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강력하게 밀어붙이면 이 판은 내가 스스로를 위해 설계한 거라는 걸 증명하는 꼴이 되는 거야.” 상혁은 눈가의 혈자리를 누르며 대답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부 회장님도 대표님이 최하연 씨를 만나는 건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는데요?” 표정이 어두워진 상혁은 대답하지 않았고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는 이미 부남준 녀석을 지지하기 시작했어.” “아마 그 녀석이 B시에서 다시 돌아올 때쯤이면 이번 프로젝트는 그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관건적인 디딤돌이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우리 DL그룹의 의사진에 자리가 하나 더 늘어날지도 모르지.” 이 말에 연지가 깜짝 놀랐다. “설마 어차피 지는 싸움이라는 말인가요?” “하지만 부남준 녀석은 아직 잘 몰라. 내가 B시에 가 있는 것과 지금처럼 DL그룹에 남아있는 것의 차이를 말이지.” “내가 여기 남아있는 한 부남진이 그런 기회를 얻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F국은 이미 깊은 밤이 되었고 상혁은 회사에서 나와 조진숙에게로 향했다. 이때 상혁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한 시종이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도련님, 돌아오셨군요!” 그러자 상혁은 검지를 입에 대고 조용하라는 손짓을 했고 겉옷을 벗으며 물었다. “어머니는요?” “거실에 계십니다. 지금 하연 아가씨와 영상통화 중입니다.” 상혁이 거실로 향하자 바로 전화기 너머의 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숙 이모, 제가 여러 가지 영양제들을 샀는데 다 피부 미용에 좋은 것들이예요. 내일 보낼 테니 꼭 챙겨 드셔야 해요.] 영상 속의 하연은 민낯이었고 편하게 똥머리를 묶고 있는 것이 아주 깔끔하고 귀여웠다. 이에 조진숙은 미소를 띄며 매우 좋아했다. “그래, 그래. 하연이 네가 보낸 거면 당연히 먹어야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 [연말이라 처리해야 할 업무가 너무 많아요. 이제 시간 좀 나면 꼭 찾아 뵈러 갈게요.] 그런데 조진숙이 대답을 하기 전에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난? 난 보러 안 올래?” 이에
이에 조진숙이 대답했다. “상혁아, 지금 내 탓이라는 거야?”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나도 어쩔 수 없어. 그가 우리의 결혼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아이까지 생겼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 미워. 밤낮없이 너무 미워 죽겠어.” “너무 미운 나머지 전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 적도 있어. 너만 아니었다면 난 진작에 부동건 그 양반과는 연을 끊었을 거야.” 조진숙은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수년 간 이어져온 이 겉치레뿐인 관계가 얼마나 힘든 지 상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조진숙의 손을 잡으며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어요. 저한테 맡겨주세요. 제가 처리할게요.”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하고 싶은 것들은 늘 포기하게 되는구나. 현재 FL그룹도 관리 못하고 있고 하연의 곁에 있어주지도 못하니 말이야.” 조진숙은 상혁을 바라보며 죄책감 어린 말을 내뱉았다. 요 몇 년간 상혁이 사업이든 연애 쪽이든 어느 한쪽 쉬운 게 없었다는 건 조진숙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때 상혁은 아까 회사에서 부동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감정이 굳건하면 굳이 매일 얼굴을 볼 필요는 없으니 괜찮아요.” 상혁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연은 절대 그렇게 마음이 쉽게 변할 사람도 아니고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상혁은 샤워를 하고 난 뒤 하연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B시는 아직 낮이었고 차 안에 있던 하연이 전화를 받았다. [저녁 먹었어요?] “웅, 아까 회사에서 먹었어.” 상혁은 화면 속의 하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 가는 거야?” [밖에 일정이 있어서요.] 하연이 대답하며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방금 한 화장인데 어때요? 예뻐요?] “예뻐, 아주 생기 있어 보여.” 상혁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때의 하연은 감정에 아무런 기복이 없었는데 메시지로 보내온 그 영상을 전혀 본 적 없는 사람 같았고 이 사실에 대해 상혁에게 말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얼른 자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상혁이 외투를 입고 있을 때 한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황 비서가 왔습니다.” 