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도망쳤다.이번 협력은 완벽 그 자체였다. 칼날은 날카로웠으나 관성은 너무 컸다. 황연지는 차에서 그대로 튕겨 나와 땅에 내동댕이쳐졌고, 큰 소리와 함께 멀리 굴러갔다.“황 비서!” 하연이 비명을 질렀다.그녀의 심장은 요동쳤고, 연지가 얼마나 심각하게 다쳤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이현은 룸미러로 뒤를 한 번 훑어보며 연지의 용기를 속으로 칭찬했다.농장은 바로 앞에 있었다. 이현은 미리 연락해 두었고, 누군가 문을 지키고 있었다. 대문은 빠르게 열렸고, 이현의 차가 지나가자마자 다시 빠르게 닫혔다.서준은 더 이상 들어올 수 없었다.하연은 숨을 크게 내쉬며 단 3초 만에 정신을 차렸고, 곧바로 차에서 내려 연지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황 비서!!”그러나 이현은 재빨리 차에서 내려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법이 있는 사회잖아요. 한서준이 그 정도로 미친 건 아니에요. 연약한 여자를 해치지는 않을 거라고요.”“그래도 가서 확인해야 해요. 어차피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사람을 데려왔고, 한서준이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제가 가서 확인해 볼게요!” 하연은 연지가 걱정되어 안절부절못했다.이현은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는 차를 한 번 바라본 뒤 말했다. “혼자 가면 안 돼요. 한서준이 하연 씨를 보면 반드시 복수하려 들 거예요. 이렇게 해요. 하연 씨가 우선 여기에 있는 아가씨를 잘 돌보고 있으면 제가 다녀올게요.”하연은 그의 말에 놀랐다. ‘이게 확실히 제일 적절한 방법인 것 같아.’그녀가 잠시 망설이는 것을 보자, 이현은 바로 마을 사람의 삼륜차에 올라탔다. “꼭 데리고 돌아올게요.”“...”방금 지나온 거리는 지금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차에서 내린 서준은 이마에 피를 흘린 채 패배한 표정으로 땅에 쓰러진 연지에게 다가갔다. 그는 연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참 용감하구나.”연지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한 대표님까지 극찬하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때, 차 옆에 있던 구동후가 급히 달려와 이현을 떼어놓으려 했다.하지만 이현의 기세는 강렬했다. “나한테 손대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두고 보자고.”동후는 손을 멈춘 채 공중에 그대로 멈췄고, 초조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래도 한씨 집안의 큰 도련님이잖아요. 한 대표님과 피가 반이나 섞였는데, 이렇게까지 몰아세울 필요는 없잖아요. 한씨 집안도 끝났고, HT그룹도 끝났다고요.”동후는 실수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말들이 이현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현의 차가운 표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그래서 동후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한씨 집안이 끝나면, 할머니께서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 말년을 보내시겠어요? 설마, 그게 보고 싶으신 겁니까?” 이 한마디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이현은 입가에 피가 묻은 채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노인을 인질로 삼는 너는 잘 될 수 없어. 그리고 그런 너를 내가 그냥 두고 볼 리도 없지.” 서준 역시 바닥에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올린 채 비웃으며 말했다. “정말 궁금하네. 할머니를 향한 네 감정이 진심인 건지, 아니면 최하연이 알게 될까 봐 두려워서 이러는 건지.” 이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손가락으로 피를 닦아내며 연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한씨 집안에서 이런 감성적인 녀석이 나올 줄은 몰랐네.” 서준이 이현의 등을 바라보며 비꼬았다.하지만 이현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연지는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이현을 올려다보다가, 마침내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네가 부상혁이랑 손을 잡을 줄은 몰랐네. 너희가 왕진의 딸을 데려간 것도, 결국 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잊지 마, 왕진은 행방불명인 상태라는 걸. 이런 짓은 아무 소용이 없어.”서준은 천천히 일어나며 손을 털었다. “한번 두고 보자고.”이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준을 무시했다. 차량은 빠르게 사라졌고, 그곳에는 파괴된 흔적만이 남았다.“제가 황 비서님을 안
하연은 예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한 남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를 본 왕대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아가씨, 혹시 이현이랑 무슨 사이야?”하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왕대천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친구예요, 친구. 손 선생님은 계속 저를 도와주셨어요.”이 말을 들은 왕대천은 눈에 띄게 실망한 듯했지만, 이내 다시 힘을 냈다.“이현이 그 녀석 참 괜찮아. 책임감도 있고, 직장도 안정적이니까. 비록 예전만큼 잘생기진 않지만,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겠니. 사람 됨됨이가 좋으면 그만이지.”하연은 왕대천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워 고개를 갸웃했다.“손 선생님이 예전에 그렇게 잘생겼었나요?”