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티를 한 모금 마신 소은정이 미소를 지었다.“그러게. 내 팔자가 그런 걸 어쩌겠어?”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소은정은 벌써 불쾌해지기 시작했다.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대표가 어떤 마음인지 알긴 해? 주가가 조금만 흔들려도 잠도 안 오고 밥도 안 들어간다고! 대표 자리가 얼마나 사람 피말리는 자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소은정의 시큰둥한 대다에 말문이 막힌 윤시라는 웃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연락처라도 교환할까? 앞으로 자주 연락하면서 지내자...”순간 소은정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윤시라가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너무나 궁금한 소은정이었다.소은정의 카톡을 추가한 윤시라는 전동하를 향해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었다.“저희도 카톡 추가하는 게 어때요?”“아, 아닙니다. 전 카톡 잘 쓰지도 않는데요 뭘.”전동하의 거절에 윤시라는 턱을 괸 채 애교섞인 눈으로 소은정과 전동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에이. 요즘 카톡 안 쓰는 사람도 있나요? 설마 은정이가 다른 여자랑은 문자도 보내지 말래요? 우리 은정이가 그렇게 쪼잔한 사람일 리가 없는데...”“그래요. 추가해 둬요.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르잖아요.”소은정까지 옆에서 부추기니 난처한 표정을 짓던 전동하 역시 휴대폰을 내밀었다.그리고 소은정은 자연스레 전동하의 채팅 화면을 힐끗 바라보았다.방금 전 카톡을 추가한 윤시라는 바로 전동하에게 하트를 날리는 이모티콘을 보낸 상태였다.하지만 먼저 추가한 그녀의 카톡은 감감무소식인 상태, 소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때 전동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주문은 했어요?”“아, 네. 시라가 사겠다고 해서요. 우리 회사 직원들 것까지 다 시켰죠 뭐.”“그럼요. 우리가 몇 년지기 친구인데요.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이 정도는 쓸 수 있죠. 정 마음 쓰이면 다음에 네가 사면 되잖아.”이렇게 자연스럽게 다음 약속을 잡는다?소은정이 어색하게 웃고 그 순간의 표정을
윤시라의 손길에 전동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얼굴은 불쾌함으로 가득했지만 소은정의 지인이라는 생각에 억지로 화를 억눌렀다.“괜찮습니다. 잠깐 실례할게요.”전동하가 소은정을 향해 말하고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전동하가 성큼성큼 화장실로 향해 걸어가고 윤시라는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일어섰다.“난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나 몰라. 은정아, 남자친구 화 많이 난 건 아니지?”여유롭게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소은정이 싱긋 웃었다.“그럴 리가.”아마 화낼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다시 자리에 앉은 윤시라는 한참을 안절부절 못하다 벌떡 일어섰다.“안 되겠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가볼게. 은정아, 잠깐만 혼자 있어.”윤시라의 말에 눈썹을 치켜세운 소은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래.”윤시라의 진짜 타깃이 누군지 이제야 깨달은 소은정이었다.잠시 후, 웨이터가 난처한 표정으로 다시 다가왔다.“고객님, 친구분께서 이쪽에 앉은 여성분 때문에 난처한 상황이신 것 같은데 안 가보셔도 괜찮겠어요?”웨이터의 말에 흠칫하던 소은정이 와인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아, 알려줘서 고마워요. 지금 바로 가볼게요.”웨이터까지 못 봐줄 정도면 도대체 어느 정도로 뻔뻔하게 들이대고 있는 거야?정교한 골동품과 그림들로 장식된 긴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향하던 소은정의 귓가에 차갑게 굳은 전동하의 목소리가 들렸다.“은정 씨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요? 진정 하세요.”“저 때문에 옷이 더러워졌잖아요. 그냥 옷 씻겨드리려는 건데... 오해하신 건 아니죠? 그리고... 은정이 주위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요. 오늘은 동하 씨가 남자친구지만 내일이면 동하 씨 얼굴도 기억 못할 걸요? 우리 대학교 동기들도 다 은정이 싫어했어요. 전 남편 앞에서는 청순한 척하는 것 같던데 사실은 여우...”전동하가 못 들어주겠다는 듯 윤시라의 말을 잘라버렸다.“윤시라 씨, 은정 씨 친구라니까 저한테 와인을 쏟은 건 넘어가겠습니다. 하지만 은정 씨를 모욕하는 말은