연지가 품에 서류를 안은 채 별장의 거실에 서있었는데 조진숙이 그녀에게 차를 마시라고 권했다. 이에 연지도 공손하게 차를 받아 마셨지만 선은 넘지 않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요 몇 년간 줄곧 그래왔다. 조진숙은 그런 연지를 칭찬했다. “상혁이 DL그룹에 들어온 뒤부터 황 비서가 우리 아들 곁에 함께 했지? 그 당시 수많은 인재들도 있고 예쁜 아가씨들도 많았는데 내가 왜 황 비서를 뽑은 지 알아?” 그러자 연지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감히 제가 부인의 생각을 함부로 추측하는 건 못할 짓입니다. 하지만 왜 저를 뽑으셨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야심이 너무 컸고 딴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게 눈에 너무 보였거든. 다들 목적성이 너무 강했어.” “하지만 그 중에서 오직 황 비서만 딴 마음이 없는 눈빛이었고 영예도 치욕도 다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같았어. 그래서 내 마음이 들었던 거야.” 조진숙은 쉽게 남을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요 몇 년간 연지는 확실히 각종 시련들을 굿굿하게 이겨냈다. 이때 연지의 마음은 아주 기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실 별 것 아니었고 아직 부족한 점도 많습니다.” 이 말을 들은 조진숙은 연지의 옷 매무새를 직접 정리해주며 말했다. “요 몇 년간 상혁이의 곁에 황 비서가 있어서 다행이야.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머니 늘 지금처럼 비서로서의 본분을 지키길 바라.” 이에 연지는 미소를 지었고 조진숙 말에 숨겨져 있는 또다른 뜻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상혁이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연지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황 비서, 가지.” 차 안. “부 사장님께서는 이미 B시에 가셨는데 그 분이 그쪽에 도착하자마자 이쪽 지하철 건설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건설자재 공급상인 연중훈이 재료 운송 도중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공사를 연기시켰는데 이미 이사진들이
연지는 그 여자를 째리며 대답했다.“부 대표님을 꼬시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부 대표님은 다른 여자에게 관심 없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래서 그냥 궁금했던 것뿐이예요.” “제가 어찌 감히 연지 언니 앞에서 부 대표님을 꼬시려 할 수 있겠어요?” 이 여인의 말은 아주 의미심장했고 연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썼다. 상혁은 늘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았고 스캔들 한 번 없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그와 가장 가까운 여자는 바로 비서인 연지였다. 때문에 외부에서는 상혁이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는 건 이미 사랑하는 여자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고 그 상대는 바로 연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혁은 그런 소문까지 일일이 신경 쓰기 귀찮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공공연한 진실처럼 되어 버렸다. “헛소리하지 마.” 연지가 꾸짖었지만 굳이 아니라고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런 소문을 내고 다닌다는 걸 알면 윗분들이 아시면 널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 여인은 계속 호기심에 찬 듯 연지의 팔짱을 끼며 말을 이어갔다. “연지 언니, 부 대표님은 어떤 스타일 좋아하세요?” 이에 연지는 두 눈을 깜빡였는데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하연의 생기발랄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네가 물어봐야 할 게 아니야.” 다른 한편. 하연은 부리나케 별장에서 뛰쳐나왔다.B시는 이미 겨울이었기에 날씨는 아주 추웠고 거의 매일 두꺼운 옷을 입고 다녀야 했다. 그러나 반대로 F국의 날씨는 따뜻했는데 새하얀 치마를 입고 나풀나풀 입구로 달려가는 하연의 모습은 마치 봄날의 나비 같았다. 이에 하경이 한 마디 나무랐다. “하연! 집에 도착하자마자 밖으로 나다녀? 네 큰 오빠랑 할아버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어!” 하연과 하경은 사전 통지 없이 돌아온 것이었기에 집사들도 깜짝 놀랐고 하민은 최동신을 데리고 병원에 가 있었다. 그러자 하연이 정원에서 고개를 돌리고 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랑 할아버지 늦게 돌아오잖아요. 그리고 전 잠깐 나갔다
