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 잠시 정신을 잃었던 서율이 깨어났다.아랫배에서 격렬한 고통이 밀려왔고, 마치 삶의 중요한 무언가가 사라진 듯한 공허함이 가슴을 짓눌렀다.피 냄새가 진동했고, 서율의 몸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제야 서율은 상황을 깨달았고다. 커다란 불안과 공포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아기... 내 아기...” 서율은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힘겹게 손을 뻗어 옆에 떨어진 핸드폰을 집어 떨리는 손으로 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길고도 지루한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그러나 서율이 말도 꺼내기 전, 핸드폰 너머로 들려온 건 한 여자의 요염한 목소리였다. [도혁아, 더 이상 못 참겠어... 나 정말 못 견디겠어...] 서율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가슴을 찢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고, 그 여자의 숨소리는 저주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서율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 눈이 따가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고통이 몸에서 오는 것인지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점점 눈앞이 흐려지더니, 서율은 다시 의식을 잃었다....“환자 대량 출혈 상태야. 바로 수혈 필요해. 어서 혈액준비해!” “이 환자 RH-O형, 희귀 혈액형입니다. 방금 서지민 씨가 수혈용으로 가져가서 병원에 남은 혈액이 거의 없습니다. 남은 혈액으로는 이 환자 못 살립니다.” “가져갔다고? 이 환자 도착했을 때, 미리 혈액 신청하라고 했잖아! 전부 넘긴 거야?” “우리 병원은 변도혁 대표님 소유고, 서지민 씨는 변 대표님의 연인으로 유명하잖아요. 누가 그걸 막을 수 있겠어요?”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환자의 가족에게 연락해서 헌혈할 사람이 있는지 물어봐..” “이분의 핸드폰에 단 세 명의 연락처만 있어요. 그중에 성이 ‘문’인 사람은 없습니다.” “일단 그 세 명에게 전화해 봐.”...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서율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천천히 눈이
지민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 아닐까?”도혁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더 깊이 찌푸렸다.“문서율, 날 따라온 거야?” 이전 같았으면 서율은 서둘러 변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지민이 돌아온 이후로 이런 일은 수없이 반복되었고 서율은 이제 지쳐 있었다. 아이를 잃고,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것이 득인지 실인지 모르겠는 마음이었다.서율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변도혁, 우리 이혼하자.” 도혁은 순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뭐라고 했어?” 서율은 그와 눈을 마주치며 또렷하게 다시 말했다. “이혼하자고.” 도혁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우며 냉소가 흘러나왔다. “다른 수가 안 통하니까 이제는 이혼으로 장난을 치는 거야? 문서율, 난 네 장난에 시간 낭비할 여유 없어.” 옆에서 지민도 비웃는 듯 서율을 바라보았다. 지민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서율 씨, 밀당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여자가 쉽게 이혼 얘기를 꺼내는 건 현명하지 않아요. 차라리 더 지혜롭게 행동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도혁 역시 그녀의 말에 동의한 듯 서늘하게 말했다. “문서율,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 끈질기게 매달리는 여자는 질색이니까.” 지민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도혁아, 아마 서율 씨가 네 관심을 끌고 싶어서 그랬던 거겠지.” 서율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정말 이혼을 원하는지 아닌지, 곧 알게 되겠지.” 그녀는 두 사람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너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내가 물러나 주겠다는데 왜 기뻐하지 않는 거지?” 도혁은 여전히 그녀가 이혼을 미끼로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서늘한 눈빛으로 차갑게 말했다. “문서율, 어떤 수를 쓰든 소용없어. 네가 더 싫어질 뿐이니까.” 서율은 그런 도혁을 보며
지옥순은 깜짝 놀라 말문이 막혔다. 서율이 감히 자신에게 이렇게 대들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지옥순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서율을 가리키며 또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문서율, 난 네 시할머니다! 어떻게 감히 나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서율은 미소 지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어르신, 당신은 변도혁의 할머니일 뿐이에요. 제 할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지옥순이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지민이 나서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서율에게 말했다. “서율 씨, 어르신께 그렇게 말씀드리면 안 되죠.” 서율은 지민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답했다. “그게 지민 씨와 상관있나요? 지민 씨 남의 일에 너무 간섭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동안 고분고분하던 서율의 반격에 지옥순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건방지게 굴지 말거라! 지민이만큼도 못하면서 그새 내가 가르쳐 준 것들을 다 잊은 게야? 당장 무릎 꿇고 사과해!” 