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입으로 그렇게 말해서는 소용없어. 난 절대 당신을 믿지 않아.” 그러자 권상용은 바로 목에 차고 있던 자신의 목걸이를 혜주에게 넘겼다. “이걸 담보로 걸게.” “만약 구하러 오지 않으면 내가 반드시 당신 찾아내서 죽일 거야!” 혜주는 민씨 가문이란 부잣집에서 크면서 부모님들이 거래하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봐왔기에 거래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때문에 권상용을 도와주기로 했고 자신은 명준과 갱단에 남기로 했다. 이 갱단은 사람 죽이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들 무리였지만 다행이도 혜주와 명준을 스파이가 아닌 난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고 얼굴까지 망가진 혜주는 반격할 방법이 전혀 없었고 게다가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명준은 기억을 잃어버렸다. 이는 혜주에게 있어 엄청난 충격이었고 두 사람은 계속 갱단에 노예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1년이 지나도록 권상용은 구하러 오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도 우연한 기회로 명준이 기억을 되찾았고 엄청난 기지를 발휘하여 혜주와 함께 이 갱단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전에 완전히 벼랑 끝까지 몰렸을 때 난 권상용이 생각났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가며 그 자 앞에 당시 그가 건넸던 목걸이를 전달했어.”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안 권상용은 겁에 질렸고 내가 자신의 생활을 헤집어 놓을까 두려워 나와 함께 B시로 돌아와 최하연을 대신 납치해준 거야.” 이 모든 걸 듣고 난 서준은 그제야 당시 그런 어마어마한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당시 그렇게 찾아도 너희 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라니!” “우리는 그 갱단에서 탈출한 뒤 B시로 돌아왔어.” 모연이 말했다. “언제?” 이에 서준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갱단에서 탈출한 뒤 가장 먼저 온 곳이 바로 B시야. 그런데 그때 이미 너와 최하연은 결혼을 했었고 아주 행복해 보였지.” “게다가 우리 민씨 가문도 가업이 나날이 번창하고 있었어. 나 하나 사라진 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이지.”
호현욱의 진술을 받은 날 경찰서에서 하연을 찾아왔다. 한 시종이 차를 내왔고 그렇게 하연과 한빈은 두 시간이 넘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호현욱은 임모연과 작당한 사실을 모두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그 여자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고 저희는 전력을 다해 찾고 있습니다.” “앞으로 DS그룹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한빈이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자 하연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번거롭게 직접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최 사장님은 지금 B시에서 업무가 가장 많으신 분인데 저희가 오는 게 당연한 거죠.” 한빈이 펜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저희 같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자 하연은 서류 가방을 건네며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들은 민중을 위해 일하는 더욱 대단한 분들인 걸요.” 문까지 배웅하고 있을 때 태훈이 돌아왔는데 한빈과 태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나누고 스쳐 지났다. 이때 태훈이 빨간 초대장 하나를 하연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오전에 사장님의 저택에 다녀왔는데 이 초대장을 발견하여 가져왔습니다.”이에 한빈이 휙 돌아보았는데 마침 하연이 그 초대장을 열고 있었다.“뭘 보는 거야? 왜? 최사장이 미모가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떼지 못 하겠어?” 동료가 짓궂게 장난을 쳤다. 그러자 한빈은 팔꿈치로 그 동료를 툭 치며 대답했다.“아니, 난 저기 저 초대장이 뭔가 눈에 익은 것 같아 본 것뿐이야.” “소울 칵테일바가 완공된 거야?”하연이 놀란 듯 물었는데 이 초대장의 아래에는 이현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네, 한 달이 다 되어 가니 말입니다. 내일 다시 개업한다고 합니다. 초대장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하마터면 이 엄청난 소식을 놓칠 뻔했습니다.” 이현은 최근 하연이 아크로리버파크에서 지내고 있다는 걸 모르는 듯했지만 그녀는 초대장을 보면서 아주 기뻤다. “선물 준비해 둬. 내일 가야겠어.” 그런데 태훈이 아직 대답을 하기 전에 커다란 손이
