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사장님께서 제 차에 타 주시니 영광입니다.” 이현오는 차분한 와중에도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영광은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뒷좌석에 올랐다. “오히려 시민을 위해 비바람을 맞으며 고생하시는 이 비서님 같은 분들이 더 대단하시죠.”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손에 들린 핸드폰이 울렸고, 상혁의 전화였다.하연은 핸드폰을 진동으로 바꾸고 받지 않았다.이현오는 백미러를 통해 하연을 힐끗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다양한 이미지로 변화할 수 있는 듯했다. 요염하게도, 청순하게도 변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지금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묘하게 매력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이 여자, 보통 여자가 아니네.’하연은 이현오의 시선을 느끼고 웃으며 말했다. “이 비서님, 제가 예뻐요?”그녀의 직설적인 질문에 이현오는 깜짝 놀라 얼른 시선을 돌렸다.“저는 여자를 볼 때, 그 사람이 예쁘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법을 어겼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죠. 서 대표님이 저에게 좋은 말 해 달라고 한 것도 효과 없을 테니, 최 사장님께서도 그만두시죠.”하연은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높은 자리라도 자런 식으로 자신만만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네.’“B시에서 상장된 30여 개 기업이 조사받았고, 서 대표님은 그 상황에 깜짝 놀라 오늘의 접대를 준비했습니다. 한창명 검사장님과 관련된 사람을 만나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런데 한창명 검사장님이 아닌 이 비서님이 오시니 서 대표님은 더욱 불안해졌고, 저에게 부탁한 것도 당연한 일이죠.”이현오는 다시 백미러를 통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예상보다 더 똑똑하고 명료하고...’이런 생각이 들자, 이현오에게는 괜한 잡념이 더해졌다.“서 대표님이 저지른 일은 크다고도 할 수 있고, 작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모든 것은 절차대로 진행될 겁니다.”하연은 그 말에 속으로 놀랐다. ‘혹시 부남준의 말대로 서태진에게 정말
문어귀에 바짝 붙어있던 하연은 여생을 강탈당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황급히 핸드폰을 켜고 정태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바로 이때, 밖에서 어떠한 소리가 들려왔다.“WA그룹 대표의 사채 관련된 일은 조사가 끝났나요?” 말하는 사람은 한창명이었다. “아직 조사 중입니다만, 요즘은 주요 은행의 승인 절차가 복잡해서 사채를 쓰는 게 훨씬 편리합니다. 이자율도 20%에 달해서 불법도 아니고, 유죄로 확정하기도 어렵죠.”이 말을 들은 한창명이 매우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최근 몇 년간 3개의 기업이 사채를 갚지 못해 파산했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수두룩했어요. 그런데도 그 사람에게 문제가 없을 거라고 100% 확신할 수 있습니까?” “작년에 B시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냈던 대기업 DS그룹의 이사도 사채로 부동산에 투자하다가 감옥에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 자금들은 다 서태진의 사채에서 나온 거였고요. 이 비서, 좀 더 엄밀하게 조사해 보세요.” 남자의 목소리는 엄숙하고 진지했다. 이현오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알겠습니다.” 문에 기대어 있던 하연은 문득 크게 깨달았다.‘호현욱에 관한 얘기구나.’ ‘부남준이 말한 약점이 이거였어. 몰래 사채업을 하다니, 서태진은 정말 미쳤어. 아마 몇 년간 재미를 좀 봤기 때문에 여태 계속해 온 거겠지? 그런데 갑자기 한 검사님이 대대적인 조사를 하겠다니까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던 거고.’ ‘정말 그렇다면... 사채업이 터지기만 하면, 공사 책임자인 상혁 오빠에게도 영향이 미칠 게 분명해.’‘그건 안 돼...’한창명은 여전히 업무를 지시하고 있었다. 하연은 손잡이를 비틀어 보았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2층이었고, 아래에는 화단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잔디는 텅 비어 있었으며, 모두 딱딱한 흙으로 덮여 있었다. ‘뛰어내리면 골절이 되진 않아도 타박상 정도는 입을 수 있을 거야.’ 이현오가 그녀에게 진짜로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달린 하연은 큰길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이현이 숨을 고르고 물었다.