소은정의 알쏭달쏭한 말에 윤시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다음 순간, 소은정은 들고 있던 와인을 정교하게 세팅된 윤시라의 머리 위로 전부 쏟아버렸다.와인이 윤시라의 아름다운 원피스를 적시고 기분 나쁜 찜찜함이 온몸을 휘감았다.창백해진 얼굴로 비명을 지른 윤시라가 비틀거리며 뒤로 한발 물러서더니 충격 받은 듯한 얼굴로 소은정을 바라보았다.“친구 남자친구인 줄 알면서 어디서 여우짓이야? 내가 그런 꼴을 보고도 가만히 넘어갈 줄 알았어?”소은정의 차가운 목소리에 윤시라의 표정도 어색하게 굳었다.“은정아, 오해야. 내... 내가 어떻게 네 남자친구한테 그런 마음을 가지겠어. 우린 친구잖아. 그리고...”하지만 소은정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앞으로 사기 치려면 상대에 대해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대학교 때 우리 전공에 여자는 나 한 명뿐이었어. 도대체 누구 사주를 받고 이런 짓을 하는 거지?”순간 분위기가 어색하게 가라앉았다.대학교 같은 과 동기라면 많고도 많을 테니 일일이 이름을 기억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다가간 건데... 여자가 한 명뿐이었다니.윤시라가 입을 벙긋거렸다.“같은 전공은 아니었는데 같은 학번은 맞아...”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윤시라의 모습에 소은정은 기가 막혔다.레이저 같은 눈빛으로 윤시라를 훑어보던 소은정이 말을 이어갔다.“눈가 주름을 보아하니 올해 적어도 30은 되어 보이는데... 적어도 5년 정도는 선배일 것 같은데 동기라... 웃기네?”그제야 윤시라는 입을 다물었다.뭐야?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여자애인 줄 알았는데... 박수혁 대표가 빠진 데는 이유가 다 있었어!눈꺼풀에 떨어진 와인을 닦아낸 윤시라가 오히려 침착한 표정으로 대응했다.“대학교 동기가 아니라고 해도 친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요?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나올 일이에요?”매정하다라...맑은 소은정의 눈동자에 혐오감이 스쳐지났다.“친구? 그쪽은 못 생기고 돈도 없고 멍청해 보이는데... 나 같은
어차피 소은정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정말 그런 짓을 저지른다 해도 돈으로 모든 걸 무마해 버릴 것이다.윤시라는 애원의 눈길로 전동하를 바라보았지만 전동하 역시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라는 그의 신조가 아니었다면 방금 전 소은정의 뒷담화를 할 때 이미 그녀의 뺨을 날리고 싶었다.지금 소은정이 윤시라를 밀어붙이니 오히려 기분이 통쾌해졌다.전혀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전동하의 모습에 윤시라가 이를 꽉 깨물었다.일단 내가 사는 게 먼저야.“신포그룹이에요...”극강의 공포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순간 소은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박수혁이 보낸 거라고?”“아... 아니요. 박수혁 대표님이 보내신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신포그룹 직원이라고...”윤시라는 해명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소은정은 더 이상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윤시라의 멱살을 잡고 안쪽으로 걸어갔다.윤시라는 잔뜩 겁 먹은 얼굴로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소은정의 손에 끌려 움직였다.소은정은 우연준을 비롯한 비서팀 직원들이 식사를 하고 잇는 테이블로 향했다.와인을 뒤집어 쓴 여자의 멱살을 잡고 나오는 대표님의 모습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하지만 소은정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들고 있던 와인잔 잔해를 바닥에 던져버렸다.“다들 많이 먹어요. 모자라면 더 시키고요.”“네, 대표님.”우연준의 대답과 함께 다들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눈치껏 술잔을 들었다.“이 레스토랑 진짜 와보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여길 어떻게 빌리실 생각을 다 하셨어요. 역시 대표님!”“이것도 먹어봐요!”윤시라의 애처로운 눈빛에도 투명인간 취급하는 직원들과 웨이터의 태도에 윤시라는 절망에 잠겼다.소은정은 그렇게 윤시라의 멱살을 끌고 옆에 있는 룸으로 향했다.보따리 버리 듯 윤시라를 의자에 던져버린 소은정은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듯 물티슈로 손을 벅벅 닦았다.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전동하가 자연스레 문을 닫았다.“은정 씨, 적당히 해요. 혹
