무 불공평하잖아.”특히 김혜연이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지려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김혜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무열 씨가 저랑 결혼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결혼하기 싫으시다면 저 때문에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이 모든 건 제가 원해서 한 일이에요.”김혜연의 목소리는 점점 더 메말라 갔다.설령 마지막에 자신이 상처받고 죽더라도 그것 역시 그녀가 원한 결과였다.신무열은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그런 말 하지 마. 네가 나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그리고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돼 있다는 것도 알아. 나는 네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신무열은 그녀를 꼭 안아주며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넌 우리 결혼식이 어땠으면 좋겠어?”“저는... 잊지 못할 결혼식을 원해요.”결혼식을 떠올리는 김혜연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했다.사실 결혼식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신무열이 그녀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드디어 결혼에 대해 마음을 열었다는 점이었다.“좋아.”신무열은 김혜연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결혼식 준비는 요한에게 맡겼고 김혜연이 직접 준비를 도울 수 있도록 했다.김혜연은 모든 준비에 만족하며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러 간 날, 한 여인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비난하다니?“아버지가 틀리지 않았다고요?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한 번도 우리 두 형제에게 있지 않았잖아요.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주고 믿어주셨다면, 지금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아버지는 언제나 고집대로예요. 여이현이 대통령 자리에 뜻이 없다고 해서, 우리를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을 찾아내서 아버지 말을 따르는 꼭두각시로 세뇌하려 하신 거 아니에요?”두 아들이 한마디씩 비난을 쏟아내자, 브람은 얼굴을 굳히며 각각 한 발씩 걷어차 둘을 바닥에 내리 눕혔다.“너희 머릿속에는 두부라도 들어 있냐? 내가 너희 편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너희가 저지른 짓거리만으로 진작에 끝장났을 거야, 그것도 모르겠냐?”브람은 말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브람의 자식 교육은 아무도 간섭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여이현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온지유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내란은 이제 다 정리됐고 당신 일도 다 마무리됐네.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여인들 사이의 갈등도 복잡하지만 남자들 사이의 싸움은 종종 더욱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법이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 일이 없었더라도 이틀 후엔 돌아갈 생각이었어. 괜찮아?”온지유가 불편하다고 하면 그는 더 빨리 떠날 계획이었다.“괜찮아.”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브람은 여이현이 있는 동안의 두 아들의 암살 시도를 공개하고 대통령을 선거를 통해 뽑겠다고 발표했다.많은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했으나 결국 브람이 재선에 성공했다. 브람은 화국의 방식을 따라 5년 임기를 추가했다.그의 두 아들은 개조 프로그램에 보내져 일반인의 신분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여이현은 S국이 평온을 되찾은 모습을 바라보며 온지유와 함께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신무열과 김혜연은 Y국으로 함께 돌아갔다.Y국도 현재 평화를 되찾았고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김씨 가문의 옛
지금 온지유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였다.바로 가족들의 인정과 축복이었다.브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라. 이제 더는 너와 이현이에게 방해가 되지 않겠어.”그는 여이현이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아 S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되길 바랐다.하지만 여이현은 그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는 평범한 삶을 원했다. 여이현의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그동안의 부재가 가슴에 남아 있는 브람은 아이가 고통 속에서 살아가길 원치 않았다.“감사합니다.”온지유의 뜻밖의 감사 인사에 브람은 묘한 감정이 일었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부부였고 이미 5년 전부터 함께해온 사이였다. 그녀는 긴 시간여이현의 곁에 머물렀다.서로에게 운명이라 믿어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온지유는 여전히 둘을 갈라놓으려 했던 브람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특히 자신과 여이현 사이의 거리감에 더욱 가슴 아팠다.순간, 브람은 깊은 후회를 느꼈다.여이현과 온지유는 한동안 S국에 머물렀고 그 사이 여이현은 브람의 일을 돕고 있었다.그간 뜻밖에도 형과 이복형이 여이현을 암살하려 했다.다행히도 여이현은 이미 준비를 해 두었고 신무열이 미리 사람을 배치해 둔 덕분에 형제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형제들은 붙잡힌 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이현을 보자마자 끌어내려 함께 죽으려 했다.그들은 여이현을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여이현은 그들의 눈빛에서 비교당하는 삶의 불행함을 느꼈다.여이현은 형제들에게 말했다.“아버지가 구해주셨을 때 저는 중상을 입어 모든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셨지만 전 처음부터 대통령 자리에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원하는 건 소소한 가정일 뿐입니다.”“이곳에 온 건 단지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일 뿐이에요. 믿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지만 떠나면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여이현은 형제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브람은 그들을 심하게 혼냈다. 그
