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 잘 나왔네.”상혁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컴퓨터 액정에 뜬 사진을 바라봤다.“이 사진은 입학 첫날 찍은 걸 거예요. 사진 찍는다는 소리에 대충 똥머리 하나 매고 찍은 거예요.”하연은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료를 한 페이지씩 넘겨보니 대학생 때의 일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매번 기말시험에 디자인했던 작품들과 성적도 눈앞에 훤했다.하지만 본인의 작품집을 클릭한 순간, 하연의 미소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상혁은 하연의 변화를 이내 눈치채고는 화면에 뜬 작품을 바라봤다.“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하연은 고개를 돌려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아니에요. 이게 아니에요.”“왜? 뭐가 잘못됐는데?”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상혁 오빠, 이건 내가 디자인한 작품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내 파일에 들어 있지?”마침 그 대화를 들은 Kelly는 다급히 설명했다.“학생 정보에 대한 파일은 사실대로 기록돼 있어서 잘못될 리 없는데? 혹시 잘못 안 거 아니야?”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자기 생각을 고수했다.“아니에요, 교수님.”하연은 손을 들어 화면을 가리켰다.“제가 대학 시절 디자인한 작품에 본명으로 사인한 적 없어요. 모두 영어 이니셜 HY로 했어요. 그런데 이 두 작품을 보면 본명으로 최하연이라고 적혀 있잖아요...”상혁은 얼른 하연의 손이 가리키는 대로 확인했다.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위에는 최하연이라고 본명으로 적혀 있었다.상혁은 얼른 하연과 눈빛을 교환했다. 하연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에, 상혁은 절대 하연이 이런 일에서 실수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하지만 왜 하연의 디자인이 아닌 작품이 하연의 이름으로, 그것도 학교 파일에 있는 건지는 의문이었다.하연은 마우스로 뒤 페이지를 계속 확인했다. 하지만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면서 점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제 졸업 작품도 모두 사라졌어요. 이건 제 작품이 아니에요.”하연은 이
다음 순간 컴퓨터 화면에 모연에 관한 정보가 나타났다.맨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모연이 갓 입학했을 때 찍은 풋풋한 사진이었다. 그 사진만 보면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저 조금 더 성숙해지고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졌을 뿐.게다가 하연보다 한 학년 선배인 것도 맞았다.“임모연의 말이 사실이었다니.”하연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때 상혁도 하연의 옆에 바싹 붙어 화면을 빤히 바라봤다. 하연은 손으로 마우스를 쉴 새 없이 클릭하며 맨 마지막 모연의 작품집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그 작품을 본 순간 하연의 눈에는 놀라움이 드리웠다.“이... 이럴 수가.”작품집에 있는 맨 처음 작품은 바로 하연의 브랜드숍에서 잘 나가는 드레스였다. 물론 상대적으로 덜 성숙해 보이긴 했지만 그 때문에 그 드레스들이 모두 이 기초 상에서 수정하고 다듬은 것처럼 보였다.마치 이게 바로 원고인 것처럼.“이건 말도 안 돼요.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하연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그러면서 믿기지 않는 듯 다시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랬더니 다음 페이지에도 역시 전 페이지와 똑같은 스타일에 상대적으로 좀 더 성숙한 작품이 나타났다. 그것만으로도 디자이너의 실력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었다.“이 원고 네가 그린 거야?”