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피터는 손을 놓고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부 대표님.”연중훈은 부들부들 떨며 소파에서 일어났다.“이 못된 X,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부 대표, 네 부하들이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거야?!”그의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머리는 깨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상혁은 연중훈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천천히 쪼그려 앉아 떨리는 손으로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하연아.”하연의 눈앞에 상혁이 서 있는 순간, 가슴 속에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동안 그녀가 애써 참아왔던 불안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눈에서 눈물방울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난 모르는 사람이에요...” 상혁은 얼음처럼 차가운 하연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안았다. 하연의 냉정한 얼굴이 그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알아, 내가 왔어. 겁내지 마.”연중훈은 하연과 상혁을 번갈아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너... 너희들! 너희들 서로 아는 사이였어? 부상혁, 지금 나를 가지고 논 거야?!”매니저가 사람들과 함께 급히 달려오더니, 장면을 본 순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갔다.“부 대표님, 저희의 실수입니다.”그러나 그가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하연의 마른 체형이 어딘가 낯설었고, 그녀가 골드 크라운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끝났어! 큰일이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말해봐, 부상혁! 이 여자, 혹시 네가 일부러 나를 속이려고 데려온 거 아니야?”연중훈은 갑자기 테이블을 세게 내리치며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넌 간도 크구나,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이제 보니, 네가 공사권 따낼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군!”“연 사장님.” 상혁은 하연을 부축해 일으킨 뒤,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오랫동안 유흥에 빠져서 집에 계신 아내분을 잊으신 것 같네요. 이제 아내분께 알려서 집으로 돌아가실 때가 된 것 같네요.”그의 말
‘만약 피터가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면, 만약 하민의 전화가 좀 늦게 걸려 왔다면...’‘하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F국으로 돌아가서 뭐 할 생각이었어?”하연은 그의 외투를 꼭 싸매고 목소리를 낮게 했다.“오빠 만나러 가는 건데요.”“나 만나러 오면서 나한테 말도 안 해?” 상혁은 성질을 억제하지 못하고 약간 위로 솟구쳤다.“연중훈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직접 뛰어든 거야?”“잘은 모르지만 그냥 오빠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죠. 황 비서님이 오빠가 골드 크라운에 있다고 해서 바로 온 거예요.” 하연은 다시 억울한 마음이 들어 가슴이 답답해졌다.‘참 안됐네.’하연의 귀여운 모습에 상혁의 화가 사그라들었다. 그는 차 안의 온도를 높이고 하연이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겼다.“어디 다친 데 좀 보자.”하연이 입은 이 치마는 특별히 고른 것이었다. 치마는 모두 얼룩덜룩한 핏자국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상혁은 하연을 가까이 앉혀놓고 구석구석 살폈다.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피는 연중훈의 것이에요.”상혁은 하연의 허리를 감싸 안고, 얼굴을 그녀의 목덜미에 파묻은 채 말했다.“미안해.”하연은 상혁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면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오빠의 일을 망쳐놨어요. 오빠에게 서프라이즈 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실패하고, 완전 빵점이에요.”상혁은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하연을 오히려 더 꽉 껴안았다. 하연의 목덜미를 잡고 고개를 돌려 하연에게 입을 맞추었다.“빵점이라니, 네가 지금 내 곁에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서프라이즈야.”생사고락을 함께한 두 사람의 키스는 일촉즉발의 열기가 느껴졌다.상혁의 몸은 매우 뜨거웠다. 그는 하연의 입술을 힘껏 빨아들였다. 차 안에서 하연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가쁜 호흡이 차량 뒷좌석에 가득했다. “오빠, 여기 차 안이에요.”“차 안은 안돼?”하연의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한 기업의 책임자다운 프로페셔널한 스타일의 외투를
