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궁!허지호의 말에 사람들은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가장 당황한 건 바로 박대한이었다.“대표님도 오셨다고요?”뭐지? 난 허지호만 온다고 들었는데 말이야.게다가 신포 인터네셔널의 대표는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 그 자체, 최근 대부분 업무는 부대표인 허지호가 대신 진행하고 있었다.신포 인터네셔널 부대표 허지호는 어느 정도 얼굴을 알린 인물, 허지호의 말에 모두의 신경은 미스테리한 대표의 정체에게로 쏠렸다.평범한 파티인 줄 알았는데 글로벌 대기업의 총수가 직접 방문하다니.사람들은 긴장감과 설레임으로 술렁거렸다.“정말 대표가 직접 온 거야?”“설마 국내 시장을 다음 타깃으로 잡은 건가?”“회사에도 일년에 몇 번 안 오는 사람이 왜 여기까지...”불안함, 설레임, 기대감, 초조함...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보이는 사람들과 달리 허지호는 덤덤하게 박대한의 질문에 대답했다.“네. 대표님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태한그룹은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 아닙니까? 그런 기업의 지분을 20%나 가지게 되었으니 저희 신포 인터네셔널에게도 큰 경사죠. 그리고 앞으로 신포 인터네셔널과 태한그룹이 한 가족이 되는 자리인데 당연히 오셔야죠.”묘한 표정을 짓던 박대한이 왠지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그럼 얼른 모시죠?”싱긋 미소를 짓던 허지호가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두 손으로 박수혁을 가리켰다.“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신포 인터네셔녈 대표 박수혁 대표님이십니다.”허지호의 말에 파티장은 죽음과 같은 적막에 잠겼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생생히 들릴 정도의 고요함이 끝나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폭발하듯 울려 퍼졌다.“신포 인터네셔널이 박 대표 거였다고?”“허 대표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그럼 이게 어떻게 되는 거죠? 박 회장님이 지분을 신포 인터네셔널에 넘기셨으니 모든 지분이 박수혁 대표 소유가 되는 겁니까?”“그럴 거면 그냥 직접 박수혁 대표한테 넘기시지 왜 이렇게 복잡하게...”한편 박대한은 사람들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아, 제 말이 이해하기 어려우셨나요? 다시 정식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희 인터네셔널 대표 박수혁 대표님이십니다. 뜨거운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허지호의 말에 가장 앞에 있던 이한석을 선두로 파티장에 뜨거운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박수혁의 뛰어난 사업수완과 막강한 세력을 향한 경외의 미소였다. 태한그룹을 넘어 신포 인터네셔널이라니, 국내가 아닌 일찍이 해외 시장으로 발돋움한 박수혁에게 질투, 부러움을 넘어 존경과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차가운 얼굴로 사람들을 훑어보던 박수혁은 소은정과 눈을 마주치고 흠칫하다 미소를 지었다.“여러분, 신포 인터네셔널과 태한그룹의 협력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할아버지와 저희 회사 주주들이 함께 의논하여 내린 결정을 저도 존중하는 바입니다. 저는 오늘 태한그룹 대표이자 신포 인터네셔널 대표로서 앞으로 두 그룹이 협력을 통해 이루어낼 찬란한 성과에 대해 기대감을 표하는 바입니다.”박수혁의 말이 끝나자 더 세찬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역시나 박수혁은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박수혁의 말로 인해 사람들은 이 사태를 박대한이 일방적으로 지분을 처분한 것이 아니라 태한그룹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위해 개혁을 벌인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제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하지만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도 박대한만큼은 웃지 못했다.공식적인 발표는 끝나고 사람들은 편하게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역시나 신포 인터네셔널을 노린 사람들로 허지호의 주위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북적이기 시작했다.한편, 무대에 남은 박수혁과 박대한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이때 무대 위로 올라온 이한석이 박대한과 박수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 계약서 내용 전부 확인했습니다.”박대한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함정이 오히려 박수혁을 도운 꼴이 되어버리다니.축구경기로 치면 자책골이나 마찬가지였다.박대한은 충격과 분노로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박대한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박수혁을 가리켰다.“