접대 중에 여자와 술은 빠질 수 없었다. 룸 안에는 퇴폐적인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한 줄로 쫙 서있었는데 연지가 허리를 숙이며 연중훈에게 술을 따랐다. “연 사장님의 위세는 익히 들었는데 오늘 보니 과연 분위기부터 남다르십니다.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연중훈은 인자한 얼굴로 웃으며 연지를 밀고 말했다. “상혁이 왔으면 이 술은 상혁이 직접 마셔야지.” 그러자 연지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난처한 얼굴도 뒤에 있던 상혁을 바라보았다. 순간 상혁의 눈에는 싸늘한 기운이 스쳤는데 다시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연지 손에 있던 그 술잔을 건네어 받았다. “정훈 아저씨와 마시는 술인데 공적이든 사적이든 당연히 제가 마셔야죠.” 상혁은 한 잔 가득 담긴 양주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이에 연중훈은 연신 박수를 치며 말했다. “상혁아, 내가 널 나무라는 게 아니라 요 몇 년간 확실히 네 동생이 너보다 일처리에 능해.”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DL그룹 대표의 자리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을 밟았고 많은 인맥도 털어냈는데 연중훈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상혁은 DL그룹에서 책임진 이번 사업에서 연중훈 회사의 건설자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결국 그와 협력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가 남준의 손에 넘어간 뒤 그는 바로 상혁의 그 점을 이용하여 연중훈과 계약을 맺은 것이었다.때문에 오늘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이 생긴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은 상혁이 억지로 사과를 하도록 짜인 판이었다. “남준은 사람들 잘 챙기기로 유명한 건 사실이예요. 확실히 제가 남준이보다 신경을 잘 쓰지 못한 것도 맞고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정훈 아저씨께 사과하러 왔잖아요.” 상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 여러 유형의 사람들도 준비해 두었으니 마음껏 골라보십시오. 오늘 이 룸의 술은 제가 전부 계산하겠습니다.” “네가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니 그럼 나도 거절하지 않으마.” 연중훈은 소파에 앉아 스윽- 한번 둘러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지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상혁이 충동적으로 굴까 봐 두려운 동시에 자신을 위해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 지 궁금하기도 했기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혁은 한참동안 안색이 어두워진 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남준이가 중훈 아저씨와 체결한 계약서를 봤는데 이윤 배당율이 30%더라고요?” “이제부터는 제가 그 사업을 맡기로 했으니 책임지고 이윤을 40%까지 올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중훈 아저씨가 기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말입니다.” 이윤을 10%나 더 올린다는 말에 연지는 너무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때 연중훈도 두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상혁이 이렇게 파격적인 제안을 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네가 책임진다고?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는 있겠지?” 이때 상혁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이 피어났고 말을 이어갔다. “알고 있습니다. 몇 년 간 제가 중훈 아저씨께 신경 써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세요. 중훈 아저씨, 연장자로서 양해해 주실 거죠?” 여기까지 말하자 연중훈도 확실히 제안에 솔깃해졌다. 오늘 밤, 상혁은 확실히 연중훈의 체면을 세워주었고 연중훈도 이미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얻었기에 이만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을 더 끌고가면 서로 불리해질 게 뻔했다.잠시 후, 연중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연지를 놔주었다. “역시 이 비서를 아끼는 게 맞나 보군? 소문 그대로였어!” 한바탕 폭풍이 지난 뒤 연지는 상혁을 바라보았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왔다. 이때 연지의 가방에 이던 핸드폰이 울렸고 이 틈을 타 바로 룸을 벗어났다. “피터?” [두 시간 째야. 대표님 아직도 안 끝났어?] 연지는 창문 쪽으로 향했고 문어귀 쪽의 스포츠카 옆에 비스듬히 서있는 건장한 체구의 피터가 보였다. “아직 좀 더 걸릴 것 같아. 급한 일이야?” [내가 아니라 최하연 씨가 오셨어.] 이 말에 연지는 눈살을 찌푸렸는데 과연 차 안에 앉아있는 가녀리지만 우아한 실루엣이 보였다. “최하