“그래.”브람이 대답한 후 여이현은 바로 돌아섰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브람은 이번이 여이현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여이현이 받지 않으려 해도 억지로 카드를 손에 쥐여주었다.“모두 화국 돈으로 바꿔뒀다. 너에게 주는 게 아니고 내 손자에게 주는 거다. 내가 그 아이를 너무 엄하게 대했다.”그래서인지 별이는 이렇게 오랜 시간 떠나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별이에게도 필요 없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모두 별이를 위해 모아둔 거니까!”브람이 엄숙하게 말했다.그러고는 문득 온지유를 떠올렸다.“지유와 잠시 단둘이 얘기할 수 있을까? 걱정 마. 상황이 이렇고 사람도 많은데 내가 해코지 할리 있겠느냐.”여이현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온지유를 브람 앞에 불러 세웠다.온지유는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아버님.”브람은 여이현의 친아버지이자 별이의 친할아버지였다. 온지유는 브람을 아버님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다.브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널 죽이려 했던 나를 그리 불러주는 게냐?”브람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온지유는 브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누구에게나 사랑받기를 요구할 수는 없죠. 아버님이 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아버님과 이현 씨의 혈연은 끊을 수 없는걸요.”그녀는 여이현의 아내로서 당연히 브람을 아버님이라 불러야 했다.브람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지유야, 솔직히 내가 이현이를 처음 찾았을 때 너희가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이현이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라면 어떤 약속이나 의식도 없이 지나칠 수는 없으니까.”“그때 나는 이현이가 너와 이혼하고 S국에 와서 새로운 결혼을 하길 바랐어. 하지만 이현이는 원하지 않았어. 나중에 그 애가 너에게 한 모든 것을 보며 너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지. 지유야, 난 이현이에게 참 못된 짓을 했다. 이제 너희가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여이현은 말이 없었다.침묵은 곧 긍정이다. 온지유는 화가 나서 바로 여이현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세게 내리쳤다.“다시 한번 그딴 생각 하기만 해봐, 내가 직접 죽여버릴 테니까!”온지유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5년이다. 그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아이를 생각하며 버텨왔다.여이현은 살아 있으면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럼 그 뒤에는?여이현은 한마디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걸 떠올릴 때마다 온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이 사람은 또 같은 짓을 반복하려 하는 게 아닌가!신무열은 덤덤하게 여이현을 한번 흘겨보았다.“맞아도 싸죠. 저의 하나 뿐인 동생이 그 몇 년간 어떻게 지내왔는데 또 그 고통을 다시 겪게 하려니 말이에요. 이현 씨, 남자라면 정정당당하게 이 모든 걸 해결하고 돌아오세요.”“잘 알고 있습니다.”여이현은 자신이 완벽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온지유와 약속한 것들을 꼭 지켜야만 했다.신무열은 시선을 거뒀다. 할 말은 이미 다 했다. 남은 건 여이현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다.그렇게 여이현과 온지유는 함께 S국으로 떠났다.브람은 여이현이 홀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온지유가 함께 돌아온 것을 본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온지유측에는 사람이 여럿 딸려있었고 화국의 군대도 동행했다.여러세력의 동원하에 내란은 작은 파도에 불과했고, 신속히 가라앉았다.가장 주요한 병력은 화국의 군대였다.여이현은 직접적으로 태도를 밝혔다.“다음에 또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될수록 내부에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화국인이고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여이현은 브람이 자신의 친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온지유처럼 받아들이지 못할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여이현은 어릴 적부터 화국에서 자랐고 몸에 밴 습관도 모두 화국의 것이었다. S국의 사람들에게 있어 여이현은 밖에서 온 타국인이었다.그런 신분으로 어떻게 이 나라를 통치
그 속에는 나라를 향한 것도, 브람을 향한 것도 있었다.브람이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갚아야 했다.온지유는 이 상황에 대한 억울함과 세상의 불공평함에 화가 났다. 거기다 여이현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속이 무너져 내렸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이현 씨가 짊어진 책임이 크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당신 곁에 있고 싶어. 제발 나도 데려가 줘.”“절대 발목 잡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기자로서 보도를 낼게. 우리는 부부고 아이도 있잖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해결해 나가자.”여이현은 온지유의 각오를 느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온지유의 얼굴도.여이현은 결국 마음이 녹아내렸다.그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가볍게 키스했다.“그래, 데려갈게. 내 곁에 있어 줘. 무슨 일이 일어나든 꼭 지켜줄 테니까.”자신의 목숨을 내주더라도 온지유만은 지키고 말 테다.S국으로 향하기로 결정했으니 신무열에게도 한마디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신무열은 온지유가 S국으로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이현 씨는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너는 따라갈 필요 없잖아.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별이는 어쩌려고.”여이현은 휴가를 즐기러 외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다. 지금의 S국은 바뀌기 전의 Y국과 같은 상황이었다. Y국에는 신무열이 온지유 손목의 푸른 구슬을 알아봐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S국에는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다.여이현의 친아버지인 브람조차 온지유를 좋게 보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만일 돌아가서 그들이 쳐둔 덫에 걸리기라도 하면?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여이현 혼자서라면 탈출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온지유를 데려가는 이상 그에게는 짐이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별이는 아버지가 봐주고 계시잖아요. 난...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난 무슨 일이 있든 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