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강력하게 밀어붙이면 이 판은 내가 스스로를 위해 설계한 거라는 걸 증명하는 꼴이 되는 거야.” 상혁은 눈가의 혈자리를 누르며 대답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부 회장님도 대표님이 최하연 씨를 만나는 건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는데요?” 표정이 어두워진 상혁은 대답하지 않았고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는 이미 부남준 녀석을 지지하기 시작했어.” “아마 그 녀석이 B시에서 다시 돌아올 때쯤이면 이번 프로젝트는 그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관건적인 디딤돌이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우리 DL그룹의 의사진에 자리가 하나 더 늘어날지도 모르지.” 이 말에 연지가 깜짝 놀랐다. “설마 어차피 지는 싸움이라는 말인가요?” “하지만 부남준 녀석은 아직 잘 몰라. 내가 B시에 가 있는 것과 지금처럼 DL그룹에 남아있는 것의 차이를 말이지.” “내가 여기 남아있는 한 부남진이 그런 기회를 얻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F국은 이미 깊은 밤이 되었고 상혁은 회사에서 나와 조진숙에게로 향했다. 이때 상혁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한 시종이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도련님, 돌아오셨군요!” 그러자 상혁은 검지를 입에 대고 조용하라는 손짓을 했고 겉옷을 벗으며 물었다. “어머니는요?” “거실에 계십니다. 지금 하연 아가씨와 영상통화 중입니다.” 상혁이 거실로 향하자 바로 전화기 너머의 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숙 이모, 제가 여러 가지 영양제들을 샀는데 다 피부 미용에 좋은 것들이예요. 내일 보낼 테니 꼭 챙겨 드셔야 해요.] 영상 속의 하연은 민낯이었고 편하게 똥머리를 묶고 있는 것이 아주 깔끔하고 귀여웠다. 이에 조진숙은 미소를 띄며 매우 좋아했다. “그래, 그래. 하연이 네가 보낸 거면 당연히 먹어야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 [연말이라 처리해야 할 업무가 너무 많아요. 이제 시간 좀 나면 꼭 찾아 뵈러 갈게요.] 그런데 조진숙이 대답을 하기 전에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난? 난 보러 안 올래?” 이에
이에 조진숙이 대답했다. “상혁아, 지금 내 탓이라는 거야?”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나도 어쩔 수 없어. 그가 우리의 결혼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아이까지 생겼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 미워. 밤낮없이 너무 미워 죽겠어.” “너무 미운 나머지 전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 적도 있어. 너만 아니었다면 난 진작에 부동건 그 양반과는 연을 끊었을 거야.” 조진숙은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수년 간 이어져온 이 겉치레뿐인 관계가 얼마나 힘든 지 상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조진숙의 손을 잡으며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어요. 저한테 맡겨주세요. 제가 처리할게요.”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하고 싶은 것들은 늘 포기하게 되는구나. 현재 FL그룹도 관리 못하고 있고 하연의 곁에 있어주지도 못하니 말이야.” 조진숙은 상혁을 바라보며 죄책감 어린 말을 내뱉았다. 요 몇 년간 상혁이 사업이든 연애 쪽이든 어느 한쪽 쉬운 게 없었다는 건 조진숙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때 상혁은 아까 회사에서 부동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감정이 굳건하면 굳이 매일 얼굴을 볼 필요는 없으니 괜찮아요.” 상혁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연은 절대 그렇게 마음이 쉽게 변할 사람도 아니고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상혁은 샤워를 하고 난 뒤 하연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B시는 아직 낮이었고 차 안에 있던 하연이 전화를 받았다. [저녁 먹었어요?] “웅, 아까 회사에서 먹었어.” 상혁은 화면 속의 하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 가는 거야?” [밖에 일정이 있어서요.] 하연이 대답하며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방금 한 화장인데 어때요? 예뻐요?] “예뻐, 아주 생기 있어 보여.” 상혁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때의 하연은 감정에 아무런 기복이 없었는데 메시지로 보내온 그 영상을 전혀 본 적 없는 사람 같았고 이 사실에 대해 상혁에게 말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얼른 자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상혁이 외투를 입고 있을 때 한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황 비서가 왔습니다.” 