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하연은 부동건이 송혜선을 데리고 왔을 것이라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문에 들어서자마자 외투를 벗어 웨이터에게 건넸다. 부동건과 나란히 서 있는 송혜선은 온화하고 얌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연은 곧장 그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경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말했다.“아저씨,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고령인 할아버지께서도 항상 손자들의 행복을 염려하시는데, 당연히 나도 신경 써야지.” 부동건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개하마, 여긴 송혜선 혜선 이모란다. 하연이는 이미 만난 적이 있어.” 하연을 힐끗 바라본 하경은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하경이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하경이지? 며칠 전엔 너를 보지 못했는데, 몇몇 사모님들이 너를 두고 외모뿐만 아니라 매너까지 훌륭한 청년이라고 칭찬하더구나. 과연 그분들의 말씀대로구나.”송혜선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왔다.“이건 내가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란다. 백 년 된 영지버섯인데, 일하느라 바쁜 요즘 젊은이들에게 제격이라 할 수 있어. 항상 몸도 잘 챙겨야 하는 법이란다.”그녀가 빨간 상자를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물론 하연이 선물도 있어. 하연아, 우리 사이에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눈썹을 살짝 찌푸린 하연은 그 선물을 받지 않았다.“제가 이모의 돈을 땄으니, 사과도 제 몫인 것 같네요. 이 영지버섯은 혜선 이모께서 드시고 몸보신하는 걸로 하시죠.”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지자, 부동건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이 모습을 본 하경이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하연이를 대신해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자리에 앉은 송혜선은 바쁘게 요리를 주문하며, 피해야 하는 음식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온화하고 친절한 모습은 여느 안주인과 다름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을 하던 하연은 부동건이 질문할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둘째 오빠의 소개팅 날이잖
하경은 부동건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하여 최대한 참으려 했고, 차분하게 식사를 끝내려 했다. ‘저 여자가 집안에 관한 이야기까지 눈을 돌릴 줄은 몰랐어. 정말 미칠 노릇이네.’같은 시각. 조진숙은 벌써 도착했다는 하연의 연락을 받았다. ‘하연이랑 쇼핑을 약속한 건 맞지만...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잖아?’커피숍의 창가에 앉은 하연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냈고, 상혁에게 메시지로 사건의 경과를 알려주었다. 화가 조금 풀린 그녀가 말했다.[내가 충동적인 거예요?]잠시 답장이 없던 상대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상혁이 가볍게 웃었다.[아가씨께서 화를 내신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연이 화가 나서 말했다.“농담할 때가 아니라고요!”[그 여자가 그런 방법으로 최씨 가문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야.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하경이가 그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텐데,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하긴, 오빠 같은 성격의 사람이 명품에 눈독이나 들이는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지.’ 이렇게 생각하자, 하연의 마음은 많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급하게 오느라 삼촌을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요.” [그래도 통쾌하긴 했잖아?]‘솔직히 통쾌하긴 했어.’고개를 끄덕이던 하연이 수화기 너머의 상혁에게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네.”상혁이 낮게 웃었다.[너만 통쾌하면 된 거야. 큰일도 아니니까, 뒷수습은 내가 할게.]갑자기 자신감이 솟아오른 하연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커피를 휘저으며 물었다.“지금 뭐 해요?” [야근.]하연은 상혁의 뒤에 보고를 기다리는 고위 간부들이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바삐 회의 중이던 상혁은 그녀의 메시지가 팝업창에 뜨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답장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는 하연의 메시지를 본 상혁은 결국 회의를 멈추고, 하연
