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시간 떼우기용이니 소은정도 딱히 개의치 않았다.시커먼 영화관으로 들어간 소은정이 주위를 더듬거리며 물었다.“몇 열이에요?”하지만 전동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때 광고 시작과 함께 영화관이 조금이나마 밝아지고 그제야 전동하는 두터운 티켓 뭉치를 꺼냈다.“아무거나 골라봐요.”뭐야? 전 좌석 티켓을 다 산 거야?소은정의 눈이 커다래지고 전동하가 해명을 이어갔다.“우리가 같이 영화를 보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다 사버렸어요.”소은정이 아무리 그의 마음을 거절해도 항상 그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는 전동하의 모습에 소은정은 가슴이 따뜻해졌다.소은정은 고개를 숙였다. 전에 그녀를 이용하는 게 아닐까 의심했던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저런 사람이 날 이용할 리가 없잖아.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내가 나쁜 사람이라 다른 사람도 그렇다고 생각했나 봐...콧등이 시큰해지는 느낌에 소은정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전 대표님, 이렇게 자상하신데 정말 모태솔로라고요?”소은정의 질문에 흠칫하던 전동하가 미소를 지었다.“왜요? 안 믿겨요? 자상이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들을 키우다 보면 자연스레 자상하게 변한답니다.”“글쎄요. 마이크는 핑계고 전 대표님은 원래 그런 분이신 것 같은데요?”“하하. 그래도 은정 씨가 제 과거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 같아 기쁘네요.”진지한 전동하의 눈빛에 소은정은 왠지 빨려들어갈 것만 같아 고개를 홱 돌렸다.그리고 영화를 가장 편하게 볼 수 있는 중간 자리로 향했다.영화가 시작되고 “한”이라는 글씨와 함께 핏빗 효과가 스크린을 꽉 채웠다.소은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전동하를 돌아보았다.“공포영화네요?”뭐야. 요즘 공포영화를 보는 게 대세인가? 이렇게 한정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의지력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인 영화라고 생각하나? 박수혁은 그렇다 치고 전동하 대표도 그럴 줄은 몰랐네.하지만 전동하 역시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일본 영화라고 했는데..
허접한 특수효과와 개연성 없는 스토리에 헛웃음을 터트리던 소은정이 전동하에게 영화 내용을 불평하려던 그때,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는 눈을 꼭 막고 있는 전동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뭐야? 이게 무서워?소은정은 의아할 따름이었다.“전 대표님, 괜찮으시죠?”소은정의 목소리에 손을 내린 전동하는 짐짓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네, 괜찮아요.”하지만 그런 전동하의 모습은 소은정은 왠지 귀엽게 느껴지며 웃음이 새어나왔다.“저 문 당겨야 열리는 것 같은데... 죽어라고 밀기만 하니까 안 열리지. 안 그래요?”소은정이 스크린을 가리키고 전동하가 고개를 돌린 순간, 머리를 풀어헤친 처녀귀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전동하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의자 손잡이를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떨림이 소은정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그... 그러네요.”전동하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렇게 무서우면 안 봐도 돼요...”“아니요.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억지로 해명을 하던 전동하가 의아한 눈길로 소은정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은정 씨는 하나도 안 무서운가 봐요?”“아, 전에 은해 오빠 따라서 공포영화 촬영현장에도 가보고 그랬 거든요. 저런 장면들을 어떻게 찍는다는 걸 알고 나니까 별로 안 무섭더라고요.”고개를 끄덕이던 전동하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런데 소은해 씨가 저런 공포영화에도 출연했었나요?”“그럴 리가요. 오빠가 이미지에 얼마나 신경 쓰는데 B급 공포영화에 출연할 리가 있겠어요?”영화관에는 두 사람뿐인지라 소은정과 전동하는 가끔씩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소은정은 전동하가 비록 얼굴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눈동자는 아래쪽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안 무서운 척하기는, 큭.전동하에게는 영겁 같았던 2시간 흐르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에야 전동하는 몸에 힘을 풀 수 있었다.음료를 사서 돌아온 소은정은 영화관 입구에 앉아 심호흡을 하고 있는 전동하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참,
