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이 내뱉은 말 속엔 하연을 함부로 대하는 냉랭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하연을 존중하지 않았고, 그녀도 이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연은 속이 답답해졌다.“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내가 몇번이나 그랬다고 이러는 거냐고요? 손 선생님은 오빠도 잘 알잖아요. 소울 칵테일의 사장이라고요. 오빠도 6개월 동안 그곳의 자리를 예약했었고요. 이번에는 손 선생님이 운성시에 물건을 구하러 왔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내가 손 선생님께 녹차를 골라달라고 부탁한 것뿐이에요.”하연이 다급히 설명하는 도중, 상혁은 갑자기 손을 들어 사찰의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마지막 남은 한줄기의 빛마저 사라졌다. 두 사람은 이제 어둠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하연은 가슴이 크게 요동쳤고, 상혁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여기는 사찰이에요. 오빠, 좀 진정하라고요.”상혁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만약 손이현이 단순히 소울 칵테일의 사장이라면,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거야.”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연은 갑작스러운 긴장감을 감지했고, 얼굴에 주름이 새기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오빠,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예요?”상혁이 문제로 삼는 것은 단순히 이현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진짜로 문제 삼는 것은, 과거 하연이 이현에게 가졌던 감정이었다. 하연과 이현의 과거, 쉽게 파헤칠 수 없는 그 복잡한 관계였다.하연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오늘 상혁이 보이는 집착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상혁은 한 번 더 문을 흘깃 보며 말했다.“손이현, 아직도 밖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나랑 같이 나가자.”...대부분 사람이 이미 떠나고, 사찰은 금방 고요해졌다. 하지만 이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가끔 핸드폰을 확인하며 고독한 모습을 보였다.아까 이현에게 점괘를 풀이해 준 스님이 물었다.“아직 안 가셨나요? 여자 친구를 기다리고 계신가요?”이현은 잠시 망설였지만, 속내를 감추며 대답했다.“네, 여자 친구가 화장
폭우가 내리는 밤의 사찰은 짙은 어둠 속에서 더욱 신비롭고 깊어 보였다. 번개가 굉장히 강하게 치고 있었고, 나무가 언제든지 벼락에 맞아 부러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현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손에 쥔 점괘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그조차 자신이 무엇을 그토록 고집하는지 알 수 없었다.한 스님이 우산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보살님, 빨리 돌아가세요. 아니면 처마 밑에서라도 비를 피하십시오. 이러다 큰일 나겠습니다!”이현은 여전히 긴장한 상태로, 비를 맞으며 말했다.“스님, 비를 피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죠, 그렇지 않습니까?”“그야 물론이죠!”‘그러니까 하연이도 지금 안전한 곳에 있을 거야. 하지만 하연이가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나마 남아있던 이현의 이성은 그가 스님을 따라 처마 밑으로 가게 했다. 그때 다른 한 노스님이 사찰 입구에서 이현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보살님, 왕씨 가문의 도련님이 아니신가요?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이현이 매우 놀라지 않자, 노스님은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사람들이 말하는 그 고집스러운 도련님이 바로 보살님이었군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음을 넓히세요. 보살님의 할머님은 아주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보살님이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히면 할머님께서도 슬퍼하실 거예요.”이현의 할머니는 매년 청운사에 돈을 기부하며, 새해 첫날에는 사찰을 폐쇄하고 이현의 할머니가 혼자만 향을 올리도록 요청하곤 했다.“저를 아십니까?”노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작년에 보살님의 할머니께서 보살님을 모시고 오셔서는 소원을 빌었죠. 저는 옆에서 경을 읽고 있었습니다.”‘이분, 기억력이 참 좋으시군.’이현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무 늦은 걸까요?”“불편하지 않으시면 이 사찰에서 하룻밤을 머무르셔도 됩니다.”하지만 이현은 대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냈다.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온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도련님, 어디 가셨습니까
하연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냥 대답하면 돼. 손이현을 좋아해, 안 해?”상혁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보통 연인들은 나랑 하연이 같은 상황에서 다투고 질투할 때 어떻게 대처할까? 아마도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당신만을 사랑해’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지금의 하연은 그런 대답을 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무너져 내린 감정 속에서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대답을 삼켰다.“그럼 손이현은 너를 좋아해?”상혁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 순간, 하연은 모든 의심을 접어두고 말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나랑 손 선생님은 작년에야 알게 됐고, 많이 만나지도 않았어요. 세상의 모든 남자가 나를 좋아할 리는 없잖아요.”하지만 상혁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하지만 손이현은 항상 중요한 순간마다 네 앞에 나타났어. 내가 처리하지 못할 때마다 손이현이 대신 네 일을 처리하더라. 우연히 만난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상혁은 실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너는 그렇게 똑똑하면서도, 손이현이 너에게 품고 있는 다른 감정을, 그리고 너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하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 하는 거야?”