“네, 그래요.”조진숙이 하연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화내지 말고, 내가 준비한 선물부터 보렴.”“선물이요?”눈앞에 나타난 것은 맞춤 제작 가게였다. 크지 않은 가게에 앉은 남녀불문의 장인들은 손에 든 화려한 옷감들을 정성스럽게 바느질하고 있었다. 한쪽에 줄지어진 전시대를 본 하연이 놀라며 말했다.“자수 드레스네요?”“생각해보니까 네가 자수 드레스를 입은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더구나. 곧 새해도 다가오니까 이 자수 드레스로 경사스러운 기운을 더하면 좋을 것 같아.”“HX국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것들을 신경을 쓰는 편이잖니.” 옆에 있던 장인이 농담을 하듯 말했다.“두 달 전부터 제작한 겁니다. 아가씨가 복이 아주 많은가 봅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하연이 말했다.“저는 의상 디자인을 배운 사람이예요! 여러분에 관한 기사를 본 적도 있고요!” 이 가게의 장인들은 모두 무형문화재 전승자들로, 바느질한 땀 한 땀에 정성을 들이는 사람들이었다. 주로 권위층을 위해 이런 자수 드레스를 맞춤 제작하는 가게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일반적인 부자는 문턱조차 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약하는 사람들은 3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하연도 한때 맞춤 제작을 생각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그새 몸매가 변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런 자수 드레스는 사이즈가 조금 더 크면 엉성해 보이고, 조금 더 작으면 착용이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진숙이 설명했다. “여기 사장이 내 오랜 친구거든. 그래서 예약하지 않고 주문할 수 있었던 거야.” 하연이 놀라워했다.“정말 영광이네요.” “으이구, 네가 원하는 거라면, 이 이모는 뭐든 해줄 수 있어.” 이때, 그 장인이 하연의 자수 드레스를 꺼내왔다. 그것은 달빛 같은 하얀색의 자수 드레스로, 목 부분에 부드러운 털 장식이 달려있고, 허리선이 아름답게 떨어지며, 모든 문양이 자수로 된 것이었다. 즉, 일반 사람이라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너무
조진숙과 식사를 마친 하연은 식사 한 끼를 따로 포장하여 DL그룹 빌딩으로 보내려 했다.그녀는 상혁에게 배달원을 구했다고 했지만, 사실 이미 차에 타 있었다.[백리향은 항상 예약도 필요하고, 셰프의 메뉴도 3일마다 바뀌어서 한 번 놓치면 먹기 어렵대요.] 상혁이 답장을 보내왔다.[고마워요, 아가씨, 기대되네요.] 메시지를 확인한 하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지난번 일로 이미 하연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런 제지 없이 그녀를 전용 엘리베이터로 안내해 주었다. “따라오시죠.” 직원은 최상층의 카드를 스캔해 줬고,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미 저녁 시간이 되었지만, DL 그룹 빌딩은 여전히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 특히 최상층은 더욱 그러했다. 하연은 이곳에 처음 온 것이 아니었기에, 부남준의 사무실이 있던 자리가 자료실로 바뀐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포장된 음식을 손에 든 채 긴 복도를 지나서야 발걸음을 멈추었다.회의실에서 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제자리에 선 하연은 창문 틈으로 안을 바라보았다. 상석에 앉은 그는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상태였다. 테이블 위에는 결제가 필요하거나 이미 결제된 서류들이 있었으며, 주변에는 몇 명의 고위 간부들이 그에게 업무를 보고하고, 결정을 논의하고 있었다. 하연은 그 모습에 빠져드는 듯했다. 흔히 ‘자기 일을 하는 남자가 가장 매력적’이라고들 하지만, 상혁과 서준은 외적인 매력뿐만이 아니라, 아주 진지하고 정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져 배로 매력적이라 할 수 있었다.상혁은 하연의 인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오히려 곁에 있던 비서 김지현이 알아차리고 문을 열었다.“최 사장님, 오셨습니까?” ‘지난번에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 하긴, 대표님의 곁에 있는 여자니까 평범하지는 않을 거야.’ 하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얼마나 걸릴까요?” “아직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대표님께 뭐라고 전해드릴까요?” “아니