박대한이 부들거리며 이한석을 노려보았다.“이한석... 네가 신포 인터네셔널의 허지호를 소개해 줬지. 내가 복수할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어차피 국내에는 온통 네 사람들뿐이니 물론 해외 자본 회사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이... 이 모든 게 네 계획이었어!”흥분한 박대한과 달리 박수혁 옆에 선 이한석이 차분하게 대답했다.“어르신, 그 누구도 어르신께 지분을 양도하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상황에 만족하고 지분을 가지고 계셨더라면 앞으로 태한그룹에서 나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겁니다. 박씨 가문의 다른 주주분들도 마찬가지였겠죠. 하지만 어르신께서는 대표님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런 무리수를 두셨죠. 태한그룹의 지분이 다른 회사로 넘어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닥쳐! 어디서 감히 훈수질이야!”박대한은 모든 화를 이한석에게 쏟아냈다.박수혁을 배신한 척 다가와서는 그에게 함정을 판 이한석이 괘씸하고 괘씸했다.박대한의 호통에 이한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대신 박수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어린 나이에 저한테 회사를 맡기셨을 때 회사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었는지 아십니까? 할아버지가 친구라고, 친척이라고 두둔해 줬던 사람들이 회사를 속부터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멀쩡한 계약서, 장부 기록 하나 찾기 힘들었죠. 제가 정말 할아버지 명성에만 힘입어서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세요?”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박수혁의 말투에 박대한의 두 눈을 번뜩였다.“이런 배은망덕한 자식!”“윗세대들의 싸질러 놓은 난장판 하나하나 다 수습하면서도 불평불만 하나 하지 않았던 건 할아버지가 제 할아버지였고 절 믿고 회사를 맡겨주신 할아버지께 보답하고 싶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 그룹으로 절 평생 꼭두각시로 사용하고 싶으셨나요? 지금이라도 그때의 장부들을 다시 들춰내 볼까요? 제가 이어받은 태한그룹이 사실은 반쯤 죽어가고 있던 고목이었다는 걸 세상 사람들한테 다 알려 봐요?”박수혁이
단호하지만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뒷모습...참, 여전하다니까.그리고 소은정은 고개를 돌려 박대한을 바라보았다.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정정한 모습,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날카로운 감각은 많이 무뎌진 박대한과 박수혁의 싸움은 처음부터 계란과 바위의 싸움이었을지도 모른다.이때 전동하가 다가와 소은정과 잔을 부딪혔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오늘 굉장히 재밌네요. 박수혁 대표의 완벽한 승리였어요.”찬란하게 빛나는 화려한 파티장과 어울리지 않는 박수혁의 쓸쓸한 뒷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소은정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러게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쉽게 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럴 줄은 몰랐지...“박수혁 대표를 동정하는 건가요?”전동하의 뜬금없는 질문에 흠칫하던 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전동하의 표정은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미묘했다.“비록 회사도 지켜냈고 잃은 것 하나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박수혁은 더 이상 가족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을 겁니다. 사실상 집안에서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불쌍하게 생각되나요?”박수혁을 향한 감정이라면 그게 연민이라도 싫어.“글쎄요. 손주에게 매정하게 칼을 들이댄 박 회장의 완벽한 패배를 보고 있자니 통쾌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박수혁 대표와 같은 편이라는 건 아니에요.”동정이란 약자에게만 어울리는 단어.박수혁과 약자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걸?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전동하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피어올랐다.“다행이네요. 동정한다고 했으면 정말 질투할 뻔했어요.”말을 마친 전동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소은정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의 옆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가끔씩 전동하가 적극적으로 다가올 때마다 부담스럽고 왠지 모르게 숨이 막혔다.어차피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다 끝난 듯하여 소은정 역시 파티장을 나서려던 그때 허지호가 와인잔을 든 채 다가왔다.“내가 잘못 봤는 줄 알았는데. 맞구나, 앤!”앤은 허지호가 직접 지어준 영어이