연지가 품에 서류를 안은 채 별장의 거실에 서있었는데 조진숙이 그녀에게 차를 마시라고 권했다. 이에 연지도 공손하게 차를 받아 마셨지만 선은 넘지 않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요 몇 년간 줄곧 그래왔다. 조진숙은 그런 연지를 칭찬했다. “상혁이 DL그룹에 들어온 뒤부터 황 비서가 우리 아들 곁에 함께 했지? 그 당시 수많은 인재들도 있고 예쁜 아가씨들도 많았는데 내가 왜 황 비서를 뽑은 지 알아?” 그러자 연지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감히 제가 부인의 생각을 함부로 추측하는 건 못할 짓입니다. 하지만 왜 저를 뽑으셨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야심이 너무 컸고 딴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게 눈에 너무 보였거든. 다들 목적성이 너무 강했어.” “하지만 그 중에서 오직 황 비서만 딴 마음이 없는 눈빛이었고 영예도 치욕도 다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같았어. 그래서 내 마음이 들었던 거야.” 조진숙은 쉽게 남을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요 몇 년간 연지는 확실히 각종 시련들을 굿굿하게 이겨냈다. 이때 연지의 마음은 아주 기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실 별 것 아니었고 아직 부족한 점도 많습니다.” 이 말을 들은 조진숙은 연지의 옷 매무새를 직접 정리해주며 말했다. “요 몇 년간 상혁이의 곁에 황 비서가 있어서 다행이야.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머니 늘 지금처럼 비서로서의 본분을 지키길 바라.” 이에 연지는 미소를 지었고 조진숙 말에 숨겨져 있는 또다른 뜻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상혁이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연지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황 비서, 가지.” 차 안. “부 사장님께서는 이미 B시에 가셨는데 그 분이 그쪽에 도착하자마자 이쪽 지하철 건설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건설자재 공급상인 연중훈이 재료 운송 도중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공사를 연기시켰는데 이미 이사진들이
연지는 그 여자를 째리며 대답했다.“부 대표님을 꼬시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부 대표님은 다른 여자에게 관심 없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래서 그냥 궁금했던 것뿐이예요.” “제가 어찌 감히 연지 언니 앞에서 부 대표님을 꼬시려 할 수 있겠어요?” 이 여인의 말은 아주 의미심장했고 연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썼다. 상혁은 늘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았고 스캔들 한 번 없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그와 가장 가까운 여자는 바로 비서인 연지였다. 때문에 외부에서는 상혁이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는 건 이미 사랑하는 여자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고 그 상대는 바로 연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혁은 그런 소문까지 일일이 신경 쓰기 귀찮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공공연한 진실처럼 되어 버렸다. “헛소리하지 마.” 연지가 꾸짖었지만 굳이 아니라고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런 소문을 내고 다닌다는 걸 알면 윗분들이 아시면 널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 여인은 계속 호기심에 찬 듯 연지의 팔짱을 끼며 말을 이어갔다. “연지 언니, 부 대표님은 어떤 스타일 좋아하세요?” 이에 연지는 두 눈을 깜빡였는데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하연의 생기발랄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네가 물어봐야 할 게 아니야.” 다른 한편. 하연은 부리나케 별장에서 뛰쳐나왔다.B시는 이미 겨울이었기에 날씨는 아주 추웠고 거의 매일 두꺼운 옷을 입고 다녀야 했다. 그러나 반대로 F국의 날씨는 따뜻했는데 새하얀 치마를 입고 나풀나풀 입구로 달려가는 하연의 모습은 마치 봄날의 나비 같았다. 이에 하경이 한 마디 나무랐다. “하연! 집에 도착하자마자 밖으로 나다녀? 네 큰 오빠랑 할아버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어!” 하연과 하경은 사전 통지 없이 돌아온 것이었기에 집사들도 깜짝 놀랐고 하민은 최동신을 데리고 병원에 가 있었다. 그러자 하연이 정원에서 고개를 돌리고 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랑 할아버지 늦게 돌아오잖아요. 그리고 전 잠깐 나갔다
