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궁!허지호의 말에 사람들은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가장 당황한 건 바로 박대한이었다.“대표님도 오셨다고요?”뭐지? 난 허지호만 온다고 들었는데 말이야.게다가 신포 인터네셔널의 대표는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 그 자체, 최근 대부분 업무는 부대표인 허지호가 대신 진행하고 있었다.신포 인터네셔널 부대표 허지호는 어느 정도 얼굴을 알린 인물, 허지호의 말에 모두의 신경은 미스테리한 대표의 정체에게로 쏠렸다.평범한 파티인 줄 알았는데 글로벌 대기업의 총수가 직접 방문하다니.사람들은 긴장감과 설레임으로 술렁거렸다.“정말 대표가 직접 온 거야?”“설마 국내 시장을 다음 타깃으로 잡은 건가?”“회사에도 일년에 몇 번 안 오는 사람이 왜 여기까지...”불안함, 설레임, 기대감, 초조함...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보이는 사람들과 달리 허지호는 덤덤하게 박대한의 질문에 대답했다.“네. 대표님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태한그룹은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 아닙니까? 그런 기업의 지분을 20%나 가지게 되었으니 저희 신포 인터네셔널에게도 큰 경사죠. 그리고 앞으로 신포 인터네셔널과 태한그룹이 한 가족이 되는 자리인데 당연히 오셔야죠.”묘한 표정을 짓던 박대한이 왠지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그럼 얼른 모시죠?”싱긋 미소를 짓던 허지호가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두 손으로 박수혁을 가리켰다.“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신포 인터네셔녈 대표 박수혁 대표님이십니다.”허지호의 말에 파티장은 죽음과 같은 적막에 잠겼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생생히 들릴 정도의 고요함이 끝나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폭발하듯 울려 퍼졌다.“신포 인터네셔널이 박 대표 거였다고?”“허 대표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그럼 이게 어떻게 되는 거죠? 박 회장님이 지분을 신포 인터네셔널에 넘기셨으니 모든 지분이 박수혁 대표 소유가 되는 겁니까?”“그럴 거면 그냥 직접 박수혁 대표한테 넘기시지 왜 이렇게 복잡하게...”한편 박대한은 사람들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아, 제 말이 이해하기 어려우셨나요? 다시 정식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희 인터네셔널 대표 박수혁 대표님이십니다. 뜨거운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허지호의 말에 가장 앞에 있던 이한석을 선두로 파티장에 뜨거운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박수혁의 뛰어난 사업수완과 막강한 세력을 향한 경외의 미소였다. 태한그룹을 넘어 신포 인터네셔널이라니, 국내가 아닌 일찍이 해외 시장으로 발돋움한 박수혁에게 질투, 부러움을 넘어 존경과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차가운 얼굴로 사람들을 훑어보던 박수혁은 소은정과 눈을 마주치고 흠칫하다 미소를 지었다.“여러분, 신포 인터네셔널과 태한그룹의 협력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할아버지와 저희 회사 주주들이 함께 의논하여 내린 결정을 저도 존중하는 바입니다. 저는 오늘 태한그룹 대표이자 신포 인터네셔널 대표로서 앞으로 두 그룹이 협력을 통해 이루어낼 찬란한 성과에 대해 기대감을 표하는 바입니다.”박수혁의 말이 끝나자 더 세찬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역시나 박수혁은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박수혁의 말로 인해 사람들은 이 사태를 박대한이 일방적으로 지분을 처분한 것이 아니라 태한그룹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위해 개혁을 벌인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제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하지만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도 박대한만큼은 웃지 못했다.공식적인 발표는 끝나고 사람들은 편하게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역시나 신포 인터네셔널을 노린 사람들로 허지호의 주위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북적이기 시작했다.한편, 무대에 남은 박수혁과 박대한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이때 무대 위로 올라온 이한석이 박대한과 박수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 계약서 내용 전부 확인했습니다.”박대한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함정이 오히려 박수혁을 도운 꼴이 되어버리다니.축구경기로 치면 자책골이나 마찬가지였다.박대한은 충격과 분노로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박대한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박수혁을 가리켰다.“
