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가 주름이 질 때까지 밀당 아닌 밀당이 계속되고 놀리는 건 이쯤 하자는 생각에 전동하는 자연스레 품을 내주었다.이때 댄스타임이 시작되고 경매장에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리듬에 맞춰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스텝을 밟던 두 사람의 입술이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맞닿았다.영화 같은 장면에 다른 커플들도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오고 곧 다들 무대로 올라오기 시작했다.로맨틱한 키스가 끝나고 전동하가 볼이 살짝 달아오른 소은정을 내려다 보았다.“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는 거예요.”한편, 살짝 가쁜 숨을 몰아쉬던 소은정은 그제야 경매장에 설치된 무대 정중앙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키스를 나누었다는 걸 발견하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윽, 미쳤어, 미쳤어.’입술을 꾹 깨문 소은정이 전동하의 손목을 잡고 무대를 내려갔다.‘쪽팔려서 진짜...’한적한 구석 자리로 이동한 뒤에야 소은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람들 다 보는 데서 우리 도대체 뭐 한 거예요?”하지만 전동하는 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뭐 어때요. 우리가 뭐 불륜도 아니고.”‘하, 이럴 때 보면 이상하게 개방적이라니까.’깊은 한숨을 내쉰 소은정이 화제를 돌렸다.“됐어요. 난 경매품이나 보러 가야겠에요.”평소 주얼리에 관심이 많은 소은정이 발걸음을 옮겼다.사실 골동품 경매에 더 관심이 많은 건 전동하일 뿐, 해마다 이쪽에 쓰는 돈도 만만치 않았지만 워낙 안목이 뛰어나 몇 년만 지나도 가치가 훨씬 뛰어오르는 아이들만 쏙쏙 골라내니 소은정도 그게 놀라울 따름이었다.전동하가 그녀의 뒤를 따라가려던 그때, 윤이한이 부랴부랴 달려왔다.“한 대표님이 급한 일로 먼저 가보셔야 한답니다. 지금 바로 얘기 나누실 수 있을까요?”전동하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소은정이 쿨하게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가요. 열심히 돈 벌어야죠.”이에 피식 웃던 전동하가 그녀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혼자 보고 있어요. 곧 돌아올 거니까 너무 멀리 가지 말고요
소은정은 엄지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화려한 조명 아래 반짝이는 엄지환의 눈은 자수성가한 사업가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열정과 자신감이 깃들어있었다.싱긋 미소 짓던 소은정이 입을 열었다.“계속해 봐요.”“프로젝트 연구 방향을 우주 항공 쪽으로 바꿀 생각입니다. 비록 우주 항공 쪽은 시장 독점 현상이 심각하지만 디자인 쪽 테크는 아직도 블루오션이에요. 저희가 얻은 연구성과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고요. 지금이라도 방향을 튼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엄지환이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괜히 손목에 걸린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소은정이 물었다.“그러니까 이미... 계획까지 다 세워뒀다는 말로 들리는데요?”“네. 방금 전 항공기술 관련 그룹 대표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최근 몇 년간 저희 나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건 사실이지만 미국, 러시아 등을 비롯한 우주 항공 강국과 비교했을 때 뒤떨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저희가 얻은 성과를 기반으로 연구 방향을 바꾼다면 항공 기술 시장 독점 판도 자체를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담담하게 말했지만 왠지 듣는 사람마저 투지를 불타오르게 하는 목소리에 소은정은 점점 더 빠져들기 시작했다.잠시 후, 엄지환의 얘기를 끝까지 경청한 소은정이 진심어린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엄지환을 바라보았다.“일리가 있네요. 한번 해보세요. 좋은 결과 기대할게요.”수없이 많은 기업들이 설립되고 또 수없이 많은 기업들이 도태되는 이 잔인한 시장속에서 왠지 엄지환만은 언젠가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소은정이었다.‘그리고 그 원석을 내가 먼저 찾았으니 절대 빼앗길 순 없지.’이때 경매장 이곳저곳을 누비던 손재은이 또 소은정을 발견하고 다가왔다.“어머, 엄 대표님도 계셨네요?”고개를 돌린 손재은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바라보았다.‘아까 금방 바람 현장을 들켜놓고 바로 또 단둘이 있는다고? 세상에... 무섭다, 무서워.’눈빛을 보아하니 또 제멋대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해명하는 것조차 귀
