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잉크가 번지면서 커다란 얼룩이 생겼다.하연은 겨우 자세를 바로잡고 글씨를 써냈지만, 그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글씨가 아주 못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었다.상혁은 그녀가 쓴 글자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그렇게 쓰기 어려웠어?”예전에도 몇몇 명문가 집안 자제들과 같은 서예 수업을 들었는데, 하연은 항상 성적이 가장 낮았다. 그래서 늘 선생님에게 남아 추가로 연습해야 했고, 한 글자를 열 번씩, 합쳐서 백 번을 써야 했다. 그때 하연은 매우 괴로워했다.“나는 원래 글쓰기에 소질이 없다고요!” 하연의 오빠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나갔지만, 상혁만은 남아서 하연의 손을 잡고 글씨를 가르쳤다. 그렇게 해서 겨우 글씨를 절반 정도 배울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연은 그 시절을 거의 잊어버렸다.하연은 갑갑한 기분에 붓을 던져두고, 얼음 통에서 에비앙 물병을 꺼내어 한껏 들이마셨다. 물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리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제야 조금 긴장이 풀렸다.상혁은 가정부에게 글씨를 가져가서 액자로 만들라고 지시하고는 하연에게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하연은 노트북을 켜고 ‘왕씨 가문’을 검색했다.“왕씨 가문의 현재 가주는 왕아영이라는 사람인데, 올해 마흔이고 아직 결혼은 안 했어요.”상혁은 그녀를 힐끔 보며 대답했다.“그 사람을 만났어?”하연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여자는 계속 나에게 불만을 품고, 마치 자기 인생의 모든 불행이 내 탓인 것처럼 원망하는 것 같아요. 내가 왕씨 가문에 그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라면서요.”하연은 분노에 가득 차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했다.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자기 무릎 위로 끌어올리며 말했다.“왕씨 가문은 아들이 없이 딸 둘만 있는 상황에서, 왕명주는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한씨 가문에 시집갔고, 난산으로 죽으면서 왕씨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지. 그래서 왕아영이 집안을 이끌어야 했고, 지금까지 결혼도 못 했으니, 불만이 있는 건 당연
하경은 반쯤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사람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어?] “그 사람 때문에 신경 쓰는 게 아니에요. 뭔가 내가 놓친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지만 하연도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그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가슴 한구석에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한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틀 안에 답을 줄게.] ...운성시는 관광 도시로서, 상업화된 B시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곳은 독특한 수상 도시의 정취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고, 강변을 따라 펼쳐진 풍경은 도시 전체를 감싸 안으며 여유롭고 느긋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듯한, 그런 곳이었다.하연이 BN그룹의 내부로 들어서자, 직원들은 일에 쫓기는 기색 없이 여유롭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마치 바삐 출퇴근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듯 보였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차분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최 사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BN그룹 대표 오기용이라고 합니다. 운성시에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오기용은 마흔 가까이 되어 보였고, 예의 바르고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오 대표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회의실에 앉아 협력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다. “태양광 산업의 변화에 따라 앞으로는 확실히 전망이 있을 겁니다. 게다가 국가에서도 기지국 건설을 적극 지원하고 있고, B시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산업에서 자금과 기획을 낼 수 있는 회사는 많지 않습니다. DS그룹은 비록 후발 주자이지만, 무대는 자신 있게 세울 수 있을 겁니다.” 하연이 요약하듯 말했다. 오기용은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농담 섞인 말을 건넸다. “듣자 하니 DS그룹의 첫 번째 목표는 HD그룹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아쉽게도 HD그룹은 이미 혜성그룹과의 협력을 발표해 버렸죠. 결국 우리 BN그룹이 DS그룹의 마지막 선택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그는 악의 없이 말했지
하연은 이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손 선생님, 아니, 손 사장님의 가게는 그렇게 큰데, 사장님께서 직접 물건을 받으러 오셔야 할 정도로 인력이 부족한가요?” 이현은 살짝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최 사장님의 인플루언서 효과가 사라지니 저희 가게도 망할 지경이에요. 지금까지도 성훈이의 월급을 못 줄 뻔했죠.” 이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연의 농담에 장단을 맞추며 유쾌하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하연도 미소를 지었다. ...오기용의 이름을 대니 효과가 있었다. 가게 주인은 즉시 차를 꺼내주었고, 이현이 하연을 도와 차를 골라주었다. “이 차가 가장 정통적이고, 맛도 깊습니다. 차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절대 놓치지 마세요.” 하연은 찻잎 한 줌을 손에 쥐고 코끝에 대어 그 향을 맡았다. “향이 정말 좋네요.” 이현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제 기억으로는 하연 씨가 차를 잘 안 마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부 대표님을 위한 건가요?” 