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영은 단순히 기회를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연을 창피하게 만들고 그녀의 얼굴에 먹칠을 하려는 것이었다.“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이방규 역시 나를 겨냥한 거고, 결국 내가 너에게 피해를 준 셈이네.” 상혁이 차분하게 말했다.“그렇지 않아요!” 하연은 즉시 반박했다. “이건 오빠와 상관없어요.”상혁은 담담하게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경찰은 이미 증거를 수집하고 조사를 시작했어. 하지만 내가 아는 이방규라면, 아주 깔끔하게 처리했을 거야. 아마 유효한 증거를 찾기는 어려울 거야.”“그건 범죄잖아요! 저 사람들을 그냥 두고 봐야 해요?”“당연히 그렇지 않아. 저 사람들을 무너뜨릴 방법은 많아. 네 지혜로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야. 다만, 지금은 네가 너무 혼란스럽고 화가 난 상태야. 조금만 진정하고 생각해 봐. 냉정함을 되찾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상혁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따뜻했으며, 마치 사람의 마음을 다독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연은 왜인지 모르게 불안했던 감정이 차분해지며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마음의 중심을 잡았다.하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상혁 오빠, 오빠는 정말 선생님의 자질이 있어요. 만약 사업을 안 했다면, 아마 많은 제자를 가르쳤을 거예요.”상혁은 하연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녀가 농담처럼 상혁에게 선생님이 어울린다고 하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하연을 데리고 병원을 나서며 말했다. “난 원래 이렇게 참을성 많은 사람이 아니야. 게다가 난 원래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그럼 원래는 뭐가 되고 싶었어요?”하연은 상혁의 과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지금 하는 일이 그가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상혁은 잠시 생각한 후, 최대한 간단한 단어로 설명하려고 했다. “프로그래머?”하연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믿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오빠의 꿈이 프로그래머였다고요? 미쳤어요? 그럼 대머리가 될 텐데요!”그녀의 고정관
마지막 경매 물품은 옛날에 아주 유명한 시인의 원본 시집인데, 경매 시작 가격은 4억이었다.하연은 상혁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 시집은 아주 연구 가치가 커서 사실 내놓기 아까운 물건이에요. 부 대표님, 관심 없으세요?]상혁은 손가락을 길게 뻗어 핸드폰을 스르륵 넘기며 답장을 보냈다. [올해를 멋지게 마무리해야지.]하연이 그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뒤에서 황연지가 입찰을 시작했다. “6억.”상혁이 여자 친구를 위해 경매에 나서자, 다른 사람들은 가격을 약간 올리는 정도였고, 크게 경쟁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주현빈 역시 12억까지 가격을 올리다가 그만두었다.경매사는 우아하게 말했다.“부 대표님께서 13억을 부르셨습니다. 13억, 하나, 둘, 13억...”“15억.”낯선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홀에서 울렸다. 그동안 전혀 들리지 않던 목소리였기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남자는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앉아 있었고, 빛과 그림자 사이로 살짝 그늘진 얼굴이 보였지만, 그가 뿜어내는 분위기는 자유롭고 당당했다.연지는 낮게 외쳤다. “부남준 사장입니다.”상혁도 당연히 그를 알아봤다. 남준은 무대 위의 물건을 주시하면서 동시에 첫 번째 줄에 앉은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하연은 순간 혼란스러웠고, 남준이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바로 상혁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상혁은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연지는 지시에 따라 다시 입찰했다. “16억.”“17억.”“18억.”“19억.”남준은 1억씩 가격을 올리며 끝까지 경쟁했다. 경매장에는 경매사와 두 사람의 입찰 소리만이 울려 퍼지며 긴장이 감돌았다.하연은 점점 이상함을 느끼고 상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그만해요. 부남준이 스스로 덤터기를 쓰게 놔두자고요.]상혁은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답장하지 않았다.연지는 26억까지 가격을 올렸다.경매사도 점점 흥분했다. “부 대표님께서 26억을 부르셨습니다. 뒤쪽에 앉은 사
상혁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건 머지않은 일이지. 그때는 네가 우리 집에 와서 술 한잔해야 할 거야.”남준의 표정은 단숨에 굳어졌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부씨 가문의 본가에 돌아간 적이 없었다. 정식으로 인정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씨 가문의 고집스러운 어른들이 부남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상혁의 말은 분명 도발이었다.황연지가 경매 낙찰 절차를 처리하러 가자, 남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또 다른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형님이 오늘처럼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기를 바라요.”그 말을 남기고 그는 곧장 홀을 나가더니 금세 사라졌다.꼿꼿하게 선 상혁은 한 그루의 늘 푸른 나무처럼 당당하고 자연스러웠다....한편, 하연은 매우 바쁘게 일을 마무리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일을 모두 처리한 후, 그녀가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경찰은 이미 증거 수집을 마친 상태였다.“CCTV가 인위적으로 손상된 흔적이 있습니다. 현장의 증거는 충분하지 않아서, 추가 조사가 필요합니다.” 말을 건 사람은 이전에 마주쳤던 경찰, 양한빈이었다.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고생 많으십니다. 이 일은 우리 직원들의 건강과 직결된 문제이니, 결과가 나오면 바로 알려주세요. 필요하다면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물론이죠.” 양한빈은 사건 당사자의 자료를 한 번 더 확인하고는 말했다. “최 사장님께서는 직원들을 참 잘 챙기시네요. 최 사장님 같은 사장이 있어서 직원들은 참 행운입니다.”그저 속이 안 좋은 몇몇 직원일 뿐인데도 이렇게 진지하게 대응하는 모습은 사업가로서 드문 경우였다.“서로가 서로를 이루는 관계니까요. 어떤 문제든 제가 책임져야죠.”양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사를 마치고 떠났다.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이미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상혁은 차 안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다. 장거리 비행으로 지친 그의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났다.연지는 차 옆에서 시간마다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