말을 마친 소은정은 소호랑을 안은 채 2층으로 올라갔다.마침 2층에서 내려오던 소은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늦었네. 파티는 진작 끝나지 않았어?”“볼일이 있어서. 아, 오빠. 오늘 파티에서 있었던 일 있었지?”도처에 인맥들을 두고 있는 소은호는 파티가 끝나기 전에 이미 신포그룹이 박수혁 소유라는 걸 이미 안 상태였다.물론 놀라운 일이었지만 별로 충격받지 않은 표정이었다.소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너 전에 거기서 인턴으로 일한 적도 있지 않아? 그 사람들은 모르지?”“박수혁은 모를 거야. 허지호 대표는 알아. 인턴할 때 내 팀장이었거든.”“알아도 상관없어. 뭐 트집잡힐 일은 아니니까.”잠간 고민하던 소은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태한그룹은 지금 큰 변화를 겪고 있는 시기야. 아마 단기간 안에 평온함을 되찾기는 힘들 거야. 박씨 가문 방계 친척들도 하루 사이에 지분을 모두 잃었으니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우리는 괜히 참견하지 말고 지켜보자.”소은정 역시 소은호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소은정, 소은호는 이 모든 게 박수혁의 계획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박씨 가문 방계 친척들은 박대한과 박수혁이 손을 잡고 방계 친척들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전부 빼앗은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아마 큰 내분이 일지도 모르겠어...미간 사이를 꾹꾹 누르던 소은호가 또 한 마디 덧붙였다.“참, 장건우 대표한테서 몇 번이나 연락이 왔었어. 물론 아직 계약은 체결하지 않은 상태고. 사생활 문제도 있지만 제품 자체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소은호의 말에 소은정의 눈이 커다래졌다.장건우의 인성은 차치하더라도 공장이 생산하는 퀄리티는 업계 최고 수준이었으므로 그 동안 SC그룹과 장기간 협력할 수 있었다.가뜩이나 장건우의 사생활 문제로 협력이 꺼려지는 상황에서 퀄리티까지 떨어졌다면 더더욱 함께 일할 필요성이 없어졌다. 이 바닥은 말 그대로 적자생존, 매일 수많은 기업들이 우후죽순 치고 올라오는데 굳이 별로인 그룹
비록 현재 직장에서는 남녀평동을 추구하고 있지만 정작 승진 문제에서는 대부분 먼저 남성을 먼저 고려하는 게 관례나 마찬가지였다.박수혁이 침묵하자 허지호는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전 윤시라 씨를 더 추천합니다. 일처리도 매끄럽고 20대에 그 정도 커리어를 쌓는 것도 힘들어요. 그리고 20대 여성 지사장, 대외적으로 홍보하기도 좋고 기사들이 한국 지사에 관해 기사를 쓰기도 좋을 겁니다.박수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윤시라가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왔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 생각합니까? 그 정도 잔머리와 강성호의 능력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군요.”순간 허지호의 표정이 살짝 굳고 몇 초간의 침묵이 어졌지만 잠깐 뒤 바로 어색한 미소로 대답했다.“이 바닥에서 성접대는 흔히 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아, 그러니까 앤이 생각나네요... 대표님 전 와이프라고 했던 거요?”허지호의 말에 박수혁이 홱 고개를 들더니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 보았다.“누구요?”“앤이요. 지금은 SC그룹 대표라던데. 전에 신포그룹 유럽지사에서 인턴으로 일했었거든요. 그때 제가 바로 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벌 2세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요. 재벌 2세와 인턴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안 어울리잖아요?”허지호가 혀를 내둘렀다.“소은정이? 신포그룹에서 일했었다고?”박수혁의 차가운 목소리에 허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두 분 예전에 부부셨다면서요. 모르셨습니까?”고개를 젓던 허지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예전 일을 술술 읊어댔다.“그해 수많은 인턴들 중에서도 앤은 가장 출중했습니다. 예쁘고 능력도 출중하고 순발력도 좋고 일에 대한 욕심도 있고요. 그래서 집중 타깃으로 육성할 생각이었고 어딜 가든 앤과 함께했었죠. 그러던 어느 날, 한 클라이언트와의 저녁 약속에서 술에 취한 클라이언트가 술을 강요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차피 계약도 곧 체결을 앞두고 있고 그냥 한 모금만 마시라고 눈치를 줬었죠. 그리고 혹시 술에 약이라도 들었을까 봐 제가 직접 술을 따라주기까지
