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숨을 뱉어내듯 질문한 박수혁은 가슴이 욱신거렸다.저번 실수 때문에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오해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왜? 내가 왜!하지만 소은정의 눈빛은 건조하기만 했다.“당신 직원이 저지른 짓이야. 당신 명령 없이 움직였다는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아니면 윤시라가 박수혁의 눈에 들기 위해 일부러 이런 짓을 저지른 건가?하지만 3년 동안의 신뢰를 져버린 박수혁을 소은정은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무조건적인 불신에 박수혁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분노 때문인지 이마의 핏줄이 터질 듯 팽창했다.하지만 그 상대가 소은정이니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또 눌렀다.“그래. 오해했다니 해명할게. 내가 시킨 거 아니야.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그러니까 제발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 소은정의 의심의 눈길은 비수가 되어 박수혁의 가슴을 난도질하고 있었다.정말 억울한 건지 화가 난 건지 흰 자위가 새빨개진 박수혁의 모습에 소은정도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박수혁, 당신이 시킨 일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난 어쨌든 당신이 싫으니까.“됐고. 그쪽 직원이나 데리고 가.”설령 박수혁에게 잘 보이기 위해 윤시라가 독단적으로 꾸민 일이라 해도 박수혁과 아무 관련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깊은 눈동자로 소은정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박수혁이 겨우 입을 열었다.“정말... 이렇게까지 나한테 상처를 줘야겠어?”박수혁의 비굴한 태도에 전동하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박수혁 대표의 저런 표정은 처음이야.결국 전동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박 대표님, 이 일에 관한 얘기만 하시죠.”전동하의 참견에 박수혁이 누르고 누르던 분노의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꺼져. 네가 뭔데 끼어들고 난리야. 내가 정말 네가 무서워서 가만히 내버려두는 줄 알아?”짐승처럼 으르렁대는 박수혁의 모습에 소은정도 의자에서 일어섰다.“그만해. 동하 씨는 내 남자친구야. 내 남자친구한테 함부로 하지 마.”순
레스토랑에서 나온 소은정은 찬바람을 쐬니 그제야 이성이 돌아오는 듯한 기분이었다.다행이다. 이제 다 끝이야. 이 정도까지 몰아붙였으면 앞으로 더 이상 들러붙지 않겠지.이때 갑자기 낯선 남자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남자의 손에는 은은한 향을 내뿜는 회색 남성용 손수건이 들려있었다.고개를 든 소은정의 시야에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전동하의 얼굴이 보였다.매정한 척 말을 뱉고 나왔지만 전동하는 소은정이 박수혁이란 존재를 완전히 인생에서 지워버리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느낄 수 있었다.소은정이 박수혁을 찌른 칼은 칼잡이가 없는 칼, 박수혁에게 상처를 낸 동지에 소은정의 손에도 큰 생채기를 남겼을 게 분명했다.아직도... 박수혁에게 마음이 남아있었구나.전동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그제야 소은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내가... 울었었나...전동하가 한숨을 내쉬었다.“은정 씨, 사랑했던 사람을 완전히 지운다는 건 참 어렵죠.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은정 씨 이러는 모습 보니까 내가 마음이 아프잖아요.”소은정은 붉어진 눈시울로 전동하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사랑했던 사이는 맞으니까요. 내려놓는데 1년 정도가 걸렸던 것 같아요. 이 정도면 됐잖아요. 언젠가는 잊어버려야 할 사람이에요. 그냥 오늘 그 끝을 맺었을 뿐이에요.”시간을 끌 수록 서로 아파질 뿐이라는 걸 소은정도 알고 있었다.소은정의 과거를 알고 있는 전동하였기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재벌가 외동딸이라는 신분을 버리면서까지 인간 같지 않은 시댁 식구들의 괴롭힘을 3년 동안이나 버텨냈다는 사실만으로 소은정이 박수혁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그래서 소은정이 더 안쓰러웠지만 이렇게라도 박수혁을 끊어버리려는 소은정의 모습에 왠지 안심이 되기도 했다.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던 전동하가 대신 차문을 열었다.“회사로 갈 거예요? 아니면 드라이브라도 갈까요?”차에 탄 소은정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차피 회사에 소은호도 있겠다 차라