허지호는 생각보다 냉담한 소은정의 태도에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감정적으로 다가가기 힘들다면 새로운 미끼를 던질 수밖에. 게다가 국내에서 신포 인터네셔널과 협력하고 싶은 회사는 셀 수조차 없으니까.허지호의 말에 소은정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글쎄요. 저희가 함께 일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전동하는 두 사람은 그저 얼굴만 아는 사이라는 걸 눈치챘다. 게다가 소은정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까지 걸리자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슬쩍 올렸다.“같이 영화 보러 가기로 했잖아요. 시간 다 된 것 같은데...”이에 소은정도 장단을 맞춰주었다.“네, 가요.”그렇게 소은정, 전동하 두 사람은 허지호만 남겨둔 채 여유로운 모습으로 사라졌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허지호는 몰래 욕설을 내뱉은 뒤 들고 있던 와인을 전부 마셔버렸다.방금 전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던 이한석이 한발 다가갔다.“허 대표님, 소은정 씨와 아는 사이십니까?”이한석은 박수혁의 측근이니 허지호는 별 의심 없이 대답했다.“알다 마다요. 아주 잘 아는 사이죠.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죠? 설마 태한그룹에서 일하는 겁니까?”허지호의 질문에 이한석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소은정 씨는 현재 SC그룹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박수혁 대표님의... 전 와이프시기도 하죠.”순간 허지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네?”앤과 나름 잘 알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한 기업의 대표이자 박수혁 대표와 결혼까지 했던 사이라니!충격 그 자체였다.허지호는 부랴부랴 손에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고 박수혁에게 달려갔다...한편, 전동하를 따라 밖으로 나온 소은정은 몰아치는 찬바람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기가 모공 하나하나를 침투하는 듯한 기분이었다.너무 춥잖아!얼른 차로 들어가야지 발걸음을 재촉하려던 그때 따뜻한 향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전동하가 소은정에게 코트를 버어준 것이었다.“잘 보일 수 있는 기회잖아요. 거절하진 말아줘요!”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전동하의
소은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전동하는 긴장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미안해요. 제 마음을 받아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그래도 나한테 기회는 주기로 했잖아요. 혹시... 후회하는 건 아니죠?”전동하의 질문에 소은정이 입술을 깨물었다. 왠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히터를 틀어 그런 것이라 소은정은 스스로를 설득했다.“아니에요.”빠르게 대답한 소은정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저랑 허지호 대표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궁금하지 않아요?”갑작스러운 질문에 전동하가 흠칫했다.“어떻게 아는 사이인데요?”하루빨리 이 애매한 분위기를 풀어버리고 싶어 소은정은 솔직하게 과거 있었던 일을 전부 말했다.“허지호도 몇 년 전에는 신포 그룹의 팀장에 불과했었죠. 유학시절 때 신포그룹에서 인턴으로 일했었고 그때 제 팀장이었어요.”소은정의 말에 전동하의 눈이 커다래졌다.너무 많은 정보량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SC그룹을 등에 지고 있는 소은정이 다른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했었다니.그리고 허지호가 단 몇 년만에 팀장에서 부대표로 승진까지 하다니.전동하는 방금 전 파티장에서의 대화를 다시 돌이켜 보았다.분명 허지호 대표는 은정 씨가 SC그룹 대표라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하지만 두 사람 그렇게 친해 보이진 않던데요?”전동하의 질문에 소은정이 코웃음을 쳤다.“허지호 대표 능력은 출중한데 권력욕이 너무 강해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스타일이랄까요? 인턴 때 파티에 참석할 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저희쪽 클라이언트가 억지로 저한테 술을 먹이려 했죠. 상사로서 자기 부하직원이 그런 꼴을 당하는데 허지호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말리긴커녕 오히려 그쪽에 붙어서 저에게 술을 따라주더라고요. 그런 사람과 친해질 수 있겠어요?”어쩐지... 그래서 허지호를 보는 눈빛이 차갑... 아니, 경멸에 가까웠던 거구나.입을 꾹 다물고 있던 전동하가 문득 물었다.“그래서요? 설마 그 술 다 마신 건 아니죠?”걱정스러운