“귀신이라도 쫓아와요?”“귀신보다 더 무서운 거였어요.”길가의 나무에 기댄 하연은 마음속으로 하염없이 부남준을 욕했다.“참, 손 선생님은 왜 여기 계세요?” 이현이 태연한 얼굴로 서류봉투를 흔들었다.“소울 칵테일의 수속을 다 처리하지 못했거든요.” “장사는 잘돼요?” “그럼요.”하연이 불만스럽게 말했다.“왜 거짓말하세요?” “뭐라고요?”이현은 약간의 긴장을 드러내며 그녀의 질문에 매우 신경 썼다. “설에 소울 칵테일 앞을 지나쳤는데, 손님이 한 명도 없더라고요. 장사가 잘 안되는 거잖아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자 하니, 하연은 조금 쑥스러웠다. 이 말을 들은 이현이 저항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소울 칵테일 앞을 지나쳤는데, 왜 들어오지는 않은 거예요? 그리고 소울 칵테일은 최 사장님의 홍보 덕분에 여전히 많은 손님을 끌어들이고 있어요.” 그의 농담을 들은 하연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한 번 놓친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 법이에요. 손 선생님은 이 기회를 제대로 잡아야 한다고요.” ‘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거구나.’이현은 은근히 동의했다. ‘그래, 기회를 잡지 못한 부분도 분명히 있어.’ 그가 우울해하는 모습을 본 하연이 속상해서 서둘러 말했다.“저도 자주 갈게요.” 미소를 짓던 이현은 손을 뻗어 그녀 얼굴의 먼지를 닦아주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한 검사장님 비서의 사무실에서 뛰어내린 거예요?” 하연이 난감해하며 말했다.“손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자주 수속하러 오다 보니까 이곳에 대해 잘 알게 됐어요.” 하연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손 선생님은 비즈니스에 종사하지 않으니까 경계할 필요가 없겠어.’“손 선생님은 소울 칵테일을 운영하면서 만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럼 사채의 장단점에 관해서도 잘 아세요?” 이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겉으로는 합법적인 일
“안씨 가문 도련님이랑 약속이 있었는데, 안씨 가문 도련님은 오늘 아침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댁으로 돌아갔다고 하더라고요. 두 사람이 같이 술을 마셨으니, 여기에 있지는 않을 거예요.하연이 상혁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만약 부하들을 시킨 거라면요?” 상혁은 그녀의 손바닥을 살짝 쥐며 달래듯이 말했다.“CCTV를 확인해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겠어.”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기에 하연은 애가 탔다. 무언가 떠오른 그녀가 갑자기 양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형사님, 왕진은 내일 석방되나요?”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겁니다.] [이미 한동안 구금되어 있었지만, 형을 선고받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요.] 하연이 막 입을 열려고 하자 양한빈이 말했다.[아마 오늘 밤 보석으로 풀려날 겁니다.] “뭐라고요?”[보석금을 냈으니, 몇 시간 정도의 차이는 신경 쓰지 않을 예정이죠.] 하연의 두 눈이 어두워졌다.“누가 보석금을 냈다는 거예요?”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한씨 성을 가진 사람인가요?” 양한빈은 2초 동안 침묵했다.[아니에요.] 하연은 곧바로 전화를 끊고 상혁을 바라보았다.“왕진한테 어떤 친척이나 친구가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전화 내용을 들은 그가 그녀에게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왕진의 딸이 사라진 시점에서 왕진이 보석으로 풀려난 건 미리 계획된 일이었을 거야. 당장은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조금만 진정해 봐.” 하연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는데,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너무 조급한 듯했다. 상혁은 황연지에게 업무를 지시한 후, 하연을 데리고 아크로리버파크로 돌아갔다. 아직 떠나지 않았던 조진숙은 하연이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왜 그래?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은 거야?” 상혁은 외투를 벗어 고용인에게 건넨 후, 진정 효과가 있는 국 한 그릇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난 괜찮아요.”하연이 소파에 반쯤 기대며 말했다.“너무 절묘한 상황이에요. 우리가 왕