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제 원고는 이렇지 않아요. 이 원고는 제가 그린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가 그린 원고와 거의 80퍼센트 일치한 작품이 임모연의 자료에 나오는 건지 모르겠어요.”하연은 곤란한 상황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그때 마침 밖에서 들어온 Kelly는 어두운 표정의 하연을 보고는 시선을 얼른 컴퓨터 화면으로 돌리더니 물었다.“임모연? 너 임모연을 알아?”하연은 그제야 초점을 찾더니 Kelly의 팔을 잡아당기며 물었다.“혹시 교수님도 임모연을 아세요?”“응, 알지. 임모연은 너보다 한 학년 위야. 그런데 내가 직접 가르친 학생은 아니야. 임모연을 맡은 교수는 윌리엄이라는 교수님이야. 왜 그래? 무슨
실험실 문 앞에 도착하자 Kelly는 2층 맨 오른쪽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아마 저기에 있을 거야. 가자.”하연은 Kelly의 뒤를 바싹 따랐다. 그렇게 도착한 2층 실험실 맨 오른쪽 방은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자, Kelly는 얼른 노크했다.“윌리엄 교수님, 안에 계세요?”하지만 안에서 아무런 응답도 들리지 않았다.이에 Kelly는 얼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험실 복도를 한참 동안 걸어 맨 안쪽에 도착했더니 하연의 눈에 백발이 희끗희끗 나 있는 흰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윌리엄 교수였다.윌리엄이 스포이트에 든 액체를 유리병 안에 떨구자 유리병 안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그 모습에 윌리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유리병을 내려놓고 기록 일지에 데이터를 기록했고, 모든 기록을 마친 뒤 고글을 벗고 실험실에서 나왔다.“윌리엄 교수님, 또 무슨 실험을 하고 있었어요?”“이번에 또 새로운 데이터를 얻었지 뭔가. 월말에 쓸 새로운 논문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어.”윌리엄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대답하더니 하연을 보며 물었다.“이분은?”하연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인사했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최하연이라고 합니다. 디자인학과를 전공하던 학생이에요.”윌리엄은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디자인학과라면 몇 학번이지?”“19학번입니다.”“18학번과 19학번은 내 기억에 가장 남는 애들이었는데. 특히 너보다 한 학년 선배인 Jion이라고 예전에 내 학생이었어. 지금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이고...”윌리엄이 먼저 모연에 대해 말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하연은 순간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혹시 Jion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윌리엄은 장갑을 벗어 던지고 의아한 눈빛으로 하연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러다가 옆에 놓인 컵을 들어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연은 불쌍한 애였어. 디자인 재능도 뛰어나고 진취심도 강한 학생이었는데, 하필이면 재학 기간
윌리엄은 제 핸드폰을 꺼내 자기가 자주 사용하는 클라우드에 로그인하더니 신속히 19년도 파일을 클릭했다.“내가 그때 심사위원이라 대회를 모두 영상으로 기록했으니 직접 확인해 봐.”하연은 핸드폰을 건네받아 얼른 수상 영상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본인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연이 제일 높은 시상대 위에 올라 윌리엄 교수가 직접 주는 트로피를 받고 있었다.그 영상을 보니 하연은 순간 혼란스러웠다.‘너무 어이없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하연은 믿기지 않는 듯 사진까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하지만 참가자 명단에서조차 본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때 하연은 분명 3개 관문을 통화해 6명의 학생과 결승전에 올라 마지막에 우승을 따냈었다.