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두진이 회의에서 제시한 일부 데이터는 부남준조차도 손에 넣지 못한 것이었다. 회의 내내 부상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방두진의 손에 쥐어진 원고와 모든 발언은 부상혁의 손길이 닿은 것이 분명했다. 특히 방두진이 결단을 내리듯 던진 말은 더욱 그랬다.“제가 있는 한, DL그룹과 운성시 휴양지 협력 문서에는 제 서명이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하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방두진이 그렇게 말하게 만든 사람이 부상혁이라는 것을 알아챘다.상혁이 지금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 DL그룹 내부 일에도 깊이 관여하며 이 전쟁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하연에게 강하게 상기시켜 주었다.“하연 씨, 지금 업무 중이었어요?”이현은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며 물었다. 하연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손 선생님, 오늘 함께 해주셔서 고마워요. 제가 커피 한 잔 사드릴게요.”“저는 커피 안 마셔요.”하연이 다른 메뉴를 생각하던 중, 이현이 길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수정과는 괜찮아요. 그건 한 번 마셔볼 만하거든요.”하연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길가에 있는 젊은 아가씨들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몇 잔 드릴까요?” “한 잔만 주시면 돼요.”돈을 지불한 하연은 이현의 의아한 표정을 보고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실, 저는 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이현은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기억해 둘게요.”하연은 수정과를 받아 이현에게 건넸다.“그럼, 우리 B시에서 다시 만나요.”이현은 예의 바르게 두 손으로 수정과를 받으려 했지만, 하연이 갑자기 손을 기울이는 바람에 달콤한 물이 그의 팔에 쏟아졌다.“어머! 어떡해!! 손 선생님, 미안해요! 제가 제대로 못 잡았어요.”하연은 서둘러 휴지를 꺼내 이현의 소매를 말아 올리고 빠르게 닦아주었다. 젊은 아가씨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아깝습니다. 제가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이현
[운성시의 휴양지 사업은 왕씨 가문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입찰이 시작된 것만으로도 부남준이 이미 왕아영과의 합의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정말 빠릅니다.]차 안에서 상혁은 전화를 받았고,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움만이 가득했다.“왕아영이 B시에 머물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해냈다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니라면, 난 믿지 않아.”“업계 전체에 알려. 그 사업은 운성시도, DL그룹도, 왕아영도 아닌 내가 주도하는 거라고!”“논란이 두려워? 이해는 해. 누구도 미움받는 일을 하고 싶어 하진 않지. 하지만 부남준에게 전해. 내가 직접 나서는 이상, 그 결과를 견뎌낼 준비는 해야 할 거라고.”상혁은 전화를 끊었지만, 여전히 분노를 삭이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황연지는 옆에서 숨을 죽였다. 상혁은 입찰 회의가 끝난 이후로 계속 화가 나 있었고, 그 분노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겨우 전화를 끊자, 연지는 즉시 식사 상자를 내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아침부터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러시는 건 위에 안 좋습니다.”상혁은 도시락을 힐끗 보더니, 창밖의 번잡한 인파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타고 있는 차는 이미 청운산에 도착해 있었고, 창밖으로는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사찰이 보였다.그때, 상혁은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여자를 발견했다.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 그런 기운을 가진 사람은 하연뿐이었다. 하지만 하연의 시선은 다른 누군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이현은 두 개의 향을 태워 공손하게 절을 한 후, 향로에 꽂았다. 하연이 농담처럼 말을 꺼냈다.“손 선생님이 이렇게 정성껏 기도하는 걸 보면, 성훈 씨가 아주 좋아하겠어요. 올해는 성훈 씨에게 꼭 좋은 짝을 소개해 줘야겠네요.”이현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성훈이가 저에게 점괘도 부탁했어요.”두 사람은 점괘를 뽑는 곳으로 걸어갔다. 하연은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상혁이 보이지 않는지 살폈다. 그리고 몰래 상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이현은 이미 스님의
핸드폰 너머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복잡한 소음이 귀에 들려왔다. 상혁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들려왔다.[청운산.]“난 오빠를 못 봤는데요...”[대웅보전.]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전화를 끊었다. 하연은 사람들 사이에서 당황한 채로 서 있었다. 밤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흩날렸고,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대웅보전은 이 사원의 중심에 있었다. 이내 사람들은 하나둘씩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오늘은 절을 왜 이렇게 일찍 닫지? 평소엔 9시까지 하는데.”“누가 알겠어?”하연은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사람들 속에서 이현이 자신을 기다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현은 인파 속에서도 눈에 띄었지만, 하연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결국 인파의 흐름을 거슬러 대웅보전 쪽으로 향했다.대웅보전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은은한 향냄새가 풍겨 나왔다. 약한 불빛 아래, 한 남자가 사찰 안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상혁의 평소 차분하고 온화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대신 거칠고 고집스러운 기운만이 가득했다.그는 겸손함도, 존경심도 없이 그곳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 손엔 여전히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부남준이 계속 밀어붙이려면 DL그룹의 리스크 관리를 통과해야 해. 책임자에게 말해. 부남준이 통과하게 두면, 그의 인생도 거기서 끝이라고.”거대한 불상은 상혁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악한 기운에 눌린 불상의 기세는 서서히 약해지는 듯했다. “오빠.”하연은 조심스럽게 상혁 옆에 무릎을 꿇으며 그를 불렀다. 상혁은 핸드폰을 꺼버리고 무심하게 옆으로 던졌다.“입찰 회의는 잘 진행됐어요?”하연의 물음에 상혁은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이런 큰일에는 신경도 안 쓰면서, 묻기는 왜 물어?” 하연은 상혁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빠는 분명히 화가 나 있는 거야.’하지만 그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해서 차