비록 전동하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발 더 다가섰다는 느낌에 전동하의 마음이 가벼워졌다.“네. 천천히 다가와도 좋아요.”이제 박수혁이라는 가장 큰 라이벌이 사라진 이상, 소은정의 마음을 천천히 돌릴 인내심도 자신감도 충만했다.부드러운 음악에 소은정의 기분도 어느새 가벼워졌다.한유라의 회사에 도착하고 소은정이 차에서 내리려던 그때 후다닥 먼저 차에서 내린 전동하가 문을 열어주며 그녀를 에스코트했다.소은정은 피식 웃으며 전동하의 장단을 맞춰주었다.“다시 데리러 올까요?”이렇게 소은정의 남자친구로서 기사 노릇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전동하의 질문에 소은정이 얼굴을 붉혔다.“아니요.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시간이 오래 걸릴 거예요.”고개를 끄덕인 전동하의 눈동자에 아쉬움이 실렸다.“남자친구로서 은정 씨 친구를 만나고 싶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잘가요.”“네, 운전 조심해요.”그냥 간단한 식사 한끼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질 줄이야.소은정은 고개를 저었다.박수혁은 떼어냈고 전동하와는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하지만 사귄다고 생각하니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이때 핸드백에 든 휴대폰이 울렸다.“나 너희 회사 앞이야.”소은정의 말에 한유라가 웃음을 터트렸다.“그래, 지금 너 보고 있어. 아주 헤어지기 아쉬어서 죽더구만?”한유라의 말에 소은정은 뜻밖에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참나. 고개를 든 소은정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사무실에서 다 봤다 이거지? 한유라 이 여우 같은 계집애.한유라가 미리 직원들에게 말해 둔 탓인지 소은정은 아무 막힘 없이 대표 사무실로 올라올 수 있었다.사무실에 도착한 소은정은 아무렇게나 핸드백을 소파에 던져버린 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오늘 무슨 일이... 으악!”소은정은 휴식실에서 나오는 남자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겨우 정신을 차린 소은정이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뭐야? 민하준이잖아?민하준을 발견하고 경악한 소은정과 달리 민하준은
소은정의 말에 한유라가 그녀의 팔을 꼬집었다.갑작스러운 고통에 급히 팔을 뺀 소은정이 바로 말을 바꾸었다.“아, 실수했어. 나쁜 여자일 리가.”“소은정, 너 내 친구 아니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 들어야지!”소은정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아이고 내가 눈치가 없었네.하지만 곧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다시 물었다.“두 사람 그냥 비즈니스 파트너 아니었어? 계약은 체결했고?”한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지. 나한테 넘어온 이상 계약이 뭐야. 아주 영혼까지 다 바칠 것 같던데?”소은정은 존경어린 시선으로 한유라를 바라보았다.한유라의 쿨하다 못해 춥기까지 한 연애관이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지만 한유라의 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하긴... 유라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가 끊이지 않았지.흠모하는 남자들 중 대부분은 오빠들에 의해 조용히 “처리”당했던 소은정과 달리 한유라 곁에는 항상 남자가 끊이지 않는 건 물론이고 모두들 한유라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에게 푹 빠지곤 했었다.“민하준 마음에 들면 내가 며칠 빌려줄까?”한유라의 제안에 소은정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어휴, 빌릴 게 따로있지...“아니야. 내 스타일 아니야.”소은정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아무리 봐도 여자한테 끌려다닐 관상은 아닌데 말이야. 뭘 숨기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 유라한테 빠진 걸까?소은정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때 한유라가 바짝 다가왔다.“그럼 어떤 남자가 우리 은정 씨 스타일이실까? 전동하 대표 같은 스타일? 두 사람 사귀어?”지나치게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소은정이 오히려 당황하기 시작했다.“아니야...”“에이. 아까 차에서 내려서도 헤어지기 아쉬워서 꼭 붙어있는 거 내가 다 봤는데?”한유라가 입을 삐죽했다.이 앙큼한 계집애. 분명 뭔가 있어... 내 직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잠깐 침묵하던 소은정은 결국 방금 전 있었던 일을 전부 설명해 주었다. 나름 연애 좀 해봤다는 한유라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한숨
