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시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이한석은 박수혁의 수행비서, 박수혁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니 그의 말이 틀렸을 리가 없다.정말... 이렇게 회사에서 잘린다고? 정말 내 손으로 내 커리어를 전부 망쳐버렸다고?창백한 얼굴로 돌아선 윤시라는 비틀거리며 회사를 나섰다.이한석은 바로 1층의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내려가는 여자... 회사 앞에서 무슨 짓 벌일지도 모르니까 잘 지켜보세요. 태한그룹 건물 범위 밖을 벗어난 뒤에는 뭘 어떻게 하든 신경 쓰지 마시고요.”훌륭한 비서로서 이한석은 최대한 박수혁 대표가 신경 쓸 일이 없도록 모든 걸 완벽하게 처리해야 했다.마무리 작업까지 끝낸 이한석이 굳게 잠긴 사무실을 문을 돌아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휴, 대표님도 참 불쌍하시다니까... 소은정 대표를 위해 박씨 가문 전체를 적으로 돌렸는데 결국 이렇게 되셨네... 소은정 대표도 정말 대표님을 잊으셨나봐.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오는 걸 보면...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윤시라는 그와 함께 지사장 자리를 놓고 경장했던 강성호를 발견했다.당당한 모습의 강성호를 보니 자신의 꼴이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역시나 강성호 역시 윤시라를 발견하고 인사까지 건네는 친절함을 발휘했다.“시라 씨는 항상 나보다 한발 앞서나가네. 퇴사도 나보다 먼저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앞으로 잘 살아. 진심이야.”말을 마친 강성호는 혼이 나간 듯한 윤시라를 남겨둔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윤시라가 이런 짓을 벌이지 않았다면 지사장 자리를 그대로 빼앗겼을지도 모른다.어부지리로 힘을 별로 들이지 않고 지사장이 되었으니 강성호의 발걸음은 점점 더 가벼워졌다.사무실로 들어온 이한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박수혁은 등을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박수혁의 얼굴을 더 빛내주고 있었다.“대표님, 강성호 씨가 지금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필요한 물건만 건네고 바로 지사장으로 취임하라고 해.”하긴, 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으
차안에 정적이 감돌고 빗소리가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이런, 젠장!소은정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내가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이 산중에 기름까지 떨어지다니...절망스러운 상황에 항상 차분한 김하늘마저 눈을 흘겼다.“하, 우리가 착해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 안 그럼 넌 벌써 백 번쯤은 죽었어.”“그러니까!”한유라도 고개를 끄덕였다.어색한 미소를 짓던 성강희가 소은정을 향해 감격스러운 시선을 보냈다.“역시 나 생각해 주는 건 우리 은정이뿐이네.”“입 다물어. 지금 너 어디에 묻어버릴까 고민 중이니까.”시간이 흐르고 히터가 꺼지니 차안의 온도도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휴대폰 신호도 잡히지 않으니 지나가는 차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그 누군가 그들의 상황을 기적처럼 눈치채고 여기까지 와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퍼붓 듯 쏟아지던 비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야 잠잠해 졌다.욕설을 내뱉던 한유라도 지쳤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고 김하늘은 기운없이 창문에 기댄 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밖에서 휴대폰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신호를 찾고 있는 소은정도 주위를 둘러보았다.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조용한 주위, 마치 이 세상에 네 사람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외로워서일까? 왠지 더 추워지는 느낌에 소은정은 몸을 움츠려 어깨를 안았다.“설마 여기서 밤새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한유라의 질문에 멍하니 있던 김하늘도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꺼내 보았지만 여전히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차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온기까지 점점 사라지고 입술을 꼭 깨문 소은정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나가서 좀 돌아다녀 볼까?”“안 돼! 그러다 정말 얼어죽는다고!”한유라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곧이어 성강희가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차에 탔다.“신호가 안 잡혀. 여길 지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겠어.”성강희의 말에 소은정의 얼굴에 어이 없다는 얼굴이 실렸다.“이
