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은 간신히 조진숙을 설득하여 외출하게 한 후, 차에 올라탔다. 옆자리를 살펴보았는데, 황연지가 정리해 둔 서류가 없었다. 그가 기사에게 물었다. “황 비서는 아직 안 왔나?”“네, 어제 술자리에서 과음하셨을 겁니다. 오늘 늦을 수도 있겠죠.”상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지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었고, 홍보팀 직원들보다도 잘 마셨다. 그렇지 않았으면 상혁도 연지를 계속 곁에 둘 수 없었을 것이다. ‘과음했다고?’...며칠 전, 최하민은 최동신을 데리고 F국으로 돌아갔고, 최하경은 휴가 마지막 날까지 B시에 머물렀다. 하연은 하경을 공항까지 배웅했다. 하경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하고 싶지 않아.”하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누가 오빠보고 굳이 프로그래머를 하래요? 10년 후면 머리카락 다 빠질 것 같아요.”“그건 프로그래머의 모습이 아니야.” 하경은 다리를 꼬며 여유롭게 대기 중이었다. “저번에 말했던 건 어떻게 됐어?”하연은 속으로 당황하며,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굴리며 말했다. “아직 조사 중이에요. 오빠가 말한 사람은 워낙 신비해서 시간이 좀 걸려요.”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재촉하지 않았다.그때, 맑은 목소리가 시끄러운 공항을 가르며 들려왔다. “최하경!”하경과 하연은 눈을 마주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펑크스타일의 긴 곱슬머리를 가진 여자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캐리어를 끌고 빠르게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최하경!”하연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하경 오빠, 저분은 누구예요?”하경은 당황하며 무심코 한 발짝 물러섰고, 여자를 놀라며 쳐다봤다. “주아린? 여긴 왜 왔어!”“B시에서 경유하거든.” 주아린은 하연을 향해 인사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주아린입니다.”하연은 아린과 악수하며 웃었다. “저번에 뵀었죠?”아린은 하경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나 반갑지 않니? 우리 채팅했을
부남준은 부상혁이 아직 하연과 손이현이 함께 있었던 그날 밤에 일을 모르는 줄 알고, 계속해서 이 일을 가지고 하연을 협박하고 있었다.하연은 조금 안심했지만, 얼굴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했다. “원본 영상을 어떻게 해야 내게 줄 거죠?”남준은 담배 한 개비를 물고 고개를 돌려 하연의 말을 들었다. 발코니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연기가 하연의 코끝으로 스며들었고, 그녀는 짜증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남준은 재미있다는 듯이 하연에게 다가와 얼굴에 대고 연기를 뿜었다.“부남준!”“이제야 급해졌나 보군. 소울 칵테일 사장과 밀회를 즐길 때는 이렇게 급하지 않던데.”하연이 처음 만난 날 자신이 마시는 차에 약을 탔을 때부터, 남준은 ‘이 교활한 최하연’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설령 하연이가 최씨 가문의 외동딸이라 해도...남준의 눈에 하연은 속셈이 많고, 지나치게 능력이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여자의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실은 하연이 손이현과 만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남준은 속으로 참 기뻤다. 부상혁이 직접 고른 여자 친구도 결국 자신의 예상대로였기 때문이다.하연은 남준의 말에 걸려들지 않고 되물었다. “이제 WA 그룹 사업의 책임자가 아닌데, 왜 서태진의 약점을 손에 넣으려 하는 거야?”“내가 책임자가 아니니까 더욱 최 사장님이 수고해 줘야 하는 것이지.” 남준은 뻔뻔한 미소를 지었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의 셔츠가 부풀어 올랐다.하연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금세 깨달았다. ‘WA 그룹의 사업이 지금 상혁 오빠의 손에 있으니까, 부남준은 분명히 상혁 오빠를 무너뜨리기 위한 거야.’“내가 당신의 형수가 될 가능성도 있는데, 어떻게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협박 때문에 상혁을 무너뜨릴 거라고 생각해?”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했다.“이 사업으로 부상혁에게 피해를 준다면, 최 사장님은 그래도 가만히 계실 건가?”하연은 순간 경계했다. “서태진에게 문제가 있어.”남준이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며 말했다.