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식사 자리는 모두가 즐거운 자리였다. 친구들을 보낸 뒤 하연은 상혁의 팔을 껴안고 차 옆에 서 있었다. “담배 폈어요?” 상혁의 몸에서는 은은한 담배 냄새가 났는데 짙지 않았고 오히려 약간 좋게 느껴졌다. “한 대 폈어.” 상혁은 하연의 목도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방금 한서준 만났어.” 그러자 하연은 눈을 비스듬히 뜨며 약간 의외라는 듯 물었다.“뭐라고 하던가요?” “이 레스토랑은 HT그룹에서 3년 넘게 다니던 곳이고 네가 자주 왔다고 하던데?” 상혁의 목소리는 빠르지도 느긋하지도 않았고 약간 짓궂은 어조가 섞여 있었다. 이때 하연은 멀리 않은 곳에서 걸어 나오는 서준을 발견했는데 바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제가 한서준의 비서로 일할 때 고객 접대용으로 이곳에 왔을 거예요. 하지만 이미 다 잊고 있었어요.” 최근 몇 년 간 하연은 DS그룹 일로 바빴기에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해서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연은 고개를 들고 억울한 눈길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이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주무르며 일부러 약간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조급해진 하연이 말했다. “정말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다고요.” “비서와 아내, 금기시되는 엄청난 이중 신분이지.” 하연은 거의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거 신경 안 쓴다면서요.”이때 더 놀리면 안 되겠다고 느낀 상혁은 바로 미소를 지으며 하연을 품에 안고 말했다. “장난이었어. 한서준이 그러는데 임모연을 유인하는 걸 돕겠다고 그러더라.” 그러자 하연은 상혁을 밀어내며 놀란 듯 물었다. “정말요?” “왜, 감동했어?” 하연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상혁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제 말은 그게 아니고 왜 그런 장난을 치는 거냐고요. 부 대표님, 설마 질투하는 거예요?” “난 질투 같은 건 안 해.” “에이, 엄청 한 것 같은데요!”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밤, 두 사람은 하얀 달빛 아래 열애 중인 연인처럼 꿀이 뚝뚝 흘러 넘쳤다. 이
호현욱은 겨우 며칠 만에 옷은 남루하고 수염은 덥수룩해졌으며 툭 튀어나온 배까지 더해져 초라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때문에 호현욱이 경찰서에서 나오는 순간 정민호는 하마터면 그를 못 알아볼 뻔했다. “너 언제 나왔어?” 호현욱은 정민호를 흘겨보더니 바로 그의 몸에 발길질을 했다. “나왔으면 나부터 구했어야지, 뭐했어! 이 빌어먹을 자식!” 그러자 정민호는 얼른 한쪽으로 비키며 울부짖었다. “이사님, 저도 방금 나왔어요. 나오자마자 이사님부터 보석한 거고요!” 이때 허공에 대고 발길질을 한 호현욱은 바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씩씩거리며 길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내 차는?” “이사님의 재산은 전부 사채업자들이 몰수해갔어요. 저도 버스를 타고 온 거고요.” 이 말을 들은 호현욱은 순간 충격에 멍해졌다. “다 없어졌어?” “네, 전부 가져갔습니다.” 정민호가 차마 호현욱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대답했다.“나, 나에게 아직 집이 있잖아.” “잊으셨어요? 집을 담보로 성동의 그 건설지에 투자를 하신 거잖아요.” 이 말에 호현욱은 휘청휘청거리며 일어나더니 정민호의 멱살을 잡으며 물었다. “성동의 그 공사 지금 어떻게 됐어? 시공 중이야? 말해!” 이에 정민호는 몸을 덜덜 떨며 대답했다. “조사가 내려왔는데 문제가 발생한 걸 알고 시공을 정지시켰습니다. 그 땅 사업은 아마 완전히 망한 것 같습니다.” ‘망했다고? 망했다니!’ 호현욱은 뒤로 뒷걸음질 치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고 자신이 하연과의 내기에서 졌다는 사실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최하연 그 여자가 날 이겼다니!” 낡은 월세방 안. 호현욱은 작은 걸상에 앉은 채 손에는 뜨거운 물을 한 잔 들고 있었는데 정민호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이사님, 계속 여기 숨어 있는 것도 방법은 아닙니다.” “비록 그 사채업자 일부가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지만 아직 밖에 그들 일당이 남아 있으니 언젠가는 다시 이사님을 찾아낼 겁니다.” “무슨 뜻이야? 지금 날 떼어내겠다는 거야?