30분 후에 운전기사가 황급히 달려왔다.“부 대표님, 여기 사 왔습니다.”기사가 내민 쇼핑백 안에는 하연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하얀 치마가 들어있었다. 하연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상혁은 차에서 내려 차체에 기대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피터는 공손하게 상혁 옆에 섰다.“지하철 공사는 착공이 언제든지 가능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먼저 연중훈과의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닐까요?”“국내에 자재 공급업체가 연씨 가문에만 있는 건 아니야. 만약 연씨 가문 어르신들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이 계약 파기했을 거야. 안 그랬으면 부남준이 이 수법으로 나를 묶어놓지 못했겠지.”“이사회과 다른 쪽은 어쩌실 생각입니까?”“내가 처리할게.” 상혁은 담배를 힘껏 한 모금 들이마셨다.“황 비서에게 오늘부터 지사로 출근하고 본사로 돌아올 필요 없다고 전해.”피터는 연지가 이렇게 심각한 처분을 받을 줄은 몰랐다.최씨 저택의 불빛이 환했다. 상혁은 타고 온 차량을 정원 안에 주차하고 하연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하경은 안에서 느릿느릿 걸어 나와 하연에게 우스갯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어머, 돌아오셨네요, 최 사장님.”상혁은 간단하게 목례로 하경에게 인사를 했다.하경 역시 상혁에게 가볍게 목례로 답했다.하연은 작은 소리로 하경에게 말했다.“큰오빠, 화 안 났죠?”“네 덕분에 10시 정각이면 잠자리에 드는 큰형이 아직도 안 자고 있잖아.”하연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상혁은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내가 같이 들어갈게.”하민은 아직 서재에 있었다.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하민은 찻잔만 여러 번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좀 전의 통화에서 상혁의 대답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만약 하경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미 사람을 보내 하연을 찾았을 것이다.하연이 납치되었던 일은 아직도 하민의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했다.입구에서 소리가 나자 하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토록 마음에 걸렸던 여동생이
외부에서는 모두 DL 그룹의 미래를 이끌어갈 사람은 상혁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이 업계에 오래 몸담은 사람 중 비리 없이 깨끗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상혁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손가락 끝에 찻물의 온기를 느꼈다.“저는 하연이와 진지하게 만나보려는 겁니다.”상혁은 이 한마디 말로 하민의 마음을 안심시켰다.하민과 상혁처럼 지혜로운 사람들끼리의 대화는 이 정도면 서로 이해하기 충분했다.“오늘 저녁 했던 말, 절대 잊지 마. 혹시 하연이가 다치는 일이 다시 생기면, 나는 너에게 책임을 물을 거니까.”하민은 일부러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다음날.DL 그룹은 아침 회의에서 두 가지 변동 사항을 발표했다.첫째, YG 그룹과의 계약을 해지하고 손해를 충분히 배상한 뒤, 블랙리스트에 올린 후 새로운 자재 공급업체를 선정할 예정이다. 둘째, 황연지는 지사로 발령이 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알고 있던 사실을 상사에게 보고하지 않고 숨겼기 때문이다.이 두 가지 변동 사항은 갑자기 한바탕 풍파를 일으켰다. 상혁과 여러 해 동안 함께 일하던 연지가 갑자기 지방 근무로 좌천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이번 상혁의 결정은 심지어 부동건까지 놀라게 했다.“네가 연 사장을 처리하는 건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황 비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황 비서를 대체 왜 지방 지사로 보내는 거야?”“비서 하나 바꾸는 것도 아버지께 허락받아야 하는군요. 아버지 여전하시네요.”상혁은 엷게 미소 지으며 부동건에게 맞섰다.부동건은 상혁의 이런 반응을 보고, 이번에 아들이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알고 잠시 한걸음 물러섰다.“피터에게 확인해 보니, 실제로는 하연이가 너에게 자기 상황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황 비서는 하연이의 부탁대로 했을 뿐이니, 이번 일이 황 비서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번 일은 황 비서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 했다고 봐야지.”상혁은 여전히 무표정했다.상혁 정도의 임원급 위치에 오른