그러나 서율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정말 죄송하네요, 마침 그 규칙들을 다 잊어버렸거든요. 지민 씨가 시범을 보여주면 어떨까요? 어르신이 좋아하시는 것처럼 아주 우아하게 무릎을 꿇겠죠?” “너...!” 지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지옥순은 충격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숨이 막혀 기절할 듯 보였다. 지민은 서둘러 약을 꺼내 지옥순에게 먹이며 진정시켰다. 약을 먹고 나서야 지옥순의 얼굴이 조금 나아졌다. 그때 도혁이 다가왔다.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검은색 맞춤 정장을 입은 모습은 우아하고 당당했다. “도혁아!” 지민은 눈을 반짝이며 도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억울한 일을 당한 듯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도혁아, 서율 씨가 여기까지 따라온 것도 모자라 방금 할머니를 화나게 만들었어. 할머니가 심장병이 도졌는데 내가 서둘러 약을 드리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어...” 지민은 울먹이며 서율을 가리켰다. “문서율?” 도혁은 눈썹을 찡그리며 서율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서율이 고개를 돌리자, 잘생기고 온화한 모습을 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지성 오빠?”“저 멀리서 봤을 때, 네가 맞는 것 같아서 혹시나 했는데... 진짜 너였구나.”고지성은 서율 곁으로 다가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난 오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결혼 전, 지성은 서율에게 고백하며 도혁과 결혼하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그러나 서율은 도혁과의 결혼만을 생각하며 망설임 없이 지성을 거절했고, 그 후로 두 사람은 연락을 끊었다.그 후 지성은 해외로 떠났고, 서율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말이다.최근에 서율은 경남을 통해 지성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자신이 도혁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중에는 자신이 진심으로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 지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를 다시 마주한 지금, 서율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옆에 있던 관리인은 지성을 보자마자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성 도련님.”지성은 고개를 돌려 관리인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야?”관리인은 낮은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방금 이분이 초대장 없이 연회에 들어왔다는 신고가 있었습니다.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저희는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지민과 지옥순은 지성과 서율이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놀란 눈치였다. 지민은 곧바로 의심하며 말했다.“지성 도련님께서 문서율 같은 여자를 아신다니,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 건 아닌가요?”지성은 지민을 흘깃 쳐다본 뒤 차갑게 말했다.“내가 내 친구도 못 알아볼 것 같나요? 그리고 '그런 여자'라니, 도대체 뭘 말하는 거죠?”지옥순은 경멸스럽게 덧붙였다.“당연히 출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지! 온종일 일도 안 하고, 우리 손자의 돈만 펑펑 쓰며 옷만 화려하게 입고 다니는 그런 여자!”지성은 무심한 목소리로 지옥순을 향해 말했다.“어르신께서 연세가 많으셔서 그런지, 가짜와 진짜를 잘 구분하지 못하시는
도혁은 마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아내를 지켜보는 듯했다. “난 그런 짓을 한 적 없는데 왜 인정해야 하지?” 서율은 도혁이가 외도를 해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달았다. 심지어 현장에서 들켜도 다른 핑계를 대며 빠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서율은 더 이상 도혁과 말 섞고 싶지 않았기에 가방에서 이혼 서류를 꺼내 던지듯 내밀었다. “이혼 합의서야. 보고 문제 없으면 사인해.” 서율은 건강을 회복한 후 계속 집에 있었고, 내일 아파트로 돌아가 짐을 정리할 계획이었다. 그에 맞춰 미리 이혼 서류를 준비해둔 것이었다. 지금 우연히 도혁을 만났으니, 이참에 직접 서류를 건네는 것이 나았다. 서율이 방금 지옥순에게 대든 것과 이혼을 들먹이며 도혁을 몰아붙이는 태도는 이미 도혁의 심기를 건드렸다. “문서율, 적당히 해.” 도혁은 서류를 보았다. ‘이혼 서류’라는 큼직한 글자가 가로등 불빛에 비춰져 뚜렷하게 보였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서류를 훑어보았다. 마지막 페이지에 서율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하자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미 이혼 서류를 준비해두었다니. 이 또한 계획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문서율...” 도혁이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서율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내일 아침 9시에 법원에서 보자. 의심스러우면 거기서 확인해.” 도혁의 눈동자가 더욱 어두워지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온갖 수단을 써서 나와 결혼하려 매달리더니, 이제 와서 네 마음대로 이혼을 하겠다고? 날 뭘로 보고 있는 거야?” 도혁의 반응에 서율은 순간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변도혁, 어차피 넌 나를 좋아하지 않잖아?” 도혁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이혼하는 게 낫지 않아? 어차피 네 첫사랑도 돌아왔으니 둘이 만나면 되잖아.” 서율은 비웃듯이 말했다. “아니면 몰래 즐기는 편이 더 좋았던 거야?” 도혁은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서율의 귀에 얼굴을 가