성강희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고민할 틈도 없었다. 이건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네 사람 모두 차에서 내려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캠핑을 온다고 편하게 운동화를 신은 김하늘, 소은정과 달리 어딜 가든 하이힐을 고집하는 한유라는 오늘도 역시나 높은 구두 차림이었다.이때 성강희가 소은정을 향해 손을 뻗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김하늘과 하이힐 때문에 속도가 떨어지는 한유라를 바라보던 소은정이 말했다.“강희야, 넌 하늘이 부축해. 난 유라 끌고 올라갈 테니까. 서둘러.”“은정아, 유라야. 조심해!”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김하늘도 입술을 깨물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산사태가 일어날 때는 최대한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는 산에서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분간하기 조차 힘들었다. 휴대폰 플래쉬가 내뿜는 빛은 곧 어둠에 의해 삼켜지고 차가운 바람과 빗방울이 칼날처럼 네 사람의 얼굴을 스치고 흘러갔다.소은정의 손을 꼭 잡은 한유라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투성이었다.머릿속에 하얘지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붕괴로 인한 굉음은 마치 귓가에서 울리는 듯 생생했다.결국 하이힐을 벗어던진 한유라가 훌쩍이며 소은정의 손을 꼭 잡았다.“은정아, 괜찮아. 겁 먹지 마.”소은정, 그리고 한유라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였다.“유라야, 괜찮아. 강희랑 하늘이도 바로 우리 앞에 있어. 곧 따라잡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의연한 척 한유라를 다독였지만 뒤편에서 불어오는 강력한 바람과 더 세지는 빗줄기에 소은정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은정아, 유라야! 빨리 와!”바람 사이로 김하늘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빗방울이 마치 송곳처럼 얼굴을 때리고 한유라의 손을 꼭 잡은 채 움직이는 소은정의 발걸음도 점점 느려져만 갔다.네 사람 중에서 가장 약골인 한유라는 누가 봐도 그녀에게 짐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손을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한유라는 누가 뭐래도 그녀의 가장 좋은 친구였으니까.한편, 숨을 헐떡이는 한유라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
태양빛이 어두운 밤의 장막을 가르고 대지를 비춘다.하지만 햇살에 눈이 부신 듯 소은정의 눈에 떠오르는 건 비바람이 몰아치는 산길을 걷는 그녀의 모습이었다.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쉬지 않고 달리던 소은정은 발을 헛디디고 심연으로 떨어진다...무중력 공간으로 떨어지는 듯한 소름돋는 느낌에 소은정이 악몽에서 깨어나듯 눈을 번쩍 뜬다.식음땀이 이마를 따라 흘러내리고 낯선 공간을 둘러보던 소은정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어질거리는 머리는 여전히 욱신거렸고 손을 뻗어 만져보니 붕대가 감긴 상태였다.철컥!라이터를 켜는 소리에 소은정이 고개를 돌리고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전동하...?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소은정의 눈이 커다래진다.정말 소은정이잖아? 이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한손에는 라이터를 다른 한 손에는 노란 긴 막대기 같은 물건을 쥐고 있는 전동하의 모습에 소은정은 미간을 찌푸리다 잔뜩 쉰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나 죽은 거예요? 향이라도 피우려는 건가?”또다시 지금 여기가 현실세계가 맞는 건가 의심스럽기 시작했다.한편 소은정의 목소리에 움찔하던 전동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걱정과 가쁨이 담긴 눈동자로 다가오는 전동하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소은정의 모습을 살피고 또 살폈다.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치고 소은정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한참을 망설이던 전동하가 겨우 질문 하나를 뱉어냈다.“내가 누군 지 알아보겠어요?”전동하의 질문에 소은정은 괜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글쎄요? 저 아세요?”소은정의 말에 전동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뭐야? 그냥 장난 좀 친 건데 왜 이래?생각보다 진지한 전동하의 리액션에 깜짝 놀란 소은정이 해명하려던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성강희, 김하늘과 한유라였다.정신을 차린 소은정의 모습에 친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왔다.“은정아, 드디어 깼네. 이 계집애야. 진짜 깜짝 놀랐잖아!”한유라가 팔을 뻗어 소은정을 안으려던 그때 전동하가 그녀의 앞을 막아
