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꼭꼭 숨기고 다니래. 우리 앞에서 티도 안 냈잖아. CS 그룹 공주인 걸 진작 알았으면 목숨이 10개라도 그렇게 말 못 했다고.”“그렇게 말하면 난 어떤데! 난 걔더러 세컨드라고 했다고. CS 그룹 막내딸이 뭐가 아쉬워서 세컨드 노릇하겠냐고. 진짜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CS 일가가 어떤 곳인데, 발만 굴러도 F국이 흔들릴 정도라고. 그런 사람은 우리랑 하늘과 땅 차이라고.”“...”친구들의 말에 연희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게, 하연한테 미움 산 것 때문에 아버지 송강석이 신용 카드를 모두 끊는 바람에 지금 몇만 원 정도 꺼내기도 힘든 상황이니까.“됐어. 걔 얘기는 그만해.”연희가 화난 듯 말하자 친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모두 입을 다물었다.“연희야, 네가 지난번에 말했던 그 한정판 가방 보러 갈래?”“그래, 연희야. 샤넬이 이번에 새로운 향수도 출시했다던데. 나 너무 갖고 싶어.”“...”“그래, 가 보자.”이 상황에서 돈 없다고 말하는 건 너무 쪽팔린 상황이었기에 연희는 뻔뻔하게 대답했다.하지만 다들 무리 지어 엘리베이터에 도착했을 때 경호원이 막아 나섰다.“죄송하지만 오늘 쇼핑몰 영업 안 하니 2층은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그 말에 다들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왜 갑자기 영업 안 해요?”“그러니까. 오랜만에 구경 왔더니.”“...”생각지 못한 상황에 오히려 한시름 놓은 연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친구들을 위로했다.“괜찮아, 쇼핑하지 못하는 대신 내가 커피 살게.”그 말에 연희의 일행은 마지못해 동의했다.“그래. 저기 옆 데이 글로우 카페가 요즘 신메뉴 출시했다던데 괜찮대.”이윽고 다들 쇼핑몰을 나서려고 할 때, 옆에 있던 조명석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하연을 알아봤다.“저기 봐. 저 사람 최하연 아니야?”일순 모두의 시선이 하연에게로 쏠렸다. 그랬더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하연 옆에서 쇼핑몰 매니저가 열성을 다해 복무하는 게 아니겠는가?“어쩐지 영업
“그런데 너희들이 쟤 꼬붕 노릇 자처해도 쟤가 너희 거들떠도 볼 것 같아?”말을 마친 연희가 화가 난 듯 떠나버리는 바람에 남은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그때 명석이 먼저 연희 뒤를 쫓았다.“연희야, 기다려...”하지만 다음 순간, 누군가 명석을 잡았다.“왜 따라가? 쟤가 아직도 네가 아는 그 송씨 집안 아가씨인 줄 알아?”“그게 무슨 뜻이야?”“너 설마 몰라? 송연희 쟤, 하연한테 밉보여서 CS 그룹에서 공식 발표 냈잖아. 일주일 내로 미래 테크놀로지 인수할 거라고.”“맞아. 미래 테크놀로지 요즘 위기야. 쟤네 집안에서 쟤 카드도 다 끊었다던데, 너도 앞으로 쟤랑 연락 끊어.”그 말에 명석은 아니나 다를까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최하연 미움 사는 일은 안 하는 건데. 최씨 가문에 줄을 댈 수 있다면 앞으로 승승장구할 길만 남았겠는데.”“하, 그러게나 말이다. 여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 없어.”자기 꼬붕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 리 없는 연희는 본인이 주차장까지 왔는데 한 명도 따라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나 발을 동동 굴렀다.그때 마침 하연은 멀리 있는 롤스로이스 팬텀 옆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고, 그걸 본 연희는 질투심이 타올라 치를 떨었다.“최하연,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내가 절대 너 가만 안 둬.”말을 마친 연희는 얼른 차에 올라 엑셀을 밟으며 하연에게 돌진했다.“조심해요.”그때,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하연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누군가에 의해 세게 밀쳐졌다. 하늘이 핑글 돌면서 따뜻한 품에 안긴 순간, 옅은 우드 향이 하연의 코끝을 간지럽혔다.하연은 눈을 들었지만 상대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바람에 눈 외에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누구세요?”하연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둔탁한 굉음이 들리더니 방금 하연 쪽으로 돌진하던 차가 기둥에 부딪혔다.그 관성에 의해 몸이 앞으로 쏠린 연희는 이내 백미러로 하연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하지만 생각과