“DS그룹은 지금 주가가 미친 듯이 상승하고 있으니 제 지분도 값이 꽤 나갈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고가로 지분을 팔아 넘길 수만 있다면 전 반드시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에게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이 말에 사채업자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뭔가 납득이 가는 듯 대답했다. “시간은 하루만 더 주겠다. 그래도 못 갚는다면 그때는 죽을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야!” 그제야 사채업자들은 으름장을 놓으며 떠나갔고 정민호는 재빨리 집 문을 닫으며 말했다. “이사님, 정말입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DS그룹의 지분이란 말입니다!” 호현욱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푹 숙였는데 지린내가 진동을 했고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안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지금 내가 DS그룹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최하연 그 여자가 날 죽이려고 달려들 텐데 말이야.” 호현욱은 자신의 처지를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임모연은!” “연락이 안 됩니다.” “젠장!” 아크로리버파크. “호현욱 이사가 경찰서에서 나오자마자 DS그룹의 지분을 전부 팔기로 내놓았습니다.” 태훈이 하연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총 10%나 됩니다.” 그러자 하연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전부 사들여.” “하지만 호현욱 이사가 내건 가격이 엄청납니다.” “싼 값으로 내놓으면 그 사채업자들에게 진 빚을 어떻게 감당하겠어?” 하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호 이사님 연세도 많은데 금전 쪽으로는 고생하게 두지 말자고.” “네, 알겠습니다.” 일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고 다음날 바로 계약이 성사되었는데 호현욱은 계약서 마지막에 적힌 이름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최하연이 내 지분을 사들인 거냐?!” 그러자 맞은편의 태훈이 아주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현재 그 가격으로 지분을 사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저희 최하연 사장님뿐일 겁니다.” “저희 사장님께서 말씀하시길 호 이사님께서DS그룹을 떠난 뒤에는 사업 선택하는 눈을
이미 궁지에 몰린 호현욱은 바로 하연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즉시 태훈에 의해 제지당했다. “호 이사님, 죄목이 더 늘어나고 싶으신 겁니까?” 태훈 뒤에 선 하연은 싸늘한 눈길로 호현욱을 바라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제 들어오시면 됩니다, 경찰관님.” 얼마 지나지 않아 한빈이 여러 경찰들을 데리고 도착했고 호현욱에게 수갑을 채우며 말했다. “당신을 특수 상해, 납치, 사생활 침해 등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호현욱은 거의 경찰에게 끌려 나가다시피 했다. “경찰관님, 다 오해입니다! 저 여자가 일부러 유도한 겁니다! 이건 법적 효력이 없단 말입니다!” “저희 둘의 대화가 법적 효력이 없을 순 있어도 호 이사님의 비서가 한 말은 법정에서 꽤 유력한 증거로 될 텐데요?” 호현욱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고 문어귀에 서 있는 정민호를 바라보았다. “너? 너였어?” “이사님, 저도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제가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저도 감방에 들어가야 할 처지라 어쩔 수 없었어요!” “너!” “호 이사님의 비서가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어요. 저희 하성 오빠의 열애설도 바로 이사님이 직접 계획한 거라고 하던데요?” “오늘 모든 걸 그대로 돌려드릴 테니 뿌린 대로 거두는 게 어떤 건지 한 번 뼈 저리게 느껴보세요!” 호현욱은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최하연! 이 망할 년! 너도 절대 좋게 죽진 못 할 거야!” 호현욱의 목소리는 점차 멀어지더니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드디어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때 태훈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호 이사에게 임모연의 행방은 묻지 않은 겁니까?” “임모연은 호 이사에게 귀띔도 해주지 않고 혼자 도망간 아주 치밀한 여자야. 그런데 호 이사가 임모연의 행방을 알 리가 있겠어?” “그렇긴 하네요.” 태훈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호 이사의 지분까지 더해졌으니 사장님의 지분은 30%, DS그룹 내에서 가장 높습니다. 이제는 안정권에 들어섰다고 봐도