도혁의 자비를 베푸는 듯한 거만한 태도에 서율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변도혁, 이혼은... 반드시 할 거야.” 서율은 차가운 말과 함께 더 이상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떠났다....서율은 후원을 한 바퀴 돌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때 도혁과 지옥순은 연회장을 떴다. 아마도 창피함을 느꼈거나, 아니면 지민을 혼자 두기 싫었을 것이다. 한편, 경남 역시 연회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서율은 그를 발견하고 빠르게 다가가 물었다. “오빠, 아까 어디 갔었어?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경남은 가볍게 웃으며 차분히 대답했다. “고 어르신과 잠깐 이야기 나누고 왔어.” 경남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묻어났고, 서율을 바라보는 눈빛이 유난히 따뜻했다. “그리고 방금 있었던 일도 들었어. 지성이가 널 도와줬다며.” 서율은 뭔가를 눈치챈 듯 물었다. “오빠, 일부러 자리를 비운 거야?” 경남은 웃으며 말했다. “영웅이 미인을 구하는 장면을 지성에게 양보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어? 그렇지 않으면 변도혁은 내 동생이 인기가 없다고 생각할 거잖아.” 서율은 그런 경남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빠, 언제 이렇게 유치해졌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다시피, 난 지성 오빠에게 남녀 간의 감정은 없어. 그저 오빠처럼 생각해.” 경남은 그녀의 말을 듣고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는 나 하나로 충분하지 않아? 오빠가 그렇게 많을 필요는 없잖아?” 서율이가 계속 말하려 했지만, 경남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그건 그렇고, 네가 3년 동안 한가롭게 지내는 동안 회사 일들을 모두 나한테 떠넘겼으니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어?” 서율은 말문이 막혀 그저 경남을 쳐다보기만 했다. 경남은 서율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서율아, 네가 변도혁과 결혼한 뒤에 집을 나갔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널 걱정하셔. 부모님이 너와 변도혁의 불화 소
서율의 옆에 지민과 한 젊고 거만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여자는 단정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표정은 날카롭고 신랄했다. 그녀는 오만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그 여자는 다름 아닌 지민의 절친, 정효연이었다.정씨 가문과 변씨 가문은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고, 지민이가 해외에 있는 동안 효연은 자주 지옥순을 찾아가 서율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았다. 이로 인해 지옥순은 서율에게 더 엄격하게 굴었고, 서율이 겪었던 많은 고난의 절반은 효연의 부추김 덕분이었다.효연은 곧바로 점원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명령을 내렸다. “이봐, 뭐하고 있는 거야? 어서 팔찌를 세척하라고 했잖아!”점원은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이 팔찌는 이 손님께서 먼저 보셨습니다.” 효연은 비웃음을 띠며 대꾸했다. “아직 돈을 낸 건 아니잖아?” 점원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만, 이 손님도 아직 구매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진 않았습니다.” 효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남자한테서 돈을 받고 사는 기생충이 이렇게 비싼 팔찌를 살 수 있을까? 말도 안 돼!” 이때 서율은 침착하게 말했다. “이 팔찌 제가 살게요. 포장해 주세요.” 점원의 얼굴에는 안도와 함께 미소가 피어올랐다. “네, 알겠습니다.”효연은 서율이가 자신과 경쟁하려는 모습을 보고 얼굴이 붉어지며 소리쳤다. “문서율! 도혁 오빠 돈으로 이렇게 비싼 물건을 사다니, 정말 뻔뻔하구나! 어떻게 남자 돈을 쓰면서도 얼굴에 철판을 깔 수 있지?” 효연은 가게 안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며 외쳤다. “여기 좀 보세요! 이 여자는 몇 년 동안 한량처럼 놀면서 남자 돈만 펑펑 쓰고 있거든요!”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과 점원들은 모두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민은 효연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리는 척했다. “효연아, 서율 씨가 마음에 들어한다면 그냥 양보하자.” 효연은 서율을 경멸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 없이 네가 이걸 살 수 있겠어?” 서율
정효연은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도혁 오빠!” 효연은 서율을 가리키며 서둘러 고자질을 시작했다. “문서율이 오늘 약을 잘못 먹은 것 같아요! 지민이가 마음에 들어 한 걸 일부러 빼앗으려고 해요! 그리고 SH그룹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려서 사람들이 여기서 물건을 사지 못하게 한다니까요!” 효연의 거짓말하는 실력은 정말 탁월했다. 그러나 도혁은 서율에게 묻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문서율, 지민이에게 팔찌를 돌려줘.” 효연은 매우 기뻤고, 지민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돌려주라니? 참으로 기묘한 말이었다. 하지만 서율은 차분하게 대응했다. “변 대표님, 어떻게 된 일인지 먼저 확인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옳지 않겠어요?” 도혁의 표정은 여전히 냉정했다.“지민이 돌아온 후 너는 계속 그녀와 부딪혔잖아. 네가 억울하다고 해도 내가 본 건 늘 네가 지민이를 괴롭히는 장면이었어. 더 알아볼 필요가 있을까?”처음엔 도혁이 서율과 지민의 다툼을 확인하기 위해 감시 카메라를 돌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늘 서율이 가해자로 보였다.시간이 흐르며 도혁은 서율을 믿지 않게 됐다.서율은 도혁의 냉정한 얼굴을 잠시 보다가, 미소 짓는 지민을 바라보았다.“좋아요. 지민 씨가 원한다면 드려야죠.”도혁의 표정이 누그러졌고, 지민은 더 깊은 미소를 지었다. 효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서율은 팔찌를 내밀며 말했다.“지민 씨, 받으세요.”지민은 주저 없이 손을 뻗었지만, 팔찌는 그녀의 손에 닿기 직전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쨍그랑!모두가 놀라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봤다. 지민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서율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지민 씨, 그렇게 원하던 팔찌를 왜 받지 못했어요?”지민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서율 씨, 일부러 그런 거죠!”“지민 씨가 제대로 받지 못한 건데 왜 저를 탓하시는 거죠?”서율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제가 부주의했다고 했는데, 왜