박대한이 부들거리며 이한석을 노려보았다.“이한석... 네가 신포 인터네셔널의 허지호를 소개해 줬지. 내가 복수할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어차피 국내에는 온통 네 사람들뿐이니 물론 해외 자본 회사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이... 이 모든 게 네 계획이었어!”흥분한 박대한과 달리 박수혁 옆에 선 이한석이 차분하게 대답했다.“어르신, 그 누구도 어르신께 지분을 양도하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상황에 만족하고 지분을 가지고 계셨더라면 앞으로 태한그룹에서 나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겁니다. 박씨 가문의 다른 주주분들도 마찬가지였겠죠. 하지만 어르신께서는 대표님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런 무리수를 두셨죠. 태한그룹의 지분이 다른 회사로 넘어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닥쳐! 어디서 감히 훈수질이야!”박대한은 모든 화를 이한석에게 쏟아냈다.박수혁을 배신한 척 다가와서는 그에게 함정을 판 이한석이 괘씸하고 괘씸했다.박대한의 호통에 이한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대신 박수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어린 나이에 저한테 회사를 맡기셨을 때 회사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었는지 아십니까? 할아버지가 친구라고, 친척이라고 두둔해 줬던 사람들이 회사를 속부터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멀쩡한 계약서, 장부 기록 하나 찾기 힘들었죠. 제가 정말 할아버지 명성에만 힘입어서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세요?”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박수혁의 말투에 박대한의 두 눈을 번뜩였다.“이런 배은망덕한 자식!”“윗세대들의 싸질러 놓은 난장판 하나하나 다 수습하면서도 불평불만 하나 하지 않았던 건 할아버지가 제 할아버지였고 절 믿고 회사를 맡겨주신 할아버지께 보답하고 싶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 그룹으로 절 평생 꼭두각시로 사용하고 싶으셨나요? 지금이라도 그때의 장부들을 다시 들춰내 볼까요? 제가 이어받은 태한그룹이 사실은 반쯤 죽어가고 있던 고목이었다는 걸 세상 사람들한테 다 알려 봐요?”박수혁이
단호하지만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뒷모습...참, 여전하다니까.그리고 소은정은 고개를 돌려 박대한을 바라보았다.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정정한 모습,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날카로운 감각은 많이 무뎌진 박대한과 박수혁의 싸움은 처음부터 계란과 바위의 싸움이었을지도 모른다.이때 전동하가 다가와 소은정과 잔을 부딪혔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오늘 굉장히 재밌네요. 박수혁 대표의 완벽한 승리였어요.”찬란하게 빛나는 화려한 파티장과 어울리지 않는 박수혁의 쓸쓸한 뒷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소은정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러게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쉽게 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럴 줄은 몰랐지...“박수혁 대표를 동정하는 건가요?”전동하의 뜬금없는 질문에 흠칫하던 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전동하의 표정은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미묘했다.“비록 회사도 지켜냈고 잃은 것 하나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박수혁은 더 이상 가족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을 겁니다. 사실상 집안에서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불쌍하게 생각되나요?”박수혁을 향한 감정이라면 그게 연민이라도 싫어.“글쎄요. 손주에게 매정하게 칼을 들이댄 박 회장의 완벽한 패배를 보고 있자니 통쾌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박수혁 대표와 같은 편이라는 건 아니에요.”동정이란 약자에게만 어울리는 단어.박수혁과 약자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걸?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전동하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피어올랐다.“다행이네요. 동정한다고 했으면 정말 질투할 뻔했어요.”말을 마친 전동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소은정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의 옆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가끔씩 전동하가 적극적으로 다가올 때마다 부담스럽고 왠지 모르게 숨이 막혔다.어차피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다 끝난 듯하여 소은정 역시 파티장을 나서려던 그때 허지호가 와인잔을 든 채 다가왔다.“내가 잘못 봤는 줄 알았는데. 맞구나, 앤!”앤은 허지호가 직접 지어준 영어이