하연은 부상혁의 품에 안긴 채, 그의 강렬한 키스에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문득 물었다. “만약 어느 날, 내가 다른 사람과 지나치게 가까워진 걸 알게 되면 오빠는 어떻게 할 거예요?”상혁은 그녀의 입술에 맺힌 물기를 닦아내며, 반쯤 농담하듯 말했다. “그 사람을 사라지게 하지.”하연은 살짝 눈을 떴다.“그렇게까지 심하게 할 거예요? 그럼 나는요?”“말을 안 듣는 아가씨는 벌을 받아야지.” 상혁은 그녀의 허리를 살짝 꼬집으며 경고의 의미를 담은 듯 말했다.그의 눈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고, 농담처럼 들렸지만, 하연은 잠깐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이전에 느꼈던 작은 단서들로 상혁이 겉으로는 온화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그의 내면에는 마른 장작더미처럼 언제든 불이 붙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부상혁은, 아주 위험한 남자였다.상혁은 자세를 조정하여 하연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 순간, 하연은 갑자기 아프다는 듯이 신음을 냈다.“왜 그래?” 상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의 표정에서 조금 전의 감정은 사라지고 있었다.“발목이 아파요.”하연의 왼쪽 발목이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상혁은 몸을 앞으로 숙여 그녀의 발목을 살피며 말했다. “발목이 아직 다 낫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다니.”“거의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경솔하군.” 하연은 상혁이 엄하게 말하자 약간 움츠러들었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손 선생님의 방법이 효과가 있어서 별로 아프지 않았어요.”하연이 갑자기 손이현을 언급하자, 상혁의 눈에 경계심이 스쳤다. “뭐라고?”“그날 발목을 삐었을 때, 오빠랑 전화하고 나서 손 선생님께서 오빠가 주문한 물건이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손 선생님은 내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근처에 있다며 발목을 좀 처치해 줬어요.”하연은 평온한 얼굴로 시간 순서를 교묘히 맞춰 말하며 상혁이 의심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상혁의 표정을 살폈다
하연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완전히 빨개졌다. 전에는 그녀가 먼저 유혹한 것이었고, 말로만 한 장난이었지만, 이제는 상혁이 먼저 나섰고, 남자의 강한 소유욕과 침략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가 내뿜는 숨결마저도 은밀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서로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번개가 치는 듯한 전율이 느껴졌다.하연은 순간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렇게 빨리요?”상혁은 한 손으로 그녀의 베개 옆을 짚고 서 있었다. 넓고 위풍당당한 그의 모습은 하연을 웃음 짓게 했다. “왜, 긴장했어? 아까는 그렇게 기대하는 것 같더니. 안 해주면 실망했잖아.”하연은 재빨리 그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그건 다르죠! 그건...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였어요!”상혁의 큰 손이 하연의 가늘고 하얀 다리 위에 머물렀고, 그 손길은 불을 지피듯 그녀의 몸을 달구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궁금하지 않아?”“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게 뭘까...”상혁이 먼저 다가오자, 하연은 진짜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하루 종일 고생했으니까, 몸이 힘들지 않을까 걱정돼서...”말이 끝나자마자 하연은 후회했다. 상혁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상혁도 역시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흥미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못 할 것 같다고?”“그런 뜻이 아니에요!!” 하연은 황급히 변명했다.상혁이 하연의 피부를 살짝 꼬집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하연은 그 강렬한 페로몬에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고,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상혁은 갑자기 힘을 주어 그녀를 품에 끌어안으며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왜 도망가? 너한테 뭘 하려고 한 건 아닌데...”하연은 그의 품에서 가볍게 떨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로 겁을 먹은 것이다.상혁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하연은 이미 온몸이 힘이 풀려버렸다. 만약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그녀가 어떻게 되