어머니로서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서율은 도혁의 ‘가식’이 정말로 불쾌했지만, 그가 사람을 달래는 데는 재주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서율도 문미정을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으니 말이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서율의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자.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네가 일이 있어 먼저 출근했다고 말씀드릴게.” 도혁은 외투를 벗던 중 고개를 들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뭐라고?” 서율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우리가 지금처럼 지내는 간 합당하지 않은 것 같아.” “왜 합당하지 않지?” “우리는 곧 이혼할 사이니까...” 서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혁이 차분히 말을 끊었다. “문서율,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서율은 차갑게 말했다. “곧 끝날 관계야.” “문서율.”도혁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가웠다. 그는 서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서둘러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지?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서율은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혁의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고지성, 네가 새로 만날 아니야?”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지만, 서율은 이내 웃음이 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네!” 서율은 차갑게 도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변도혁, 네가 더러운 짓을 했다고 해서 나도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너처럼 결혼 중에 불륜을 저지를 만큼 뻔뻔하지 않아.” 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율의 턱을 쥐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지성과는 언제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서율은 그의 손을 떨쳐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어.” 도혁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도혁은 옆에 있는 안전벨트를 꺼내 그녀에게 채워주었다. 서율은 잠시 얼어붙었다. 곧 도혁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안전벨트 매야지.” 이 광경을 지켜본 문미정은 도혁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율아, 조수석에 타더라도 안전벨트를 매야 한단다. 도혁이가 참 세심하구나.” 문미정이 없었다면, 서율은 아마 비웃었을 것이다. ‘하긴 세심하긴 해. 다른 여자의 물건이 당당하게 조수석에 잡을 정도로.’마치 지민이 그의 아내인 것처럼. 서율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미정은 도혁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도혁아, 예전에 너한테 첫사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이 최근에 돌아왔다며?” 문미정의 말에 서율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도혁이가 지민과 함께 어울린다는 건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모두 도혁이가 지민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문미정이 이 일을 알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반면 도혁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인정하며 말했다. “네, 지금 HS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문미정이 살짝 톤을 올리며 물었다. “그 아가씨가 어쩌다 HS그룹에서 일하게 된 거지?” “지민은 원래 무용을 전공했는데, 저를 구하다 다리를 다쳐 예전처럼 무용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뒤, 제가 HS그룹 내의 가벼운 일을 맡겼습니다. 지민이가 제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갚아야 마땅합니다.” 도혁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문미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율 역시 그의 말에 딱히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문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도혁아, S시에 네가 그 아가씨와 만난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직 옛 정을 못 잊은 건 아닌지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란다...” 도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와 지민은 이미 끝난 관계입니다. 제가 서율과 결혼한 이