“Kelly 교수님, 이거 진짜 아니에요...”하연은 모든 희망을 Kelly에게 걸면서 Kelly가 자신을 대신해 증명해 주기를 바랐다.하지만 너무나 확실한 증거 앞에서 Kelly도 그저 입을 오므리고 있다가 끝내 하연을 바라봤다.“하연아, 혹시 네가 잘못 기억한 거 아니야? 너는 다른 해에 주최한 대회에 참석했겠지.”“아니에요. 제가 잘못 기억할 리 없어요.”하연은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하연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건 하연이 첫 번째로 탄 상이기에 인생에서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잘못 기억할 리 없었다.윌리엄과 Kelly는 동시에 걱정스러운 눈빛을 교환하더니 Kelly가 이내 앞으로 나서서 하연의 팔을 잡으며 위로했다.“하연아, 너 요즘 집에 무슨 일 있어?”하연은 이 상황을 좀처럼 설명할 수 없어 끝내 침묵을 유지했다.그때 윌리엄이 말을 이었다.“Jion은 내가 만난 학생 중에서 가장 훌륭한 학생이었어. 그 교통사고만 아니었으면 더 완벽했을 수 있는데...”그의 말투에는 온통 안타까움이 들어 있었다.하연은 순간 혼란스러웠다. 이제 버팀목까지 사라져 오히려 본인이 남의 작품을 표절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그때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자
“하하하, 최하연. 정말 주제를 모르는구나?”모연은 그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건너편에서 ‘뚜뚜’하고 들리는 소리에 하연은 핸드폰을 꽉 움켜쥔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러다 잠깐 뒤 어디론가 전화했다.“둘째 오빠, 지금 바빠요?”하경은 본인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농담조로 물었다.“하연아, 네가 웬일로 나한테 다 전화하를 해? 정말 놀랍네.”하연은 그 말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내가 뭐 평소에 전화 안 했나? 그건 그렇고, 오빠...”“말해. 무슨 일인데?”“헤헤. 별일은 아니고. 나 뭐 하나만 도와줘요.”“우선 들어나 보자.”“혹시 컬럼비아 대학 서버에 들어와 학생들 자료 확인해 볼 수 있어요?”하연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건너편에서 기침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그러다 한참 뒤 놀란 듯한 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설마 나더러 해킹하라는 건 아니지?”“음... 사실 누가 학교 서버에 들어와서 학생들 자료 수정한 기록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요.”하연은 모연이 자료를 조작했다고 의심하기에 특별히 하경에게 이 일을 부탁했다.“알아듣기 쉽게 말할게. 사실 학교 서버는 국가 시스템에 속해서 보안관리국에서 책임지고 있어. 일반 해커는 들어갈 수 없어. 들어갔다 해도 아무 흔적도 안 남기고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없어. 아무리 나라도 발각 안 될 거라고 보장 못 해.”하연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오므렸다.‘둘째 오빠도 방법이 없는 건가?’“그런데... 한 사람이라면 가능할 지도.”그때 귓가에 들리는 하경의 말에 하연은 눈을 반짝였다.“그게 누구예요? 얼른 알려줘요.”“그분은 내 우상이야. 해커 X라고 실력이 그야말로 신들렸다고 보면 돼. 그분 상대는 아마 없을걸. 계속 해커 랭킹 1위를 차지하는 분이니까.”하경의 목소리에는 존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한창 흥분한 듯 말하던 하경은 한숨을 푹 쉬었다.“이번 생에 그분과 한 번이라도 겨루어 보면 여한이 없을 텐데...”