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 대표님과 계속 협력할 수 있다니, 정말 기쁜 일입니다.”서태진은 술에 취해 연신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 사업은 원래 부 대표님이 최 사장님을 위해 만든 거예요. 입찰 당일에 부 대표님은 절 DL그룹에서 붙잡아 두며 억지로 바둑 한판을 두자고 해서, 그때의 저는 거의 겁에 질려 있었지요.”하연은 이 내막을 몰랐기에 잠시 놀랐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상혁 오빠가 B시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한 사업이었을 거야.’“부남준이 그 후에 갑자기 치고 올라올 줄은 몰랐죠. 그래도 이제는 상황이 나아졌어요. 부남준은 몰락했고, 주도권은 다시 부 대표님의 손에 돌아갔으니 말이에요.”하연은 서둘러 말했다. “서 대표님, 그런 말씀은 너무 일러요. 이런 얘기가 소문나면 좋지 않아요.”서태진은 순간 깨닫고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내 정신 좀 봐요.”서태진은 하연을 보는 눈빛에 칭찬이 가득했다. 하연은 생각했다. ‘상혁 오빠의 존재가 없었다면 서태진도 날 이렇게 믿지 않았을 거야.’하연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 중 한 사람은 시청의 조 국장이었는데, DS그룹의 몇 가지 사업이 조 국장의 승인을 받은 것이었다. 하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 국장님, 오랜만입니다.”서로 인사를 나누는 동안, 문이 열리며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넥타이를 맨 그는 약간 통통한 몸매였고, 서태진을 향해 곧바로 걸어왔다. “서 대표님, 아주 성대한 자리군요.”“오, 이 비서님, 이렇게 와주시다니, 제게 큰 영광입니다.” 서태진은 얼른 달려가며 반갑게 맞이했다.하연은 슬쩍 ‘이 비서’를 쳐다보다가 서태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 하연도 때마침 조 국장과 대화하느라 몸을 숙이고 있었고, 방 안에서 유일한 미녀였기에 오해를 사기 쉬운 상황이었다.“서 대표님, 건드려서는 안 될 것에는 절대 손대지 마세요. 우리 한 검사장님께서는 이런 걸 아주 싫어합니다.”이현오는 그렇게 말하
“최 사장님께서 제 차에 타 주시니 영광입니다.” 이현오는 차분한 와중에도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영광은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뒷좌석에 올랐다. “오히려 시민을 위해 비바람을 맞으며 고생하시는 이 비서님 같은 분들이 더 대단하시죠.”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손에 들린 핸드폰이 울렸고, 상혁의 전화였다.하연은 핸드폰을 진동으로 바꾸고 받지 않았다.이현오는 백미러를 통해 하연을 힐끗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다양한 이미지로 변화할 수 있는 듯했다. 요염하게도, 청순하게도 변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지금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묘하게 매력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이 여자, 보통 여자가 아니네.’하연은 이현오의 시선을 느끼고 웃으며 말했다. “이 비서님, 제가 예뻐요?”그녀의 직설적인 질문에 이현오는 깜짝 놀라 얼른 시선을 돌렸다.“저는 여자를 볼 때, 그 사람이 예쁘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법을 어겼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죠. 서 대표님이 저에게 좋은 말 해 달라고 한 것도 효과 없을 테니, 최 사장님께서도 그만두시죠.”하연은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높은 자리라도 자런 식으로 자신만만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네.’“B시에서 상장된 30여 개 기업이 조사받았고, 서 대표님은 그 상황에 깜짝 놀라 오늘의 접대를 준비했습니다. 한창명 검사장님과 관련된 사람을 만나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런데 한창명 검사장님이 아닌 이 비서님이 오시니 서 대표님은 더욱 불안해졌고, 저에게 부탁한 것도 당연한 일이죠.”이현오는 다시 백미러를 통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예상보다 더 똑똑하고 명료하고...’이런 생각이 들자, 이현오에게는 괜한 잡념이 더해졌다.“서 대표님이 저지른 일은 크다고도 할 수 있고, 작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모든 것은 절차대로 진행될 겁니다.”하연은 그 말에 속으로 놀랐다. ‘혹시 부남준의 말대로 서태진에게 정말