접대 중에 여자와 술은 빠질 수 없었다. 룸 안에는 퇴폐적인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한 줄로 쫙 서있었는데 연지가 허리를 숙이며 연중훈에게 술을 따랐다. “연 사장님의 위세는 익히 들었는데 오늘 보니 과연 분위기부터 남다르십니다.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연중훈은 인자한 얼굴로 웃으며 연지를 밀고 말했다. “상혁이 왔으면 이 술은 상혁이 직접 마셔야지.” 그러자 연지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난처한 얼굴도 뒤에 있던 상혁을 바라보았다. 순간 상혁의 눈에는 싸늘한 기운이 스쳤는데 다시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연지 손에 있던 그 술잔을 건네어 받았다. “정훈 아저씨와 마시는 술인데 공적이든 사적이든 당연히 제가 마셔야죠.” 상혁은 한 잔 가득 담긴 양주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이에 연중훈은 연신 박수를 치며 말했다. “상혁아, 내가 널 나무라는 게 아니라 요 몇 년간 확실히 네 동생이 너보다 일처리에 능해.”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DL그룹 대표의 자리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을 밟았고 많은 인맥도 털어냈는데 연중훈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상혁은 DL그룹에서 책임진 이번 사업에서 연중훈 회사의 건설자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결국 그와 협력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가 남준의 손에 넘어간 뒤 그는 바로 상혁의 그 점을 이용하여 연중훈과 계약을 맺은 것이었다.때문에 오늘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이 생긴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은 상혁이 억지로 사과를 하도록 짜인 판이었다. “남준은 사람들 잘 챙기기로 유명한 건 사실이예요. 확실히 제가 남준이보다 신경을 잘 쓰지 못한 것도 맞고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정훈 아저씨께 사과하러 왔잖아요.” 상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 여러 유형의 사람들도 준비해 두었으니 마음껏 골라보십시오. 오늘 이 룸의 술은 제가 전부 계산하겠습니다.” “네가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니 그럼 나도 거절하지 않으마.” 연중훈은 소파에 앉아 스윽- 한번 둘러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지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상혁이 충동적으로 굴까 봐 두려운 동시에 자신을 위해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 지 궁금하기도 했기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혁은 한참동안 안색이 어두워진 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남준이가 중훈 아저씨와 체결한 계약서를 봤는데 이윤 배당율이 30%더라고요?” “이제부터는 제가 그 사업을 맡기로 했으니 책임지고 이윤을 40%까지 올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중훈 아저씨가 기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말입니다.” 이윤을 10%나 더 올린다는 말에 연지는 너무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때 연중훈도 두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상혁이 이렇게 파격적인 제안을 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네가 책임진다고?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는 있겠지?” 이때 상혁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이 피어났고 말을 이어갔다. “알고 있습니다. 몇 년 간 제가 중훈 아저씨께 신경 써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세요. 중훈 아저씨, 연장자로서 양해해 주실 거죠?” 여기까지 말하자 연중훈도 확실히 제안에 솔깃해졌다. 오늘 밤, 상혁은 확실히 연중훈의 체면을 세워주었고 연중훈도 이미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얻었기에 이만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을 더 끌고가면 서로 불리해질 게 뻔했다.잠시 후, 연중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연지를 놔주었다. “역시 이 비서를 아끼는 게 맞나 보군? 소문 그대로였어!” 한바탕 폭풍이 지난 뒤 연지는 상혁을 바라보았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왔다. 이때 연지의 가방에 이던 핸드폰이 울렸고 이 틈을 타 바로 룸을 벗어났다. “피터?” [두 시간 째야. 대표님 아직도 안 끝났어?] 연지는 창문 쪽으로 향했고 문어귀 쪽의 스포츠카 옆에 비스듬히 서있는 건장한 체구의 피터가 보였다. “아직 좀 더 걸릴 것 같아. 급한 일이야?” [내가 아니라 최하연 씨가 오셨어.] 이 말에 연지는 눈살을 찌푸렸는데 과연 차 안에 앉아있는 가녀리지만 우아한 실루엣이 보였다. “최하