아까의 빨간 차가 어느새 경호원들에게 잡힌 모양이었다.차창을 내리자 경호원 한 명이 다가와 보고했다.“아가씨, 범인은 이미 잡혔습니다.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차 문을 열고 내린 하연은 단번에 운전석에 앉아서 떨고 있는 연희를 발견했다.하연을 발견한 연희는 찔리기라도 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최... 최하연.”하연은 콧방귀를 뀌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연희의 뺨을 후려갈겼다.“송연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센 충격에 하연은 고개가 돌아갔지만 그렇다고 반박할 배짱은 없었다.그저 충동적으로 하연을 차로 쳐 죽일 생각만 했지 최씨 집안 경호원이 이토록 강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고작 3킬로미터도 가지 못해 잡히다니.“최하연, 아까 널 쳐 죽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야.”하연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너 따귀가 감히? 송연희, 너 이거 살인미수야. 이것만 해도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해줄 수 있어.”여기까지 말한 하연은 잠깐 멈추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내가 3일 내로 미래 테크놀로지 파산시키고, 5일 내로 인수해 줄게.”말을 마친 하연이 돌아서자 연희는 그제야 애원하기 시작했다.“최하연, 복수하려면 나한테 해, 미래 테크놀로지 건드리지 마...”하지만 연희가 아무리 소리치고 애원해도 하연은 듣는 체도 하지 않고 차에 올라 훌쩍 떠나버렸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미래 테크놀로지는 위기에 직면했다. 전자 제품 문제로 소비자들의 대량 반품 운동이 벌어졌고, 곧이어 주식도 곤두박질치며 은행 대출마저 끊겨 단 3일 만에 파산을 맞게 되었다.태훈이 이 소식을 전하러 왔을 때, 하연은 최씨 저택 정원의 그네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따스한 햇볕이 마침 하연의 몸에 쏟아져 내린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최 사장님, 미래 테크놀로지는 이미 파산되었습니다.”하연은 아무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가볍게 대답했다.“인수 계획서는 작성했어?”“네, 작성했습니다.”“그럼 인수해. DS 그룹도 마침 전자제품 쪽 산업이
운석은 선유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농담조로 말했다.“그래?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그 말에 화가 난 선유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운석은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선유를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 동작에 선유는 끝내 폭발했다.“서른 넘는 아저씨가!”“지금 누구더러 서른 넘는다는 거야? 말 제대로 해줄래?”운석도 화가 난 듯 반박했다.겨우 복수한 선유는 혀를 내밀며 약 올리는 표정을 짓고는 얼른 하연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잔뜩 화난 운석이 뒤쫓았다.“조그만 게 어디서! 눈 똑똑히 뜨고 봐. 내가 어딜 봐서 서른이 넘어?”한 치의 양보도 없이 티격태격 싸우는 두 사람을 보자 하연은 왠지 두 사람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왠지 어울리기까지 했다.그렇게 한참 넋 놓고 있던 그때.“하연아!”조진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의외 인물의 등장에 하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진숙 이모, 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때 조진숙과 함께 나타난 하민철이 먼저 나서서 소개했다.“내가 하연 씨 이모랑 오랜 친구예요.”조진숙도 얼른 말을 이었다.“맞아. 네 민철 아저씨한테서 들었는데 이번에 네 덕분에 선유가 무사할 수 있었다며? 너 아니었으면 정말 큰 일이라도 났을 거야.”“그러니까. 내 딸이지만 선유가 워낙 고집이 센데, 하연 양은 무척 따르더라고. 앞으로 종종 우리 딸 부탁해요.”“그럴게요.”그 뒤로 몇 마디 수다를 떤 뒤, 조진숙이 하연을 잡아당겨 낮은 소리로 물었다.“너 요즘 상혁이랑 어때? 왜 같이 오지 않았어?”하연은 난감한 듯 황급히 설명했다.“이번에 F국에 급하게 들어오느라 상혁 오빠한테는 미처 말하지 못했어요.”조진숙인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도 그럴 게, 젊은 남녀가 이미 한참 동안 붙어 있었는데 아무런 불꽃도 튀지 않으니.물론 하연을 진작 며느리로 점 찍어 뒀다지만 그것도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이 맞아야지, 만약 이렇게 좋은 며느리를 누가 채가기라도 하면 큰 낭패였다.‘안돼, 방법을 생각해야 해.