문어귀에 바짝 붙어있던 하연은 여생을 강탈당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황급히 핸드폰을 켜고 정태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바로 이때, 밖에서 어떠한 소리가 들려왔다.“WA그룹 대표의 사채 관련된 일은 조사가 끝났나요?” 말하는 사람은 한창명이었다. “아직 조사 중입니다만, 요즘은 주요 은행의 승인 절차가 복잡해서 사채를 쓰는 게 훨씬 편리합니다. 이자율도 20%에 달해서 불법도 아니고, 유죄로 확정하기도 어렵죠.”이 말을 들은 한창명이 매우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최근 몇 년간 3개의 기업이 사채를 갚지 못해 파산했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수두룩했어요. 그런데도 그 사람에게 문제가 없을 거라고 100% 확신할 수 있습니까?” “작년에 B시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냈던 대기업 DS그룹의 이사도 사채로 부동산에 투자하다가 감옥에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 자금들은 다 서태진의 사채에서 나온 거였고요. 이 비서, 좀 더 엄밀하게 조사해 보세요.” 남자의 목소리는 엄숙하고 진지했다. 이현오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알겠습니다.” 문에 기대어 있던 하연은 문득 크게 깨달았다.‘호현욱에 관한 얘기구나.’ ‘부남준이 말한 약점이 이거였어. 몰래 사채업을 하다니, 서태진은 정말 미쳤어. 아마 몇 년간 재미를 좀 봤기 때문에 여태 계속해 온 거겠지? 그런데 갑자기 한 검사님이 대대적인 조사를 하겠다니까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던 거고.’ ‘정말 그렇다면... 사채업이 터지기만 하면, 공사 책임자인 상혁 오빠에게도 영향이 미칠 게 분명해.’‘그건 안 돼...’한창명은 여전히 업무를 지시하고 있었다. 하연은 손잡이를 비틀어 보았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2층이었고, 아래에는 화단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잔디는 텅 비어 있었으며, 모두 딱딱한 흙으로 덮여 있었다. ‘뛰어내리면 골절이 되진 않아도 타박상 정도는 입을 수 있을 거야.’ 이현오가 그녀에게 진짜로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달린 하연은 큰길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이현이 숨을 고르고 물었다.“귀신이라도 쫓아와요?”“귀신보다 더 무서운 거였어요.”길가의 나무에 기댄 하연은 마음속으로 하염없이 부남준을 욕했다.“참, 손 선생님은 왜 여기 계세요?” 이현이 태연한 얼굴로 서류봉투를 흔들었다.“소울 칵테일의 수속을 다 처리하지 못했거든요.” “장사는 잘돼요?” “그럼요.”하연이 불만스럽게 말했다.“왜 거짓말하세요?” “뭐라고요?”이현은 약간의 긴장을 드러내며 그녀의 질문에 매우 신경 썼다. “설에 소울 칵테일 앞을 지나쳤는데, 손님이 한 명도 없더라고요. 장사가 잘 안되는 거잖아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자 하니, 하연은 조금 쑥스러웠다. 이 말을 들은 이현이 저항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소울 칵테일 앞을 지나쳤는데, 왜 들어오지는 않은 거예요? 그리고 소울 칵테일은 최 사장님의 홍보 덕분에 여전히 많은 손님을 끌어들이고 있어요.” 그의 농담을 들은 하연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한 번 놓친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 법이에요. 손 선생님은 이 기회를 제대로 잡아야 한다고요.” ‘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거구나.’이현은 은근히 동의했다. ‘그래, 기회를 잡지 못한 부분도 분명히 있어.’ 그가 우울해하는 모습을 본 하연이 속상해서 서둘러 말했다.“저도 자주 갈게요.” 미소를 짓던 이현은 손을 뻗어 그녀 얼굴의 먼지를 닦아주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한 검사장님 비서의 사무실에서 뛰어내린 거예요?” 하연이 난감해하며 말했다.“손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자주 수속하러 오다 보니까 이곳에 대해 잘 알게 됐어요.” 하연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손 선생님은 비즈니스에 종사하지 않으니까 경계할 필요가 없겠어.’“손 선생님은 소울 칵테일을 운영하면서 만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럼 사채의 장단점에 관해서도 잘 아세요?” 이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겉으로는 합법적인 일