[연말이 다가오자 각 그룹이 올해 재무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그 중 DS그룹의 데이터가 특히 눈에 띄고 있습니다.] [DS그룹이 최근 합작한 몇 가지 프로젝트는 모두 거대한 수익을 거두었고 같은 해 대비40%를 초과하고 있습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모연은 습하고 차가운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술을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텔레비전의 뉴스를 보던 모연이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던졌는데 텔레비전 스크린은 완전히 부숴졌고 아나운서의 얼굴은 찌그러져 버렸다. “망할 년!” 모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짙은 술 냄새에 서준을 코를 틀어막았고 침착하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바닥에 떨어진 술병을 주었다. “그래도 민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인데 이렇게까지 망가진 걸 보면 민 회장 마음이 꽤나 아프겠는 걸?” 모연은 싸늘한 눈길로 서준을 째려보았다. “한서준,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척하지 마. 지금 내가 이렇게 된 건 너 때문이기도 하니까!” 그러자 서준은 술병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너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도 주었지만 그 기회를 차버린 건 바로 너야.” 이 말에 모연이 콧방귀를 뀌었고 비틀거리며 서준의 앞으로 다가갔다. “난 처음부터 최하연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어. 그 여자가 내 집안을 완전히 망하게 했는데 내 복수가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왜 다들 그 여자만 감싸고 도는 건데!” “그럼 지금은?” 서준이 싫은 듯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했는데 아직도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 민혜주, 내가 말했지? 넌 하연의 상대가 아니라고.” “아니, 1대1의 승부였다면 난 분명 최하연을 이길 수 있었을 거야.” 모연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 여자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 “그만해! 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건데! 호 이사는 이미 경찰에 잡혔어. 전부 다 잃은 그 사람이 네 이름을 분다면 네가 B시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이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모연은 서준의 팔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한명준이 돌아온 거면 난 더더욱 B시를 떠나야 해. 안 그럼 최하연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될 수도 있잖아?” “넌 그 여자를 미치도록 사랑한다며? 그냥 이렇게 둬도 되겠어?” 하지만 서준은 예상 외로 너무 냉정했고 바로 모연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B시에 있는 게 좋지 않겠어?” “무슨 말이야?” “네가 이리 저리 숨어 다니는 것보다 한명준을 B시에서 떠나게 하는 게 어때?” 이 말에 모연은 미간을 찌푸렸고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눈길로 서준을 쳐다보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한명준은 나라 밥 먹는 사람이야! 게다가 그 자가 B시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남은 사람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고 말이야.” “지금 B시에서의 내 권력으로 너 하나 숨기는 건 문제가 아니야.” 서준은 뭔가 자신 만의 생각이 있는 듯 말했다. “한명준을 떠나게 하려면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어.” “그게 뭔데?” 한명준과 관련된 더욱 큰 사건을 만드는 거지.” 서준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말해봐. 도대체 권상용은 왜 너를 돕고 있는 거야?” 모연은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일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더 이상 다른 방법은 없었다. “한서준, 널 믿어도 되는 거야?” 이에 서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긴 하고? 네 말처럼 우린 이익공동체야.” 잠시 후 모연은 깊은 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권상용을 구한 적 있어.” “언제?” “교통사고 났을 때 말이야.” 그때 한씨 가문과 민씨 가문은 사이가 꽤 좋았고 모연도 한명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 당시 G국에서 여행을 하고 있던 모연은 길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한서준?” 모연은 얼른 다가가 그 사람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 사람은 가족 재킷을 입고 있었고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눈빛은 아주 날카로웠는데 모연을 힐끔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맨 입으로 그렇게 말해서는 소용없어. 난 절대 당신을 믿지 않아.” 그러자 권상용은 바로 목에 차고 있던 자신의 목걸이를 혜주에게 넘겼다. “이걸 담보로 걸게.” “만약 구하러 오지 않으면 내가 반드시 당신 찾아내서 죽일 거야!” 혜주는 민씨 가문이란 부잣집에서 크면서 부모님들이 거래하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봐왔기에 거래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때문에 권상용을 도와주기로 했고 자신은 명준과 갱단에 남기로 했다. 이 갱단은 사람 죽이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들 무리였지만 다행이도 혜주와 명준을 스파이가 아닌 난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고 얼굴까지 망가진 혜주는 반격할 방법이 전혀 없었고 게다가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명준은 기억을 잃어버렸다. 