다시 일어선 전동하가 소은정의 손을 잡으며 이리저리 훑어보았다.“다친 데는 없어요?”그의 질문에 소은정이 고개를 저었다.“난 당연히 괜찮죠. 구태정 대표, 정말 여기로 온 거예요?”이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대충 지어낸 말은 아닌 건가 싶어 소은정이 걱정스레 물었다.“정말 온 거 맞아요. 게다가 혼자 온 것도 아니던데요?”전동하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소은정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경매장 로비.비틀비틀 밖으로 걸어나온 손재은은 마침 차에서 내리는 구태정을 발견한다.평소 우아한 모습과 너무 달라서일까? 아니면 그냥 관심 자체가 없는 것일까?구태정은 와이프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전시홀에서 상황을 지켜봤던 사람들 중 몇몇이 조심스레 그녀의 뒤를 따랐다.주위를 대충 둘러보던 소은정은 따라나온 사람들 중 남자는 전동하 한 명뿐인 걸 발견하고 속삭였다.“볼일 있으면 가봐도 괜찮아요.”하지만 전동하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 안 바쁜데요? 은정 씨 곁에 있을래요.”전동하의 말에 소은정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옆에 있는 여자들은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눈빛을 보내왔다.바로 그때, 구태정의 차에서 늘씬한 미인 한 명이 내렸다.게다가 뛰어난 패션감각까지, 어딘가 오버스러운 손재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아우라였다.하지만 여자가 가까워질수록 소은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야? 저 여자 문상아잖아? 구태정의 내연녀가 문상아였어? 이상준이랑 만나던 사람이 어떻게 구태정이랑...’구태정도 못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몸매가 살짝 망가진데다 탈모도 어느 정도 진행되어 아예 삭발로 깎아버린 탓에 어느 정도 느끼한 감이 없지 않았다.‘세상에, 요즘 정말 궁하긴 한가 보네...’하지만 구태정의 에스코트를 받아 차에서 내린 문상아가 구태정의 품에 안긴 순간, 이상하리만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소은정도 눈썹을 치켜세웠다.자연스레 서로의 허리를 감고 눈을 맞추는 두 남녀는 누가 봐도 서로 깊은 사랑에 빠진 커플이었다.하지만, 다음
왠지 말 속에 뼈가 들어있는 것 같아 흠칫하던 전동하가 어깨를 으쓱했다.“글쎄요.”하지만 소은정은 애매한 대답으로는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질문을 이어갔다.“동하 씨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지금 재은 씨는 구태정 대표의 외도 증거를 전부 잡고 있어요. 구태정 대표, 돈 한 푼 못 챙겨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고요. 아니지. 외도까지 저질렀으니 위자료를 지급해야 할지도 몰라요. 지금 구태정 대표가 운영하고 있는 회사도 자금적으로 위기니... 재은 씨 친정 도움이 없다면 아마 곧 파산하겠죠. 지금 이혼하는 건 구태정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에요. 만약 동하 씨가 똑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진심으로 궁금해진 소은정이 눈을 반짝이고 전동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크, 괜히 따라왔다. 괜히 나한테까지 불똥이 튀었잖아.’“은정 씨, 날 저런 남자랑 비교하지 말아줘요. 그런 만약에는 아예 성립이 안 된다고요. 그리고 난 재은 씨 이혼하는 거 찬성이에요. 재산 분할 한 푼도 안 해주는 것도요.”그녀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한 건 아니었지만 전동하의 대답이 꽤 마음에 든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던 소은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까 재은 씨... 귀걸이 하나 낙찰받는데도 망설이는 걸 보면... 경제적인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던데요. 반면 아까 구태정 대표가 탄 차, 신상 맞죠? 그렇다는 건... 구태정 대표가 몰래 재은 씨 재산을 빼돌리고 있다는 거겠죠?”“역시, 우리 은정 씨 똑똑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전동하가 고개를 끄덕였다.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문상아를 힐끗 바라본 소은정이 기지개를 켰다.“이제 들어가요. 이제 곧 경매 시작이에요.”드디어 무거운 화제에서 벗어난 전동하가 잔뜩 신난 얼굴로 소은정의 손을 잡았다.“오늘 핑크 다이아몬드도 경매품으로 나온다던데. 우리가 낙찰받을까요? 브로치로 만들면 예쁠 것 같은데...”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두 사람이 경매장에 들어서고...좌석을 확인한