박수혁의 얼굴에 실렸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쪽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박수혁의 질문에 전동하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글쎄요. 제가 왜 여기 있을까요?”하지만 박수혁은 전동하의 질문은 깔끔하게 무시한 채 소은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무슨 일로 부른 거야?”박수혁을 빤히 바라보던 소은정이 손가락으로 룸을 가리켰다.“당신 직원이 저쪽에 있어. 그리고 당신, 좀 정정당당하게 살면 안 돼? 꼭 이렇게 역겨운 술수를 써야겠어?”소은정의 가시돋친 말에 박수혁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말이야?”요즘 신포그룹과 태한그룹의 협력건으로 인해 눈 코 뜰새없이 바쁘게 보냈는데 수작이라니. “신포그룹, 당신 그룹 맞지? 그리고 윤시라는 신포그룹 직원이고.”소은정의 질문에 박수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을 생각했다.윤시라? 누구더라? 아, 허지호가 말했었지... 한국 지사 지사장 후보 중 한 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맞아.”“그럼 됐지 뭐. 직원을 시켜서 전동하 대표를 꼬시라고 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뇌구조면 그런 추잡한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는 거지?”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은 성큼성큼 걸어가 룸 문을 퍽 차버렸다. 문이 열리고 처참한 모습의 윤시라를 발견한 박수혁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대표님...”윤시라의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전 대표님을 도와드리려고... 전동하 대표를 유혹하면 소은정 대표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는 거니...”하지만 윤시라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박수혁의 호통소리가 울려 퍼졌다.“미쳤습니까?”단호하게 돌아선 박수혁은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소은정에게 설명했다.“저 여자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짓이야. 난 그런 명령 내린 적 없어. 어떻게 처리하든 네 마음대로 해.”뭐야? 이 일 때문에 날 부른 거야? 전동하에 관한 루머를 퍼트리긴 했지만 내가 정말 이런 일까지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이때 윤시라가 눈물바람으로 룸에서 걸어나왔다.“대표님, 저 좀 살려주세요. 저
막힌 숨을 뱉어내듯 질문한 박수혁은 가슴이 욱신거렸다.저번 실수 때문에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오해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왜? 내가 왜!하지만 소은정의 눈빛은 건조하기만 했다.“당신 직원이 저지른 짓이야. 당신 명령 없이 움직였다는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아니면 윤시라가 박수혁의 눈에 들기 위해 일부러 이런 짓을 저지른 건가?하지만 3년 동안의 신뢰를 져버린 박수혁을 소은정은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무조건적인 불신에 박수혁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분노 때문인지 이마의 핏줄이 터질 듯 팽창했다.하지만 그 상대가 소은정이니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또 눌렀다.“그래. 오해했다니 해명할게. 내가 시킨 거 아니야.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그러니까 제발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 소은정의 의심의 눈길은 비수가 되어 박수혁의 가슴을 난도질하고 있었다.정말 억울한 건지 화가 난 건지 흰 자위가 새빨개진 박수혁의 모습에 소은정도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박수혁, 당신이 시킨 일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난 어쨌든 당신이 싫으니까.“됐고. 그쪽 직원이나 데리고 가.”설령 박수혁에게 잘 보이기 위해 윤시라가 독단적으로 꾸민 일이라 해도 박수혁과 아무 관련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깊은 눈동자로 소은정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박수혁이 겨우 입을 열었다.“정말... 이렇게까지 나한테 상처를 줘야겠어?”박수혁의 비굴한 태도에 전동하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박수혁 대표의 저런 표정은 처음이야.결국 전동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박 대표님, 이 일에 관한 얘기만 하시죠.”전동하의 참견에 박수혁이 누르고 누르던 분노의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꺼져. 네가 뭔데 끼어들고 난리야. 내가 정말 네가 무서워서 가만히 내버려두는 줄 알아?”짐승처럼 으르렁대는 박수혁의 모습에 소은정도 의자에서 일어섰다.“그만해. 동하 씨는 내 남자친구야. 내 남자친구한테 함부로 하지 마.”순