“그럼, 백 명 중의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인물이었지! 대학 다닐 때는 이현이한테 고백하려는 여자애들이 집까지 따라올 정도였다고.”왕대천의 과장된 말에 하연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덕분에 긴장도 조금 풀렸다.“그중에서 고백에 성공한 사람은 없었나요?”“받아줬으면 지금까지 혼자겠니?” 왕대천은 혀를 차며 팔로 하연을 툭툭 쳤다. “기회를 놓치지 마.”“저는 그런 거 아니에요...” 하연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이현이 연지를 데리고 돌아온 것이었다.하연은 서둘러 뛰어나갔고, 연지가 상처투성이인 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요.”이현이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의사를 불렀으니 곧 집으로 올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다른 아가씨의 상태만 봐도 병원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하연은 이현의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연지를 침대에 눕히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이제부터 딱딱하게 ‘황 비서’ 라고 부르지 않고, 편하게 ‘연지 씨’ 라고 부르고 싶은데, 괜찮죠? 나중에 돌아가면 상혁 오빠한테 얘기해서 연지 씨의 급여를 올려달라고 할게요.” 연지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최 사장님이 편한 대로 불러주세요. 하지만... 이번에도 제가 해야 할 일
“세상을 떠난 사람이요?” 이현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그는 하연이 한씨 집안의 일을 몰래 조사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녀가 이렇게 용감하게 직접 한씨 집안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녀가 왜 이토록 위험한 일에 집착하는지 그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이것은 비밀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현의 곁에 앉은 하연은 비밀을 말해도 될 것만 같은 이상한 신뢰를 느꼈다. “저는 한서준의 전처예요. 혹시 알고 계셨어요?”“알고 있었어요. 두 사람은 모두 유명인이니까 들어본 적은 있었던 거죠.”하연은 사실을 설명하려니 조금 복잡해졌고, 잠시 생각한 후 말을 이었다.“제 친구 중 한 명이... 한씨 집안 사람인데, 한서준과 그 집안의 사모님 이수애 때문에 그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 친구를 위해 그 일에 대한 공정한 대가를 받으려 해요.”하연은 말할 때 이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말투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현은 그 말을 듣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는 감정을 숨기려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그 친구, 하연 씨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이었나요?”‘중요했을까?’하연은 지난 몇 년 동안 한서준에게 의지했던 감정을 떠올리며 조용히 웃었다.“한때는 중요했죠. 하지만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에요.”이현이 손가락을 꾹꾹 눌렀다. “그런데도 이렇게 애를 쓰는 이유가 뭐예요?”“지금은 그 친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잘살든 못살든, 그 친구가 편안하게 지내길 바라요. 그래야지만 제가 과거의 일에 집착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하연 씨는... 그 친구를 사랑했었나 봐요.”이현의 돌직구에 하연은 당황하다가 이내 웃었다.“손 사장님, 눈치가 정말 빠르시네요.”“사랑했었죠.” 하연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끝났어요.”이현의 손가락은 힘이 빠진 듯 천천히 풀어졌다.“만약 그 친구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으면 어떡할 거예요? 그 친구도... 하연 씨를 좋아했을 수도 있
이 말을 듣고 나서야 하연은 조금 안심했다. “소 선생님, 제가 간병인을 보내서 간호를 맡길게요. 치료비는 걱정하지 마시고, 꼭 최선을 다해 주세요.”유찬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현과 눈을 마주친 후 함께 밖으로 나갔다....“최하연 씨,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아. 컬럼비아 대학 출신의 그 여자분 말이야, 맞지?”이현이 햇빛에 달궈진 벽에 기대어 쓸쓸한 눈빛을 보냈다. “유찬아, 그만해. 그건 다 지난 일이야.”“지난 일? 너는 전혀 잊지 못한 것 같은데? 네가 이렇게 변한 이유의 절반은 그 여자 때문이잖아?” “이미 남자 친구도 있고, 잘살고 있어.”그 말에 유찬은 말문이 막혔는데, 그저 혀를 차며 이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두 사람은 인연이 아니었나 봐.”“...”하연이 왕진의 딸 침대 옆에 반쯤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름이 뭐야? 걱정하지는 마, 나쁜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니까.” “왕... 왕정.” 왕정의 목소리는 아주 약했다.“그렇구나. 너... 원래 춤을 배웠었지?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는 마. 병원에 돌아가면 내가 재활을 도와줄 사람을 구해줄게. 그럼 분명히 나을 수 있을 거야. 다 나으면 나랑 공연도 보러 가자, 어때?” 하연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왕정을 설득했고, 왕정은 이 말을 들으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하연은 마음이 아팠다. 예전에는 왕정을 이용해 왕진의 증언을 얻으려는 생각도 했었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엄마를 보고 싶어요.”