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둘째 오빠가 의외로 행동력이 있었네?”하지만 두 사람은 누군가가 하경보다 먼저 행동했다는 걸 알지 못했다.자료 열람실에는 키보드 소리가 들리더니 컴퓨터 액정에 일련의 코드가 나타났다.키보드를 두드리는 상혁의 손은 너무 빨라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약 2분 뒤, 상혁은 성공적으로 학교 서버에 들어갔고, 심지어 서버에 존대하는 버그도 몇 개 고쳤다.5분 뒤, 상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학교 서버에서 나오더니 확인한 모든 정보를 본인의 핸드폰에 전송했다.그러고는 기록조차 지운 채 천천히 열람실을 나왔다....그 시각, 하연은 또 다시 윌리엄의 핸드폰을 들고 대회 영상을 확인했다. 모연과 통화하고 나니 하연은 이 영상이 편집된 거라는 확신이 섰다.하지만 윌리엄 앞에서 직접적으로 까발리지는 않았다.“윌리엄 교수님, 혹시 이 영상 저한테 보내줄 수 있나요?”“클라우드에 백업한 걸 저장하면 될 거야.”윌리엄은 하연의 말에 별생각없이 대답했다.하연은 윌리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그 영상을 본인 핸드폰에 저장했다.그때 마침 상혁이 왔다.“상혁 오빠, 이 영상 편집한 게 맞는지 확인해 줄래요?”상혁은 옆에 있는 교수들이 있는 걸 확인하자 말없이 하연 손에 있는 핸드폰을 윌리엄에게 돌려주었다.“하연아, 할 말 있어.”“뭔데요?”상혁은 부연 설명 없이 하연을 조용한 곳으로 끌어갔다.“따라와.”하연은 의아했지만 상혁의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실험실에서 나오자 진환도 때마침 다가와 손에 있는 서류를 건네며 으쓱해서 말했다.“자, 형이 방금 나한테 보내준 자료들이야. 이미 프린트했어. 빠르지?”“응.”상혁은 가볍게 대답하고 서류를 하연에게 건넸다.“봐 봐.”하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상혁을 흘긋 보더니 건네받은 서류를 확인했다.맨 위에 놓인 건 사진 두 장이었는데, 한 장은 모연이 학생 때 찍은 사진이고, 다른 한 장은 아마 최근 사진인 듯싶었다.하연은 어리둥절했지만 바로 묻지는
하지만 하연은 상혁의 컴퓨터 기술이 이토록 대단하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최고의 해커인 둘째 오빠도 학교 서버를 해킹하는 게 어렵다고 했는데 말이다.‘상혁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쉽게 들어가 이 모든 자료를 빼냈지?’“상혁 오빠, 이건 어떻게 알아냈어요?”그때 옆에 있던 진환이 오히려 난감한 듯 헛기침을 했다. 진환은 상혁을 도와 해명하고 싶었지만 본인의 실수로 상혁의 정체가 탄로 날까 봐 꾹 참았다.그러자 상혁이 낮게 헛기침하며 말머리를 돌렸다.“네 정보도 확인해서 원래대로 회복해 놨어.”하연은 그제야 큰 부담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되면 모연의 모든 계획이 무너지니까.“그런데...”상혁은 잠깐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네 자료에서 표절당한 원고를 찾지 못했어.”이 사실은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그 말에 하연의 표정은 다시 굳어버렸다.“그럴 리가요.”상혁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이러면 가능성은 하나야. 애초에 네 작품을 등록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아무 흔적도 없는 거고.”‘뭐야?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게 모두 의미 없는 건가? 여전히 내 결백을 증명할 수 없나?’‘이래서 임모연이 그렇게 거리낌 없이 행동했던 거였어?’하연은 깊은 생각에 빠져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서류를 움켜쥐었다.그러다가 다시 방금 봤던 두 장의 원고에 시선을 고정했다.“상혁 오빠, 그럼 이 두 원고는 어떻게 된 거예요?”상혁은 하연이 중점을 캐치했다는 것이 기뻤다. 이게 바로 상혁이 서버를 해킹한 뒤 발견한 가장 중요한 단서니까.“첫 번째 원고는 임모연이 5년 전에 그린 건데 의도적으로 삭제되어 내가 방금 복구했어. 다른 한 장은 오늘 봤던 원고고...”상혁의 설명을 들은 하연은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하나하나 조합하더니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봤다.“이 두 원고는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요. 한 사람이 그린 게 아니에요.”“응.”상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이윽고 천천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이 두 장의 사진을 봐.