이는 혜주에게 있어 엄청난 충격이었고 두 사람은 계속 갱단에 노예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1년이 지나도록 권상용은 구하러 오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도 우연한 기회로 명준이 기억을 되찾았고 엄청난 기지를 발휘하여 혜주와 함께 이 갱단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전에 완전히 벼랑 끝까지 몰렸을 때 난 권상용이 생각났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가며 그 자 앞에 당시 그가 건넸던 목걸이를 전달했어.”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안 권상용은 겁에 질렸고 내가 자신의 생활을 헤집어 놓을까 두려워 나와 함께 B시로 돌아와 최하연을 대신 납치해준 거야.” 이 모든 걸 듣고 난 서준은 그제야 당시 그런 어마어마한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당시 그렇게 찾아도 너희 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라니!” “우리는 그 갱단에서 탈출한 뒤 B시로 돌아왔어.” 모연이 말했다. “언제?” 이에 서준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갱단에서 탈출한 뒤 가장 먼저 온 곳이 바로 B시야. 그런데 그때 이미 너와 최하연은 결혼을 했었고 아주 행복해 보였지.” “게다가 우리 민씨 가문도 가업이 나날이 번창하고 있었어. 나 하나 사라진 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이지.”
호현욱의 진술을 받은 날 경찰서에서 하연을 찾아왔다. 한 시종이 차를 내왔고 그렇게 하연과 한빈은 두 시간이 넘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호현욱은 임모연과 작당한 사실을 모두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그 여자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고 저희는 전력을 다해 찾고 있습니다.” “앞으로 DS그룹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한빈이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자 하연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번거롭게 직접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최 사장님은 지금 B시에서 업무가 가장 많으신 분인데 저희가 오는 게 당연한 거죠.” 한빈이 펜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저희 같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자 하연은 서류 가방을 건네며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들은 민중을 위해 일하는 더욱 대단한 분들인 걸요.” 문까지 배웅하고 있을 때 태훈이 돌아왔는데 한빈과 태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나누고 스쳐 지났다. 이때 태훈이 빨간 초대장 하나를 하연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오전에 사장님의 저택에 다녀왔는데 이 초대장을 발견하여 가져왔습니다.”이에 한빈이 휙 돌아보았는데 마침 하연이 그 초대장을 열고 있었다.“뭘 보는 거야? 왜? 최사장이 미모가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떼지 못 하겠어?” 동료가 짓궂게 장난을 쳤다. 그러자 한빈은 팔꿈치로 그 동료를 툭 치며 대답했다.“아니, 난 저기 저 초대장이 뭔가 눈에 익은 것 같아 본 것뿐이야.” “소울 칵테일바가 완공된 거야?”하연이 놀란 듯 물었는데 이 초대장의 아래에는 이현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네, 한 달이 다 되어 가니 말입니다. 내일 다시 개업한다고 합니다. 초대장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하마터면 이 엄청난 소식을 놓칠 뻔했습니다.” 이현은 최근 하연이 아크로리버파크에서 지내고 있다는 걸 모르는 듯했지만 그녀는 초대장을 보면서 아주 기뻤다. “선물 준비해 둬. 내일 가야겠어.” 그런데 태훈이 아직 대답을 하기 전에 커다란 손이
“시간 없어.” 하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메시지를 확인했고, 내용을 본 후 손에 힘이 들어갔다. 10분 후.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남준의 눈에 띄는 빨간색 스포츠카가 비상등을 켠 채 호텔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번화한 호텔 입구에서 유독 도드라져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잠시 후, 차 문이 열리고 남준이 내렸다. 그는 오늘 블랙 패딩을 걸친 채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기며 여유롭게 하연을 바라보았다. “역시 올 줄 알았어.” 남자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고, 말투에는 확신이 묻어 있었다.찬바람이 부는 겨울밤, 차가운 바람이 하연의 얼굴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하연은 몇 걸음 옮긴 뒤 걸음을 멈췄고, 남준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손을 들어 흩날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말해. 문자에 적힌 상혁 씨하고 관련해서 중요한 일이 뭔데?”남준은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형이 걱정돼?”“그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하연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남준은 그녀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더니, 불과 반걸음 거리에 멈춰서 몸을 약간 숙였다. “너의 그 관심 나 한테도 좀 나눠 주면 안 돼?”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내뱉은 말에 은은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술 마셨어?”남준은 입가를 비틀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 혹시 나 걱정하는 거야?”“착각하지 마.”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부남준,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여기서 시간 끌 여유 없어.”남준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어딘가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너 갈수록 성격이 우리 형이랑 닮아가네. 역시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하연