하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게 주인에게 차를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며 웃었다. “저는 차를 잘 고를 줄 모르는데, 다행히 손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상혁 오빠가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이현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분간 부 대표님께서 우리 가게에 오실 일은 없겠군요.” 이현의 농담에 하연은 어딘가 애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두 사람은 나란히 가게를 나섰다. 때마침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고, 이현은 길가에서 우산을 하나 사서 하연과 함께 썼다. 하연은 거절하려고 했다. “제가 비서에게 데리러 오라고 할게요.” 이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차가 들어올 수 없을 거예요. 이 골목은 굽이굽이 돌아가니까, 하연 씨 비서가 찾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조금 전 하연이 들어왔을 때도 길이 복잡했으니, 이현의 말이 맞았다. 하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
하연은 가게 주인의 말을 듣고 즉시 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씨 가문은 대대로 학문을 중시하는 집안이잖아요. 이런 기회는 놓칠 수 없죠. B시에 돌아가면 같이 한 번 보러 갈래요?” 비가 내리고 가로등 불빛이 비치자, 하연의 머리카락은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하연이 미소를 지으며 초대했을 때, 이현은 그 따스한 분위기에 전혀 저항할 수 없었다. “마침 구경도 할 겸, 우리 가게를 보수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게다가 하연 씨가 직접 저한테 같이 가자고 했으니,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이현은 미소를 지으며 갓 구워낸 호떡을 포장해 하연에게 건넸다. 호텔이 멀지 않아서, 이현은 하연을 호텔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두 사람은 내일의 출발 시간을 약속한 뒤, 더 이상 말없이 돌아섰다. 날씨는 약간 쌀쌀했다. 하연은 팔짱을 끼고 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마음속에서 의문이 피어올랐다. ‘손이현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어.’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인 하연은 이미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문 앞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긴 복도 끝,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연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에 다가서자, 정태훈이 곤란한 표정으로 한쪽에 서 있었다. “최 사장님, 드디어 오셨네요. 전화해도 받지 않으셔서...” 태훈의 긴장한 모습에 하연은 즉시 소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파에는 한 남자가 거침없이 앉아 있었다. 셔츠 단추 두 개가 풀려 탄탄한 가슴이 드러나 있었는데, 그는 눈을 감은 채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자 눈을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돌아왔네.”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하연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아니라 놀라움과 약간의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부상혁은 그녀의 손에 든 음식 상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밖에 나갔었구나. 왜 정 실장을 데리고 가지 않았어?” 만약 손
다음 날, 하연이 눈을 떴을 때 상혁은 이미 방에 없었다.아침 식사 중에 하연은 정태훈에게 입찰 상황에 관해 물었다. 둘이 모든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그럼 오늘 상혁 오빠는 정말 바쁘겠네.”어차피 오전부터 준비가 시작되고, 오후에 입찰이 진행되니 하연에게는 외출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네, 맞습니다.”“나 잠깐 나갔다 올게. 저녁 8시 전에는 돌아올 거야. 상혁 오빠가 나를 찾으면, 내가 축제에 갔다고 전해줘. 괜히 걱정하지 말라고도 해주고.”태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살짝 놀란 듯 물었다.“혼자 가시려고요?”하연은 태훈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정 실장도 나랑 같이 가고 싶은 거야?”태훈은 당황한 듯 웃으며 손을 저었다.“최 사장님, 농담 마세요. 저는 그저 사장님의 안전이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부 대표님이 사장님을 혼자 보냈다는 걸 아시면 분명 화를 내실 거예요.”하연은 한숨을 쉬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자세한 설명 대신 차분하게 말했다.“정 실장이 지금 하는 말, 나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아. 지금 정 실장이 충성을 다해야 할 사람은 나야, 상혁 오빠가 아니라.”태훈은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외출하기 전, 하연은 샤워 했다.어제저녁 깊은 밤.하연이 어렴풋이 잠들어 있던 사이, 상혁이 그녀를 뒤에서 꼭 안아왔다. 상혁의 몸에서는 비 내린 뒤의 습기와 샤워 후의 잔향이 묻어 있었다. 뜨겁고 강렬한 그의 체온이 하연에게 전해졌고, 목소리는 낮고 잠겨 있었다.하연은 반쯤 깨어서 나지막이 물었다.“오빠...”상혁은 말없이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했다. 하연이 완전히 깨어났을 때, 결국 말했다.“나, 샤워 안 했어요.”“나중에 하자.”그 말과 함께 상혁은 하연을 불빛 아래로 이끌었다. 그는 하연이 먼저 움직이길 원했다. 하연은 이런 순간들에 대해 어느 정도 보수적이었다. 매번 그녀는 불을 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상혁은 고집스럽게 불을 켜둔 채 그녀가 모든
