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은 하연의 입술에 살짝 입 맞추며 하연이 하려던 말을 모두 막아버렸다.그 순간 세상은 마치 정지된 것만 같았다.하연은 눈을 크게 뜬 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고, 상혁은 그런 하연이 예뻐 죽겠다는 듯 싱긋 웃으며 힘 있는 손으로 하연을 더 꽉 끌어안았다.“하연아, 난 우리가 하루빨리 연인 더 나아가서 가족이 되고 싶어.”하연은 난감해 상혁을 몇 초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살짝 부끄러운 듯 ‘응’이라고 대답했다.하연의 묵인에 상혁의 눈에 기쁨이 지나갔다.“하연아, 정말이지?”하연은 싱긋 웃으며 눈을 들더니 별빛 같은 눈동자로 상혁을 바라봤다.하연의 예쁜 눈동자 속에 오롯이 드러난 자신을 보더니 상혁은 만족스러운 듯 입고리를 말아 올렸다.상혁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사이 주위 사람들 시선이 모두 두 사람에게로 쏠렸고, 하연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상혁 오빠, 주변에 사람 있어요.”상혁은 그제야 하연을 놓아주었다. 하연은 부끄러워 얼른 얼굴을 돌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며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런 느낌이 너무 익숙하고도 낯설어 하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하연아, JJ 그룹 주 회장도 오늘 왔어.”그 한마디는 이내 하연의 집중력을 끌었다.그도 그럴 게, JJ 그룹 주 회장 주현빈은 오늘 두 사람이 여기에 온 목적 중 하나이다.JJ 그룹은 현재 쇼트폼 업계의 최고 기업이다.쇼트폼은 요즘 국내에서 나날이 발전하는 데다 크나큰 전망을 가지고 있어 DS 그룹도 마침 이 업계에 뛰어들 참이었다.때문에 하연은 얼른 물었다.“주 회장님은 어디 있어요?”“같이 만나러 가자.”상혁의 말에 하연은 싱긋 웃으며 상혁의 팔짱을 끼고 파티장 반대편으로 걸어갔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상혁과 하연이 함께 나타나자 주현빈은 먼저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최근 2년 동안 새롭게 떠오른 상업계의 샛별로서 현빈도 당연히 이 두 대단한 인물을 알고 있다.“주 회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상혁이 먼저 고개를
하연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그러면 저야 좋죠! 나중에 시간 될 때 약속 잡아서 제대로 얘기해 볼까요?”하지만 현빈은 오히려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그도 그럴 게, B시에서 손꼽히는 기업인 FL 그룹과 DS 그룹과 손잡는 건 현빈이 줄곧 꿈꿔왔던 일이었으니.게다가 JJ 그룹은 요즘 발전단계에 있긴 하지만 아직도 자금 문제가 존재하기에 FL 그룹과 DS 그룹처럼 막강한 기업과 손잡으면 전도가 밝을 건 분명하다.“최 사장님, 부 대표님,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오늘 어떻겠습니까? 우리 어디 가서 협력에 관해 얘기 나누지 않을래요?”하연과 상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동의했다. 그러자 현빈은 얼른 명을 내렸다.“승범 씨, 얼른 가서 옆에 있는 호텔 스위트 룸 예약해요. 내가 당장 부 대표님과 최 사장님과 함께 가서 미팅할 테니.”“네, 주 회장님.”승범은 다급히 대답했다.“그럼 최 사장님, 부 대표님, 이따가 뵙겠습니다.”현빈은 두 사람과 인사를 하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떠나갔다.“상혁 오빠, 주 회장님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이라는 느낌 안 들어요?”하연이 갑자기 의아한 듯 질문하자 상혁은 바로 그 의문점을 풀어주었다.“JJ 그룹은 요즘 갓 일어선 회사라 아직 기초가 단단하지 못하거든. 주 회장이 오늘 여기 직접 나타난 것도 아마 투자 유치 때문일 거야.”상혁의 짤막한 설명에 하연은 바로 내막을 이해했다.“그렇구나. 그렇다면 쌍방 모두 협력할 의향은 충분한 것 같네요?”“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너 정말 쇼트폼에 뛰어들 거야?”하연은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이 업계는 비전이 아주 좋아요.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상혁 호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그러자 상혁은 얼른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어두운 눈빛으로 거절 버튼을 눌렀다.“하연아,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절대 딴 데로 새지 마, 금방 올게.”“그