서율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의아하게 물었다. “나에 대해 묻고 있었다고?” 도혁은 미묘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고지성 씨만큼 잘 알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고지성 씨께 당신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었어.” 지성과 서율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이니, 그들의 오랜 정은 부부 3년의 세월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혁의 말을 듣자 문미정은 도혁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지성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지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문미정은 서둘러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피곤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지성은 문미정의 앞에서 무언가 더 보여줄 수 없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차에 타려는 순간, 서율은 문미정과 함께 뒷좌석에 앉으려고 했다. 그때 도혁이 갑자기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서율은 그를 흘깃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연기 잘하네.’ 결혼한 3년 동안, 도혁은 한 번도 서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조수석에 앉히지도 않았다. 한 번은 도혁과 함께 지옥순의 생신잔치에 참석할 때,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려 하자, 도혁은 차갑게 말했다. “뒷좌석에 타.” 그 이후로, 서율은 도혁과 함께 외출할 때 조수석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언제나 뒷좌석에 앉았다. 이제 와서, 서율은 조수석에 앉는 것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벌어진 일로 인해 문미정의 마음은 점차 도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까도 문미정은 서율에게 도혁과 다투지 말라고 계속해서 타일렀다. 문미정이 있는 자리에서 도혁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준 이상, 서율은 그의 체면을 깎지 않기 위해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안전벨트를 매려던 서율의 눈에 문 앞에 붙은 ‘전용 좌석’이라는 스티커가 들어왔다. 순간 멍하니
문미정은 서율을 쳐다보며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혁을 데리고 온 건 사실 네가 아닌 도혁을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네가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강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우리한테 잘 말하지 않잖니. 그래서 네가 도혁과의 관계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지 의심스러웠거든.” “지성이는 참 괜찮은 아이야. 그동안 여자친구도 사귀지 않고, 부모님께서 아무리 결혼하라고 재촉해도 따르지 않았대. 그건 아마 아직 네가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거야.” “도혁이가 너에게 진심이라면, 지성의 마음을 일찍 정리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서율은 잠시 침묵했다. 서율도 지난번 지성과의 만남에서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율은 그를 오빠처럼만 여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도혁과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혁과 이혼한다고 해도, 지성과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성의 마음을 빨리 정리해주는 게 맞는 일이기도 했다. ... 지성은 계산을 마치자마자 뒤에 서 있는 도혁을 발견했다. 지성은 도혁을 보자마자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건 서율과 문미정 앞에서 보여준 따뜻한 모습과는 달랐다. “변도혁 씨, 아주머니와 서율이랑 함께 있지 않고 왜 여기 와 있어요?” 도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지난번에 고지성 씨가 서율을 대접했다는 얘길 듣고, 이번에는 고지성 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저더러 계산하라고 하셨어요.” 도혁의 말에 담긴 도발을 느낀 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변도혁 씨, 아무리 연기가 완벽해도 결국엔 연기일 뿐이죠. 아주머니를 속이는 건 몰라도, 나한테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가식적이지 않나요?” 지성의 비꼼에도 불구하고, 도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연기라도 고지성 씨는 어머님을 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저는 부를 수
서율은 거짓말이 들통날 상황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도혁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순간 당황하여 무의식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으며 열 손가락을 깍지 끼듯 맞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멍하니 몇 초간 움직이지 못했다. 도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메뉴를 주문했다. 서율은 도혁의 손짓에 온 신경이 쏠려 그가 무엇을 주문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더 세게 쥐었고 서율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도혁은 자신이 이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더욱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서율은 당장이라도 화를 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있었고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성은 서율의 변화를 눈치채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율아,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더운 거야? 