허지호는 생각보다 냉담한 소은정의 태도에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감정적으로 다가가기 힘들다면 새로운 미끼를 던질 수밖에. 게다가 국내에서 신포 인터네셔널과 협력하고 싶은 회사는 셀 수조차 없으니까.허지호의 말에 소은정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글쎄요. 저희가 함께 일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전동하는 두 사람은 그저 얼굴만 아는 사이라는 걸 눈치챘다. 게다가 소은정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까지 걸리자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슬쩍 올렸다.“같이 영화 보러 가기로 했잖아요. 시간 다 된 것 같은데...”이에 소은정도 장단을 맞춰주었다.“네, 가요.”그렇게 소은정, 전동하 두 사람은 허지호만 남겨둔 채 여유로운 모습으로 사라졌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허지호는 몰래 욕설을 내뱉은 뒤 들고 있던 와인을 전부 마셔버렸다.방금 전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던 이한석이 한발 다가갔다.“허 대표님, 소은정 씨와 아는 사이십니까?”이한석은 박수혁의 측근이니 허지호는 별 의심 없이 대답했다.“알다 마다요. 아주 잘 아는 사이죠.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죠? 설마 태한그룹에서 일하는 겁니까?”허지호의 질문에 이한석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소은정 씨는 현재 SC그룹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박수혁 대표님의... 전 와이프시기도 하죠.”순간 허지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네?”앤과 나름 잘 알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한 기업의 대표이자 박수혁 대표와 결혼까지 했던 사이라니!충격 그 자체였다.허지호는 부랴부랴 손에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고 박수혁에게 달려갔다...한편, 전동하를 따라 밖으로 나온 소은정은 몰아치는 찬바람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기가 모공 하나하나를 침투하는 듯한 기분이었다.너무 춥잖아!얼른 차로 들어가야지 발걸음을 재촉하려던 그때 따뜻한 향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전동하가 소은정에게 코트를 버어준 것이었다.“잘 보일 수 있는 기회잖아요. 거절하진 말아줘요!”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전동하의
소은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전동하는 긴장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미안해요. 제 마음을 받아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그래도 나한테 기회는 주기로 했잖아요. 혹시... 후회하는 건 아니죠?”전동하의 질문에 소은정이 입술을 깨물었다. 왠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히터를 틀어 그런 것이라 소은정은 스스로를 설득했다.“아니에요.”빠르게 대답한 소은정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저랑 허지호 대표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궁금하지 않아요?”갑작스러운 질문에 전동하가 흠칫했다.“어떻게 아는 사이인데요?”하루빨리 이 애매한 분위기를 풀어버리고 싶어 소은정은 솔직하게 과거 있었던 일을 전부 말했다.“허지호도 몇 년 전에는 신포 그룹의 팀장에 불과했었죠. 유학시절 때 신포그룹에서 인턴으로 일했었고 그때 제 팀장이었어요.”소은정의 말에 전동하의 눈이 커다래졌다.너무 많은 정보량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SC그룹을 등에 지고 있는 소은정이 다른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했었다니.그리고 허지호가 단 몇 년만에 팀장에서 부대표로 승진까지 하다니.전동하는 방금 전 파티장에서의 대화를 다시 돌이켜 보았다.분명 허지호 대표는 은정 씨가 SC그룹 대표라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하지만 두 사람 그렇게 친해 보이진 않던데요?”전동하의 질문에 소은정이 코웃음을 쳤다.“허지호 대표 능력은 출중한데 권력욕이 너무 강해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스타일이랄까요? 인턴 때 파티에 참석할 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저희쪽 클라이언트가 억지로 저한테 술을 먹이려 했죠. 상사로서 자기 부하직원이 그런 꼴을 당하는데 허지호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말리긴커녕 오히려 그쪽에 붙어서 저에게 술을 따라주더라고요. 그런 사람과 친해질 수 있겠어요?”어쩐지... 그래서 허지호를 보는 눈빛이 차갑... 아니, 경멸에 가까웠던 거구나.입을 꾹 다물고 있던 전동하가 문득 물었다.“그래서요? 설마 그 술 다 마신 건 아니죠?”걱정스러운