상혁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고, 하연은 황연지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가장 유능한 비서인 연지는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상혁은 그 주택 건물로 가기 직전에 회의를 마친 상황이었고, 바쁜 하루를 보낸 탓에 낯빛이 좋지 않았으며, 피로가 여실히 드러났다. 연지가 막 대답하려고 할 때, 상혁이 끼어들었다.“사업에 관한 문제로 불공정 경쟁에 연루됐어. HT그룹의 윗선이 무너지면, 한서준은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거야.” 하연은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앞으로 나아간 조진숙이 하연을 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뜨거운 물을 받아뒀으니까 우선 목욕부터 하고 긴장 좀 풀어. 온몸이 먼지투성이잖니.” “저를 위해서 목욕물을 준비하셨다고요?”놀라서 소리친 하연은 그제야 자신의 몸이 더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진숙은 그녀를 밀고 욕실에 들어가 외투를 벗겨주었다.“키워준 엄마도 엄마인 법이야. 엄마가 딸의 목욕물을 받아주는 게 뭐 어때서 그래?” 이 말에 긴장이 풀린 하연은 그제야 주머니 안에 있는 손이현의 만년필을 발견했다. 그 만년필에는 지방검찰청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2층에서 뛰어내렸을 때 닥치는 대로 주워 온 거구나.’ “이게...”조진숙은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대체 언제쯤이면 호칭을 바꿀 생각이야? 나는 진숙 이모나 어머니가 아닌 그냥 엄마라고 불러주는 날을 기다리고 있어.”의도를 알아차린 하연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놀리지 마세요.” 그 모습을 본 조진숙은 좋아서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 사람들이 네가 예의 바른 아이라고 하면서 부씨 가문에 시집가는 건 시간문제일 거라고 했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더구나.” 과분한 평가를 받은 하연은 몸의 절반을 욕조에 담그고 한쪽으로 기대며 말했다.“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대요?” 하연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고, 조진숙의 미소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난 네가 너무 빨리 부씨 가문에 들어가는 건 원치 않아.
연지는 놀랐다.“한서준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 두렵지 않을 거야. 심지어 조사받는 것조차도.” 상혁은 그가 하연을 방패막이로 삼으려 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생각했다.“HT그룹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야. 하지만 한명창이 어떻게 조사했는지에 달려 있겠지.”목욕은 확실히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됐고, 하연은 몽롱하여 졸리기까지 했다. 바로 이때, 그녀의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관자놀이를 마사지해 주었는데, 힘 조절이 아주 부드러웠다. 그녀는 조진숙이 아직 가지 않은 줄 알았다.“이모, 이러실 필요 없어요.”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 남자의 숨결이었다. 하연은 즉시 몸을 돌려 남자의 커다란 손을 뿌리쳤다.“누구세요?!” 상혁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스쳤다.“집에서도 이렇게 경계하다니, 안전의식이 뛰어난데?” ‘상혁 오빠잖아!’ 하연이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앉았다.“어떻게 인기척도 안 낼 수 있어요?” 그녀는 상혁을 등진 채 당황스러움을 숨겼다. 아마 부남준과 함께 있을 때 불안에 떨었기 때문에 유난히 경계하게 된 듯했다. 상혁은 계속해서 그녀의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왕진과 왕진의 딸은 같은 곳에 있을 거야. 아무래도 한씨 집안이 꾸민 일일 확률이 높지. 이것만큼은 확실하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돌파구는 분명히 있을 거야.” 상혁은 하연을 위로하고 있었다.“하지만 양 형사님이 왕진의 보석금을 낸 사람이 한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양한빈의 그 짧은 침묵을 떠올린 상혁이 입술을 오므렸다. 그의 마음속에는 대략 속셈이 있었다. “목욕하면서도 그렇게 생각이 많은 거야? 많이 걱정하면 빨리 늙는 법인데.”그가 그녀를 위협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연이 얼굴을 치켜세웠다.“나를 싫어하는 거죠?” “아니.”“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 부상혁 씨, 주름이 생긴 나는 보기 싫다는 거예요?”하연은 지체 없이 거울을 찾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촉촉하고 새하야며