레스토랑에서 나온 소은정은 찬바람을 쐬니 그제야 이성이 돌아오는 듯한 기분이었다.다행이다. 이제 다 끝이야. 이 정도까지 몰아붙였으면 앞으로 더 이상 들러붙지 않겠지.이때 갑자기 낯선 남자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남자의 손에는 은은한 향을 내뿜는 회색 남성용 손수건이 들려있었다.고개를 든 소은정의 시야에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전동하의 얼굴이 보였다.매정한 척 말을 뱉고 나왔지만 전동하는 소은정이 박수혁이란 존재를 완전히 인생에서 지워버리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느낄 수 있었다.소은정이 박수혁을 찌른 칼은 칼잡이가 없는 칼, 박수혁에게 상처를 낸 동지에 소은정의 손에도 큰 생채기를 남겼을 게 분명했다.아직도... 박수혁에게 마음이 남아있었구나.전동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그제야 소은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내가... 울었었나...전동하가 한숨을 내쉬었다.“은정 씨, 사랑했던 사람을 완전히 지운다는 건 참 어렵죠.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은정 씨 이러는 모습 보니까 내가 마음이 아프잖아요.”소은정은 붉어진 눈시울로 전동하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사랑했던 사이는 맞으니까요. 내려놓는데 1년 정도가 걸렸던 것 같아요. 이 정도면 됐잖아요. 언젠가는 잊어버려야 할 사람이에요. 그냥 오늘 그 끝을 맺었을 뿐이에요.”시간을 끌 수록 서로 아파질 뿐이라는 걸 소은정도 알고 있었다.소은정의 과거를 알고 있는 전동하였기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재벌가 외동딸이라는 신분을 버리면서까지 인간 같지 않은 시댁 식구들의 괴롭힘을 3년 동안이나 버텨냈다는 사실만으로 소은정이 박수혁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그래서 소은정이 더 안쓰러웠지만 이렇게라도 박수혁을 끊어버리려는 소은정의 모습에 왠지 안심이 되기도 했다.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던 전동하가 대신 차문을 열었다.“회사로 갈 거예요? 아니면 드라이브라도 갈까요?”차에 탄 소은정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차피 회사에 소은호도 있겠다 차라
비록 전동하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발 더 다가섰다는 느낌에 전동하의 마음이 가벼워졌다.“네. 천천히 다가와도 좋아요.”이제 박수혁이라는 가장 큰 라이벌이 사라진 이상, 소은정의 마음을 천천히 돌릴 인내심도 자신감도 충만했다.부드러운 음악에 소은정의 기분도 어느새 가벼워졌다.한유라의 회사에 도착하고 소은정이 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후다닥 먼저 차에서 내린 전동하가 문을 열어주며 그녀를 에스코트했다.소은정은 피식 웃으며 전동하의 장단을 맞춰주었다.“다시 데리러 올까요?”이렇게 소은정의 남자친구로서 기사 노릇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전동하의 질문에 소은정이 얼굴을 붉혔다.“아니요.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시간이 오래 걸릴 거예요.”고개를 끄덕인 전동하의 눈동자에 아쉬움이 실렸다.“남자친구로서 은정 씨 친구를 만나고 싶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잘가요.”“네, 운전 조심해요.”그냥 간단한 식사 한끼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질 줄이야.소은정은 고개를 저었다.박수혁은 떼어냈고 전동하와는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하지만 사귄다고 생각하니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이때 핸드백에 든 휴대폰이 울렸다.“나 너희 회사 앞이야.”소은정의 말에 한유라가 웃음을 터트렸다.“그래, 지금 너 보고 있어. 아주 헤어지기 아쉬어서 죽더구만?”한유라의 말에 소은정은 뜻밖에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참나. 고개를 든 소은정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사무실에서 다 봤다 이거지? 한유라 이 여우 같은 계집애.한유라가 미리 직원들에게 말해 둔 탓인지 소은정은 아무 막힘 없이 대표 사무실로 올라올 수 있었다.사무실에 도착한 소은정은 아무렇게나 핸드백을 소파에 던져버린 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오늘 무슨 일이... 으악!”소은정은 휴식실에서 나오는 남자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겨우 정신을 차린 소은정이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뭐야? 민하준이잖아?민하준을 발견하고 경악한 소은정과 달리 민하준은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