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오빠.”“내가 뭐 어쨌는데?”상혁은 사과를 담은 그릇을 하연의 품에 놓고 말했다.“이거 다 먹으면 링거 다 맞았을 거야. 나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몸집이 꽤 큰 남자 둘이 앞뒤로 병실에서 나가자, 하연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태훈에게 말했다.“따라가 봐. 설마 싸우는 건 아니겠지?”“셋째 도련님, 그러실 분 아니에요.”병원의 옥상은 바람이 너무 불어 두 사람의 외투가 바람에 날렸다. 하성은 연예인이기에 자태가 우아했는데, 그런 하성의 곁에 있어도 상혁은 전혀 꿀리지 않았다.“할 말 있으면 해.”하성이 상혁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우리 같이 자라서 네 부모님도 나한테 되게 고마워하시니까, 우린 거의 친형제나 다름이 없지.”“맞아.”“예전에 우리 정말 사이가 좋았어. 후에 각자의 사업이 생겨서 전처럼 자주 연락하지 못했지만, 요 몇 년간 네가 뭘 하고 지냈는지 잘 몰라. 그렇지만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어. 우리 큰형이랑 둘째 형도 널 믿고.”하성이 얘기하자 상혁도 고개를 끄덕였다.“응.”“네가 하연이를 좋아하는 거 우린 다 찬성해. 너희가 만나는 거 우린 완전 찬성이지.”상혁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근데 오늘 내가 경찰서에 들어갔을 때, 하연이 다 해진 옷을 입고 로비에 앉아 있는 걸 보고 내가 널 죽일 뻔했잖아! 너 왜 하연이를 그렇게 보살피는데? 그 모습을 보고 네가 하연이를 잘 보살필 수 있는지 의심했어!”직설적인 욕에 상혁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이건 내 실책이야. 이런 일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하성은 화가 났지만, 상혁이 솔직하게 인정해서 할 말이 없었다.“너!”“하성아, 몇 년 전에 내가 하연에게 고백했을 때, 너도 불렀었잖아. 그때 네가 나한테 앞으로 마음이 변할 수 있냐고 물었었지. 지금 너한테 대답할 수 있어. 앞으로 절대 그럴 일 없어.”상혁은 담담하게 말했다.하성은 상혁의 팔에 난 상처를 보고 그를 툭 쳤다.“나쁜 놈, 나 여동생 한
“뭐 찔리는 게 없으면 왜 실종했겠어. 이 일 십중팔구는 걔가 계획한 거 아니야?”HT그룹, 동후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서준이 만년필을 쥐고 흔들고 있었고 표정이 좋지 않았다.“양재승은 권상용을 불러내 올 만한 능력이 없어, 민혜주가 국경 쪽 사람들이랑 연락한 걸 거야.”“그 여자가 그쪽에 인맥이 있어요?”“있지, 그렇지만 중요할 때 아니면 안 써.”동후가 생각에 잠겼다.“민혜주가 급해진 걸까요?”“비가 오면 공사가 언제든지 중단될 위험이 있어. 그래서 민혜주는 비가 올 때를 대비하여, 하연에게서 돈을 요구하려고 했던 것 같아. 근데 뜻밖에도 상혁이 갑자기 돌아와서, 계획이 다 망가진 거지. 지금은 공사장이 폐쇄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데, 도망가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DS그룹에서 이유를 알려고 할 텐데.”서준이 등을 어루만졌다.“그것뿐이 아니지. 권상용의 신분이 경찰을 움직이게 해서 우리 형님이 있는 한 절대 조사를 멈추지 않을 거야.”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더니 깜짝 놀랐다.“네? 한명준?”“현장에서 형을 봤어. 얼굴은 못 봤지만, 몸매를 봐서는 형이 확실해.”이복형제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걱정을 해왔기에 서준은 잘못 봤을 리가 없었다.동후는 깜짝 놀랐다.“한명준 아직 안 죽었어요? 이렇게 오랜 시간 자취를 감춘 건 집안에서 감춰준 거겠네요. 그러니까 저희가 못 찾았죠.”임모연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내막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형이랑 하연이 이미 만났어.”서준은 침착하게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그날에 형이 나타나지 않았을 거야.”‘한명준이 아마 다소 달갑지 않았던 것 같아.’서준의 머릿속은 온통 하연이 자신에게 짜증을 내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모든 인원을 동원해서 임모연을 찾아. 걔가 사업을 담당하고 있어서 B시를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네.”“그리고 운석이 보고 오라고 해.”아크로리버파크, 하연이 오후의 따듯한 햇살 아