소파의 반대편으로 조용히 물러나던 모연은 다급히 이수애를 끌고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최하연은 역시 몸 함부로 굴리는 가벼운 여자였어요. 어떻게 대낮부터 인플루언서와 호텔 방을 드나드는지!”이수애도 곧바로 하연을 깔보는 듯 맞받아쳤다.“최하연이 이러는 거 한두 번이 아니야. 서준은 이런 애가 뭐가 좋다고 그렇게 잊지 못하는지. 오늘 서준한테도 최하연의 진짜 모습을 보여줘야겠어.”이수애는 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이수애가 서준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모연은 얼른 뜯어말렸다.“어머님, 이 일은 조급하게 처리하면 안 돼요. 우리 멀리 봐야죠.”이수애는 이해가 안 되는 듯 물었다.“난 최하연만 생각하면 한 시도 못 참겠어. 당장 서준한테 저년 진짜 모습을 보여야지.”심지어 말하면 말할수록 화가 치밀었다.그 모습을 본 모연은 얼른 이수애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어머님, 우선 진정하세요. 우리 아직 아무 증거도 없잖아요. 서준 씨한테 전화해서 뭐라고 말할 건데요? 최하연이 얼마나 교활한데, 딱 잡아떼면 우리가 오히려 곤란할 거예요.”모연의 말에 이수애는 점차 진정을 되찾았다.“뭐, 정 그렇다면야. 그럼 뭐 좋은 수라도 있나?”모연은 입꼬리를 비틀며 냉소를 지었다.“증거를 모은 다음에 폭로하죠.”이수애도 그 아이디어에 동의하는지 이내 맞장구쳤다.“맞아. 한꺼번에 싸잡아야지.”“최하연, 어쩜 이런 실수를 할까? 어머님, 최하연한테 방키 건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요?”“누구지?”“요즘 가장 핫한 인플루언서예요. 팬도 많아 이 사실이 공개되면 최하연은 아마 여팬들한테 테러당할지도 몰라요. 여자 사생팬들은 선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거든요. 최하연은 이제 한씨 집안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명예가 실추되어도 한씨 집안에 피해가 될 건 없어요.”이수애는 모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 하연한테 많이 당한 탓에 조심하는 건 나쁠 거 없다고 여겼다.“이건 우리가 하면 안 돼. 다른 사람한테 시켜야지...”“혹시 적
상혁은 하연을 보자 얼른 전화 건너편에 말했다.“이 일은 나중에 얘기해. 우선 이만 끊지.”전화를 끊은 상혁은 하연을 향해 걸어왔다.“하연아, 어디 가?”하연은 상혁 앞으로 다가가 호텔 카드키를 흔들어댔다.“주 회장님이 룸 예약했대요. 일 다 마쳤어요? 마쳤으면 같이 가요”“그래.”말을 마친 상혁은 경계하듯 하연의 뒤를 살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하연아, 너 먼저 가서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나 기다려.”“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야, 먼저 가 있어.”하연이 의아한 듯 묻자 상혁은 안심하라는 눈빛을 건넸다. 그때 하연이 상혁의 눈빛을 따라 제 뒤를 확인하며 물었다.“상혁 오빠, 뭘 그렇게 봐요?”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으로 쭉 걸어가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아니야. 내가 잘못 봤나 봐.”하연은 의아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곧이어 두 사람은 맞은편 호텔로 향했다. 두 사람이 멀어지자 구석에 숨어 있던 카메라를 든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호텔 입구.승범은 진작 현빈의 분부대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인기 있는 인플루언서라 하지만 아직은 그저 사장 밑에서 일하는 직원에 불과했으니 모두 사장의 분부에 따라야 했다.하연과 상혁을 보자 승범은 반갑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최 사장님, 부 대표님, 오셨어요? 주 회장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얼른 올라갑시다.”승범은 안으로 들어가자는 제스처를 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 오른 세 사람은 뒤에서 누군가 저들을 찍고 있다는 걸 꿈에도 알지 못했다....호텔 스위트룸.현빈은 비서를 시켜 자료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 이건 우리 JJ 그룹이 최근 진행하는 인기 있는 쇼트폼 프로젝트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세요.”비서가 자료를 건네자 하연은 곧바로 열심히 확인했다.물론 쇼트폼 업계에 대해 아직은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쇼트폼에 열광하는 것만