컬럼비아 대학에서 모연의 집까지 가는 데는 차로 2시간가량 걸렸는데, 도로가 조금 덜컹거렸다.가는 길에 진환은 모연의 가정 상황을 대충 설명했다.그걸 요약하자면 모연은 가정 형편이 넉넉한 집의 외동딸이라는 거다. 이건 그야말로 중요한 정보였다.한참 뒤, 도착해 보니 임씨 저택은 유럽풍이 물씬 느껴지는 별장이었다.별장 인테리어는 빈티지했고, 별장 앞 정원의 화초는 섬세하게 가꿔져 있었다.“형, 여기야.”진환은 말하면서 먼저 차에서 내렸다.“가자, 들어가 보자.”말하면서 제 손을 잡는 상혁의 행동 덕에 하연은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이윽고 짤막하게 대답하며 상혁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문 앞에 도착한 세 사람은 열심히 별장을 관찰했다. 그러다 한참 뒤, 진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형, 원래 대로라면 저택이 오랫동안 비어 있어야 하는데 잘 가꿔진 걸 보니 그렇지 않은 모양이야.”진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앞으로 가 초인종을 눌렀다.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약 5, 60대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천천히 나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임씨 저택 가정부 최향숙이다. 최향숙은 세 사람을 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누구 찾으러 오셨나요?”하연은 얼른 앞으로 나서서 웃는 얼굴로 물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여기 임모연의 저택 맞나요?”최향숙은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누구시죠?”하연이 대답하려 할 대, 옆에 있던 상혁이 끼어들었다.“저희는 임모연의 친구인데 뭐 좀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하연이 고개를 돌려 상혁을 보자 상혁은 이내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그때 최향숙이 약간 의심스러웠는지 다시 물었다.“아가씨 친구분이라고요?”“네.”최향숙은 여전히 의아했는지 뭐라 말하려고 입을 뻐끔거렸지만, 진환이 제 핸드폰을 쑥 내밀며 끼어들었다.“자, 봐 봐요. 임모연 시가 보낸 문자예요. 우리한테 디자인 원고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거든요.”최향숙은 핸드폰 액정에 든 모연의 카톡 계정을 확인하더니 그제야 환한 미소를
하연이 눈을 떴을 때, 도시는 이미 밤의 장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몸이 묵직하게 아픈 것을 느꼈다.오랜만에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던 상혁은 특히나 격렬했다. 소파에서 시작해 주방, 다시 안방, 마지막으로 욕실까지, 온 집안의 모든 공간을 사용했다. 하연의 온몸은 마치 압사당한 듯 피곤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방 안에는 은은한 아로마 향이 퍼져 있었고, 어둑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이미 사랑의 흔적이 사라졌고, 상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하연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천장이 아닌 신들의 조각상이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신들은 어두운 밤 속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하연의 마음은 쓸쓸했다. 어젯밤, 둘이 동시에 절정을 맞았을 때, 상혁이 그녀의 손을 잡고 신들을 가리켰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넘어, 정신적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극도의 미친 감정이었다.하연은 다시 샤워할 필요는 없었다. 상혁이 욕실에서 이미 그녀를 씻겨주었기 때문이다.하연은 침대에서 내려왔으나,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겨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고, 그곳에서 외부로 통하는 또 다른 문을 발견했다.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버지를 조사해보라고 했잖아. 했어?” 조진숙의 목소리였다.하연은 걸음을 멈췄다.조진숙이 갑자기 찾아왔고, 상혁은 서둘러 셔츠를 하나 걸치고 나갔다. 그와 하연이 얽히며 셔츠 목 부분이 구겨져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사했어요. 고나희의 사고는 단순 사고였고, 아버지와는 관련이 없어요.”“고경수가 비리로 돈을 챙긴 걸 얼마나 알아냈어? 난 그 명목상의 숫자만 믿을 수는 없어. 배를 채운 흔적이 있는지 다 밝혀냈어?” “DL그룹은 아버지 거예요. 아버지가 그런 실수를 하실 리 없죠.” 조진숙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많은 시련을 겪어온 여성이기에,
“왔어요?” 상혁은 놀라움이 가득한 여자 목소라가 들렸다. 상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방에서 서둘러 나오는 하연이 국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연이는 웃으며 물었다. “왜요?”국이 너무 뜨거웠던지, 그녀는 재빨리 그릇을 내려놓고 귀를 만지며 식히고 있었다. 상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목소리까지 차가웠다. “정말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의아해하며 답했다. “당신이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당신이 너무 안 와서, 심심해서 뭐 만들어 먹을 게 없나 하고 요리 만드는 법을 찾아보다가 뭘 좀 만들어 먹었어요. 다행히 냉장고도 가득 차 있었고 장비도 다 갖추어져 있어서 문제없었어요.” 그녀가 말할 때, 분명히 기쁜 마음과 행복한 표정이었다. 하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상혁은 두세 걸음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는 손을 잡고 그대로 바로 하연이를 품 안에 가둬버렸다. 상혁의 힘은 상당히 강했고, 하연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음... 왜 그래요?” 하연은 상혁의 품에서 안정을 느꼈지만, 그의 강한 포옹에 약간 당황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평온한 향기가 상혁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상혁은 눈을 감고, 목소리가 거칠고 낮았다. “난 네가 간 줄 알았어.” 하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의 옷깃을 살며시 잡았다. “기다린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니 안 갔죠.” 그녀는 상혁의 감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 상혁은 본가에서 싸움 끝에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왔다. 부남준은 송혜선을 보호하며 소리쳤다.“형, 이 아이도 한 생명이에요! 아버지의 혈육이잖아요!”상혁은 바로 남준의 옷깃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 집사가 나서서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남준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상혁의 목에 난 상처를 알아보고 하연은 황급히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죠? 교통사고 처리하러 간