“...” 하연은 왕정의 마음을 이해하며 대답했다. “반드시 네 엄마를 찾아줄게.”한편, 연지는 상혁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손 사장님은 최 사장님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아 했어요. 그래서 말하지 않았습니다.”전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참 후, 상혁이 입을 열었다. [잘 들어, 황 비서. 하연을 데리고 그곳에 며칠 더 머물러. 꼭 시간을 끌어야 해.]연지가 놀라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같은 시각, 외부에서는 이미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상혁이 국제증권감독기구의 직원과 금융감독원 검사원에게 연행된 건 FL그룹에서 회의하던 중이었다. 그는 회의실 주석에 앉아 있었는데, 깔끔하고 새하얀 셔츠는 그의 남자다운 성숙함과 소년다운 순수함을 조화롭게 만들고 있었다.비서실에서 검사원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부 대표님의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하지만 검사원들은 이미 문을 열고 들어왔고, 직원증을 내보였다. “죄송합니다, 부 대표님. 저희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상혁은 그들을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이었고,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5분 이내에 회의를 끝내겠습니다.”그의 어투는 차분하고 침착했으며, 조금의 동요도 없었는데, 정말로 대장 같은 모습이었다.그것은 크게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기에, 선두에 있던 검사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발 물러섰다.상혁은 5분이라고 말했기에, 정확히 5분 만에 FL그룹의 향후 며칠간의 업무를 완벽하게 정리했고, 심지어 홍보팀까지 신경 쓰며 지시했다. “외부 여론을 최소화하고, 주가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세요.”그리고 정확히 5분 후, 몸을 일으킨 상혁이 말했다. “이제 가겠습니다.”상혁은 이토록 차분했지만, 외부에서는 이미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가 연행되는 사진이 빠르게 퍼졌고, 사람들은 부씨 가문의 장남이 곧 몰락하는 것인지, DL그룹과 FL그룹에 어떤 영향이 있을 것인지를 두고 떠들썩해졌다.서여은은 가장 먼저 이 소식을 들었는데, 부하직원이 다급하게 달려와 말했기 때문이었다. “부상혁이 드디어 뉴스에 나왔어요! B시로 가서 단독 보도를 따올까요?”“그게 무슨 소리야?!” 여은은 화를 내며 부하를 꾸짖었다. 그녀는 급히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응답이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그냥 B시에 가서 대기해. 새로운 소식이 나오면 즉시 보고하고. 그때 내가 결정할게, 기사를 낼지 말지.” 여은
이현은 하연이 빠르게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며 점점 실망하는 표정으로 바뀌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안 받아요?” 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뭔가 바쁜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상혁 오빠에게 메시지를 남겨야겠어요.”이현은 그녀를 말리지 않았지만, 낮에 들은 소식을 떠올리며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부상혁이 조사받는 중이라면, 전화나 메시지를 받을 수 없을 거야.’그래서 이현은 하연이 아무리 연락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손 선생님, 고마워요.” 하연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만약 상혁 오빠가 손 선생님한테 전화하면, 아무리 늦어도 꼭 저한테 알려주세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기서 잠을 잘못 잤죠? 내일 이장님의 부인께 더 두툼한 이불을 깔아 달라고 할게요.”침대가 약간 딱딱하긴 했지만, 하연은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분께 폐 끼칠 필요 없어요. 전 괜찮아요.”“지금은 벌써 12시인데, 아직도 못 자고 있잖아요. 하긴, 이런 곳에서 편히 잘 수 있을 리 없죠.” 이현이 직설적으로 말했다.하연은 그 말에 들켜버린 듯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방 안을 둘러보다가 책더미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거 다 손 선생님의 책이에요?”“네, 대천 아저씨가 팔기 아까워하시더라고요. 팔아도 얼마 못 받을 텐데, 그냥 기념으로 남겨두셨어요.”하연은 그 책 중 하나를 꺼내며 살펴보다가 눈에 띄는 책을 집어 들었다. “경찰학...”그러나 그녀가 다 읽기도 전에 이현이 재빨리 책을 빼앗아 갔다. 그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전에 경찰학과에 가려고 공부를 좀 했어요.”하연은 놀랐다. 그가 그런 꿈을 꿨을 줄은 전혀 몰랐다. “손 선생님의 꿈이 경찰이었군요.”“네, 뭐... 하지만 다 지난 일이에요. 지금도 행복하니까요.”하연은 그 말이 아쉽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 발 물러서서 이