하지만 박수혁의 새카만 눈동자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너무 심하다고요? 내가 은정이 마음을 돌리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압니까? 그런데 윤시라 그 쥐새끼 같은 여자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됐어요. 그런데 너무 심하다고요?”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지 박수혁은 욕도 서슴치 않았다.괜한 간섭을 해서는 다 된 죽에 코를 빠트리고 난리야. 그딴 여자가 지사장? 웃기지도 않아.이때 차가운 미소를 짓던 박수혁이 허지호를 훑어보았다.“윤시라한테서 도대체 무슨 재미를 봤길래 이렇게까지 편을 드는 겁니까? 이런 짓을 벌일 정도로 멍청한 여자가 한국 지사 지사장을 맡을 수 있겠어요? 내가 허지호 씨를 애인 뒷바라지나 하라고 신포그룹 부대표 자리에 앉힌 건 아닐 텐데요.”박수혁의 말에 사무실에 정적이 감돌았다.허지호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실렸다.박수혁 대표가 나랑 시라 관계를 어떻게 눈치챈 거지?대외적으로 허지호와 윤시라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 사이였다. 사람들은 오히려 다른 후보자인 강성호와 더 친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박수혁 대표는 어떻게 알아낸 걸까?의아함과 동시에 그 동안 박수혁의 신뢰를 얻기 위해 들였던 모든 정성이 와르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부대표가 된 이상 박수혁의 측근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에 대한 감시를 멈추지 않다니...그 전에 교체되었던 수많은 부대표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났다.모두 이렇게 내쳐졌던 건가?허지호가 다급하게 두 사람 사이를 해명하려던 그때, 박수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 넘지 말고 부대표로서 할 일이나 제대로 해요. 이만 나가봐요.”신포그룹은 박수혁의 것, 허지호가 지금 마음껏 누리는 권력 또한 박수혁이 자비를 베풀어 나누어준 것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낀 허지호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섰다.사무실 앞에는 윤시라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서 있었다. 옷을 갈아입을 겨를도 없었는지 원피스에는 와인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머리카락은 끈적한 와인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
윤시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이한석은 박수혁의 수행비서, 박수혁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니 그의 말이 틀렸을 리가 없다.정말... 이렇게 회사에서 잘린다고? 정말 내 손으로 내 커리어를 전부 망쳐버렸다고?창백한 얼굴로 돌아선 윤시라는 비틀거리며 회사를 나섰다.이한석은 바로 1층의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내려가는 여자... 회사 앞에서 무슨 짓 벌일지도 모르니까 잘 지켜보세요. 태한그룹 건물 범위 밖을 벗어난 뒤에는 뭘 어떻게 하든 신경 쓰지 마시고요.”훌륭한 비서로서 이한석은 최대한 박수혁 대표가 신경 쓸 일이 없도록 모든 걸 완벽하게 처리해야 했다.마무리 작업까지 끝낸 이한석이 굳게 잠긴 사무실을 문을 돌아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휴, 대표님도 참 불쌍하시다니까... 소은정 대표를 위해 박씨 가문 전체를 적으로 돌렸는데 결국 이렇게 되셨네... 소은정 대표도 정말 대표님을 잊으셨나봐.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오는 걸 보면...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윤시라는 그와 함께 지사장 자리를 놓고 경장했던 강성호를 발견했다.당당한 모습의 강성호를 보니 자신의 꼴이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역시나 강성호 역시 윤시라를 발견하고 인사까지 건네는 친절함을 발휘했다.“시라 씨는 항상 나보다 한발 앞서나가네. 퇴사도 나보다 먼저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앞으로 잘 살아. 진심이야.”말을 마친 강성호는 혼이 나간 듯한 윤시라를 남겨둔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윤시라가 이런 짓을 벌이지 않았다면 지사장 자리를 그대로 빼앗겼을지도 모른다.어부지리로 힘을 별로 들이지 않고 지사장이 되었으니 강성호의 발걸음은 점점 더 가벼워졌다.사무실로 들어온 이한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박수혁은 등을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박수혁의 얼굴을 더 빛내주고 있었다.“대표님, 강성호 씨가 지금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필요한 물건만 건네고 바로 지사장으로 취임하라고 해.”하긴, 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으