에어컨 온도를 좀 더 낮춰줄까?” 서율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 온도가 딱 좋아.” 지성은 그녀가 거절하자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도혁도 서율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낀 듯, 메뉴를 다 고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서율은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물컵을 들어 도혁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성과 문미정은 그들의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듯, 최근의 일상이나 업무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왔다. 서율은 그제야 자신이 아까 도혁의 손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메뉴 주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율의 머릿속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는 이제 문미정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웨이터가 가져온 음식을 본 순간, 서율은 할 말을
지성은 문미정과 서율을 보자마자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했다. “아주머니, 서율아.” 곧이어 그의 시선이 함께 온 도혁에게로 향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듯, 지성은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변도혁 씨, 반갑습니다.” 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지성 씨, 오랜 만이네요.” 지난번 만남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서율은 지성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지성과 도혁 사이에는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율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마주치자 머리가 아팠다. 서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미 결혼했는데, 엄마가 혹시 아직도 지성 오빠와 나를 이어주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왜 변도혁까지 데리고 온 걸까?’서율은 무심코 문미정을 흘끗 쳐다보았다. 문미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문미정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지성이가 예약한 방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각각 자리에 앉았다. 문미정은 먼저 지성의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 물었고, 지성은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이때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와 주문을 부탁했다. 문미정은 메뉴판을 받아 들고 도혁에게 건넸다. “엄마랑 서율이 입맛이 비슷하니까, 서율이가 좋아할 만한 요리를 몇 가지 골라주면 돼.” 서율은 단번에 문미정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문미정은 그들이 연기한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쉽사리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관계를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도혁이가 서율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른다면, 그들이 친밀한 사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서율은 지난번 식사 때 도혁이가 자신의 취향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를 것이라 생각
서율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더 이상 도혁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도혁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둘은 묵묵히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LJ그룹 건물에 도착하자, 서율은 간단히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향했다. ... 사무실에 도착한 서율은 바로 육경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S시에 온 거 알고 있었어?” 핸드폰 너머에서 경남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나도 어제 알았어. 엄마가 너 혼자 지내는 게 많이 걱정되셨나 봐. 네가 혹시 힘들어하고 있진 않은지 보러 오신 거래.] 서율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오빠, 나랑 변도혁이 곧 이혼할 거라는 걸 엄마에게 말해야 할까?” 경남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이혼을 결심했다면, 이혼 후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율은 그의 말에서 뭔가를 느끼고 다시 물었다. “오빠 말은, 지금 이혼한다고 하면 엄마 아빠가 반대할 거라는 뜻이야?” 경남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웃음이 담겨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렇게 완고한 분들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이유를 물어보시겠지. 단순히 성격 차이라고 말하고 넘기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야.][네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는 결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며 널 혼낼 거야. 반대로 도혁의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잖아.][게다가 변도혁이 이혼에 동의할지도 의문이야. 내가 보기엔 네 남편,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야. 변도혁이 진지하게 나오면 너 혼자 상대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경남의 말에 서율은 아침에 도혁이 자신을 유혹하려던 장면이 떠오르며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서율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 엄마 보러 안 올 거야?” [이미 엄마랑 통화했어. 변도혁은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아서, 그 문제로 싸울까 봐 당분간 나서지 말자고 하시더라.] S시에 오기 전까지 경남은 부모와 함께