핸드폰에 귀를 가까이 대자, 하연은 하민이 꾸지람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꾸지람 듣기 싫어 혀를 내밀었다.상혁은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민의 꾸지람을 들었다.하민은 길게 얘기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나 오늘 회의에 참석했는데, 부남준을 만났어.]이 말을 들은 상혁은 하연에게서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이동했다.하연은 원래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상혁에게 동생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데, 하민은 알고 있었다. F국의 최상급 계층에는 비밀을 지킬 수 없나보다.[무역 유통 회의였는데, 걔 몸에 상처가 있었고 제일 뒤에 앉아 날 알아보지 못하더구나. 네가 걔를 그냥 놔둔다고 하던데?]“잠시 그러는 거예요. 이제 쓸 때에는 다시 써야죠.”[회의가 끝나고 나가려고 하는데, 주차장에서 동건 삼촌이 걔를 교육하고 있더라.]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상혁은 말하지 않았다.“친부자니까 너 조심해.”하민이 걱정했다.[잘 알고 있어요, 형님.]똑똑한 사람은 요점만 말한다....통화를 마친 하민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때 비서가 물었다.“회장님, 무슨 생각 하고 계세요?”“미래 매제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상혁이 남준을 놓아버렸지만, 남준이 손해를 보더라도 본부로 돌아가려고 했고 동건이 남준에게 보상을 해주었다. 회의를 마친 상혁이 수시로 폭발할 수 있는 두 번째 폭탄을 묻었다.상혁은 속셈이 아주 깊었고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비서는 중점을 캐치하지 못했다.“아가씨 남자 친구 생겼어요?”하민은 표정 관리를 했다.“매제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상혁은 하연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자, 하연이 상혁의 팔을 쥐고 애교를 부렸다.“제가 저를 잘 돌보지 못한 걸로 우리 가족에게 꾸지람 듣게 해서 미안해요.”상혁은 웃었다.“꾸지람 듣는 게 맞아.”“그 동생분이랑 요즘 사이가 안 좋아요?”상혁은 하연이 통화 내용을 들었을 줄 알고 자리에 돌아가서 앉았다.하연은 다급히 말했다.“저한테 설사약 많아요!”상혁이 소리를 내서
현빈이 가자, 상혁은 쭈그려 앉아 빨개진 하연의 얼굴을 들었다.“네가 먼저 다가왔으면서 왜 부끄러워해?”하연은 현빈이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고 이럴 때 마침 지나갈 것으로 생각지 못했다.하연은 상혁을 바라보지 않았다.“다 오빠 때문이잖아요. 밖에서 날 꼬셔서 부끄럽게 하고.”상혁은 할 말이 없었다. 하연의 언어능력은 예전부터 아주 셌다.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태훈이 도착했다.“대표님, 호 이사님을 찾을 수 없어 은행에 연락해 봤는데, 호 이사님 카드에 돈이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공지는 이 일 때문에 수사를 받고 있어 48시간 안에 자금 문제가 나올 것 같습니다.”하연은 예상했다.“호 이사는 임모연과 성동에 투자하기 위해 빚을 많이 졌던데, 우리가 호 이사를 못 찾아도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우리를 대신해 무조건 찾아낼 거야. 사람 시켜서 계속 감시하도록 해.”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DS그룹 내부에서 말이 많은데, 대응하실 거예요?”하연이 잠시 생각했다.호현욱을 처분해야 하는데, 다른 이사들까지 움직이게 하면 안 된다. “내일 월요일에 회의를 열어줘, 다른 건 내가 알아서 할게.”두 사람이 대화하고 나자, 어느샌가 밤이 되어 있었다. 부엌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났고 가정부가 음식을 하나둘씩 들고나왔다. 상혁도 서재에서 나왔다.“밥 먹고 가.”태훈이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안 됩니다. 저 저녁에 할 일이 있어서요.”하연도 같이 밥을 먹고 가라고 했는데, 태훈이 거절했다.“사장님을 지켜주시는 분이 계셔서 시름이 놓입니다.”“정 비서도 나이가 이젠 있으니 결혼해야 하지 않겠어?”이 화제가 나오자, 태훈은 부끄러워했다.“그런 적이 있었어요.”하연의 눈에서 빛이 났다.“누구랑?”“근데 상대 쪽 집안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하연의 눈이 동그래졌다.“원래는 몰랐다가 알고 나서 파탄이 났죠.”태훈이 급히 설명했다.하연이 계속 듣고 싶어 하자 상혁이 태훈보고 얼른 가라고 했다.연인이 되자 하연은 상혁의 곁