SC그룹.소은호가 다시 회사로 돌아오니 소은정도 부담이 많이 사라진 기분이었다.소은정은 사무실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파일을 확안히고 있었다.점심 때도 되었겠다 밥이나 먹으려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우연준이 들어왔다.“대표님, 양예영 씨가 오셨습니다.”양예영? 미간을 찌푸리던 소은정은 골프 클럽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안 만날 거예요.”우연준이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을 나서려던 그때 양예영이 문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선글라스에 마스크, 목도리... 얼굴에 틈 하나 드러내지 않은 모습이 왠지 웃겼다.나 연예인이오 광고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그 모습에 소은정의 얼굴에 불쾌함이 피어올랐다.“경비원 불러요...”소은정이 이렇게 매정하게 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전에 좋은 마음에서 도와주려 했는데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나몰라라 도망간 걸 생각하면 아직도 괘씸했다.그리고 서로 아이를 학대한다는 양예영, 장건우 두 사람의 주장 중 어느 쪽이 맞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어차피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허둥지둥 사무실로 들어온 양예영이 다급하게 선글라스를 벗으며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대표님, 5분만요. 제발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대표님 도움이 필요해요.”“아니요. 전 도움을 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도와주지 않는다는 주의라서요.”소은정의 말에 양예영이 우물쭈물 대답했다.“그건... 장건우 쪽 사람들이 쫓아올까 봐 도망쳤던 거예요. 그리고 그 뒤로 바로 촬영에 들어갔고요. 정말 죄송합니다.”양예영의 변명에도 소은정은 피식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알았으니까 이만 나가주세요.”하지만 양예영은 초조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SC그룹은 지금 장건우의 공장과 계약을 맺은 상태죠. 그 계약 계속 진행하면 안 돼요.”그제야 소은정은 고개를 들더니 손을 저어 우연준을 내보냈다.사무실에 소은정, 양예영 두 사람만 남게 되고 소은정은 여유롭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내가 장건우와의
게다가 테스트 제품을 빼돌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개발팀 팀장뿐이라는 생각에 소은정의 표정이 드디어 흔들리기 시작했다.감히 내 눈꺼풀 아래에서 도둑질을 해?장건우...“제 말을 못 믿으시겠으면 확인해 보세요. 지금 그 기기 하나가 빌 걸요?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지금 개발팀 팀장 집에 있을 거예요.”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든 소은정이 피식 웃었다.“설마... 그쪽에서 제품을 훔치길 기다렸다가 저에게 온 건 아니겠죠?”소은정의 말에 정곡을 찍힌 양예영이 흠칫하더니 고개를 숙였다.“네. 맞아요. 괜히 먼저 말했다면 대표님께서도 제 말을 믿지 않으셨겠죠...”기가 막혀 코웃음을 치던 소은정이 우연준을 호출했다.“회사 신제품이 도난당했어요. 범인은 개발팀 팀장이니까 바로 경찰에 신고하고 팀장으로서의 모든 권한은 정지시키도록 해요.”양예영을 힐끗 바라보던 우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제야 소은정은 휴대폰을 양예영에게 돌려주었다.“양예영 씨가 한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좋을까요?”소은정의 태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양예영이 말했다.“아니에요. 대표님께서 먼저 저를 도와주셨잖아요.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할게요.”“그래요? 그럼 그런 걸로 알게요.”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솔직하게 말 안 한다 이거지? 그러든가. 어차피 급한 건 그쪽일 테니까.예상과 다르게 나오는 소은정의 모습에 양예영은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우물쭈물 말을 이어갔다.“만약 대표님께서 제 아이를 해외로 보내신다면...”양예영의 말에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글쎄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되네요.”양예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대표님, 장건우는 이미 아이가 있어요. 그런데 왜 자신의 사생아한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걸까요? 사생아라면 숨기는 게 맞지 않나요?”그러니까. 나도 그게 이상했어.드디어 소은정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지금 장건우의 아이는 급성 백혈병을 앓고 있어요. 살 수