서율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서율은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표정은 완벽하게 차분함을 유지했다.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데려다 줄게.” “괜찮아.”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 “혼자 가도 돼.” “율아, 도혁이가 너를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해.” 문미정은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부는 서로 미워할 시간이 없단다.” 문미정은 서율이 도혁에게 서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 사람이 다투었다고 오해한 듯했다. 서율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문미정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차마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려는 순간, 도혁이 서율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표정이 굳어졌다. “변도혁, 지금 뭐 하는 거야?” 도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해야 어머니가 우리가 잘 지낸다고 믿으실 거야.” 그 말이 맞긴 했지만, 서율은 방금 일어난 일 때문인지 도혁에게 더 거부감이 들었다. 서율은 그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문미정이 뒤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서율은 더 이상 무리하게 저항할 수 없었기에 결국 도혁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왔다. 서율은 도혁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혁은 여태껏 한 번도 서율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는 것은 서율에게는 처음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스킨십이었기에,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문미정은 현관까지 나와 그들이 손을 맞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차에 타자마자, 서율은 도혁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변도혁, 약속을 어겼네.” 도혁은 살짝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서율을 보았다. “뭐?” 도혁이 모르는 척하자 서율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어젯밤에 나랑 약속했잖아. 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똑똑.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아, 엄마가 아침 준비 다 했으니 얼른 내려와서 아침 먹어.” 서율은 문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며 황급히 옷의 단추를 채웠다.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잡아주려 했다. 그러나 서율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이 방에선 단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율이 답을 하지 않자, 문 밖에 있던 문미정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율아, 일어났니? 빨리 안 일어나면 회사 늦겠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방금 일어났어요. 세수하고 금방 내려갈게요.” 서율의 모습을 본 문미정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서율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고,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문미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서율보다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너 출근 늦을까 봐 깨우러 왔지 뭐야... 어, 어서 준비해. 엄마는 먼저 내려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서율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혁은 이미 옷을 다 입고 평소처럼 평온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혁은 서율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씻고 와. 난 먼저 내려가 있을게.” 서율은 그와 대화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도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더니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서율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확인했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 잘못 잠근 셔츠 단추,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문미정이 자신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서율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만 감으면 도혁과의 아찔한 순간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다. 만약 문미정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