[최하연: 특별하고 생각지도 못한 거 뭐 없을까?][최하연: 좋기는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그런 거. 좀 추천해 봐.][최하연: ...]메시지를 여러 개 보낸 하연은 계속 기다려도 답장이 없자 얼른 시간을 확인했다.그제야 지금 새벽 2시라는 걸 확인한 하연은 얼른 전화를 내려놨다.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하연은 겨우 답장을 받았다.[서여은: 뭔데 우리 예쁜이가 이렇게 조급해할까?][서여은: 어디 보자. 설마 한서준 때문에 이러는 거야?]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가흔이 그 말에 놀라는 이모티콘을 보내더니 얼른 말을 보탰다.[신가흔: 최하연, 너희 합치기로 했어?][정예나: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어! 한서준 생일 이번 달 아니거든. 오히려 부씨 성을 가진 그분이면 모를까.][신가흔: 오호라! 진도 나갔어?]...하연은 열렬히 토론하는 친구들을 지켜보다가 얼른 끼어들었다.[최하연: 얘들아, 얼른 아이디어 좀 내주라.][정예나: 네가 뭘 주든 상혁 씨는 좋아할걸. 그런데 네가 직접 만든 거면 더 의미 있긴 하지.][서여은: 나도 찬성. 그런데 뭘 만들 건데? 케익?]하연은 눈을 깜빡이며 고민했다.‘케익? 괜찮은 것 같은데?’결정을 내린 하연은 다급히 핸드폰으로 재료를 구매했고, 반 시간도 안 되는 사이, 주방은 재료들로 가득 찼다.이윽고 핸드폰으로 케익 만드는 방법을 검색해 한 절차씩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 동안 실습한 결과, 하연은 다음 날 겨우 케익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눈앞에 놓인 정교하고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케익을 보며 하연은 한숨을 푹 쉬었다.“겨우 완성했네.”이윽고 방법대로 케익 박스에 곱게 포장해 문을 나섰다.월요일이라 그런지 FL 그룹 회사는 유독 바삐 돌아갔다. 하연이 도착하자 안내 데스크 직원 신지영은 하연을 한 눈에 알아보고 먼저 인사했다.“최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그에 미소로 화답한 하연은 곧장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위층으로 향했다.하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 하연
하연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에는 분노가 일렁였다. 이윽고 주저하지 않고 뒤돌아 사무실을 나갔다.화난 듯 떠나가는 하연의 뒷모습을 보며 서희는 으쓱한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이윽고 느릿느릿 옷을 정리하고 나서야 대표 사무실에서 천천히 나왔다.그때 지영이 쪼르르 달려와 아부하는 표정으로 물었다.“매니저님, 저 오늘 어땠어요? 괜찮았나요?”서희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칭찬을 투척했다.“정보가 꽤 정확하네. 잘했어. 앞으로 계속 노력해.”“감사합니다, 매니저님.”서희는 아주 대범하게 제 사무실로 돌아와 고급 화장품 세트를 챙겨 지영에게 건네 주었다.“받아.”지영은 그걸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마치 난감하다는 듯 한 번 거절했다.“매니저님, 저 이런 거 못 받아요.”“괜찮아. 작은 선물이니까. 안 받으면 나 무시하는 거야.”“에이, 그럴 리가요.”지영은 기다렸다는 듯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화장품 세트를 받아 챙기더니 최근 들은 소식을 서희한테 알려주었다.“매니저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까 봤는데 최 사장님 이미 회사 떠났어요.”서희는 그 대답에 아주 만족했다.사실 서희도 하연이 왜 이혼했었는지 잘 알고 있다. 때문에 하연이 제삼자와 배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다.그리고 오늘 아침 본 이런 상황은 어떤 여자라도 석연치 않아 할 게 뻔하다.서희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심지어 옆에 있던 지영마저 그 모습에 몸을 흠칫 떨었다.“매니저님, 다른 시키실 일 없으면 전 이만 가볼게요.”“그래. 오늘 일...”“걱정하지 마세요. 제 입 무거워요. 절대 그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서희는 그제야 만족한 듯 지영을 보내 주었다.하지만 그 시각 하연이 FL 그룹 사옥을 나온 뒤 바로 떠나지 않았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하연은 입을 오므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솔직히 아까 그 모습은 하연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침대에는 그저 임서희 한 명뿐이었다.‘물어
‘네’라고 낮게 대답한 하연은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그로부터 2분도 안 지나 하연은 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상혁을 발견하였다.심지어 가까이했을 때, 상혁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발견했다.“상혁 오빠,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상혁은 서먹서먹한 하연의 말투에 얼른 하연의 손을 잡고 회사로 걸어갔다.“나한테 왜 그렇게 내외하고 그래? 오고 싶으면 언제든 와. 네가 찾아오는 건 방해가 아니니까.”하연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지자 이제야 마음마저 따뜻해졌다.두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1층 로비를 가로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하연은 쑥스럽기는커녕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그렇게 엘리베이터에 도착하자 하연은 그제야 상황을 설명했다.“진숙 이모가 오늘 오빠 생일이라고 해서 왔어요.”상혁은 옆으로 돌아 하연을 바라봤다.“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미리 말하면? 사무실에서 봤던 그 장면 볼 일 없었나?’