치열한 입찰 경쟁속에서도 전동하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미간 사이에서 느껴지는 여유는 마치 이 A시에서 박수혁과 돈으로 배틀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한편, 입찰가가 100억까지 치솟자 소은정은 겨우 브로치를 만드는 다이아몬드에 100억을 퍼붓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그럼에도 아직 차분한 소은정과 달리 임유경은 불안한 듯 자꾸만 박수혁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그녀의 말 한마디가 박수혁의 승부욕을 불태운 게 아닌가 싶어 죄책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임유경이 박수혁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수혁 씨, 그만해요. 저 다이아몬드... 이쁘긴 하지만 그 정도로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에요.”‘게다가 오빠가 수혁 씨한테서 100억짜리 다이아몬드를 뜯어낸 걸 알면 정말 화낼지도 모른다고요.’하지만 박수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힐끗 돌아보았을 뿐, 다시 경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다이아몬드를 낙찰받기 전엔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한 단호한 표정에 임유경은 불안하면서도 왠지 모를 설렘과 희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경매 분위기가 점점 고조에 이를 무렵,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소은정이 문득 입을 열었다.“200억.”오늘의 최고가 달성에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소은정이 나섰으니 전동하는 당연하다는 듯 물러섰고 박수혁마저도 침묵을 유지했다.낙찰을 의미하는 망치 소리 세 번과 함께 오늘 경매의 주인공, 핑크 다이아몬드는 소은정이 낙찰받게 되었다.MC의 안내에 따라 무대 위로 올라간 소은정은 다이아몬드와 함께 기념 촬영을 진행했다. 여유롭게 사람들의 시선을 만끽하는 그녀를 임유경은 동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그 뒤로 다시 경매가 이어지고 박수혁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평범한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를 낙찰받았다.다이아몬드반지?박수혁의 행동에 여성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집중되었다.반지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결혼, 프러포즈.설마... 박수혁 대표가 결혼이라도 하려는 건가?
순간, 임유경은 머리에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그래서 오늘 수혁 씨가...’소은정의 등장과 함께 오늘 어딘가 이상했던 박수혁의 모습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애초에 다이아몬드 원석을 낙찰받으려고 했던 것도 그녀의 예쁘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소은정에게 주고 싶었다는 사실 역시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그래서... 소은정 대표가 입찰하니까 바로 물러섰던 거야. 더 끼어들면 소은정 대표가 화낼까 봐 무서웠나? 그런데 소은정 대표는 유부녀에 애까지 있잖아. 그런데도... 그런데도 좋은 거야?’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낸 임유경이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떨리는 손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오빠, 수혁 씨랑 소은정 대표... 두 사람 무슨 사이야?”“...”그녀의 질문에 잠깐 침묵하던 임춘식이 대답했다.“유경아, 넌 아직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는 게 많을 거야. 어쨌든... 몰라도 되는 일이야. 알려고도 하지 마.”이 말을 마지막으로 임춘식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영혼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곁으로 박수혁의 기사가 다가왔다.“저택으로 모실까요?”하지만 임유경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시 소은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비서가 건넨 상자를 힐끗 바라보던 소은정은 그저 고맙다고 말한 뒤 상자를 받지 않고 창문을 닫아버렸다.난처한 얼굴의 비서가 안절부절 못하며 자리를 지키는 사이 대표들과 인사를 마친 전동하가 다시 돌아오고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유유히 주차장을 나섰다.그제야 시선을 거둔 임유경이 기사를 향해 애써 웃어보였다.“그럼... 부탁드릴게요.” 차에 탄 임유경은 밀려드는 피곤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혼자 설레였다가 혼자 실망하고 혼자 충격받고.오늘 경매는 임유경에게 롤러코스터와도 같은 행사였으니까.한편, 휴대폰을 바라보던 소은정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뭐가 그렇게 재밌어요?”“유라가 돌아온대요.”전동하의 질문에 소은정이 대답했다.“C시 지사를 아주 꽉 잡기 전