“그런 뜻이 아니라 진숙 이모와 동건 아저씨가 오빠가 다쳤다는 걸 알면 분명 속상하실 거예요.” 하연은 뭔가 마음에 걸리는 듯 말했다. “작은 부상일 뿐인걸.” “부모님들에게 있어서는 작은 상처라도 마음이 아픈 건 다 똑같을 거예요.” 하연의 이 말에 상혁은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다. 아주 오래 전 조진숙과 부남진은 이혼을 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이혼을 하지 않은 것과 별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 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봤을 때는 그게 아니었고 부동건은 늘 송혜선과 남준을 보러 자주 나가곤 했다. 감정의 깊이가 어떤 지는 막론하고 필경 남준은 부동건의 친자식이었기에 그는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른이 된 후, 가끔 송혜선을 만날 때에도 상혁은 자신의 온전했던 가족을 망가뜨린 그 여자를 보면서 상황상 공손하게 혜선 아주머니라고 불러야 하곤 했다. 상혁은 만약 부동건이 정말 자신을 마음 아파했다면 상황을 그 지경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하연이 찌푸려진 상혁의 미간을 펴주며 물었다. 그제야 상혁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별 거 아니야. 아마 3일 후면 떠나게 될 거야.” 이 말에 하연은 상혁을 껴안으며 말했다.“이렇게 빨리요?” “방금은 떠났으면 했던 거 아니야?” 그러자 하연은 얼굴이 빨개져 말했다. “오빠가 안 갔으면 좋겠어요. 아쉬워졌어요.” 하연은 자신이 몇 년 만에 다시 시작한 첫 연애가 장거리일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모두들 장거리 연애가 어렵다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번에 돌아가면 오래 B시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볼게.” 상혁이 약속했다. 하지만 하연은 DL그룹처럼 엄청난 규모의 회사에서 상혁은 떠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자주 보러 갈게요.” 하연과 상혁의 알콩달콩한 모습에 태훈은 바로 물러났다. 다음날 아침 피터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지상이 제공한 정보는 정확했고 저희 쪽에서 이미 양재성을 찾았습니다. 그
개업식에 온 사람들은 전부 B시에서 알아줄 만한 지위 높은 사람들이었다. “B시의 시중심에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가계를 낼 수 있는 걸 보니 분명 인맥이 꽤 넓은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주러 왔네요.” 하연이 자에 앉으며 말했다.“그래? 한서준도 왔어.” 이 말에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는데 과연 맞은편 룸으로 들어가는 서준의 모습이 보였고 줄곧 칵테일을 즐겨 마시지 않던 서준이 왜 여기 온 건지 의문이 들었다. 이때 상혁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여기 사장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궁금해지는 걸?” ‘어떤 사람이냐고?’ 사실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고 심지어 매일 마스크를 쓰고 다녔기에 얼굴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한편 방금 막 다른 손님의 접대를 끝낸 이현에게 강성훈이 다가와 말했다.“저번 달에 누군가 룸을 하나 예약했는데 오늘 보니 그 사람이 한서준 대표였습니다. 그 자가 여기에 온 걸 보니 이미 사장님의 신분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에 마스크를 쓰고 있던 이현이 약간 움찔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알아서 마시고 가던지 말던지 하게 둬. 난 그 자를 만나지 않을 거니까.” 하연을 구했던 그날 밤, 이현은 이미 자신의 신분이 까발려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하연 사장님도 오셨습니다. 바로 한서준 대표의 맞은편 룸에 계시는데 사장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동시에 하연이 상혁에게 술을 한 잔 따르고 있었다.“전에 함께 마시기로 했었죠? 그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네요.”그러자 상혁이 술잔을 들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고작 요만한 B시에서 임모연은 대체 어디에 숨은 걸까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잖아?” “혹시 가장 위험한 곳이 오히려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말이예요? 그러면 설마 우리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바로 이때 누군가 룸의 문을 두드렸다. 하연이 문을 열어보니 바로 손이현이었다.“이제는 손 사장님이라고 불