하연의 기분은 순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연의 감정 변화를 느낀 상혁은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아, 아무것도 아니에요.”하연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상혁 오빠, 오빠랑 오빠 전 비서 무슨 사이예요?”“전 비서?”상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임 비서 말하는 거야?”하연은 고개를 끄덕이자 상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상사와 부하 관계지.”“아.”하연은 알겠다는 듯 대답했지만 영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그러자 상혁이 더 의아해했다.“왜 갑자기 그걸 묻는데?”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밖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분주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하연은 그걸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먼저 나갔다. 하연이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 리 없는 상혁은 어리둥절해서 다급히 뒤따랐다.“최 사장님, 안녕하세요.”“부 대표님, 안녕하세요.
하연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만으로도 그 답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그 순간 상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무실 전화로 내선 번호를 눌렀다.“마케팅팀 임 매니저더러 내 사무실로 오리고 해요.”“네, 대표님”“그리고, 경비원 몇 명도 함께 불러줘요.”“네.”하연은 곧장 소파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로부터 약 5분 뒤, 서희가 헐레벌떡 달려와 사무실 문을 열었다.“대표님,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말을 마치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을 발견한 서희는 한순간 넋을 잃었지만 이내 표정을 관리했다.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상혁은 놓칠 리 없었다.조진숙도 예전에 서희가 불여우라 겉모습처럼 순진하지 않을 거라고 예기했던 적 있다. 그래서 대표실에서 강제로 마케팅팀으로 부서를 옮겼던 거고.상혁은 그때만 해도 자기 어머니가 서희한테 편견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 괜히 한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임 매니저,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대표님, 그게 무슨 뜻이죠?”서희는 천연덕스럽게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표정을 본 순간 상혁의 눈빛은 이내 어두워졌다. 상혁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분위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상혁 곁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비서 일을 해온 서희가 그걸 모를 리는 없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티를 낼 수 없었기에 서희는 애써 침착한 척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마 서희가 정말 억울하다고 믿었을 거다.“임 매니저는 오늘 당장 인사팀에서 퇴사 처리해요. 월급은 한 달 치 더 지급할게요.”그 말에 서희는 더 이상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대표님, 왜 그러세요?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상혁은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서희를 내쫓았다.그러자 서희가 하연을 삿대질하며 버럭 소리쳤다.“대표님, 혹시 저 여자가 뭐라고 했어요? 저 여자 말 믿으세요?”이 상황을 보자 하연은 겨우 마음이 놓였다. 이로써 서희와 상혁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게 증명됐으니까.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
알고 보니 하연이가 졸업하던 그 해부터 상혁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늘까지 ‘여주인’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혁은 하연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마셔, 그리고 자. 진정 효과가 있는 와인이야.” 오늘 상형이가 고른 와인은 안정을 돕는 효능이 있는 와인이었다. 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내 수면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네요.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주슬기는 당신을 위해 꿀물까지 챙겨주더군요.” 상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안 마셨잖아.” 이 대답에 만족한 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위 안 좋은 거 알면서도 그렇게 술을 마셨어요? 나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죠?” “맞아.” 상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널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넌 신경도 안 쓰잖아.” “누가 신경 안 쓴다고 그래? 나 이렇게 와 있잖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상혁은 하연을 품에 안아버렸다. “손이현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걸 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한명준과 함께 떠날까 봐 두려웠어.”