상혁이 내뱉은 말 속엔 하연을 함부로 대하는 냉랭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하연을 존중하지 않았고, 그녀도 이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연은 속이 답답해졌다.“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내가 몇번이나 그랬다고 이러는 거냐고요? 손 선생님은 오빠도 잘 알잖아요. 소울 칵테일의 사장이라고요. 오빠도 6개월 동안 그곳의 자리를 예약했었고요. 이번에는 손 선생님이 운성시에 물건을 구하러 왔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내가 손 선생님께 녹차를 골라달라고 부탁한 것뿐이에요.”하연이 다급히 설명하는 도중, 상혁은 갑자기 손을 들어 사찰의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마지막 남은 한줄기의 빛마저 사라졌다. 두 사람은 이제 어둠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하연은 가슴이 크게 요동쳤고, 상혁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여기는 사찰이에요. 오빠, 좀 진정하라고요.”상혁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만약 손이현이 단순히 소울 칵테일의 사장이라면,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거야.”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연은 갑작스러운 긴장감을 감지했고, 얼굴에 주름이 새기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오빠,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예요?”상혁이 문제로 삼는 것은 단순히 이현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진짜로 문제 삼는 것은, 과거 하연이 이현에게 가졌던 감정이었다. 하연과 이현의 과거, 쉽게 파헤칠 수 없는 그 복잡한 관계였다.하연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오늘 상혁이 보이는 집착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상혁은 한 번 더 문을 흘깃 보며 말했다.“손이현, 아직도 밖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나랑 같이 나가자.”...대부분 사람이 이미 떠나고, 사찰은 금방 고요해졌다. 하지만 이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가끔 핸드폰을 확인하며 고독한 모습을 보였다.아까 이현에게 점괘를 풀이해 준 스님이 물었다.“아직 안 가셨나요? 여자 친구를 기다리고 계신가요?”이현은 잠시 망설였지만, 속내를 감추며 대답했다.“네, 여자 친구가 화장
폭우가 내리는 밤의 사찰은 짙은 어둠 속에서 더욱 신비롭고 깊어 보였다. 번개가 굉장히 강하게 치고 있었고, 나무가 언제든지 벼락에 맞아 부러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현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손에 쥔 점괘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그조차 자신이 무엇을 그토록 고집하는지 알 수 없었다.한 스님이 우산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보살님, 빨리 돌아가세요. 아니면 처마 밑에서라도 비를 피하십시오. 이러다 큰일 나겠습니다!”이현은 여전히 긴장한 상태로, 비를 맞으며 말했다.“스님, 비를 피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죠, 그렇지 않습니까?”“그야 물론이죠!”‘그러니까 하연이도 지금 안전한 곳에 있을 거야. 하지만 하연이가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나마 남아있던 이현의 이성은 그가 스님을 따라 처마 밑으로 가게 했다. 그때 다른 한 노스님이 사찰 입구에서 이현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보살님, 왕씨 가문의 도련님이 아니신가요?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이현이 매우 놀라지 않자, 노스님은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사람들이 말하는 그 고집스러운 도련님이 바로 보살님이었군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음을 넓히세요. 보살님의 할머님은 아주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보살님이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히면 할머님께서도 슬퍼하실 거예요.”이현의 할머니는 매년 청운사에 돈을 기부하며, 새해 첫날에는 사찰을 폐쇄하고 이현의 할머니가 혼자만 향을 올리도록 요청하곤 했다.“저를 아십니까?”노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작년에 보살님의 할머니께서 보살님을 모시고 오셔서는 소원을 빌었죠. 저는 옆에서 경을 읽고 있었습니다.”‘이분, 기억력이 참 좋으시군.’이현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무 늦은 걸까요?”“불편하지 않으시면 이 사찰에서 하룻밤을 머무르셔도 됩니다.”하지만 이현은 대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냈다.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온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도련님, 어디 가셨습니까
하연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냥 대답하면 돼. 손이현을 좋아해, 안 해?”상혁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보통 연인들은 나랑 하연이 같은 상황에서 다투고 질투할 때 어떻게 대처할까? 아마도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당신만을 사랑해’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지금의 하연은 그런 대답을 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무너져 내린 감정 속에서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대답을 삼켰다.“그럼 손이현은 너를 좋아해?”상혁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 순간, 하연은 모든 의심을 접어두고 말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나랑 손 선생님은 작년에야 알게 됐고, 많이 만나지도 않았어요. 세상의 모든 남자가 나를 좋아할 리는 없잖아요.”하지만 상혁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하지만 손이현은 항상 중요한 순간마다 네 앞에 나타났어. 내가 처리하지 못할 때마다 손이현이 대신 네 일을 처리하더라. 우연히 만난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상혁은 실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너는 그렇게 똑똑하면서도, 손이현이 너에게 품고 있는 다른 감정을, 그리고 너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하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 하는 거야?”연이은 질문에 하연도 순간 멍해졌다. 사실 그녀도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의심은 단순한 남녀 간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상혁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가라앉았다. “너는 손이현이 다가오는 걸 허락하고, 그 남자의 접근을 받아들였어. 최하연, 도대체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그의 말은 분노에 찬 듯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힘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변했다.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는 듯, 그저 피곤해 보이는 눈빛이었다.사실 상혁도 하연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 왔다. 처음에는 하연이 자신의 곁에만 남아준다면, 설령 그녀가 다른 남자와 엮인다 해도 용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했다. 하연을 향한 그의 소유욕은 그가 생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보세요.”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ST 그룹이라...’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할머니, 전 괜찮아요.”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영숙은 하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