“개인 취향일 뿐입니다.” 이현은 상혁을 훑어보았는데 서준과는 완전히 다른 남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서준은 늘 권력과 이익의 다툼 속에서 컸기에 세속의 때에 물들었지만 상혁은 그런 풍파는 전혀 겪지 않는 느낌이었다. 상혁의 분위기는 분명 아주 화목하고 느슨한 환경에서 자란 것처럼 보였다. “손 사장님은 눈이 꽤 정확하신 분 같아요. 이런 사업 추진에 능한 걸 보니 말이예요.” 이때 상혁이 입을 열며 이현의 눈길을 끊어냈다. 그제야 이현도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최하연 씨가 너무 과분한 선물을 주셔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네요.” “저와 하연이 모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물며 오늘 개업식 같은 바쁜 날에 특별히 저희에게 룸도 남겨주지 않았습니까?” “이 고마움은 앞으로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상혁은 손가락에 멋으로 차고 있던 반지를 만지작거렸는데 진심 반, 장난 반이 섞여 있었다. ‘하연이라고 불렀어?’ 이현은 상혁이 너무도 다정하게 하연을 부르는 모습이 약간 신경에 거슬렸는데 이때 하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보탰다. “맞아요, 손 사장님.” “참, 그 연회가 있던 날 저희 하성 오빠를 소개시켜 드리기로 했는데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해요.” 하연은 그날의 일을 언급했고 이에 이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 분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듣는 것으로도 이미 저에겐 충분히 복받은 일입니다.” 그러자 하연이 웃으며 말했다. “저희 오빠는 허세 부리는 걸 좋아해서 분명 그날 고백하고 나서 자아도취하고 있었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보다 멋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충분히 스스로에게 취할 만합니다.” 이현이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어갔다. “그날 최하성 씨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참 예쁘던데 사랑하는 사람의 손재주가 엄청 뛰어난 것 같더라고요. 혹시 디자이너 맞나요?” “세상에!” 하연이 깜짝 놀란 듯 물었다. “눈썰미가 정말
하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자신도 새까맣게 잊고 있던 걸 상혁이 기억하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얼마에 사들인 겁니까?” 200억이 넘은 돈은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혁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들어?” 상혁이 다정한 눈길로 활짝 웃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긴 하는데 도대체 얼마인 거예요?” 하연은 이 목걸이가 가격이 분명 적지 않게 나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상혁은 그 돈이 아쉬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값진 물건이었다. 상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바로 그 목걸이를 하연에게 걸어주며 말했다. “돈은 신경 쓰지 마. 네가 마음에 들면 그거로 충분해.” 두 사람의 이 모습은 한창 열애 중인 연인의 모습이 틀림없었다.상혁은 하연에게 목걸이를 걸어준 후 몸을 돌리며 말했다. “손 사장님께도 예쁜지 한 번 보여드려.” 루비 보석은 매우 컸고 하연의 뽀얀 피부와 자연히 잘 어울렸는데 이때 이현은 하연의 쇄골 쪽에 난 키스마크를 발견하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 “최하연 씨의 우아한 미모에 무엇인들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이어 이현은 바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두 분 저의 개업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다른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편하게 즐기다 가십시오.” 이현이 룸에서 나오자마자 성훈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신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마스크를 썼는데 그게 보여?” “암울한 분위기가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데 안 봐도 알겠습니다. 최하연 씨가 무슨 거슬리는 행동이라도 한 겁니까?” 하지만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고 하연에게서 받은 선물을 성훈에게 건넸다.“이거 잘 보관해 둬.” 그렇게 성훈이 떠나간 뒤 이현이 고개를 들었는데 맞은편 룸에 있던 서준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마치 오랫동안 사냥감을 노리고 있던 늑대처럼 이현을 바라보았다. 룸 안, 하연은 착용했던 목걸이를 다시 선물 상자