장장 두 시간 동안의 미팅을 마치고 호텔에서 나올 때 현빈은 아쉬운 듯 말했다.“최 사장님, 부 대표님, 만약 두 분이 저희 회사와 손잡을 의향이 있다면, 저희는 언제든 환영입니다.”“네, 주 회장님,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네, 그럼 다음에 뵙시다.”현빈이 떠나가자 하연은 고래를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빛만 봐도 할 말이 아주 많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기에 상혁이 먼저 물었다.“위 미디어를 하고 싶어?”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물론 나타난 지 얼마 안 되는 사업이지만 비전이 아주 훌륭하다고 봐요. 우리 DS 그룹에서도 한번 뛰어들고 싶어요. 그러자면 우선 연예부를 만들고 실력 있는 인플루언서를 모집하고 팀을 운영하고 또 IP도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하연은 머릿속에 그려지는 대략적인 구상을 차근차근 설명했다.그러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게 제 초기 아이디어인데, 어때요?”“형태만 갖추면 바로 실시해도 좋을 것 같아.”하연은 그 말에 기쁜 듯 환호했다.“그럼 다음 주 월요일 임원 회의에서 말해볼 생각이에요. 절반 이상의 임원만 통과하면 바로 실시할 수 있으니까.”하연은 마치 새로운 방향이라도 찾은 듯 집에 도착하자마자 며칠 동안 야근하면서 계획서를 완성했다.월요일 오전 9시.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하연의 열정은 여전히 활활 타올랐고, 온 정신을 회사에 쏟아부었다.“최 사장님, 임원들 모두 회의실에 도착해 사장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태훈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보고하자 하연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알았어, 지금 바로 가지.”오늘 회의실은 유난히 떠들썩했다.그도 그럴 게, 요즘 도는 소문을 이미 들은 임원진 모두가 회의 시간 전에 도착해 있었으니까.심지어 임원 회의에 거의 참석하지 않는 호현욱마저 도착했으니, 다들 이번 회의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9시가 다 돼가는데 최 사장은 대체 언제 온대?”“그러게 말이야. 최하민 대표가 있을 때도 우리를 이렇게 이른 시간에 부르지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요즘 인터넷이 발전하고 있으니 쇼트폼이야말로 현재 가장 핫한 프로젝트라고 봅니다. 물론 우리 DS 그룹이 쇼트폼에 처음으로 뛰어드는 거지만 이번이 변화를 가져올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하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호현욱은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테이블 위에 내팽개쳤다.“최 사장님, 저는 동의 못 합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임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혹 무슨 문제가 있나요?”하연의 물음에 호현욱은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비틀며 비아냥거렸다.“우리 DS 그룹은 첨단기술 사업을 위주로 해왔어요. 이를테면 나노로봇 기술, 의료기기, 광물 등. 이건 모두 우리가 잘하는 분야라 성적이 좋은 거지. 갑자기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겠다니, 한번 물어보고 싶네요. 성공 확률은 몇 퍼센트나 있습니까?”호현욱의 말에 다른 임원도 맞장구쳤다.“맞아요. 최 사장님, 무턱대고 새로운 분야에 뛰어드는 건 너무 큰 도전입니다. 그러다 실패라도 하면 우리 회사 평판도 떨어질 겁니다.”“사장님, 이 일은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무모하게 행동하지 마시고요.”“위 미디어라면 저도 별로입니다. 오히려 요즘 부동산의 발전 추세가 꽤 좋고, 집값도 계속 오르고 있는데 부동산에 투자하는 게 좋은 선택이라고 봅니다.”“정부가 요즘 신도시 개발을 계획하고 있다던데, 땅만 차지해 건물을 짓는다면 위 미디어인지 뭔지 하는 것보다 훨씬 좋을 겁니다.”“...”임원들이 너도나도 의견을 내놓자 호현욱은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앉아 하연의 반응을 살폈다.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보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최 사장님, 다른 임원분들 의견이 좋은 듯한데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위 미디어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분야잖습니까. 차라리 정 이사님 말씀대로 건물을 짓는 게 더 수익이 높을 겁니다.”“...”사람들은 모두 하연이 이대로 물러날 거라고 확신했다.하지만