“안씨 가문 도련님이랑 약속이 있었는데, 안씨 가문 도련님은 오늘 아침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댁으로 돌아갔다고 하더라고요. 두 사람이 같이 술을 마셨으니, 여기에 있지는 않을 거예요.하연이 상혁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만약 부하들을 시킨 거라면요?” 상혁은 그녀의 손바닥을 살짝 쥐며 달래듯이 말했다.“CCTV를 확인해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겠어.”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기에 하연은 애가 탔다. 무언가 떠오른 그녀가 갑자기 양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형사님, 왕진은 내일 석방되나요?”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겁니다.] [이미 한동안 구금되어 있었지만, 형을 선고받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요.] 하연이 막 입을 열려고 하자 양한빈이 말했다.[아마 오늘 밤 보석으로 풀려날 겁니다.] “뭐라고요?”[보석금을 냈으니, 몇 시간 정도의 차이는 신경 쓰지 않을 예정이죠.] 하연의 두 눈이 어두워졌다.“누가 보석금을 냈다는 거예요?”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한씨 성을 가진 사람인가요?” 양한빈은 2초 동안 침묵했다.[아니에요.] 하연은 곧바로 전화를 끊고 상혁을 바라보았다.“왕진한테 어떤 친척이나 친구가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전화 내용을 들은 그가 그녀에게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왕진의 딸이 사라진 시점에서 왕진이 보석으로 풀려난 건 미리 계획된 일이었을 거야. 당장은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조금만 진정해 봐.” 하연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는데,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너무 조급한 듯했다. 상혁은 황연지에게 업무를 지시한 후, 하연을 데리고 아크로리버파크로 돌아갔다. 아직 떠나지 않았던 조진숙은 하연이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왜 그래?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은 거야?” 상혁은 외투를 벗어 고용인에게 건넨 후, 진정 효과가 있는 국 한 그릇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난 괜찮아요.”하연이 소파에 반쯤 기대며 말했다.“너무 절묘한 상황이에요. 우리가 왕
상혁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고, 하연은 황연지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가장 유능한 비서인 연지는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상혁은 그 주택 건물로 가기 직전에 회의를 마친 상황이었고, 바쁜 하루를 보낸 탓에 낯빛이 좋지 않았으며, 피로가 여실히 드러났다. 연지가 막 대답하려고 할 때, 상혁이 끼어들었다.“사업에 관한 문제로 불공정 경쟁에 연루됐어. HT그룹의 윗선이 무너지면, 한서준은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거야.” 하연은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앞으로 나아간 조진숙이 하연을 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뜨거운 물을 받아뒀으니까 우선 목욕부터 하고 긴장 좀 풀어. 온몸이 먼지투성이잖니.” “저를 위해서 목욕물을 준비하셨다고요?”놀라서 소리친 하연은 그제야 자신의 몸이 더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진숙은 그녀를 밀고 욕실에 들어가 외투를 벗겨주었다.“키워준 엄마도 엄마인 법이야. 엄마가 딸의 목욕물을 받아주는 게 뭐 어때서 그래?” 이 말에 긴장이 풀린 하연은 그제야 주머니 안에 있는 손이현의 만년필을 발견했다. 그 만년필에는 지방검찰청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2층에서 뛰어내렸을 때 닥치는 대로 주워 온 거구나.’ “이게...”조진숙은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대체 언제쯤이면 호칭을 바꿀 생각이야? 나는 진숙 이모나 어머니가 아닌 그냥 엄마라고 불러주는 날을 기다리고 있어.”의도를 알아차린 하연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놀리지 마세요.” 그 모습을 본 조진숙은 좋아서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 사람들이 네가 예의 바른 아이라고 하면서 부씨 가문에 시집가는 건 시간문제일 거라고 했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더구나.” 과분한 평가를 받은 하연은 몸의 절반을 욕조에 담그고 한쪽으로 기대며 말했다.“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대요?” 하연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고, 조진숙의 미소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난 네가 너무 빨리 부씨 가문에 들어가는 건 원치 않아.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