하지만 더 이상 말할 겨를이 없었던 하연이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급한 일이 있어서... 미안해요.” 서류 파일을 안아 든 연지가 하연의 뒤를 쫓으며 물었다.“운전하실 거예요?” 하연은 대꾸하지 않고, 급히 걸으며 핸드폰 화면을 켰다. “지금은 DL그룹의 퇴근시간이라 택시를 잡기 어려울 거예요.”연지가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제가 운전할게요. 최하연 씨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입술을 오므린 하연은 본능적으로 연지의 호의에 반감을 느꼈다. 하지만 더 나은 방법이 없지 않은가. “고마워요.”연지의 차는 상혁의 차만큼 고급스럽지 않았으나, 그녀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운전대를 돌리며 말했다.“저는 곧 지사로 발령될 예정이예요. 오늘은 비서실에 업무를 인계하러 온 거고요.” 하연은 그녀가 주동적으로 상황을 설명할 줄 몰랐다. ‘의외잖아?’“수고가 많네요.”하연을 힐끗 바라본 연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최하연 씨, 골드 크라운에 관한 일은 정말 죄송해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분명히 제 책임도 있으니까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해요.” 하연은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괜찮아요, 그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해요.” 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에 집중했다. 사고 지점에 도착하자, 차에서는 연기가 나고 있었고, 한쪽에는 쓰러져 있는 오토바이 한 대가 있었다. 하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오빠!” “여기야!”가드레일 옆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는 이마에 찰과상을 입은 하경이 원망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뭐하는 거예요? 운전할 줄도 알면서, 왜 교통사고를 낸 거냐고요!”놀란 하연이 그의 몸을 꼼꼼히 살피며 말했다.“난 괜찮아, 작은 상처일 뿐이거든. 한참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도깨비 불 같은 게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도깨비 불이라뇨?”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쪽이 빨간 신호등에 멈추지만 않았더라면, 사고가 날 일은 없었을 거라고요!
사고 처리가 끝난 후, 차량이 견인차에 끌려갔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되어 있었다. 회의를 마친 상혁은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손에 든 서류를 지현에게 건네주었다.“앞으로 급한 서류는 빨간색 라벨을 붙이고, 급하지 않은 서류는 파란색 라벨을 붙여줘요.” 서류를 얼른 받아 든 지현이 대답했다.“예.” 그는 남자였기 때문에 연지처럼 사소한 문제에 대한 섬세함이 없었다. 상혁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여자들만의 향기를 느꼈고, 익숙한 향에 눈살을 찌푸렸다.“하연이가 왔었나요?” “두 시간 전에 포장된 음식을 가져오셨는데, 회의가 끝나지 않아서요...” 상혁이 낮은 목소리로 지현의 말을 끊었다.“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죠?” 지현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저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는 도시 서쪽의 재개발 문제를 처리하고 계셨고, 류 대표님과 의견 충돌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보고하려고 했지만, 대표님께서는 손짓으로 제지하셨고요.”“그랬군요.”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상혁이 앞에 놓인 포장된 음식을 열었다. 그 안에는 정성스럽게 준비된 음식이 담겨 있었다. 그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지만, 오랜 시간 방치된 음식은 약간 식어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불편하고 초조해졌다. 같은 시각.전화를 받아야 하는 하연은 마침 연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부 대표님은 저의 상사시잖아요. 그분을 위해서 일하는 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예요. 그러니까 최하연 씨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아니라... 상혁 오빠를 도운 거라고요?” “부 대표님께서 부하 직원들한테 명령을 내리셨어요. 최하연 씨의 일을 대표님의 일처럼 여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최선을 다한 거예요.” ‘상혁 오빠가 나를 그 정도로 배려해 줬다고? 그리고 황 비서님이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었다고?’하연은 다소 놀랐다.‘내가 황 비서님을 오해한 건 아닐까?’핸드폰이 울리자, 그녀가 전화