차안에 정적이 감돌고 빗소리가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이런, 젠장!소은정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내가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이 산중에 기름까지 떨어지다니...절망스러운 상황에 항상 차분한 김하늘마저 눈을 흘겼다.“하, 우리가 착해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 안 그럼 넌 벌써 백 번쯤은 죽었어.”“그러니까!”한유라도 고개를 끄덕였다.어색한 미소를 짓던 성강희가 소은정을 향해 감격스러운 시선을 보냈다.“역시 나 생각해 주는 건 우리 은정이뿐이네.”“입 다물어. 지금 너 어디에 묻어버릴까 고민 중이니까.”시간이 흐르고 히터가 꺼지니 차안의 온도도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휴대폰 신호도 잡히지 않으니 지나가는 차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그 누군가 그들의 상황을 기적처럼 눈치채고 여기까지 와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퍼붓 듯 쏟아지던 비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야 잠잠해 졌다.욕설을 내뱉던 한유라도 지쳤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고 김하늘은 기운없이 창문에 기댄 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밖에서 휴대폰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신호를 찾고 있는 소은정도 주위를 둘러보았다.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조용한 주위, 마치 이 세상에 네 사람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외로워서일까? 왠지 더 추워지는 느낌에 소은정은 몸을 움츠려 어깨를 안았다.“설마 여기서 밤새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한유라의 질문에 멍하니 있던 김하늘도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꺼내 보았지만 여전히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차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온기까지 점점 사라지고 입술을 꼭 깨문 소은정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나가서 좀 돌아다녀 볼까?”“안 돼! 그러다 정말 얼어죽는다고!”한유라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곧이어 성강희가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차에 탔다.“신호가 안 잡혀. 여길 지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겠어.”성강희의 말에 소은정의 얼굴에 어이 없다는 얼굴이 실렸다.“이
성강희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고민할 틈도 없었다. 이건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네 사람 모두 차에서 내려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캠핑을 온다고 편하게 운동화를 신은 김하늘, 소은정과 달리 어딜 가든 하이힐을 고집하는 한유라는 오늘도 역시나 높은 구두 차림이었다.이때 성강희가 소은정을 향해 손을 뻗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김하늘과 하이힐 때문에 속도가 떨어지는 한유라를 바라보던 소은정이 말했다.“강희야, 넌 하늘이 부축해. 난 유라 끌고 올라갈 테니까. 서둘러.”“은정아, 유라야. 조심해!”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김하늘도 입술을 깨물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산사태가 일어날 때는 최대한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는 산에서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분간하기 조차 힘들었다. 휴대폰 플래쉬가 내뿜는 빛은 곧 어둠에 의해 삼켜지고 차가운 바람과 빗방울이 칼날처럼 네 사람의 얼굴을 스치고 흘러갔다.소은정의 손을 꼭 잡은 한유라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투성이었다.머릿속에 하얘지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붕괴로 인한 굉음은 마치 귓가에서 울리는 듯 생생했다.결국 하이힐을 벗어던진 한유라가 훌쩍이며 소은정의 손을 꼭 잡았다.“은정아, 괜찮아. 겁 먹지 마.”소은정, 그리고 한유라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였다.“유라야, 괜찮아. 강희랑 하늘이도 바로 우리 앞에 있어. 곧 따라잡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의연한 척 한유라를 다독였지만 뒤편에서 불어오는 강력한 바람과 더 세지는 빗줄기에 소은정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은정아, 유라야! 빨리 와!”바람 사이로 김하늘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빗방울이 마치 송곳처럼 얼굴을 때리고 한유라의 손을 꼭 잡은 채 움직이는 소은정의 발걸음도 점점 느려져만 갔다.네 사람 중에서 가장 약골인 한유라는 누가 봐도 그녀에게 짐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손을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한유라는 누가 뭐래도 그녀의 가장 좋은 친구였으니까.한편, 숨을 헐떡이는 한유라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