하연은 상혁의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새벽녘에 깨어나니 집안은 고요했고 상혁이 돌아온 흔적은 없었다. 그녀는 뒤척이며 잠을 청할 수 없어 핸드폰을 열었고 보니, 마침 서여은이 사진을 올려놓았다. 외부 취재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에는 ‘큰 뉴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두 시간 뒤, 여은이 다시 글을 남겼다. [뉴스가 없어졌어.]하연은 궁금해졌다. [어떤 뉴스?][DL그룹과 관련된 일이야. 전에 조사받았던 고경수 기억나지? 그 사람 딸이 죽었대. 원래 뉴스에 나올 예정이었는데, 누군가 큰돈을 써서 기사를 막아버린 모양이야.]하연은 짐작할 수 있었다. DL그룹과 관련된 일이라면 상혁이 처리했을 가능성이 컸다. 여은이 사건 현장의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사진 속 여성은 운전석에 앉아있었고, 절반가량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표정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처참했다. 하연은 사진을 확대했다. [이 여자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여은이 바로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나희야, 고경수의 딸이잖아. 애지중지하게 키워졌는데 세상 물정은 잘 모르는 아이였지. 그런데 네가 정말 고나희를 본 적 있어?]“한 번 스쳐 지나가며 본 적 있어.” 하연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고, 드디어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정다영을 만나러 호텔에 갔을 때, 고나희와 스쳐 지나갔었다. 그때 고나희가 하연과 부딪혔고, 부남준이 다정하게 하연을 붙잡아주며 고나희에게 아주 화를 내면서 잘 보고 다니라고 말했다.하연은 그때 남준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반박하려다, 남준의 시선이 고나희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나희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고, 이후 하연과 남준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저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하연은 고나희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녀의 사망 소식으로.[참, 고나희의 뱃속에 아이도 있었다고 하더라.]하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몇 개월이었는데?”[5,6개월쯤 되었을 거야.]하지만
“형님 얼굴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요.” 상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만, 아침부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해. 어서 앉아라.” 부동건이 꾸짖었다. “어젯밤에 술 마셨어요?” 남준은 대수롭지 않게 앉으며 말했다. “접대하는 자리여서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혁이 처럼 남준이 너도 당연히 그런 자리는 해야 해.” 송혜선은 웃으며 중재했고, 말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었다. 상혁은 집사가 가져온 우유 외에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 반면 부남준은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갔다. “형, 들었어요. 고경수의 딸이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소식 한번 빠르군.” “검사 보고서도 확인했어요. 그 여자아이,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아버지가 누군지는 밝혀졌나요?” 이 질문은 부동건의 주의를 끌었다. “아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상혁아, 왜 나한테는 이런 얘기는 하지 않은 거냐?” “떳떳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아서 말씀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잘못된 남자를 믿는 일은 흔합니다.” 상혁은 남준을 힐끗 보고 말했다. “본인이 굳이 알리지 않았다는 건, 아버지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고경수의 집안은 이미 파란 속에 휩싸여 있으니, 괜한 일을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지나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준은 아침을 먹으며 웃었다. “고경수가 DL그룹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을 누군가 알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서 자기 딸을 이용해 DL그룹 고위 간부에게 연결하게 해줘서 둘 사이에 아이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냥 떠본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부동건은 남준의 말의 조금씩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계속해 봐라.” “제 말은, 고경수가 자기 딸을 이용해 누구에게든 신세를 졌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상혁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하얀 손가락 관절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무심한 어조로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