연이은 질문에 하연도 순간 멍해졌다. 사실 그녀도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의심은 단순한 남녀 간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상혁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가라앉았다. “너는 손이현이 다가오는 걸 허락하고, 그 남자의 접근을 받아들였어. 최하연, 도대체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그의 말은 분노에 찬 듯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힘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변했다.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는 듯, 그저 피곤해 보이는 눈빛이었다.사실 상혁도 하연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 왔다. 처음에는 하연이 자신의 곁에만 남아준다면, 설령 그녀가 다른 남자와 엮인다 해도 용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했다. 하연을 향한 그의 소유욕은 그가 생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보세요.”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ST 그룹이라...’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할머니, 전 괜찮아요.”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영숙은 하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순간, 하연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해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며느리로서 일을 열심히 했지만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하연은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혜경이는 내 세컨드
하연은 서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그의 복근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감춰온 서준의 대한 갈망 탓인지 귀밑까지 붉어졌다.그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이 집의 작은 안주인이 되었는지 잊었냐고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임무는 당신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고요.“어떻게 그런 말을?!”화를 내는 서준의 탄탄한 복근이 울룩불룩 움직였다.“방 안에 최음제를 좀 뿌렸어요. 조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제 임무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는 것뿐이에요.”그녀는 더 대담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요염한 모습이었다.하연의 적극적인 도발에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그는 이것이 최음제 때문인 것을 알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하연의 거침없는 손을 꽉 움켜 잡았다.“최하연, 너 정말 역겨워.”서준의 말에 그녀의 끓어오르던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하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채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를 안는 게 그렇게 구역질나요?”“그래!”서준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밀쳐냈다.더는 그녀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하연이 벗긴 옷을 집어 들고 다시 입기 시작했다.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하연은 그가 나가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서준을 원망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서준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이 정도로 했으면 있던 마음도 없어지겠지...’...다음날 아침, 하연은 아직 성치 않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짐을 싼 여행가방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살림을 돕는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숙 여사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어머, 새언니! 죽다 살아난 지 얼마
이수애 여사는 하연이 전과는 완전히 다른 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하연을 가리켰다.“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방금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민혜경이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 그 여자한테 집안일을 시키세요. 저는 앞으로 하지 않을 거예요.” 하연은 앵두처럼 붉은 입술로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 여사는 그녀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너!”“엄마, 엄마!”서영이 흥분한 엄마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새언니 화난 거 맞죠? 어젯밤에 오빠가...”그녀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려는 듯 어젯밤 일을 꺼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하연의 화를 돋우려는 의도가 충분히 보였다.이 여사는 딸의 의도를 금방 알아채고 다시 차분해졌다. 그녀는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는 주제에 별 억지를 다 부리네. 감히 시어머니 탓을 해?”하연은 느릿느릿 짐을 끌고 나오다가 저택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지난 3년동안 아이가 없었던 게 다 저 때문이라고 하셨죠? 절 의심하기 전에 서준 씨에게 비뇨기과 진료를 받으라고 하는 편이 빠를 거예요. 그러면 임신이 안됐던 원인이 과연 누구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너, 니가 감히!”하연의 말에 이 여사와 서영 둘 다 깜짝 놀랐다. 이 여사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최하연! 난 너랑 우리 서준이하고 꼭 이혼시키고 말 테니 두고 봐!”그동안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와의 정을 생각해서 한씨 집안 사람들과 다툼을 피했다. 왠만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원만하게 지내왔다.지금까지는 집안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신경 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