가정에서 비롯된 결핍은 연지를 떠도는 부평초처럼 만들었고, 상혁은 그녀에게 있어 생명의 지푸라기였다. “저는 2천 원도 반으로 나눠 써야 했던 날들을... 그리고 부 대표님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몇 년 전, 부 대표님을 따라 입사할 때 맹세했어요, 부 대표님의 명령을 영원히 따르겠다고요.” 연지의 눈빛은 대단히 확고했다. 하연이 눈을 가늘게 뜨자, 길가의 네온사인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흩어졌다. “상혁 오빠의 뒤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여기까지 온 거군요.” “네.”“상혁 오빠는 예전에 많이 힘들어했나요?” “처음 DL그룹에 입사하신 부 대표님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밑바닥부터 시작하셨어요. 심지어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한 달 동안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고객의 집 앞을 지키셨죠. 한 달 후, 프로젝트는 깔끔하게 성사됐고, 대표님은 세 단계나 승진하게 되신 거예요.”차 앞에 기댄 연지는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2년 후, 부 대표님은 9명의 이사 중 한 분이 되셨지만, 당시 협력하던 고객 한 분은 사업이 점점 쇠퇴하면서 파산해야 했고, 결국 건물에서 뛰어내려 세상을 떠나고 마셨어요.” 이 말을 들은 하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상혁 오빠가 그랬다는 거예요?”“최하연 씨, 비즈니스 업계에서 절대적인 건 없어요. 부 대표님께서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 분의 결정을 존중해요. 패권을 잡으려면 그런 결단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연지가 말했다.이야기가 끝날 무렵, 상혁의 검은 차가 미끄러지듯 두 사람의 앞에 다다랐다. 그가 차에서 내리며 일으킨 바람은 머리카락을 날리게 했다. 잠시 후, 상혁은 하연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괜찮아?”약간 숨을 헐떡이는 그의 어투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연지는 한쪽으로 물러났다. 하연은 상혁의 옷을 꽉 쥐더니 무의식중에 그를 밀쳐냈다.“괜찮다고 했는데 왜 온 거예요?”
다급해진 하연이 상혁의 손을 잡았다.“왜 안된다는 거에요? 전 오빠의 과거를 알고 싶어요. 하지만 오빠는 단 한번도 알려준 적이 없잖아요.” “알아도 되는 게 있고, 알아서는 안 되는 게 있어. 난 그 구분을 명확히 짓고 있는데, 일부는 너무 지저분한 일이라 네 귀에 들어가서는 안 돼.”상혁이 차창을 조금 내리며 밖을 바라보았다. “연인 사이에도 숨길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하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그게 무슨 일이든, 오빠와 관련이 있다면 지저분하다고 느끼지 않을 거예요.” 뒤에서부터 들려온 하연의 목소리는 상혁의 마음을 관통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황 비서님의 이런 점이 좋아요. 제가 오빠의 진짜 모습을 알게 해줬으니까요. 오빠는 저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은데, 저는 세상사를 모르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에요.” 한숨을 내쉰 하연이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상혁 오빠, 앞으로는 오빠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가정에 관한 일이든, 친구에 관한 일이든 상관없이요.” 고개를 돌린 상혁의 눈에는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하연이는 포용력이 아주 넓은 사람이구나.’상혁은 줄곧 하연을 손에 닿지 않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제는 자신을 이해해 주려 하다니... 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바보야.”상혁이 하연의 귓가에 흐트러진 잔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많은 걸 걱정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졌어. 나랑 함께 있으면... 아주 힘들 수밖에 없을 거야.” 이것은 애초가 그가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기분이 좋아진 하연이 상혁의 어깨에 기대었다.“벌써 잊은 거예요? 내가 오빠랑 함께하는 건 희로애락을 함께하기 위한 거예요. 그런 여자 친구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격식을 차리는 거잖아요.” 옅은 미소를 띤 상혁이 품에 안긴 여자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잠들지 않은 조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