같은 시각, B시에서 가장 청결하고 가장 핫한 술집에서 권위가 오고 갔다.청결하다는 것은 환경이 아주 깨끗했고 핫하다는 것은 룸을 예약하기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제일 안쪽에 자리 잡은 룸에서 식사하는데, 식사할수록 분위기가 다운됐다.나호중이 넥타이를 풀더니 술잔을 들었다. 식탁 주위에는 도련님들이 앉아 있었다.“운석아, 갑자기 일이 생겨서 이 술 다 마시고 갈게. 생일 축하한다.”나호중은 잔의 술을 비우고 가려고 했다.그러자 운석과 태현이 눈빛을 교류하고 다급히 막아 나섰다.“아저씨, 이재 10분 앉아 있었는데, 벌써 가시게요? 제 어머니, 아버지도 아직 안 오셨는데, 되게 만나고 싶어 하세요. 조금만 더 있다 가세요.”나호중은 말하지 않았다.나씨 집안은 국제 상회를 운영하고 있어 장사를 하기에 안 좋은 것들과 접촉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떨 때 나호중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나호중은 항상 그들을 도와주지 않아, 나씨 집안에서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나호중은 청렴한 경찰이다.그래서 나호중은 운석의 말을 믿지 않았다.나호중은 뒷짐을 지고 말했다.“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야? 무슨 부탁이 있으면 그냥 말해.”운석은 서준을 마음속으로 욕하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러죠. 요즘 사상에 문제가 생겨서 교육 좀 받고 싶어요.”“장난 그만 쳐! 교육받고 싶으면 경찰서에 와서 날 찾아!”나호중은 다리를 꼬고 앉자, 단정해 보이는 남자가 선물을 들고 예의 바르게 호중을 불렀다.“서장님.”그 사람은 나호중을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고 국장이라고 불렀다.나호중은 뒤로 물러서서 그 사람을 다시 보았다.“한씨 집안 도련님이시네요?”“회의가 있어서 늦었습니다. 제가 운석을 시켜서 서장님 가시지 못하게 했어요. 죄송합니다.”나호중은 다시 자리에 앉았고 운석과 태현 등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어 두 사람만 남았다.“그날 일에 관해 묻고 싶은 거라면 묻지 마세요.”서준이 대각선 자리에 앉아 말했다.“서장님,
명준은 한씨 집안의 장남으로 어머니께서 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서 아버지께서 곧바로 새 아내인 이수애를 맞아들였다. 이수애는 집안의 재산을 싹쓸이하고 서준과 서영을 낳았다. 이상한 것은 서준과 명준이 아주 닮았다. 그래서 수애는 명준을 끔찍이 싫어했다.할머니의 보호가 없었다면 명준을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조금 큰 뒤에 명준이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집에 잘 오지 않았다.그래서 사람들은 한씨 집안에 장남이 명준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명준이 사고를 당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연이 나타났다.이 이상한 여자는 서준을 잡고 이상한 말을 했다. 서준은 그녀가 아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명준임을 알고 있었다.하연이 서준을 이렇게 오랜 시간 좋아한 것은 명준이지 서준이 아니었다.왜인지 모르게 서준은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았고 일이 이렇게까지 번져버렸다.지금 명준이 소리 없이 다시 돌아왔다.룸 밖에서 도련님들이 문에 귀를 대고 엿들으려고 하고 있었다. 이때 태훈이 손님을 모시러 가고 있는데,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운석 도련님?”운석이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 비서님, 왜 여기 계세요?”“여기서 뭐 하세요...?”귀를 대고 한참 있었는데,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운석은 서준이 나호중을 무슨 일로 찾는지 몰라 손을 저었다.“오랫동안 최 사장님을 못 뵜는데, 어디 계세요? DS그룹이 이렇게 활발히 활동하는데, 대표님은 왜 소식이 없으시죠?”태훈이 대답했다.“저희 사장님께서는 떠벌이는 분이 아니라서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시면 사장님께 직접 연락하시면 됩니다.”예전 같으면 그렇게 할 텐데 지금은 친구가 되었으니 쉽게 연락할 수 없었다.운석은 손을 흔들며 친구들보고 장소를 바꾸자고 했다.사람들이 가자 태훈은 문이 닫힌 룸을 바라보았다.서준은 나호중의 얘기를 다 듣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서장님, 감사합니다. 서장님께서 제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주셨어요. 그때 일은 제가 직접 형님께 사죄를