하연은 밝게 웃으며 상혁이 건넨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갓 짠 오렌지 주스는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부 대표님이 직접 짠 오렌지 주스라 그런가, 확실히 맛이 다르네요. 정말 맛있어요.”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맛있으면 자주 짜줄게.” 하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감사히 잘 마실게요, 부 대표님!” “아니, 한참을 찾았는데 여기서 둘이서만 꽁냥거리고 있었네?” 문 앞에 기대어 서 있던 하성이 두 팔을 교차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혁, 너 요즘 이 녀석을 너무 애지중지하더라. 그러다 버릇 나빠지겠어.” “오빠!!” 하연은 볼이 부풀어올라 약간 투덜거렸지만, 옆에 있던 상혁은 태연하게 그녀를 감싸며 말했다. “애지중지하든 말든 내 마음이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하성은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투항했다. “알았어, 알았어. 난 그냥 너희 둘이 잘 지내는 거 보니 마음이 놓여서 하는 소리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 계속 이렇게 잘 지내줘, 아주 보기 좋아!”그때 하연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부남준’이라는 이름이 뜨자 그녀는 잠시 긴장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오빠들, 먼저 얘기하고 있어요. 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하연이 자리를 비우고 복도로 나가자, 하성은 방금 전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상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요즘 너희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있더라. 동건 삼촌 쪽에서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던데?” 상혁은 하연이 마시다 남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시선을 복도 쪽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첩이 ‘본처’의 자리를 노리는 거야. 흔한 일이잖아.” 하성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동건 삼촌이 그 여자를 꽤 오랫동안 봐줬던 모양이던데. 이제는 꽤 많은 걸 쌓아둔 듯하고, 한번 크게 판을 벌일
“뭐 하는 거야? 빨리 이 주스를 연회장으로 가져가!” 홀 매니저가 다가와 살짝 꾸짖었다. 여자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질투로 번들거리던 눈빛을 감추고는 얌전히 대답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다영은 태어나서 가사일 한 번 손댄 적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트레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매니저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너 신입이야?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영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가슴 속에서 송혜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 친척 중 하나가 DS그룹에서 일하고 있어. 오늘 밤엔 그 사람 신분을 쓰는 게 편할 거야.” 침착함을 되찾은 다영은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는 고객지원부의 진미입니다. 연회 인력이 부족해서 임시로 지원 나온 거예요.” 매니저는 그녀의 명찰을 한 번 흘깃 본 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건네받았다. “신입이라면 전면에 나가면 실수하기 쉬워. 내실에서 돕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난 뒤, 다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회장을 바라봤을 때, 앞줄에 앉아 있던 하연과 상혁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2층 휴게실 안. 원신명은 한 손에 신선한 오렌지 한 봉지를, 다른 손에 포장을 뜯지 않은 녹즙기를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오렌지와 녹즙기입니다.” 원신명은 궁금한 듯 물었다. “대표님,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드시는 건가요?” 상혁은 짧게 대답했다. “원 비서, 거기 두고 가면 돼.” 원신명은 얼른 다가가 도움을 자청했다. “대표님,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와이프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는데,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와이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그 단어를 그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원신명은 곧 깨달았다. ‘아, 대표님이 직접 최하연 씨를 위해 주스를 준비하시고 싶은 거구나!’ “원 비서, 연말인데도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