소은정의 질문에 김하늘이 대답했다.“운이 좋았지 뭐. 다행히 우리가 도망친 쪽은 괜찮았나 봐.”휴, 다행이다...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은정의 모습에 김하늘이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위험했었어. 전동하 대표가 마침 와서 우리를 구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 정말 그 산속에 묻혔을지도 몰라.”한유라도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난... 전동하 그 남자 별로였거든? 샌님처럼 생겨서는 왠지 뒤로는 나쁜 짓을 할 것 같은 관상이랄까? 근데 내가 오해했던 것 같아. 너 쓰러진 거 보고 나도 진짜 너무 무서웠었어. 전동하 대표 덕분에 우리 다 산 거라고. 네가 여기로 온 건 어떻게 온 건지 바로 달려왔더라. 솔직히... 나 남자한테 이렇게 감동받은 거 진짜 오랜만이야.”김하늘은 두 손을 꼭 모은 채 황홀한 표정을 짓는 한유라의 이마를 톡 두드렸다.“야, 넌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하고 싶어?”입을 삐죽거리며 이마를 만지작거리던 한유라가 다시 소은정 옆에 앉았다.“어쨌든 널 위해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다른 건 몰라도 널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확실하더라.”한유라의 말에 소은정이 가슴이 간질거렸다.비가 거세게 내리는 밤, 혼자 차를 몰고 한없이 그녀를 찾았을 전동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만약 운이 좋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행여나 산사태 구역으로 들어갔다면 전동하도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목숨 걸고 그녀를 구해준 사람에게 깨어나자마자 장난이나 쳤으니...죄책감이 더 밀려들었다.“지금도 상황이 좋은 건 아니야. 산사태로 도로가 전부 막혀서 우리 지금 이 마을에 완전히 갇힌 상태라고. 구조 차량이 오길 기다리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어쩐지... 병원 상태가 안 좋다 했어...”소은정은 작은 진료소 수준의 병원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물론 어제 상황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천국이나 다름없었지만.이때 한유라가 문득 물었다.“너 이 은혜 어떻게 갚을 거야? 나 같으면 바로 사귀었다.”한유라의 말에 소은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지만 겉으로
성강희의 말에 병실이 적막에 잠겼다.살았다는 안도감과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공포감이 동시에 느껴지며 모두들 묘한 감정이 휩싸였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장착한 전동하가 병실 문을 빼꼼 열었다.“들어가도 되죠?”소은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한유라가 소은정의 옆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소은정을 향해 나 잘했지라는 표정까지 지어보이는 한유라를 바라보던 전동하의 입가에 미소가 실렸다.어휴, 이런 걸 친구라고...소은정은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돌렸다.이때 성강희가 어색한 기침과 함께 먼저 입을 열었다.“은정이도 깨어났겠다 우리도 일단 좀 나갈까? 가족들한테 연락드려야지.”성강희가 병실을 나서고 김하늘도 그의 뒤를 따랐다.마음 같아서는 병실에 남고 싶은 한유라였지만 전동하, 소은정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한편, 손에 달걀 두 개를 쥐고 있는 전동하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조각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하얀 손으로 계란 껍질을 까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묘하게 더 따뜻하게 다가왔다.“시골이라 먹을 게 별로 없네요. 의사선생님 댁에서 계란 두 개 빌려왔거든요? 일단 이거라도 먹어요. 피도 많이 흘렸는데...”어색하게 계란을 받아든 소은정이 망설이다 말했다.“미안해요. 내가 가끔씩 이상한 장난기가 생길 때가 있어서... 그리고 기억 잃은 척하는 거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단 말이에요.”어색한 미소와 함께 그의 눈치를 보는 소은정의 모습에 전동하는 화도 사르륵 풀렸다.전동하의 따뜻한 미소에 병실이 왠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그래요. 환자니까 한번은 봐줄게요.”남은 계란의 껍질을 까는 전동하의 손이 살짝 떨려왔다.그 커다란 산속에서 소은정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분위기가 묘하게 어색해지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소은정이 물었다.“여긴... 마을 병원인가 봐요?”소은정의 질문에 흠칫하던 전동하가 싱긋 웃었다
