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lly의 눈에 상혁은 그야말로 외모가 준수하고 말투에 예의가 묻어 있는 데다 교양까지 겸비한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다.“하연아, 너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결혼 생활 잘하고 있는 모야이네.”“교수님 사실...”“사실 저희가 이번이 학교에 온 건 하연이 재학시절 디자인했던 작품을 찾기 위해서예요. 학교에 서류가 다 있는 거 맞죠?”상혁은 하연의 말을 자르며 여기로 온 목적을 말했다.그 말에 Kelly는 얼른 대답했다.“모든 학생이 재학시절 디자인했던 작품은 모두 전자파일로 보관해 둬요. 자료 열람실에 가면 찾을 수 있어요. 내가 안내할게요.”“감사합니다.”상혁이 예의 있게 대답했다.하지만 Kelly는 아쉽다는 듯 하연을 보며 말을 이었다.“사실 하연 너는 내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이기도 하고 몇 년 동안 가르치면서 만난 학생 중 가장 재능 있는 학생이었어. 내가 대학원에 추천서도 써주려 했는데 상혁 군과 결혼하겠다고 그 좋은 기회를 놓쳐 내가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Kelly 낮은 한숨을 쉬며 하연을 보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두 사람이 결혼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알콩달콩 지내는 걸 보니, 한 번뿐인 인생 남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만 걷는 것보다 자기가 원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도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드네.”하연은 그 말에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몇 년 전에 하연도 자기 인생은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린 시절의 하연은 안개에 눈이 가려져 정확한 길을 보지 못했다.“여기가 자료 열람실이야.”하연은 시선을 거두고 눈앞에 있는 열람실을 바라봤다.그때 Kelly가 얼른 말을 이었다.“나한테 마침 열쇠가 있으니 열어 줄게.”Kelly는 가방에 있는 열쇠를 꺼내 자료 열람실 문을 열었다.“따라와, 들어가서 확인해 봐.”세 사람은 함께 자료 열람실로 들어갔다. 열람실 내부는 매우 큰 데다 아주 많은 책과 캐비닛이 진열되어 있었다.그때 Kelly가 맨
“이 사진 잘 나왔네.”상혁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컴퓨터 액정에 뜬 사진을 바라봤다.“이 사진은 입학 첫날 찍은 걸 거예요. 사진 찍는다는 소리에 대충 똥머리 하나 매고 찍은 거예요.”하연은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료를 한 페이지씩 넘겨보니 대학생 때의 일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매번 기말시험에 디자인했던 작품들과 성적도 눈앞에 훤했다.하지만 본인의 작품집을 클릭한 순간, 하연의 미소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상혁은 하연의 변화를 이내 눈치채고는 화면에 뜬 작품을 바라봤다.“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하연은 고개를 돌려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아니에요. 이게 아니에요.”“왜? 뭐가 잘못됐는데?”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상혁 오빠, 이건 내가 디자인한 작품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내 파일에 들어 있지?”마침 그 대화를 들은 Kelly는 다급히 설명했다.“학생 정보에 대한 파일은 사실대로 기록돼 있어서 잘못될 리 없는데? 혹시 잘못 안 거 아니야?”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자기 생각을 고수했다.“아니에요, 교수님.”하연은 손을 들어 화면을 가리켰다.“제가 대학 시절 디자인한 작품에 본명으로 사인한 적 없어요. 모두 영어 이니셜 HY로 했어요. 그런데 이 두 작품을 보면 본명으로 최하연이라고 적혀 있잖아요...”상혁은 얼른 하연의 손이 가리키는 대로 확인했다.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위에는 최하연이라고 본명으로 적혀 있었다.상혁은 얼른 하연과 눈빛을 교환했다. 하연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에, 상혁은 절대 하연이 이런 일에서 실수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하지만 왜 하연의 디자인이 아닌 작품이 하연의 이름으로, 그것도 학교 파일에 있는 건지는 의문이었다.하연은 마우스로 뒤 페이지를 계속 확인했다. 하지만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면서 점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제 졸업 작품도 모두 사라졌어요. 이건 제 작품이 아니에요.”하연은 이