연지는 두 눈이 빨개져 말했다.“대표님께서 저에게 만들어 두라고 여자들도 다 똑같습니다.” “그들은 이익을 위해 몸을 파는 거니 공정한 거래야. 하지만 너는 달라. 넌 나와 업무상의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나에겐 너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어.” 상혁의 말투는 매우 딱딱했고 공적인 감정 외에 다른 감정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 몇 년간 확실히 연중훈을 섭섭하게 한 부분도 많으니 10%의 이윤은 그 보상이라고 치면 돼.” 이건 연지가 예상했던 답이었지만 뭔가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이때 상혁은 핸드폰을 들었는데 자신이 한참 전 보낸 문자에 아직도 하연의 답장이 오지 않자 마음은 점점 더 갑갑했다. 그런데 마침 이 순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고 상혁은 실눈을 뜨며 전화를 받았다.“형님?” [하연이는? 전화가 통하지 않던데 이렇게 늦게까지 뭐하는 거야? 선을 지켜줘야지.] 엄숙한 목소리에 약간의 장난기가 섞여 있는 하민의 목소리였다. 이때 하경도 옆에서 웃으며 한 마디 보탰다. [형도 참, 연인끼리 시간 좀 보내는 게 어쨌다고 그래요? 하연이도 다 컸는데 통금시간 있는 게 말이 돼요?] 그러자 하민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는데 사실 굳이 하연이를 집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려던 게 아니라 그녀가 안전한지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혁의 한 마디에 그들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버렸다. “하연이가 돌아왔어요?” 상혁의 턱은 떡 벌어졌고 내뱉은 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때 연지는 완전히 굳어버렸고 주체할 수 없이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최하연 씨는 지금 골드 크라운 앞에 있습니다. 대표님을 한참 기다렸습니다.” 이에 상혁은 싸늘한 눈길로 연지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차 돌려!” 연지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피터가 대표님에 말하지 말하고 부탁했습니다!” 운전 기사는 가속 페달을 밟으며 미친 듯이 질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골드 크라운 앞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하연의 차량이
이때 피터는 손을 놓고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부 대표님.”연중훈은 부들부들 떨며 소파에서 일어났다.“이 못된 X,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부 대표, 네 부하들이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거야?!”그의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머리는 깨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상혁은 연중훈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천천히 쪼그려 앉아 떨리는 손으로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하연아.”하연의 눈앞에 상혁이 서 있는 순간, 가슴 속에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동안 그녀가 애써 참아왔던 불안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눈에서 눈물방울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난 모르는 사람이에요...” 상혁은 얼음처럼 차가운 하연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안았다. 하연의 냉정한 얼굴이 그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알아, 내가 왔어. 겁내지 마.”연중훈은 하연과 상혁을 번갈아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너... 너희들! 너희들 서로 아는 사이였어? 부상혁, 지금 나를 가지고 논 거야?!”매니저가 사람들과 함께 급히 달려오더니, 장면을 본 순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갔다.“부 대표님, 저희의 실수입니다.”그러나 그가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하연의 마른 체형이 어딘가 낯설었고, 그녀가 골드 크라운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끝났어! 큰일이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말해봐, 부상혁! 이 여자, 혹시 네가 일부러 나를 속이려고 데려온 거 아니야?”연중훈은 갑자기 테이블을 세게 내리치며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넌 간도 크구나,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이제 보니, 네가 공사권 따낼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군!”“연 사장님.” 상혁은 하연을 부축해 일으킨 뒤,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오랫동안 유흥에 빠져서 집에 계신 아내분을 잊으신 것 같네요. 이제 아내분께 알려서 집으로 돌아가실 때가 된 것 같네요.”그의 말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