알고 보니 하연이가 졸업하던 그 해부터 상혁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늘까지 ‘여주인’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혁은 하연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마셔, 그리고 자. 진정 효과가 있는 와인이야.” 오늘 상형이가 고른 와인은 안정을 돕는 효능이 있는 와인이었다. 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내 수면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네요.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주슬기는 당신을 위해 꿀물까지 챙겨주더군요.” 상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안 마셨잖아.” 이 대답에 만족한 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위 안 좋은 거 알면서도 그렇게 술을 마셨어요? 나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죠?” “맞아.” 상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널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넌 신경도 안 쓰잖아.” “누가 신경 안 쓴다고 그래? 나 이렇게 와 있잖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상혁은 하연을 품에 안아버렸다. “손이현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걸 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한명준과 함께 떠날까 봐 두려웠어.”그 짧은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하연은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나를 믿지 못했어요?”“아니, 나 자신을 믿지 못한 거야.”하연은 잠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내가 봐도 상혁 오빠는 거의 완벽한 사람인데,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했다니...’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네 앞에 서면, 난 자신감이 없어.”그 말을 듣고 하연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하지만 요즘 난 다시 우리 하연이 앞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어.”하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상혁에게 먼저 다가갔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으며, 상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여주었으니까.“하지만 그럴수록 더 두려워졌어
상혁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하연의 눈물 어린 고백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하연의 모든 억울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나 한명준이나 다 똑같아요!!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속였어요!!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내가 다 알고 있었어요.” 하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상혁의 몸에서 진한 술향이 풍겼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나를 떠나는 거죠?” 하연은 울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최근의 갈등은 하연의 모든 안정감을 무너뜨렸다. 한때 하연은 상혁이 영원히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확신이 무너졌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하연도 상혁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을 거라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른 남자에게도 마음 한구석에 남겨진 미련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상혁은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울지 마.” 하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자의 눈물이었는데, 이제는 내 눈물조차도 통하지 않는 건가...?’ “오늘 저녁은 우연이었어. 주슬기가 나와 할 일이 있어서 만난 거지, 약속한 게 아니었어.” 상혁은 먼저 해명했다. 하연의 마음은 다시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주슬기과 당신은...” “그럼 너랑 한명준은 또 무슨 사이인데?” 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하연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양 국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서 간 것뿐이에요. 데이트는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하연은 이현에게 말했다. 그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연아, 네가 춤추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 그해에 너 혼자 춤출 때, 나는 현장에 있었어. 그때 너를 알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쉈어.” 하연은 그가 말하는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학교 축제 때, 하연은 독무를 했고, 무대 위에서 춤을 췄던 그 장면이었다. 이때, 하연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연은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해요.” 이현의 손이 하연의 손가락을 잡았다. “우리 같이 가자.” 하연은 머리가 더욱더 아파지며 갑자기 테이블 위에 있던 꿀물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요.” 더 이상 얽히지 않기 위해, 양국성은 안도한 듯 하연과 함께 이현을 부축하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안에서 유리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하고 잔이 깨지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양국성은 하연과 이현이 같은 차를 타지 않았고, 하연은 이현을 부축해 차에 태운 후, 몸을 숙여 그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며 말했다.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요.” “하연 씨.” 이현은 하연의 손이 다시 잡혔다. 하연은 눈을 들어 보았는데, 이현의 눈은 맑았다. “당신이 취하지 않았군요.” “마지막에 부상혁이 저에게 질문을 하나 했어요.”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응시했다. “부상혁이 저에게 물어본 것, 바로 예전에 제가 하연 씨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겠냐고...” 하연의 손이 순간 떨렸다. 자기 손을 당겨 빼내고 돌아서려 했지만, 다시 이현의 손에 잡혔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제 능력이 있어요!! 예전처럼 우물쭈물하는 한명준이 아니에요!!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이현을 바라보는 하연의 마음도 무척 복잡했다. “부상혁 씨는 뭐라고 했어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