봄날의 밤은 이미 춥지 않았지만, 이현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몸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부 대표님이 그렇게 좋은데, 왜 나중에 한서준을 좋아하게 된 거예요?”하연의 머릿속에는 한서준이 아니라 한명준이 떠올랐다.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아마 어렸을 때, 잠깐의 설렘을 진짜 사랑으로 착각했기 때문일 거예요.”“인제 와서야 진정으로 저를 사랑해 주고, 제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 거죠.”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놓치지 마세요. 부 대표님이 하연 씨한테 많이 신경 쓰고 있어요.”“상혁 오빠가 저를 오래 기다려줬거든요.” 하연은 무심하게 대답하며 늦은 시간에 둘이 함께 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 일어나 인사했다.문이 닫히고 나서, 무언가가 문에 무겁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소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그녀는 그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연지는 하연에게 자신을 돌봐달라고 부탁했지만, 실제로 하연이 해야 할 일은 많지 않았다. 하연의 하루는 다소 심심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농장 마당에서 보냈다.왕대천은 농장의 책임자이자 이 마을의 이장이었기 때문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고, 집에는 손님이 자주 들락거렸다. 하연을 본 마을 사람들은 예쁘다고 말하며 묻곤 했다. “이장님 아들이 데려온 며느리인가요?” 왕대천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대답하고 싶어 했지만, 이현의 충고에 의해 그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하연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이현에게 농담을 던졌다. “이장님은 손 선생님이 빨리 결혼하길 바라시는 것 같은데,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이때 이현은 나무를 톱질하고 있었고, 하얀 민소매를 입어 건장한 팔 근육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있어요.”하연이 깜짝 놀라 물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됐어요?”“같이 있지
“정말요?” 다영은 남준의 말을 듣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남준을 믿고 기다린 게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녀가 모든 걸 걸어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남준 씨, 난 그냥...” “그냥 뭐요?” 다영은 고개를 저으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전에 떠돌던 소문들 때문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던 것뿐이에요.”“그런 쓸데없는 소문에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남준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기쁨에 젖어 있는 다영은 남준의 말 속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의 팔을 꼭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언제나 남준 씨의 편이에요. 당신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부르면 돼요. 항상 곁에 있을 거니까요.”‘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내가 도와서 얻게 해줄 거야. 그게 DL그룹이라 해도...’ 그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굳은 결심을 다졌다....새해를 맞이하는 밤.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축제가 열렸고, 도시는 환희와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 모두가 기쁨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던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하연은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 안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으로부터 들어온 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어났어?” 상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연은 기지개를 켜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시예요?” 상혁이 곧바로 답했다. “아직 일러. 11시밖에 안 됐어.” “11시?” 하연은 예상외로 늦은 시간에 살짝 놀랐다. 그 순간 상혁이 침대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 조금 더 자도 돼.”그러나 상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연의 배에서 신호가 왔다
“남준 씨, 지금 당신 날 피한 거예요?” 다영은 손에 쥔 라이터를 꽉 쥐었다가 조용히 주머니에 넣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최근 들어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졌고, 남준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이 상황 역시 그녀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두 사람이, 이제는 마치 남이 된 것 같은 이 분위기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남준은 정면만을 응시한 채 아무런 설명도 없이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요.” 다영의 눈에 순간적으로 희미한 빛이 스쳤다. 망설임 없이 그녀는 차 뒤쪽을 돌아 조수석 문 앞에 섰고, 문을 열어 차에 탔다.차에 올라탄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놓인 정교한 포장 상자로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영은 상자를 들고서 물었다. “남준 씨, 이거... 내 선물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멈추지 않고 상자를 열고 있었다.남준은 살짝 찌푸린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상자를 열어보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볼 뿐이었다.