어차피 시간 떼우기용이니 소은정도 딱히 개의치 않았다.시커먼 영화관으로 들어간 소은정이 주위를 더듬거리며 물었다.“몇 열이에요?”하지만 전동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때 광고 시작과 함께 영화관이 조금이나마 밝아지고 그제야 전동하는 두터운 티켓 뭉치를 꺼냈다.“아무거나 골라봐요.”뭐야? 전 좌석 티켓을 다 산 거야?소은정의 눈이 커다래지고 전동하가 해명을 이어갔다.“우리가 같이 영화를 보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다 사버렸어요.”소은정이 아무리 그의 마음을 거절해도 항상 그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는 전동하의 모습에 소은정은 가슴이 따뜻해졌다.소은정은 고개를 숙였다. 전에 그녀를 이용하는 게 아닐까 의심했던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저런 사람이 날 이용할 리가 없잖아.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내가 나쁜 사람이라 다른 사람도 그렇다고 생각했나 봐...콧등이 시큰해지는 느낌에 소은정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전 대표님, 이렇게 자상하신데 정말 모태솔로라고요?”소은정의 질문에 흠칫하던 전동하가 미소를 지었다.“왜요? 안 믿겨요? 자상이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들을 키우다 보면 자연스레 자상하게 변한답니다.”“글쎄요. 마이크는 핑계고 전 대표님은 원래 그런 분이신 것 같은데요?”“하하. 그래도 은정 씨가 제 과거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 같아 기쁘네요.”진지한 전동하의 눈빛에 소은정은 왠지 빨려들어갈 것만 같아 고개를 홱 돌렸다.그리고 영화를 가장 편하게 볼 수 있는 중간 자리로 향했다.영화가 시작되고 “한”이라는 글씨와 함께 핏빗 효과가 스크린을 꽉 채웠다.소은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전동하를 돌아보았다.“공포영화네요?”뭐야. 요즘 공포영화를 보는 게 대세인가? 이렇게 한정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의지력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인 영화라고 생각하나? 박수혁은 그렇다 치고 전동하 대표도 그럴 줄은 몰랐네.하지만 전동하 역시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일본 영화라고 했는데..
허접한 특수효과와 개연성 없는 스토리에 헛웃음을 터트리던 소은정이 전동하에게 영화 내용을 불평하려던 그때,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는 눈을 꼭 막고 있는 전동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뭐야? 이게 무서워?소은정은 의아할 따름이었다.“전 대표님, 괜찮으시죠?”소은정의 목소리에 손을 내린 전동하는 짐짓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네, 괜찮아요.”하지만 그런 전동하의 모습은 소은정은 왠지 귀엽게 느껴지며 웃음이 새어나왔다.“저 문 당겨야 열리는 것 같은데... 죽어라고 밀기만 하니까 안 열리지. 안 그래요?”소은정이 스크린을 가리키고 전동하가 고개를 돌린 순간, 머리를 풀어헤친 처녀귀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전동하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의자 손잡이를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떨림이 소은정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그... 그러네요.”전동하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렇게 무서우면 안 봐도 돼요...”“아니요.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억지로 해명을 하던 전동하가 의아한 눈길로 소은정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은정 씨는 하나도 안 무서운가 봐요?”“아, 전에 은해 오빠 따라서 공포영화 촬영현장에도 가보고 그랬 거든요. 저런 장면들을 어떻게 찍는다는 걸 알고 나니까 별로 안 무섭더라고요.”고개를 끄덕이던 전동하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런데 소은해 씨가 저런 공포영화에도 출연했었나요?”“그럴 리가요. 오빠가 이미지에 얼마나 신경 쓰는데 B급 공포영화에 출연할 리가 있겠어요?”영화관에는 두 사람뿐인지라 소은정과 전동하는 가끔씩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소은정은 전동하가 비록 얼굴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눈동자는 아래쪽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안 무서운 척하기는, 큭.전동하에게는 영겁 같았던 2시간 흐르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에야 전동하는 몸에 힘을 풀 수 있었다.음료를 사서 돌아온 소은정은 영화관 입구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있는 전동하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참,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