설 이후, 혼란스러운 B시에서는 정부 관계자나 사업가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사모님들 모임에서도 많은 얼굴이 바뀌었는데, 함께 모여 카드놀이를 하거나 오후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모두 낯선 얼굴이 되었다. 오늘은 이수애가 B시로 돌아온 후, 안주인으로서 다른 명문가 사모님을 초대한 첫 연회였다. 그녀는 한씨 고택의 정원에 연회를 마련하여 많은 사모님이 참석하게 했다. “아이고, 저는 서준이가 속 깊은 아이라는 걸 진작 알았어요. 사모님을 돌아오게 할 거라는 것도요. 이것 좀 보세요. 특별히 사모님을 위해 남겨둔 원단도 있잖아요. 이걸로 드레스를 만들면 딱이겠어요!” 말하는 사람은 B시에서 가장 큰 직물 기업의 사모님인데, 그녀가 말하는 원단은 금실로 수놓아져 있어서 가치가 매우 높았다. 이수애가 그 원단에서 손을 떼지 못할 정도로 좋아하며 말했다.“사람만 오면 되지, 무슨 선물까지 가져오셨어요?” “나갔다 오니까 얼굴이 더 좋아지셨네요. 서준이가 효도하고, 따님도 아름다워서 그런 건가요? 참, 어제 뉴스를 보니까 따님이랑 최하성 씨가 같이 찍힌 사진이 있더라고요. 두 사람, 정말이에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자신도 봤다고 말했다.“최하성이요? 그 사람은 국제적인 스타잖아요. 그 남자의 숨겨진 여자 친구가 한서영 씨라는 거예요?” 두 사람이 같은 프레임에 있는 사진은 한서영이 예능 프로그램을 녹화하던 날 찍힌 것으로, 악의적인 언론이 두 사람의 사진을 합성하여 큰 화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하성의 인기는 만만치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인기에 힘입어 주목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하성과 하연이 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였다. 이수애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런 말씀들 마세요. 우리 서영이가 그런 광대를 눈여겨볼 리 없잖아요.” 사람들이 분분히 서로를 바라보았다.‘한서영도 영화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던가? 두 사람 모두 광대잖아...?’ 바로 이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보기에 서영 씨는 타고난 미인이라 최하성 씨와 잘 어울리는 것
“그렇지만 뭐?”“이 방면의 고수인 하경 도련님에게 도움을 청한다면...”태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연이 끼어들었다.“안 돼.” “하경 오빠는 일정한 선을 넘을 수 없어. 물론 나도 오빠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고.” 여기까지 말한 하연은 조금 안타까워했다.‘내가 해커를 찾지 못해서 그래. 해커를 찾았더라면, 지금쯤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 그리고 한씨 가문도 주시해 줘.” 태훈이 사무실을 나섰다. 하연은 곧장 여은에게 연락하여 한서영의 루머를 띄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것일까.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가흔이한테도 말해봤어?] “너한테 연락했으니까 당연히 얘기했지. 딱히 신경 쓰지는 않던데 약간 흥분하더라고.” 여은이 웃으며 말했다.[흥분? 자기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와 스캔들에 휘말렸는데 고작 흥분?]하연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가흔을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원인을 추측하려 했다.“아마 남자 친구가 너무 주목받아서 현실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아. 그래서 모든 관심이 한서영에게 향하는 거라면, 기꺼이 그렇게 되도록 둔 거지.” “하성 오빠도 가흔이가 오빠를 쫓아다니는 다른 여자들에게는 전혀 관심 없다는 걸 알고 있을까?” 하성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연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연하게 좋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 뿐이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두 사람의 감정에 금이 갈지도 몰라.’ 어쨌든 하성은 이 부분에 대해 아주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가흔이 확고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폭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연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해야겠어.” 한서영이 처음 참여한 작품은 대형 제작인데, 그녀는 조연을 맡았다. 게다가 이방규가 그녀의 뒤를 든든하게 받치는 탓에 감독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같은 작품에 참여한 여주인공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상대는 유명한 여배우 출신이며, 권위 있는 상을 여러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