꽃등이 성벽 위에 걸려 있고, 사회자는 무대에 서서 수수께끼를 내고 있었다.“이번 문제는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사자성어를 맞추는 문제입니다.”관광객들이 수군거렸다. 이내 누군가 손을 들며 답을 말하려 했고, 이현도 천천히 손을 들었다.그는 흰 셔츠를 입고 있어 군중 속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사회자는 이현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말했다.“말씀해 주세요.”무대 뒤 대형 스크린에 이현의 얼굴이 비쳤다. 아주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에게서 묻어나오는 차분한 기운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전전반측.”사회자는 즉시 반응했다.“정답입니다!”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누군가 꽃등을 이현에게 건네주었고, 사회자는 말을 이어갔다.“수수께끼 맞추기 시간이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요, 여기서 추가로 특별한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이 성벽 뒤에는 저희 운성시 왕씨 가문의 옛 저택이 있는데, 3일간 한정적으로 개방됩니다. 하지만 예약을 못 하신 분들이 많죠?”“그렇습니다!”이현은 꽃등을 들고 군중 속에서 하연을 찾았다. 사람들이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와중에도 그의 모습은 선명하게 드러났다.“제가 이겼어요!”이현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외쳤다. 평소의 차분한 가게의 사장 모습과는 다른, 한결 밝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사회자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다음 문제를 맞히시면 꽃등뿐만 아니라, 두 분께 왕씨 가문의 옛 저택 무료 관람권도 드리겠습니다!” 관광객들이 열광적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하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전 어린애도 아닌데, 왜 이런 걸 이겨야 하죠?” 이현은 그녀의 귀에 바짝 대고 웃으며 크게 외쳤다. “다들 갖고 싶어 하니까 우리도 가져야죠!” 그는 꽃등을 하연의 손에 꼭 쥐여주었고, 따뜻한 손잡이의 감촉이 하연에게 전해졌다. 하연의 어깨 위로는 큰 나무에서 떨어진 치자꽃들이 하나둘 내려앉았다. 은은한 꽃내음이 바람에 실려 주변을 감쌌다. 사회자는 새로운 문제를 던졌다. “
‘그렇다면 왕씨 가문도 왕명주를 완전히 소외시키지는 않았던 모양이네요.’‘그리고 한명준이라는 외손자에게도 큰 기대를 걸었던 것 같은데...’“만약 왕씨 가문의 그 외손자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겠죠.”하연의 말에 직원은 주위를 둘러보며 급히 말했다.“아가씨, 왕씨 가문의 영역에서 그런 이야기는 금기입니다. 조심해 주세요.”하연과 이현은 왕씨 가문의 고택 안을 천천히 걸어갔다. 다섯 개의 출입문을 지나는 동안, 등불로 환하게 빛나는 저택의 곳곳은 그야말로 황홀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그러다 이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연 씨, 혹시 왕씨 가문의 가주와 이미 연락하신 건가요?”하연은 순간 당황해하며 되물었다.“어떻게 알았어요?”이현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저도 한씨 가문에 대해 꾸준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하연 씨가 개입한 흔적이 전혀 없길래요.”하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손 선생님, 장사보다는 경찰이 더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이렇게 예리하신 걸 보면.”이현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경찰은 힘들겠지만, 탐정 정도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대화를 이어갔다. 저 멀리 앞에서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여기서 더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저 앞은 왕씨 가문의 사유지입니다.”마침 이현은 전화를 받으며 멀리 떨어졌다.하연은 곁에 있던 직원에게 다시 물었다.“그 후로는 왕씨 가문에서 외손자를 정말 데려온 적이 없었나요?”직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소문에 따르면 그런 적이 있긴 했던 것 같아요. 원래는 철저히 비밀로 하려 했는데, 그날 갑자기 왕씨 가문의 저택에 화재가 나면서 일이 터졌어요. 그 왕씨 가문의 외손자는 팔에 화상을 입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됐고, 그때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죠. 하지만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확실하게 몰라요. 그 이후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거든요.”명문가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
방두진이 회의에서 제시한 일부 데이터는 부남준조차도 손에 넣지 못한 것이었다. 회의 내내 부상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방두진의 손에 쥐어진 원고와 모든 발언은 부상혁의 손길이 닿은 것이 분명했다. 특히 방두진이 결단을 내리듯 던진 말은 더욱 그랬다.“제가 있는 한, DL그룹과 운성시 휴양지 협력 문서에는 제 서명이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하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방두진이 그렇게 말하게 만든 사람이 부상혁이라는 것을 알아챘다.상혁이 지금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 DL그룹 내부 일에도 깊이 관여하며 이 전쟁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하연에게 강하게 상기시켜 주었다.“하연 씨, 지금 업무 중이었어요?”이현은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며 물었다. 하연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손 선생님, 오늘 함께 해주셔서 고마워요. 제가 커피 한 잔 사드릴게요.”“저는 커피 안 마셔요.”하연이 다른 메뉴를 생각하던 중, 이현이 길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수정과는 괜찮아요. 그건 한 번 마셔볼 만하거든요.”하연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길가에 있는 젊은 아가씨들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몇 잔 드릴까요?” “한 잔만 주시면 돼요.”돈을 지불한 하연은 이현의 의아한 표정을 보고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실, 저는 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이현은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기억해 둘게요.”하연은 수정과를 받아 이현에게 건넸다.“그럼, 우리 B시에서 다시 만나요.”이현은 예의 바르게 두 손으로 수정과를 받으려 했지만, 하연이 갑자기 손을 기울이는 바람에 달콤한 물이 그의 팔에 쏟아졌다.“어머! 어떡해!! 손 선생님, 미안해요! 제가 제대로 못 잡았어요.”하연은 서둘러 휴지를 꺼내 이현의 소매를 말아 올리고 빠르게 닦아주었다. 젊은 아가씨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아깝습니다. 제가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