그러니까 결국엔 자신의 커리어 때문에 아이를 해외로 버리겠다는 말이잖아.잠깐 망설이던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어차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 들어주는 게 좋겠다 싶었다.그제야 양예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감격에 겨운 얼굴로 소은정을 바라보았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이때 전동하의 말을 떠올린 소은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런데 정말 그쪽은 아이를 학대한 적이 없는 건가요?”소은정의 질문에 양예영의 얼굴에 의아함이 실렸다.“당연히 없죠. 솔직히 일 때문에 바빠서 1년에 집에 몇 번 못 들어가요. 아이와 만나는 시간도 별로 없는데 학대라니요.”양예영의 대답에 소은정은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절차는 제가 알아서 밟을 테니까 제 연락 기다리세요.”그렇다면 아이를 학대한 건 장건우거나 아이를 케어하는 시터겠어...“네. 저도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을게요. 대표님, 대표님께서도 하루빨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귀여운 아이 낫길 바랄게요...”미소를 지으며 덕담 아닌 덕담을 하는 양예영의 말에 소은정의 눈동자에 경멸이 실렸다.하, 자기 딸 제대로 책임지지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출산을 권해?목적을 이룬 양예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SC그룹이라면 아이의 뒤를 봐준다면 제아무리 장건우라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양예영의 생각이었다.네 새끼 구하려고 내 딸을 희생시키려고? 꿈 깨시지, 장건우!잠시 후 우연준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다.“대표님, 잃어버린 기기는 역시 연구팀 조기형 팀장 집에 있었습니다. 기기는 회수했고 회사 명의로 조기형 팀장을 고소할 예정입니다.”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이 뭔가 떠올린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아, 장건우 대표에게 백혈병을 앓고 있는 아들이 있나요?”흠칫하던 우연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네. 전에 소은호 대표님 명령으로 장건우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되었죠.”그럼 양예영이 적어도 거짓말은 안
소은정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어느새 그녀의 맞은 편 좌석에 앉은 윤시라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대학교 때 친구들 만난 게 얼마만인지 몰라.”친한 척 다가오는 윤시라의 태도에도 소은정은 싱긋 미소를 지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이때 웨이터가 다가와 윤시라와 소은정의 컵에 레몬티를 따라주고 소은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밥 먹으러 온 거야?”이만 좀 가지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낯선 사람, 더군다나 향수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낯선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상상만 해도 소은정은 속이 울렁거렸다.“응. 해외에서 일하다 국내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어. 한국에 친구도 얼마 없고 어떻게 지내나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널 만났네. 요리 주문했어? 합석해도 돼? 내가 살게.”미간을 찌푸린 소은정이 거절하려던 그때 윤시라가 한발 빠르게 웨이터를 불렀다.하, 이게 무슨 붙임성이래...추천 메뉴를 주문한 윤시라가 소은정에게도 메뉴판을 건넸다.“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 내가 산다니까.”불쑥 나타나 온갖 친한 척은 다해대는 윤시라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먼저 사겠다고 말까지 했으니 소은정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소은정이 미소를 지으며 웨이터에게 말했다.“메뉴판에 있는 거 전부 다 주세요.”순간 윤시라의 표정이 움찔했다.“전부 다? 다 먹을 수 있겠어?”“아, 같이 온 사람도 있어서. 부담되면 내가 살게.”하지만 자존심 센 윤시라가 뱉은 말을 다시 거두어 들일 리가 없었다.하, 재벌 2세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가격 한 번 안 보고 주문하네.“부담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그 정도는 쓸 수 있지.”순간 소은정의 눈동자가 묘한 빛을 내뿜었고 피식 미소를 지었다.유난히 정교한 화장과 의상... 윤시라라고 주장하는 이 여자는 뭔가 목적을 가지고 그녀에게 접근했음을 소은정은 직감했다.여자의 가장 큰 무기는 핸드백, 역시나 윤시라는 샤넬 신상백을 들고 있었다.물론 소은정이 든 한정판 에르메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