다음 순간 컴퓨터 화면에 모연에 관한 정보가 나타났다.맨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모연이 갓 입학했을 때 찍은 풋풋한 사진이었다. 그 사진만 보면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저 조금 더 성숙해지고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졌을 뿐.게다가 하연보다 한 학년 선배인 것도 맞았다.“임모연의 말이 사실이었다니.”하연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때 상혁도 하연의 옆에 바싹 붙어 화면을 빤히 바라봤다. 하연은 손으로 마우스를 쉴 새 없이 클릭하며 맨 마지막 모연의 작품집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그 작품을 본 순간 하연의 눈에는 놀라움이 드리웠다.“이... 이럴 수가.”작품집에 있는 맨 처음 작품은 바로 하연의 브랜드숍에서 잘 나가는 드레스였다. 물론 상대적으로 덜 성숙해 보이긴 했지만 그 때문에 그 드레스들이 모두 이 기초 상에서 수정하고 다듬은 것처럼 보였다.마치 이게 바로 원고인 것처럼.“이건 말도 안 돼요.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하연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그러면서 믿기지 않는 듯 다시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랬더니 다음 페이지에도 역시 전 페이지와 똑같은 스타일에 상대적으로 좀 더 성숙한 작품이 나타났다. 그것만으로도 디자이너의 실력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었다.“이 원고 네가 그린 거야?”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제 원고는 이렇지 않아요. 이 원고는 제가 그린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가 그린 원고와 거의 80퍼센트 일치한 작품이 임모연의 자료에 나오는 건지 모르겠어요.”하연은 곤란한 상황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그때 마침 밖에서 들어온 Kelly는 어두운 표정의 하연을 보고는 시선을 얼른 컴퓨터 화면으로 돌리더니 물었다.“임모연? 너 임모연을 알아?”하연은 그제야 초점을 찾더니 Kelly의 팔을 잡아당기며 물었다.“혹시 교수님도 임모연을 아세요?”“응, 알지. 임모연은 너보다 한 학년 위야. 그런데 내가 직접 가르친 학생은 아니야. 임모연을 맡은 교수는 윌리엄이라는 교수님이야. 왜 그래? 무슨
실험실 문 앞에 도착하자 Kelly는 2층 맨 오른쪽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아마 저기에 있을 거야. 가자.”하연은 Kelly의 뒤를 바싹 따랐다. 그렇게 도착한 2층 실험실 맨 오른쪽 방은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자, Kelly는 얼른 노크했다.“윌리엄 교수님, 안에 계세요?”하지만 안에서 아무런 응답도 들리지 않았다.이에 Kelly는 얼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험실 복도를 한참 동안 걸어 맨 안쪽에 도착했더니 하연의 눈에 백발이 희끗희끗 나 있는 흰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윌리엄 교수였다.윌리엄이 스포이트에 든 액체를 유리병 안에 떨구자 유리병 안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그 모습에 윌리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유리병을 내려놓고 기록 일지에 데이터를 기록했고, 모든 기록을 마친 뒤 고글을 벗고 실험실에서 나왔다.“윌리엄 교수님, 또 무슨 실험을 하고 있었어요?”“이번에 또 새로운 데이터를 얻었지 뭔가. 월말에 쓸 새로운 논문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어.”윌리엄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대답하더니 하연을 보며 물었다.“이분은?”하연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인사했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최하연이라고 합니다. 디자인학과를 전공하던 학생이에요.”윌리엄은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디자인학과라면 몇 학번이지?”“19학번입니다.”“18학번과 19학번은 내 기억에 가장 남는 애들이었는데. 특히 너보다 한 학년 선배인 Jion이라고 예전에 내 학생이었어. 지금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이고...”윌리엄이 먼저 모연에 대해 말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하연은 순간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혹시 Jion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윌리엄은 장갑을 벗어 던지고 의아한 눈빛으로 하연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러다가 옆에 놓인 컵을 들어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연은 불쌍한 애였어. 디자인 재능도 뛰어나고 진취심도 강한 학생이었는데, 하필이면 재학 기간