다영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섬세하게 디자인된 고급스러운 목걸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독특한 디자인의 목걸이는 푸른빛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조명에 반사되어 빛나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말 예쁘네요...” 다영은 감탄하며 목걸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환한 미소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이거 나한테 걸어줄 수 있어요?”남준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어졌고,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목걸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남아공에서 천연으로 채굴된 최고급 보석입니다. 순도와 투명도가 모두 최상급이고, 무엇보다도 희소성이 높아 전 세계에 단 하나뿐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하기에 가장 적합한 아이템이죠.’ 그때 들렸던 매장의 직원 설명이 귀에 맴돌았다.
“나... 나 술 안 취했어.” 남준은 말끝이 흐려졌고, 아까의 당당한 기세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하연은 남준의 이상한 태도를 감지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거기에는 상혁이 어느새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혼자 있는 남자의 긴 그림자가 조명 아래 길게 드리워졌고, 묵직한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오빠...” 하연은 입을 열어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상혁은 모든 상황을 이미 이해한 듯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편안한 눈빛을 주었다. 단 한 번의 눈맞춤으로 하연은 마음속에 있던 불안함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신뢰가 있었다.상혁은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어깨에 걸쳐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바람이 차니까 빨리 들어가자.”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응, 알았어요.”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서로 맞물리고,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고스란히 서로에게 느껴졌다.그러나 이 장면은 남준의 가슴 깊은 곳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남준은 표정만큼은 최대한 담담하게 유지하며 시선을 애써 다른 곳으로 돌리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DS그룹 연말 행사가 있다고 해서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들렸어, 마침 형도 여기 있었네.”상혁은 하연의 손을 살며시 감싼 채 고개를 들고 남준을 바라보았다. 상혁의 눈빛은 깊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왜 이젠 DS그룹 일에도 신경이 쓰여? 모르는 사람은 보면 네가 DL그룹 버리고 DS그룹으로 옮기려는 줄 알겠어.” 남준은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상혁의 말에는 은근한 경계와 조롱이 담겨 있었다. 남준은 불리한 상황임을 깨닫고 억지로 웃으며 변명했다. “형,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분위기나 좀 보려고 들른 거야.”상혁은 남준의 속내를 이미 간파하고
“시간 없어.” 하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메시지를 확인했고, 내용을 본 후 손에 힘이 들어갔다. 10분 후.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남준의 눈에 띄는 빨간색 스포츠카가 비상등을 켠 채 호텔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번화한 호텔 입구에서 유독 도드라져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잠시 후, 차 문이 열리고 남준이 내렸다. 그는 오늘 블랙 패딩을 걸친 채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기며 여유롭게 하연을 바라보았다. “역시 올 줄 알았어.” 남자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고, 말투에는 확신이 묻어 있었다.찬바람이 부는 겨울밤, 차가운 바람이 하연의 얼굴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하연은 몇 걸음 옮긴 뒤 걸음을 멈췄고, 남준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손을 들어 흩날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말해. 문자에 적힌 상혁 씨하고 관련해서 중요한 일이 뭔데?”남준은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형이 걱정돼?”“그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하연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남준은 그녀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더니, 불과 반걸음 거리에 멈춰서 몸을 약간 숙였다. “너의 그 관심 나 한테도 좀 나눠 주면 안 돼?”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내뱉은 말에 은은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술 마셨어?”남준은 입가를 비틀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 혹시 나 걱정하는 거야?”“착각하지 마.”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부남준,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여기서 시간 끌 여유 없어.”남준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어딘가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너 갈수록 성격이 우리 형이랑 닮아가네. 역시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하연