눈부신 수트 차림의 하성이 자기 매니저를 데리고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순간 회의실에 있던 임원들은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아니, 최하성이 여긴 어떻게?”“최씨 가문 셋째가 연예인이 잖나. 팬도 엄청 많아 대충 아무 계정이나 확인해 봐도 팔로워나 리트윗이 몇백만씩 되네.”“최하성이 워낙 인기 있고 팬층이 두터운 연예인이긴 하지. 그런데 여기엔 웬일이지?”“...”하성의 등장은 회의실 분위기를 바로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호현욱에게 눈빛으로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봤다.그 순간 호현욱의 낯빛은 잿빛이 되어버렸다.그도 그럴 게, 하연이 이런 카드를 숨기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하성은 성큼성큼 하연에게 걸어가더니 하연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싱긋 웃었다.“오빠...”“응.”하성은 눈썹을 추켜 올리며 가볍게 대답하고는 하연과 나란히 서서 사람들을 바라봤다.“반가워요.”이윽고 가벼운 어투로 인사하자 임원진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최하성 배우님이 여기엔 웬일입니까? 그동안 연예계에 있어 회사 일에는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그 질문에 하성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좋은 질문이네요. 오늘부터 DS 그룹에서 엔터 사업을 한다고 해서 첫 번째 연예인으로 계약하게 됐거든요.”그 말이 떨어진 순간 회의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최하성이 누군가? 월드 스타, 노래와 연기 모두 뛰어난 연예계의 최고 스타, 게다가 두터운 팬덤까지 보유한 인기 절정의 연예인이다.만약 하성이 DS 엔터에 들어온다면 아무리 새로 뛰어든 분야라도 단번에 살아날 수 있다.“그게 정말입니까?”하성은 어깨를 으쓱했다.“물론이죠. 제 매니저먼트 계약은 제 손에 있으니 DS 그룹과 계약하는 것도 제가 결정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선 DS 그룹에 연예부가 있어야 제가 들어올 수 있죠.”그 말에 사람들은 순간 이해했다.하성이 DS 그룹에 들어오는 건 순전히 하연이 하는 위 미디어를 지지해 주기 위해서라는
때문에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태도를 바꾸었다.“호 이사님은 어떠신가요?”하연이 던진 질문에 호현욱은 멋쩍게 웃으며 끝내 입을 열었다.“다들 동의한다는 건 그만큼 좋은 프로젝트라는 걸 설명하겠죠. 저도 의견 없습니다.”하연은 이 결과에 매우 만족하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며 사람들 앞에서 선포했다.“그렇다면 거수로 표결하겠습니다.”그 말이 떨어진 순간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분분히 손을 들었다.심지어 하성마저 옆에서 말을 보탰다.“저도 DS 그룹 지분을 갖고 있으니 주주나 다름없는데, 당연히 표결권이 있겠죠.”말을 마친 하성은 바로 손을 들었다.결국 예상보다 훨씬 많은 동의를 얻은 하연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과반수가 동의했으니 이번 프로젝트는 통과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오늘부로 DS 엔터가 정식으로 성립했음을 알립니다...”일순 회의실에는 열렬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회의가 끝나고 모든 사람이 회의실을 떠나자 하성은 그제야 신이 나서 하연을 바라보며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하연아, 오늘 오빠 어땠어?”“아주 멋졌어요. 오빠가 나서니까 임원들이 찍소리도 못하잖아요, 오빠가 아니었으면 이번 프로젝트가 이렇게 쉽게 진행되지 못했을 거예요.”“그럼 내가 큰 공신이겠네?”하연은 하성의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렸다.“당연하죠. 그런데 정말 DS엔터랑 계약할 거예요?”“내가 농담하는 거로 보여?”하성이 하연의 이마를 콩 치며 말했다.그러자 하연은 얼른 이마를 비벼대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오빠, 아프잖아요. 그런데... 아파도 좋아요.”“못 말려 정말! 앞으로 나한테 잘해. 내가 DS 엔터의 유일한 기둥이잖아.”하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 오빠는 우리 엔터의 첫 번째 연예인인데, 모든 자원 오빠한테 몰빵할게요. 오빠 한 명만 총애할 거예요.”하성은 미소 지으며 억지로 동의한다는 듯 대답했다.“그래, 뭐.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니 내키지는 않지만 해볼게.”“저 때문에 더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