윌리엄은 제 핸드폰을 꺼내 자기가 자주 사용하는 클라우드에 로그인하더니 신속히 19년도 파일을 클릭했다.“내가 그때 심사위원이라 대회를 모두 영상으로 기록했으니 직접 확인해 봐.”하연은 핸드폰을 건네받아 얼른 수상 영상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본인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연이 제일 높은 시상대 위에 올라 윌리엄 교수가 직접 주는 트로피를 받고 있었다.그 영상을 보니 하연은 순간 혼란스러웠다.‘너무 어이없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하연은 믿기지 않는 듯 사진까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하지만 참가자 명단에서조차 본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때 하연은 분명 3개 관문을 통화해 6명의 학생과 결승전에 올라 마지막에 우승을 따냈었다.“Kelly 교수님, 이거 진짜 아니에요...”하연은 모든 희망을 Kelly에게 걸면서 Kelly가 자신을 대신해 증명해 주기를 바랐다.하지만 너무나 확실한 증거 앞에서 Kelly도 그저 입을 오므리고 있다가 끝내 하연을 바라봤다.“하연아, 혹시 네가 잘못 기억한 거 아니야? 너는 다른 해에 주최한 대회에 참석했겠지.”“아니에요. 제가 잘못 기억할 리 없어요.”하연은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하연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건 하연이 첫 번째로 탄 상이기에 인생에서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잘못 기억할 리 없었다.윌리엄과 Kelly는 동시에 걱정스러운 눈빛을 교환하더니 Kelly가 이내 앞으로 나서서 하연의 팔을 잡으며 위로했다.“하연아, 너 요즘 집에 무슨 일 있어?”하연은 이 상황을 좀처럼 설명할 수 없어 끝내 침묵을 유지했다.그때 윌리엄이 말을 이었다.“Jion은 내가 만난 학생 중에서 가장 훌륭한 학생이었어. 그 교통사고만 아니었으면 더 완벽했을 수 있는데...”그의 말투에는 온통 안타까움이 들어 있었다.하연은 순간 혼란스러웠다. 이제 버팀목까지 사라져 오히려 본인이 남의 작품을 표절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그때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자
“하하하, 최하연. 정말 주제를 모르는구나?”모연은 그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건너편에서 ‘뚜뚜’하고 들리는 소리에 하연은 핸드폰을 꽉 움켜쥔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러다 잠깐 뒤 어디론가 전화했다.“둘째 오빠, 지금 바빠요?”하경은 본인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농담조로 물었다.“하연아, 네가 웬일로 나한테 다 전화하를 해? 정말 놀랍네.”하연은 그 말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내가 뭐 평소에 전화 안 했나? 그건 그렇고, 오빠...”“말해. 무슨 일인데?”“헤헤. 별일은 아니고. 나 뭐 하나만 도와줘요.”“우선 들어나 보자.”“혹시 컬럼비아 대학 서버에 들어와 학생들 자료 확인해 볼 수 있어요?”하연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건너편에서 기침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그러다 한참 뒤 놀란 듯한 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설마 나더러 해킹하라는 건 아니지?”“음... 사실 누가 학교 서버에 들어와서 학생들 자료 수정한 기록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요.”하연은 모연이 자료를 조작했다고 의심하기에 특별히 하경에게 이 일을 부탁했다.“알아듣기 쉽게 말할게. 사실 학교 서버는 국가 시스템에 속해서 보안관리국에서 책임지고 있어. 일반 해커는 들어갈 수 없어. 들어갔다 해도 아무 흔적도 안 남기고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없어. 아무리 나라도 발각 안 될 거라고 보장 못 해.”하연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오므렸다.‘둘째 오빠도 방법이 없는 건가?’“그런데... 한 사람이라면 가능할 지도.”그때 귓가에 들리는 하경의 말에 하연은 눈을 반짝였다.“그게 누구예요? 얼른 알려줘요.”“그분은 내 우상이야. 해커 X라고 실력이 그야말로 신들렸다고 보면 돼. 그분 상대는 아마 없을걸. 계속 해커 랭킹 1위를 차지하는 분이니까.”하경의 목소리에는 존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한창 흥분한 듯 말하던 하경은 한숨을 푹 쉬었다.“이번 생에 그분과 한 번이라도 겨루어 보면 여한이 없을 텐데...”