그 자리에 있는 명문가의 사모님들은 딱히 더 이상 나눌 말도 없어서 간단한 카드놀이를 시작했다.사람이 셋밖에 없어 한 자리가 비자, 백수미 여사는 누군가를 불러 자리를 채우려고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는 동안 하연이 그 자리에 앉았다.“연 사장님의 부인 정원선 여사가 전화를 안 받아요. 무슨 일일까요?”“못 들었어요? 어젯밤에 정원선 여사가 골드 크라운에 가서 칼부림했나 봐요. 정원선 여사가 거기에 가보니까 로비의 홀 스크린에서 연 사장과 어떤 아가씨가 함께 있는 동영상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대요.” 진미라 여사는 들은 소식을 매우 실감 나게 전했다.“무슨 영상이었대요?”“그거 있잖아요, 다 알면서.”세 명의 명문가 사모님이 갑자기 한꺼번에 웃음이 터졌다.“누군가에게 약점 잡힌 거 아니에요? 연씨 집안도 재산 꽤 있는 집인데, 그 집안을 모욕하는 거잖아요.”“골드 크라운은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쉽게 알려주지 않아요. 그런데도 들켰다면 아마 중간에 대단한 인물이 있는 거 같아요.”하연은 손에 든 카드의 패를 응시하며 말없이 웃었다.여자들끼리의 대화가 지겨워진 하경은 나가서 바람을 쐬겠다며 나가서 하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밖에서 기다릴 테니, 두 판만 더 치고 나와.”하경이 말하지 않아도 하연은 그럴 생각이었다. 마지막 카드를 내려놓고 예의 바르게 일어나려던 순간,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 가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 사모님들, 제가 늦었습니다.”하연이 뒤를 돌아보았다.아주 분위기 있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비록 눈가에 잔주름도 보였지만, 손짓 하나 발짓 하나마다 모두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매혹적인 자태를 띠고 있었다.“혜선 여사, 혜선 여사를 기다린 셈이 됐네요.” 진미라 여사는 특히 반갑게 앞으로 나가 송혜선을 맞이했다.“사모님의 전화 받자마자 나왔어요. 누구 부탁인데 감히 거절할 수 있겠어요?” 송혜선은 자리에 앉아 하연을 한 번 훑어보았다.“어머, 보기 드문 미인이네, 어느 집 딸이에요?”하연은 이렇게
송혜선이 하연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이 사회에서는 법적 배우자와 애인의 구분이 매우 확실했다. 남자들은 아내나 애인들 중 누구를 공개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비록 부동건은 조진숙과 일찌감치 이혼한 사이였지만, 그 후에도 단 한 번도 송혜선에게 아내 자리를 인정해 준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아들 부남준과의 관계를 내세워 돈을 많이 받아서 그 돈으로 이런 부인들과의 모임에 낄 수 있었다.이런 모임에서 송혜선을 부동건의 아내로 인정해 준 이유는 첫째로 조진숙이 콧대가 높아 이런 가십이 넘치는 모임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부남준이 앞으로 DL 그룹의 경영자 자리에 오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그룹의 핵심 자리에 들어가면 송혜선도 좋은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혜선 이모께서 농담하신 거잖아요, 동건 삼촌의 얼굴을 봐서라도 제가 예의를 갖추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하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송혜선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부동건을 봐서 예의를 갖추겠다는 의미였다.하지만 송혜선은 하연의 말에 화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남준이 통해서 네 이야기 들었다.”“뭐라고 하던가요?”“최씨 집안 넷째이자 막내딸, 당차고 활달하다고. 아가씨를 아주 좋게 이야기하던데?”하연은 갑자기 속이 불편하고 메스꺼워졌다.“저는 부남준 씨에 대해 기억나는 게 별로 없어요. 그냥... 배가 좀 나오고, 떡진 머리카락에 키가 160이 조금 안 되는 것 같고... 여기 계신 혜선 이모를 많이 닮은 것 같네요.”하연의 남준에 대한 평가가 끝나자 송혜선의 얼굴이 굳어졌다.“사람을 잘못 본 것 같은데요? 우리 남준이가 얼마나 잘생기기로 유명한데요.”진미라 여사도 얼른 거들었다.“그래, 전에 남준이를 본 적이 있는데, 키가 185야. 다 둘러봐도 우리 남준이만큼 뛰어난 사람은 드물지.”하연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들고 다시 말했다.“그럼 부상혁 씨와 비교하면 어떤가요?”하연의 입에서 ‘상혁’의 이름이 나오자