어차피 시간 떼우기용이니 소은정도 딱히 개의치 않았다.시커먼 영화관으로 들어간 소은정이 주위를 더듬거리며 물었다.“몇 열이에요?”하지만 전동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때 광고 시작과 함께 영화관이 조금이나마 밝아지고 그제야 전동하는 두터운 티켓 뭉치를 꺼냈다.“아무거나 골라봐요.”뭐야? 전 좌석 티켓을 다 산 거야?소은정의 눈이 커다래지고 전동하가 해명을 이어갔다.“우리가 같이 영화를 보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다 사버렸어요.”소은정이 아무리 그의 마음을 거절해도 항상 그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는 전동하의 모습에 소은정은 가슴이 따뜻해졌다.소은정은 고개를 숙였다. 전에 그녀를 이용하는 게 아닐까 의심했던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저런 사람이 날 이용할 리가 없잖아.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내가 나쁜 사람이라 다른 사람도 그렇다고 생각했나 봐...콧등이 시큰해지는 느낌에 소은정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전 대표님, 이렇게 자상하신데 정말 모태솔로라고요?”소은정의 질문에 흠칫하던 전동하가 미소를 지었다.“왜요? 안 믿겨요? 자상이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들을 키우다 보면 자연스레 자상하게 변한답니다.”“글쎄요. 마이크는 핑계고 전 대표님은 원래 그런 분이신 것 같은데요?”“하하. 그래도 은정 씨가 제 과거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 같아 기쁘네요.”진지한 전동하의 눈빛에 소은정은 왠지 빨려들어갈 것만 같아 고개를 홱 돌렸다.그리고 영화를 가장 편하게 볼 수 있는 중간 자리로 향했다.영화가 시작되고 “한”이라는 글씨와 함께 핏빗 효과가 스크린을 꽉 채웠다.소은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전동하를 돌아보았다.“공포영화네요?”뭐야. 요즘 공포영화를 보는 게 대세인가? 이렇게 한정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의지력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인 영화라고 생각하나? 박수혁은 그렇다 치고 전동하 대표도 그럴 줄은 몰랐네.하지만 전동하 역시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일본 영화라고 했는데..
허접한 특수효과와 개연성 없는 스토리에 헛웃음을 터트리던 소은정이 전동하에게 영화 내용을 불평하려던 그때,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는 눈을 꼭 막고 있는 전동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뭐야? 이게 무서워?소은정은 의아할 따름이었다.“전 대표님, 괜찮으시죠?”소은정의 목소리에 손을 내린 전동하는 짐짓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네, 괜찮아요.”하지만 그런 전동하의 모습은 소은정은 왠지 귀엽게 느껴지며 웃음이 새어나왔다.“저 문 당겨야 열리는 것 같은데... 죽어라고 밀기만 하니까 안 열리지. 안 그래요?”소은정이 스크린을 가리키고 전동하가 고개를 돌린 순간, 머리를 풀어헤친 처녀귀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전동하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의자 손잡이를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떨림이 소은정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그... 그러네요.”전동하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렇게 무서우면 안 봐도 돼요...”“아니요.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억지로 해명을 하던 전동하가 의아한 눈길로 소은정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은정 씨는 하나도 안 무서운가 봐요?”“아, 전에 은해 오빠 따라서 공포영화 촬영현장에도 가보고 그랬 거든요. 저런 장면들을 어떻게 찍는다는 걸 알고 나니까 별로 안 무섭더라고요.”고개를 끄덕이던 전동하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런데 소은해 씨가 저런 공포영화에도 출연했었나요?”“그럴 리가요. 오빠가 이미지에 얼마나 신경 쓰는데 B급 공포영화에 출연할 리가 있겠어요?”영화관에는 두 사람뿐인지라 소은정과 전동하는 가끔씩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소은정은 전동하가 비록 얼굴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눈동자는 아래쪽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안 무서운 척하기는, 큭.전동하에게는 영겁 같았던 2시간 흐르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에야 전동하는 몸에 힘을 풀 수 있었다.음료를 사서 돌아온 소은정은 영화관 입구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있는 전동하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