“왜?” 잠시의 침묵 후, 서준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연회 날 분명 현장에 있었잖아.” “그건 내 일이야. 너에게 설명할 의무는 없어.” 이에 서준은 눈살을 찌푸렸고 이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너만 빼면 내가 한명준이었단 건 아는 자는 없어. HT그룹은 이제 네꺼고 그걸 뺏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하지만 서준은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고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아무도 없다고? 그럼 하연은?” 그러자 이현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날 알아보지 못 했어.” 이에 서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칵테일바는 아주 조용했고 룸의 문을 닫으면 마치 바깥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었다. 하연은 상혁의 다리에 누운 채 잠이 들었고 다시 일어났을 때는 두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는데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룸을 나섰다. 그런데 이때 상혁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발신자는 연지였고 하연은 바로 DL그룹 내부 사정임을 알아보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응, 화장실 다녀올게.” 안 봐도 상혁을 빨리 F국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인 게 뻔했는데 연지가 조급한 어조로 말했다.[부 회장님께서 이틀 연속 송혜선 아주머니 쪽에 가 계십니다. 부남준 사장이 이번 일로 기세가 저조하긴 하지만 분명 다시 기회를 잡아 돌아오려 할 겁니다.] [저희 DL그룹은 주인인 대표님이 필요합니다.] 상혁은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다. “3일 후에 돌아갈게.” 이에 연지는 꾹꾹 참고 있던 말을 내뱉았다. [금방 알게 된 소식인데 부남준 사장이 WA그룹과의 사업에 관한 모든 걸 인정했다고 합니다.] [비록 처벌을 받긴 했지만 대표님을 대신하여 B시에서 일을 다시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태도 표시를 했답니다.] [그리고 부남준 사장은 내일이면 B시로 돌아가 이 일을 실행할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꽉 잡았다. 약 2분 후, 상혁이 화장실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길 모퉁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이현 쪽은 이제 신경
이때 마침 하연과 상혁 쪽으로 불빛이 비춰졌는데 두 사람은 길가의 눈부신 풍경이 다름없었다.상혁은 하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말했다. “내기는 일단 다음에 하는 거로 하고 두고 보자고.” 이 순간 서준의 차량이 길가로 들어오고 있었고 모든 걸 봐 버린 그는 안색이 어두워진 채 이를 악물었다. 이때 동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대표님!” “한명준이 나와 다투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이에 동후는 서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젠 내가 아니더라도 한명준일 가능성도 없어.” 하연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고 충분히 그녀를 지켜줄 능력도 가진 남자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시련을 겪은 적 없던 서준은 차에 앉아 눈가를 문질렀고 방금 이현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해서 네가 진 빛을 그냥 두겠다는 건 아니야.” “뭐라고?”“내가 내 신분을 이용하여 하연과 결혼했으면 아껴줬어야지. 하연을 속상하게 만들어? 그 빚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다가 갚게 만들 거야.” 이에 서준은 한 마디 반박도 하지 못했는데 전부 사실이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내일 임모연을 B시에서 벗어나게 할 거야.” 이 말에 동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여기에 남긴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저희 쪽에 임모연을 B시에서 빼낼 인맥은 없어요.” “오늘 밤 자리 한 번 마련해. 그 윗분을 만나야 해. 잘 구슬리면 가능할 지도 몰라. 임모연에게 새로운 신분을 줘야 해.” ... 차 안, 기사는 운전에만 몰두하고 있었고 뒷좌석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오늘 밤 떠난다고요? 왜 이렇게 갑자기요? 3일 후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연이 놀란 듯 한쪽 구석에 자리했고 상혁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DL그룹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가봐야 해.”“부남준 그 사람 때문인가요?” 이에 상혁은 담배 한 갑을 주머니에서 꺼냈지만 차마 필 수는 없었다. “비슷해.” 그러자 하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고 비록 아쉽긴 했지만 일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