연지는 두 눈이 빨개져 말했다.“대표님께서 저에게 만들어 두라고 여자들도 다 똑같습니다.” “그들은 이익을 위해 몸을 파는 거니 공정한 거래야. 하지만 너는 달라. 넌 나와 업무상의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나에겐 너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어.” 상혁의 말투는 매우 딱딱했고 공적인 감정 외에 다른 감정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 몇 년간 확실히 연중훈을 섭섭하게 한 부분도 많으니 10%의 이윤은 그 보상이라고 치면 돼.” 이건 연지가 예상했던 답이었지만 뭔가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이때 상혁은 핸드폰을 들었는데 자신이 한참 전 보낸 문자에 아직도 하연의 답장이 오지 않자 마음은 점점 더 갑갑했다. 그런데 마침 이 순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고 상혁은 실눈을 뜨며 전화를 받았다.“형님?” [하연이는? 전화가 통하지 않던데 이렇게 늦게까지 뭐하는 거야? 선을 지켜줘야지.] 엄숙한 목소리에 약간의 장난기가 섞여 있는 하민의 목소리였다. 이때 하경도 옆에서 웃으며 한 마디 보탰다. [형도 참, 연인끼리 시간 좀 보내는 게 어쨌다고 그래요? 하연이도 다 컸는데 통금시간 있는 게 말이 돼요?] 그러자 하민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는데 사실 굳이 하연이를 집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려던 게 아니라 그녀가 안전한지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혁의 한 마디에 그들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버렸다. “하연이가 돌아왔어요?” 상혁의 턱은 떡 벌어졌고 내뱉은 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때 연지는 완전히 굳어버렸고 주체할 수 없이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최하연 씨는 지금 골드 크라운 앞에 있습니다. 대표님을 한참 기다렸습니다.” 이에 상혁은 싸늘한 눈길로 연지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차 돌려!” 연지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피터가 대표님에 말하지 말하고 부탁했습니다!” 운전 기사는 가속 페달을 밟으며 미친 듯이 질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골드 크라운 앞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하연의 차량이
이때 피터는 손을 놓고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부 대표님.”연중훈은 부들부들 떨며 소파에서 일어났다.“이 못된 X,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부 대표, 네 부하들이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거야?!”그의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머리는 깨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상혁은 연중훈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천천히 쪼그려 앉아 떨리는 손으로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하연아.”하연의 눈앞에 상혁이 서 있는 순간, 가슴 속에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동안 그녀가 애써 참아왔던 불안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눈에서 눈물방울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난 모르는 사람이에요...” 상혁은 얼음처럼 차가운 하연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안았다. 하연의 냉정한 얼굴이 그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알아, 내가 왔어. 겁내지 마.”연중훈은 하연과 상혁을 번갈아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너... 너희들! 너희들 서로 아는 사이였어? 부상혁, 지금 나를 가지고 논 거야?!”매니저가 사람들과 함께 급히 달려오더니, 장면을 본 순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갔다.“부 대표님, 저희의 실수입니다.”그러나 그가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하연의 마른 체형이 어딘가 낯설었고, 그녀가 골드 크라운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끝났어! 큰일이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말해봐, 부상혁! 이 여자, 혹시 네가 일부러 나를 속이려고 데려온 거 아니야?”연중훈은 갑자기 테이블을 세게 내리치며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넌 간도 크구나,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이제 보니, 네가 공사권 따낼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군!”“연 사장님.” 상혁은 하연을 부축해 일으킨 뒤,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오랫동안 유흥에 빠져서 집에 계신 아내분을 잊으신 것 같네요. 이제 아내분께 알려서 집으로 돌아가실 때가 된 것 같네요.”그의 말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