하연은 밝게 웃으며 상혁이 건넨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갓 짠 오렌지 주스는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부 대표님이 직접 짠 오렌지 주스라 그런가, 확실히 맛이 다르네요. 정말 맛있어요.”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맛있으면 자주 짜줄게.” 하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감사히 잘 마실게요, 부 대표님!” “아니, 한참을 찾았는데 여기서 둘이서만 꽁냥거리고 있었네?” 문 앞에 기대어 서 있던 하성이 두 팔을 교차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혁, 너 요즘 이 녀석을 너무 애지중지하더라. 그러다 버릇 나빠지겠어.” “오빠!!” 하연은 볼이 부풀어올라 약간 투덜거렸지만, 옆에 있던 상혁은 태연하게 그녀를 감싸며 말했다. “애지중지하든 말든 내 마음이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하성은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투항했다. “알았어, 알았어. 난 그냥 너희 둘이 잘 지내는 거 보니 마음이 놓여서 하는 소리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 계속 이렇게 잘 지내줘, 아주 보기 좋아!”그때 하연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부남준’이라는 이름이 뜨자 그녀는 잠시 긴장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오빠들, 먼저 얘기하고 있어요. 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하연이 자리를 비우고 복도로 나가자, 하성은 방금 전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상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요즘 너희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있더라. 동건 삼촌 쪽에서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던데?” 상혁은 하연이 마시다 남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시선을 복도 쪽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첩이 ‘본처’의 자리를 노리는 거야. 흔한 일이잖아.” 하성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동건 삼촌이 그 여자를 꽤 오랫동안 봐줬던 모양이던데. 이제는 꽤 많은 걸 쌓아둔 듯하고, 한번 크게 판을 벌일
“뭐 하는 거야? 빨리 이 주스를 연회장으로 가져가!” 홀 매니저가 다가와 살짝 꾸짖었다. 여자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질투로 번들거리던 눈빛을 감추고는 얌전히 대답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다영은 태어나서 가사일 한 번 손댄 적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트레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매니저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너 신입이야?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영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가슴 속에서 송혜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 친척 중 하나가 DS그룹에서 일하고 있어. 오늘 밤엔 그 사람 신분을 쓰는 게 편할 거야.” 침착함을 되찾은 다영은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는 고객지원부의 진미입니다. 연회 인력이 부족해서 임시로 지원 나온 거예요.” 매니저는 그녀의 명찰을 한 번 흘깃 본 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건네받았다. “신입이라면 전면에 나가면 실수하기 쉬워. 내실에서 돕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난 뒤, 다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회장을 바라봤을 때, 앞줄에 앉아 있던 하연과 상혁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2층 휴게실 안. 원신명은 한 손에 신선한 오렌지 한 봉지를, 다른 손에 포장을 뜯지 않은 녹즙기를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오렌지와 녹즙기입니다.” 원신명은 궁금한 듯 물었다. “대표님,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드시는 건가요?” 상혁은 짧게 대답했다. “원 비서, 거기 두고 가면 돼.” 원신명은 얼른 다가가 도움을 자청했다. “대표님,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와이프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는데,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와이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그 단어를 그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원신명은 곧 깨달았다. ‘아, 대표님이 직접 최하연 씨를 위해 주스를 준비하시고 싶은 거구나!’ “원 비서, 연말인데도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