하연의 머리는 전형적인 검은 긴 생머리로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었다.상혁은 인내심 있게 하연의 머리를 조금씩 말려줬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향기가 조금씩 났다하연이 감탄했다.“부상혁, 우리 오빠 말고 다른 남자가 제 머리 말려준 적 없어요.”바람 소리가 너무 커 상혁은 하연을 놀리고 싶었다.“한서준은?”“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도 저를 무슨 병균처럼 피해 다녔으니 머리를 말려주는 건 꿈이랑 다름없어요.”하연은 말하고 나니까 이상한 일을 말한 것 같아 웃었다.상혁은 그녀의 머리를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서준은 예전과 지금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하연이 매력이 없는 여자가 아닌데, 서준이 다치고 싶어도 꾹 참았을 것이다. 이혼하고 나서 갑자기 후회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설마 무슨 이유가 있어서 하연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했나?’상혁이 갑자기 말하지 않자, 하연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헤어드라이이에 말려들어 가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상혁은 다급히 전원을 끄고 하연의 머리를 정리하고는 어루만져 주었다.“아파?”상혁이 걱정하듯 다가갔다.하연은 그런 상혁한테 설레어 아픔을 잊어버렸다.“무슨 생각 했어요?”상혁이 미간을 찌푸렸다.하연이 오해했다.“혹시 서준과 제가 결혼했던 거 신경 쓰여요?”여자한테 재혼한다는 것은 넘기 어려운 문턱이다. 자신감이 넘치는 하연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걱정이 됐다. 상혁은 하연의 볼을 꼬집었다.“너랑 장난친 거야. 난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거짓말, 남자라면 다 신경 쓸걸요?”하연은 고집을 부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상혁은 미소를 지었다.“네가 지금 가정이 있는 여잔데, 나랑 바람 피자고 하면 그래도 난 동의할걸?”“불륜남 하게요?”하연의 눈에서 빛이 났다.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사랑을 위해 불륜남이 되는 거지.”하연은 상혁의 다리에 누워 해맑게 웃었다.한참을 웃고 하연은 상혁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며 물었다.“이제는 한서준을 완전히 놨어요. 그때는
상혁은 멍해진 하연의 코끝을 톡톡 건드렸다. 하연은 상혁이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뺏아갔지만 평소 그녀가 피던 것에 비해 너무 독했던 탓에 기침을 콜록거리고 말았다. 이에 상혁은 하연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럼 언제면 되는데요?” 하연이 못내 아쉬워하며 물었다. 겨우 참고 있던 상혁은 이마를 탁 짚으며 말했다.“이렇게 열정이라고?” 생각해보면 욕구 불만인 것 같기도 했다. 이 말에 하연은 혼자서 이불을 휙 뒤집어쓰고는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그럼 후회하지 마세요!” 상혁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는데 이 정도로 기분이 좋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한 가사 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 “밖에 누가 왔는데 꼭 하연 아가씨를 만나 뵙겠다고 합니다.” 하연은 몸을 기웃거리며 물었다.“누군데?” “문지상이라는 분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하연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후, 대문이 열렸고 하연이 자리에 앉기 바쁘게 문지상이 헐레벌떡 달려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최하연 씨, 최 사장님! 저 좀 살려주세요.” 이에 하연은 깜짝 놀랐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문 사장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문지상은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날 전 최 사장님이 건설자재를 몰래 빼돌리지 말라고 귀띔해준 말씀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그 뒤로 확실히 모든 건설자재 공급을 멈추게 했고요. 하지만...” 이 말을 듣고 나서야 하연은 생각이 났는데 그 뒤로 아무 일 없는 줄 알았는데 지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정말 부실한 건설자재를 공급하고 있었던 겁니까?” “이미 그런 일에서 손을 뗀 지는 꽤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양재성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되 겁니다.”“그 자의 손에 아주 오래 전 제가 부당거래를 했던 증거들이 남아있는데 제가 성동 사업에 협조하지 않을 시 그 증거들을 세상에 전부 까발리겠다고 했습니다.” “전 도저히 그 협박을 이길 수 없어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