그 짧은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하연은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나를 믿지 못했어요?”“아니, 나 자신을 믿지 못한 거야.”하연은 잠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내가 봐도 상혁 오빠는 거의 완벽한 사람인데,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했다니...’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네 앞에 서면, 난 자신감이 없어.”그 말을 듣고 하연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하지만 요즘 난 다시 우리 하연이 앞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어.”하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상혁에게 먼저 다가갔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으며, 상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여주었으니까.“하지만 그럴수록 더 두려워졌어
상혁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하연의 눈물 어린 고백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하연의 모든 억울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나 한명준이나 다 똑같아요!!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속였어요!!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내가 다 알고 있었어요.” 하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상혁의 몸에서 진한 술향이 풍겼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나를 떠나는 거죠?” 하연은 울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최근의 갈등은 하연의 모든 안정감을 무너뜨렸다. 한때 하연은 상혁이 영원히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확신이 무너졌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하연도 상혁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을 거라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른 남자에게도 마음 한구석에 남겨진 미련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상혁은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울지 마.” 하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자의 눈물이었는데, 이제는 내 눈물조차도 통하지 않는 건가...?’ “오늘 저녁은 우연이었어. 주슬기가 나와 할 일이 있어서 만난 거지, 약속한 게 아니었어.” 상혁은 먼저 해명했다. 하연의 마음은 다시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주슬기과 당신은...” “그럼 너랑 한명준은 또 무슨 사이인데?” 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하연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양 국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서 간 것뿐이에요. 데이트는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하연은 이현에게 말했다. 그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연아, 네가 춤추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 그해에 너 혼자 춤출 때, 나는 현장에 있었어. 그때 너를 알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쉈어.” 하연은 그가 말하는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학교 축제 때, 하연은 독무를 했고, 무대 위에서 춤을 췄던 그 장면이었다. 이때, 하연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연은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해요.” 이현의 손이 하연의 손가락을 잡았다. “우리 같이 가자.” 하연은 머리가 더욱더 아파지며 갑자기 테이블 위에 있던 꿀물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요.” 더 이상 얽히지 않기 위해, 양국성은 안도한 듯 하연과 함께 이현을 부축하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안에서 유리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하고 잔이 깨지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양국성은 하연과 이현이 같은 차를 타지 않았고, 하연은 이현을 부축해 차에 태운 후, 몸을 숙여 그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며 말했다.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요.” “하연 씨.” 이현은 하연의 손이 다시 잡혔다. 하연은 눈을 들어 보았는데, 이현의 눈은 맑았다. “당신이 취하지 않았군요.” “마지막에 부상혁이 저에게 질문을 하나 했어요.”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응시했다. “부상혁이 저에게 물어본 것, 바로 예전에 제가 하연 씨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겠냐고...” 하연의 손이 순간 떨렸다. 자기 손을 당겨 빼내고 돌아서려 했지만, 다시 이현의 손에 잡혔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제 능력이 있어요!! 예전처럼 우물쭈물하는 한명준이 아니에요!!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이현을 바라보는 하연의 마음도 무척 복잡했다. “부상혁 씨는 뭐라고 했어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