마치 이방규와 한서영의 등장이 단순한 우연, 그저 운 좋게 상황에 끼어든 것처럼 보였다.하연은 감사 인사를 했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를 본 양한빈은 그녀를 위로했다. “최 사장님, 다행히도 걸그룹의 멤버들은 생명에 위협이 없고, 약을 뿌린 사람도 이미 잡혔습니다. 증거가 부족해 더 이상의 조사는 어렵습니다.”하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용의자를 한 번 볼 수 있을까요?”“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양한빈이 앞장서서 안내하던 중, 갑자기 한 인물이 모퉁이에서 걸어왔다. 그가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하연은 그를 알아챘다. “손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로 똑바로 서 있는 그 모습은 바로 손이현이었다.이현은 고개를 들어 세 사람과 눈을 마주치더니, 무심코 손에 든 서류를 뒤로 숨겼다.“최 사장님, 부 대표님.”상혁은 침착하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손 사장님, 여기 무슨 일로 오셨어요?”이현은 양한빈을 한 번 흘깃 본 후 대답했다. “소울 칵테일에 도둑이 들어서 신고하러 왔습니다.”“도둑이요?” 하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뭘 도둑맞았어요? 대체 무슨 도둑이 소울 칵테일에서 물건을 훔쳐요?”“귀한 차 몇 종류요. 다행히 범인은 이미 잡혔습니다.”이현은 다시 한번 양한빈을 쳐다보았다.양한빈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이미 해결된 작은 문제입니다.”상혁은 담담하게 공감하며 말했다. “손 사장님, 소울 칵테일 사장을 하느라 고생 많으시네요. 화재에 이어 도둑까지, 참 힘들겠어요.”“부 대표님과 최 사장님께서 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전부 사소한 일입니다.”이현은 하연을 슬쩍 쳐다보았다. 며칠 못 본 사이 그녀는 살이 조금 빠졌고, 얼굴에는 여전히 분노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짧게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하연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용의자를 보러 갔다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현이 들고 있는 서류를 흘끗 쳐다보았다. “손님을 맞이하는 시간이 이틀 앞당겨졌습니다. 손 사장님께서 저를 위해 방을 예약해 주셔야 할 것 같네요.”이현은 피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하연은 용의자를 만나보았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람은 감정이 매우 불안정해 보였고, 붉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막 용의자실을 나왔을 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서영이가 네 연말 행사를 방해한 것에 대해 사과할게.]익숙한 목소리였다. 바로 한서준이었다. 그가 이 상황에 대해 이미 들은 모양이었다.하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을 걸 알면서 일부러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 “네가 시켰어?”[그럴 리가... 당연히 아니지.]“그럼 왜 사과를 하지? 아니면 이제 한서영을 통제할 수 없는 건가?” 하연은 화가 나 있었고, 서준이 그 타이밍에 전화를 건 것이 딱 맞아떨어졌다.서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서영이는 이방규와 얽혀 있어서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지금은 내가 서영을 통제할 수 없지만, 서영이도 어쨌든 우리 한씨 집안의 사람이라, 언젠가는 내가 처벌할 거야.]하연은 그 말을 듣고는 비웃으며 대꾸했다. “거만하고 제멋대로인 여동생은 가족으로 인정하면서, 예의 바르고 격식 있는 형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한씨 집안, 참 이상한 집안이네.”다시 ‘한명준’을 언급하자, 서준의 마음속에 긴장이 스쳤다. [우리 집안은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은 적이 없어. 그 사람이 스스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고, 그게 본인의 선택이었어!]하연은 바로 반박했다. “진짜 가족이라면 그분이 돌아오지 않을 리 없지! 한서준, 네 집안의 본질이 어떤지 난 너무 잘 알잖아.”하연은 분노에 차서 말했다. 예전의 밝고 활달했던 ‘소년’이 한씨 가문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 생각하
설날 3일 전, 상혁은 소울 칵테일에 손님을 만나러 갔다. 이번에도 하연을 데려가지 않았다.전에는 하연이 상혁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늘 곁에 붙어있었다. 그가 F국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상혁이 며칠간 휴가를 냈고 설 연휴 이후까지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그렇게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하연이 늦게까지 일어나기 싫어하며 침대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강성훈이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부 대표님, 손님께서 이미 도착하셨습니다.”상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프런트 데스크 근처에서 손이현과 스쳐 지나갔다. 이현의 코끝을 스치는 것은 은은한 목련 향기, 여성의 향기였다. 이 향기는 그가 예전에 하연의 곁에서도 맡았던 것이다.그는 경험이 부족하지만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이 향기는 상혁과 하연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현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상혁이 예약한 룸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사생활이 철저히 보호되는 이곳에서 나이 든 한 노인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상혁을 보자마자 노인은 바로 일어서려고 했다. “상혁아.”상혁은 서둘러 노인의 움직임을 막으며 말했다. “교수님, 앉으세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나도 이제 막 왔네. 네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어!” 노인은 몹시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왜 바로 우리 집으로 오지 않고, 굳이 여기에서 보자고 했나?”이 노인의 이름은 정태산, B시 지방검찰청의 검사장이자 조진숙의 절친이었다. 또한 상혁이 해외 유학 시절 대학에서 상혁을 가르쳤던 교수이기도 했다.“지금 교수님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아서요. 저는 비즈니스에 종사하니, 사적으로 만나면 교수님께 누가 될까 염려스러워서요.”정태산은 한숨을 내쉬며 상혁이 차를 따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5, 6년이 흘렀구나. 넌 이젠 이런 모습을 하고 있네. 그때는 한창 풋풋한 젊은이였는데.”상혁은 미소를 지으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