솔직히 박수혁과 헤어진 뒤로 말로는 좋아한다 사랑한다 하지만 진짜 사랑이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지만 전동하의 모습을 보면 볼 수록 마음이 흔들렸다.S에서 교통사고가 있었을 때는 우연이라고 쳐도 이번에는...이곳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전동하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달려와줬다.그녀가 위험해질 때마다 한줄기 빛처럼 다가오는 전동하... 이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어색한 침묵이 몇 초간 흐르고 전동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실 어제 제 생일이었어요. 그래서 은정 씨랑 저녁이라도 먹으로 유라 씨 회사로 갔었죠. 저녁 식사가 안 되면 야식이라도 같이 먹으려고...”멋쩍게 웃는 전동하의 모습에 소은정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생일이었어? 왜 말을 안 한 거야... 사람 미안하게.“그런데 유라 씨 회사로 갔더니 비서님께서 사운드 바로 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갔더니 사장님이 강희 씨랑 같이 나갔다고 하셨고... 성강희 씨 집으로 갔더니 일하는 아주머니가 별똥별 보러 한지산으로 갔다는 거예요...”기막하게 엇갈렸던 어제 상황이 떠오르는 듯 표정이 살짝 굳던 전동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사실 그냥 포기하고 가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점점 오기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별똥별을 볼 수 있나 인터넷에 검색해 봤더니 폭우에 산사태 위험까지 있다고 해서 은정 씨한테 바로 전화를 걸었었죠. 그런데 전화기가 꺼져있다고 해서 직접 왔던 거예요.”덤덤한 목소리로 어제 상황을 설명하는 전동하의 모습에 소은정은 말문이 막혔다.고맙다는 말 한 마디로 전동하의 노력을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소은정이 갔었던 곳을 전부 뒤지고 다녔고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위해 한달음에 달려와준 전동하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며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누구보다 진심인 전동하의 마음을 제멋대로 해석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일방적인 사랑이 얼마나 힘들고 비굴한지 소은정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아파왔다.과거의 일들까지 떠오르며 가
소은정의 갸느다란 손을 잡은 전동하의 손은 크고 따뜻했고 깊은 눈동자에는 단호함으로 가득했다.“은정 씨가 그동안 많이 힘들었던 거 알아요. 하지만 사람이 준 상처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잊는 거라고 하잖아요. 은정 씨 기억속에 남은 고통스러운 추억... 좋은 기억으로 덮어주고 싶어요. 제가 반했던 그 모습처럼... 은정 씨가 항상 당당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은정 씨를 위한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좋아요.”소은정의 마음속에 조금의 따뜻함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 자체로도 큰 보람일 테니까.한편, 아직 늦겨울임에도 소은정의 마음만은 봄이 된 듯 따뜻했다.오직 그녀의 모습만 비친 전동하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소은정도 마음을 다잡았다.그래. 어쩌면 진작 걸어나왔어야 할지도 몰라. 새 인생을 시작해야지...확실한 행복이 눈앞에 있는데 굳이 포기할 필요가 있을까?그녀의 마음을 누르고 있던 돌멩이가 천천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박수혁 그 남자 때문에 평생 고통스러워할 수는 없어...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소은정의 모습에 전동하는 자신의 말에 그녀가 난처해진 걸까 싶어 살짝 실망한 얼굴로 손을 빼내려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갸늘지만 따뜻한 소은정의 손이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움찔하던 전동하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조금이라도 잘 못해 주면... 바로 차버릴 거예요.”소은정이 싱긋 웃어 보였다.이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한 발 다가서니까 이렇게 편한데... 뭘 그렇게 망설였나 몰라...한참을 멍하니 있던 전동하의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였다. 항상 차분하던 전동하가 흥분하며 전동하의 손을 꼭 잡았다.“아...”전동하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손에 힘을 꼭 주었고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그제야 후다닥 손에 힘을 푼 전동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당... 당연히 잘해 줘야죠. 그러니까... 내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