하연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둘째 오빠가 의외로 행동력이 있었네?”하지만 두 사람은 누군가가 하경보다 먼저 행동했다는 걸 알지 못했다.자료 열람실에는 키보드 소리가 들리더니 컴퓨터 액정에 일련의 코드가 나타났다.키보드를 두드리는 상혁의 손은 너무 빨라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약 2분 뒤, 상혁은 성공적으로 학교 서버에 들어갔고, 심지어 서버에 존대하는 버그도 몇 개 고쳤다.5분 뒤, 상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학교 서버에서 나오더니 확인한 모든 정보를 본인의 핸드폰에 전송했다.그러고는 기록조차 지운 채 천천히 열람실을 나왔다....그 시각, 하연은 또 다시 윌리엄의 핸드폰을 들고 대회 영상을 확인했다. 모연과 통화하고 나니 하연은 이 영상이 편집된 거라는 확신이 섰다.하지만 윌리엄 앞에서 직접적으로 까발리지는 않았다.“윌리엄 교수님, 혹시 이 영상 저한테 보내줄 수 있나요?”“클라우드에 백업한 걸 저장하면 될 거야.”윌리엄은 하연의 말에 별생각없이 대답했다.하연은 윌리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그 영상을 본인 핸드폰에 저장했다.그때 마침 상혁이 왔다.“상혁 오빠, 이 영상 편집한 게 맞는지 확인해 줄래요?”상혁은 옆에 있는 교수들이 있는 걸 확인하자 말없이 하연 손에 있는 핸드폰을 윌리엄에게 돌려주었다.“하연아, 할 말 있어.”“뭔데요?”상혁은 부연 설명 없이 하연을 조용한 곳으로 끌어갔다.“따라와.”하연은 의아했지만 상혁의 뒤를 따랐다.두 사람이 실험실에서 나오자 진환도 때마침 다가와 손에 있는 서류를 건네며 으쓱해서 말했다.“자, 형이 방금 나한테 보내준 자료들이야. 이미 프린트했어. 빠르지?”“응.”상혁은 가볍게 대답하고 서류를 하연에게 건넸다.“봐 봐.”하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상혁을 흘긋 보더니 건네받은 서류를 확인했다.맨 위에 놓인 건 사진 두 장이었는데, 한 장은 모연이 학생 때 찍은 사진이고, 다른 한 장은 아마 최근 사진인 듯싶었다.하연은 어리둥절했지만 바로 묻지는
하지만 하연은 상혁의 컴퓨터 기술이 이토록 대단하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최고의 해커인 둘째 오빠도 학교 서버를 해킹하는 게 어렵다고 했는데 말이다.‘상혁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쉽게 들어가 이 모든 자료를 빼냈지?’“상혁 오빠, 이건 어떻게 알아냈어요?”그때 옆에 있던 진환이 오히려 난감한 듯 헛기침을 했다. 진환은 상혁을 도와 해명하고 싶었지만 본인의 실수로 상혁의 정체가 탄로 날까 봐 꾹 참았다.그러자 상혁이 낮게 헛기침하며 말머리를 돌렸다.“네 정보도 확인해서 원래대로 회복해 놨어.”하연은 그제야 큰 부담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되면 모연의 모든 계획이 무너지니까.“그런데...”상혁은 잠깐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네 자료에서 표절당한 원고를 찾지 못했어.”이 사실은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그 말에 하연의 표정은 다시 굳어버렸다.“그럴 리가요.”상혁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이러면 가능성은 하나야. 애초에 네 작품을 등록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아무 흔적도 없는 거고.”‘뭐야?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게 모두 의미 없는 건가? 여전히 내 결백을 증명할 수 없나?’‘이래서 임모연이 그렇게 거리낌 없이 행동했던 거였어?’하연은 깊은 생각에 빠져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서류를 움켜쥐었다.그러다가 다시 방금 봤던 두 장의 원고에 시선을 고정했다.“상혁 오빠, 그럼 이 두 원고는 어떻게 된 거예요?”상혁은 하연이 중점을 캐치했다는 것이 기뻤다. 이게 바로 상혁이 서버를 해킹한 뒤 발견한 가장 중요한 단서니까.“첫 번째 원고는 임모연이 5년 전에 그린 건데 의도적으로 삭제되어 내가 방금 복구했어. 다른 한 장은 오늘 봤던 원고고...”상혁의 설명을 들은 하연은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하나하나 조합하더니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봤다.“이 두 원고는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요. 한 사람이 그린 게 아니에요.”“응.”상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이윽고 천천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이 두 장의 사진을 봐.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