이때 이한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소리쳤다.“저 안에 도련님께서 계십니다!”박수혁의 차가운 시선이 매섭게 꽂히고 이한석 역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대표님께서 도련님은 아직 어려서 장례식장에 발을 들이면 안 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도련님과 놀아드리다 졸리다고 하셔서 저 방에 눕히고 온 게 다입니다. 방문을 닫지도 않았는데 어떻게...”이한석이 부랴부랴 변명을 이어갔지만 박수혁의 귀에는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은정아, 어서 내려와...”누군가 일부러 꾸민 짓인 게 분명하지만 상대 역시 소은정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을 것이다.한편,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맞는 소은정 역시 안색이 안 좋긴 마찬가지였다.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살짝 넘긴 소은정은 난간을 휙 넘어간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밖에서 창문을 여니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밀려나오고 그 사이로 어린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연기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것인지 아이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소은정이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질식해 죽었을 게 분명한 상황.연기가 조금 걷히고 아이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소은정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저 아이는... 그날 지혁이랑 같이 있던... 박수혁 아들이잖아.’하지만 지금은 그딴 걸 생각할 여유가 없는 상황, 소은정은 망설임없이 손을 내밀었다.“자, 손 잡아.”한편, 이미 지칠대로 지친 박시준은 누군가 그를 구하러 와줬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듯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그의 소리없는 부름에 유일하게 응답해 준 소은정은 그에게 구세주 같은 존재, 박시준은 망설임없이 손을 내밀었다.소은정이 바로 아이를 안아 방에서 꺼내고 그녀가 빨리 내려올 수 있도록 사다리가 배치되었다.그리고 그 사다리를 잡고 있는 사람은 바로 박수혁이었다.고개를 든 박수혁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내려와. 조심해...”하지만 아이를 안고 내려갈 순 없는 노릇.“자, 네가 먼저 내려가자?”하지만 너무 겁을 먹은 건지 아이는
하지만 소은정이 마땅한 핑계를 생각하던 그때, 손재은이 굉장히 유혹적인 미끼를 던졌다.“내가... 내가 친구가 없어서 그래요. 지금 나한테 와주면 어떻게든 보답할게요. 이혼하고 구태정 회사 지분 받으면 그 지분 은정 씨한테 팔게요. 어때요?”손재은도 물색없는 사람은 아니니 두 사람의 사이가 그 정도로 친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 던진 제안이기도 했다.역시나, 방금 전까지 핑계를 생각하던 소은정이 벌떡 일어났다.“별말씀을요. 저도 여자인데 재은 씨 마음 백 번 이해하죠. 정말이에요...”부리나케 옷장에서 베이지색 원피스, 얇은 카디건을 꺼내 대충 걸친 소은정이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잠시 후, 손재은의 집에 도착한 소은정은 지나치게 화려한 집안 인테리어에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세상에... 뭐가 이렇게 많아. 발 디딜 틈이 없네.’힐끔 시선을 돌리니 저쪽 테이블에는 현금 다발이 가득 쌓여있기까지 했다.소은정이 조잡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집안을 둘러보고 있던 그때, 빨개진 눈의 손재은이 그녀를 맞이했다.평소 누구보다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던 그녀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왔어요? 어서 앉아요.”“제 도움이 필요하신가 봐요?”소파에 앉은 소은정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은정 씨랑 얘기 좀 나누고 싶어서요. 이 바닥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은정 씨니까...”분명 칭찬이었지만 소은정은 왠지 기쁘지 않았다.“그래서... 이혼하기로 한 거예요?”욕실에서 대충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낸 손재은이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아니요. 합의 이혼은 물 건너 간 것 같고. 그래서 소송 걸려고요.”“정말 이혼하기로 결심했나 보네요.”“반평생 바보처럼 살았잖아요. 남은 생은 당당하게 살고 싶어요. 그 자식 이제 공식적인 장소에까지 내연녀를 대동하고 다니기 시작하는데... 앞으로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아, 아까 은정 씨한테 한 말... 은정 씨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