상혁이 문을 두드리자 웨이터가 문을 열고 상혁을 맞이했다. 백수미가 고개를 들자 깔끔하고 매끈한 이목구비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상혁은 손가락을 세워 입에 대고 눈을 마주친 백수미에게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그때 하연은 이미 10여 게임을 연속으로 이기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판을 정확히 읽고 계속해서 하연에게 유리한 카드를 내주었다. 게다가 하연은 계산이 빨라 송혜선과 진미라는 거의 게임에서 지고 있었다.책상 위에 한 무더기의 칩들이 쌓여 있었다.송혜선은 좋지 않은 안색으로 마지막 게임을 마치고 게임에서 손을 털었다.“하연 아가씨가 참 톡톡하네, 이쯤에서 내가 진 걸 인정할게.”테이블에 앉아있던 하연의 뒷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네, 사실 지는 건 겁나지 않는데,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게 더 겁나죠. 혜선 이모는 카드 실력은 더 분발하셔야겠어요.”하연의 말을 듣고도 송혜선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하연은 게임에서 이겨서 딴 칩들을 모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고 돌아서다 뒤에 서 있던 남자의 품에 갑자기 부딪혔다. 코가 아파서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상혁 오빠?”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상혁에게로 쏠렸다.상혁은 웃음을 참고 부딪친 코를 아파하는 하연을 대신해 하연의 코를 문질러주었다.“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예요?” 하연이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방금, 게임 하느라 지치지 않아?”“조금요.”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은 누가 봐도 분명히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송혜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상혁이구나, 여기는 어떻게 왔어?”상혁은 손을 들어 하연의 구겨진 셔츠 깃을 정리하면서도 송혜선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일이 있어서요. 하연이가 여기에 있다고 해서 보려고 온 겁니다.”“진 여사가 그러더구나, 여기 최하연 씨는 부 회장님의 딸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면 최씨 가문에 위로 오빠가 셋이나 된다던데, 그럼 상혁이 네가 넷째인 건가? 네가 넷째 오빠가 되겠네.”송혜선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재 공급업체 최종 인선이 확정되었다. 계약서에 서명하려던 상혁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이번 민생 사업은 어떠한 부정 행위나 속임수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하나라도 적발된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공급업체 담당자는 상혁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상혁의 기세에 압도되어 연신 땀을 닦으며 말했다.“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물론입니다.”계약의 모든 프로세스가 끝나자, 상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잠시 쉬었다. 새로 임명된 비서는 상혁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주었다.“대표님, 수고하셨습니다. 차량이 이미 준비되었는데요, 어디로 가시겠습니까?”상혁의 눈이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저는 커피를 마시지 않습니다.”비서는 곧바로 커피잔을 도로 가져왔다. “다른 음료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됐어요.” 부상혁은 겉옷을 들고 밖으로 나가면서 비서를 곤란하게 만들었다.“어머니 댁으로 가.”피터는 상혁에게 보고하기 위해 차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상혁은 차에 오르기 전에 멈춰 서서 피터를 보았다. 셔츠의 윗 단추 두 개를 풀었다. 밤바람이 불어 셔츠깃이 흔들리자 그 사이로 선명한 근육의 윤곽선이 드러났다.“무슨 일이야?”“임모연... 저희쪽 사람들이 놓쳤습니다.”피터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상혁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어떻게 놓칠 수가 있어? 국경은 네 구역 아니었나?”“저희 쪽에서 임모연의 뒤를 따라붙었는데, 임모연이 의심이 많아 금방 눈치채더니 바로 바다로 뛰어들어 모습을 감췄습니다.”피터는 재빨리 말했다.“저희도 뒤따라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아마도 그 밑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 통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상혁의 가슴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차갑게 식은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더욱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내뿜었다.잠시 후 상혁이 입을 열었다.“오늘부터 네 목표는 임모연 감시가 아니라 국경 전체를 감시하는 거야. 미세한 움직임이라도 있으면 누가 됐든 즉시 보고해!”“네!”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