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청하가 재빨리 달려 나와 말렸다.“사부님! 다친 곳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에 더는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은혜도 모르는 년!”화가 치밀어 오른 백수정은 냅다 홍청하의 따귀를 후려갈기며 욕설을 퍼부었다.“네가 반쪽짜리 인여경을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주화입마에 빠질 일도 없고 다칠 일도 없잖아!”“제...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홍청하는 얼굴을 움켜쥐고 연신 고개를 저었다.“아직도 변명할 셈이야?”백수정이 무섭게 호통쳤다.“그럼 저 자식에게 어떻게 인여경이 있을 수 있어? 네가 몰래 준 거 아니야? 감히 우릴 배신하고 외부인과 결탁해?”“전 그런 적이 없어요.”홍청하는 연신 부정했다.“홍청하, 사부님께는 반쪽을 드리고 진짜 보물은 저 남자에게 줬어? 이 개돼지만도 못한 년아!”“난 줄곧 네가 충성심이 가득한 애라고 생각했었어. 양심도 없는 년, 감히 인여궁을 배신해?”“착한 척 좀 그만해. 역겨우니까!”이젠 인여궁의 모든 제자들이 나서서 그녀를 욕했다. 그들은 홍청하가 유진우와 결탁하여 진짜 인여경을 훔쳤기에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오해예요... 전부 오해란 말이에요.”홍청하는 설명하려 했지만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뭇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영감님, 그만 머뭇거리고 얼른 저년의 다리를 분질러버려요.”유진우는 싸늘한 얼굴로 차연주를 가리켰다.“알겠습니다.”장 어르신은 곧바로 차연주에게 다가가 무릎을 발로 걷어찼다.뚜두둑!차연주의 무릎이 반대 방향으로 꺾이면서 그대로 부러지고 말았다.“으악!”차연주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렀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멈춰! 감히 내 제자를 다치게 해? 절대 가만 안 둬!”백수정은 두 눈을 부릅뜨고 언성을 높였다.“당신들이 한 짓을 그대로 갚아줬을 뿐이야. 내 부하의 다리를 분질렀으니 당연히 저년의 다리도 분질러야지.”유진우는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영감님, 나머지 한쪽
“인마, 너희 둘이 한패가 되어 못된 짓을 했다는 거 다 알아. 청하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당장 연주를 풀어줘!”백수정이 검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협박했다. 다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인질을 잡고 협박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왜... 대체 왜...”홍청하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마치 혼이라도 빠져나간 것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녀의 모습에 유진우는 얼굴을 찌푸렸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았으니까 청하 씨를 풀어줘. 그럼 당신 제자도 풀어줄게.”그러고는 손을 흔들어 장 어르신에게 물러서라고 했다.“얼른 연주를 데려가.”백수정이 눈짓을 보내자 인여궁 제자들은 정신을 차리고 다리가 부러진 차연주를 부축하여 문을 나섰다.풍자 할멈은 혹시라도 장 어르신이 다른 움직임을 보이진 않을까 걱정되어 곁을 지키면서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노려보았다.“이놈아, 명령하는데 당장 인여경을 나에게 넘겨!”차연주를 데려간 후에도 백수정은 검을 거두지 않고 조건을 걸었다.“난 이미 한 발짝 양보했어. 그러니까 당신도 적당히 해.”유진우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이년이 점점 기어오르네?’“흥! 인여경은 우리 인여궁의 보물이야. 당신이 주인에게 돌려줘야지.”백수정이 또박또박 말했다.“당신이 이런 태도로 나오는데 내가 줄 것 같아?”유진우가 되물었다.“인여경은 여자만이 수련할 수 있는 건데 네가 가져서 뭐 하려고? 나에게 돌려준다면 불경죄는 용서해 줄게.”백수정은 여전히 기고만장했다.“당신네 인여궁 사람들은 정말 왜 다 이 모양 이 꼴이야?”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으며 차갑게 말했다.“솔직하게 얘기할게. 인여경이 나에게 필요는 없지만 태워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당신에게는 못 줘!”“너!”그의 말에 백수정이 살벌하게 협박했다.“이 자식아, 잘 생각해. 인여경을 내놓지 않으면 청하를 죽여버릴 거야.”그러면서 들고 있던 검을 더 들어 올렸다.홍청하 목의 상처가 점점 벌어지면서 시뻘건 피가 검을 따라 주르
유진우는 홍청하를 진심으로 걱정했다.“됐어요. 얼른 가서 준비해요. 오늘 저녁에 연회를 열 생각이에요. 청하 씨에게 강린파 제자들도 소개해 주고요.”유진우는 홍청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두 여자 도우미를 불러 홍청하를 부축하여 처소로 돌아가라고 했다.“보스, 청하 씨에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닌가요?”장 어르신이 감탄했다.“청하 씨 오빠에게 목숨을 빚졌으니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와야죠.”유진우의 눈빛이 어딘가 허전해 보였다.“청하 씨가 보스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네요.”장 어르신의 얼굴에 부러움이 스쳤다.홍청하를 살려주고 고통의 구렁에서 벗어나게 한 것도 모자라 인여경까지 선물했고 또 당주 자리에도 앉혔다.이런 대우는 아무나 받지 못하는 대우였다. 장 어르신은 자신이 만약 여자였더라면 몸도 기꺼이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어느덧 어둠이 짙게 깔렸다.풍우 산장의 연회장에 강린파 고위층들이 한데 모여 술을 마시면서 즐거움을 나누고 있었다.5대 파의 당주들도 전부 한자리에 모였다.악당파의 장 어르신, 염룡파의 홍청하, 맹호당의 유군철, 곰파의 석웅걸, 망파의 변대성. 이 5인은 유진우의 유능한 부하들이었다.장 어르신은 무술 실력이 더할 나위 없이 강하고 홍청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유군철은 머리가 영특하고 석웅걸은 의리가 넘치며 변대성은 임기응변에 능했다. 각자 자기만의 장점이 있었다.“홍 당주님, 강린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자, 제가 먼저 한잔 올리겠습니다.”“홍 당주님의 인품은 제가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염룡파가 더욱 찬란하게 발전하길 바랄게요.”“홍 당주님, 전 말주변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 진심은 이 한잔에 담도록 하겠습니다.”4대 당주들이 하나둘 일어나 홍청하에게 술을 따랐다. 그들은 5대 파 중에서 염룡파가 유진우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여인이 염룡파 당주가 돼도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고맙습니다.”홍청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한잔
둥근 상 맞은편의 홍청하를 보며 유진우는 멍해졌고 경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약을 탄 사람이 홍청하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당신이었어요? 당신이 어떻게...”장 어르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움과 경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눈빛 속에 분노가 가장 짙었다. 유진우가 그렇게 잘해줬던 홍청하가 배신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홍청하는 죄책감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심지어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대체 왜 그런 거예요?”유진우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힘겹게 물었다.홍길수의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홍청하를 자기 친여동생으로 생각했고 무슨 일이든 그녀 편에 서서 도와주었다. 그리고 고통의 구렁에서 벗어나게 했고 심지어 인여궁에도 여러 번 양보했지만 돌아오는 건 배신일 줄은 정말 몰랐다.“인여궁은 나의 집이고 이 사람들은 내 가족이에요.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요. 진심으로 미안해요...”홍청하는 끊임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사과했다. 유진우에게 너무도 미안했지만 사부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고 인여궁과 맞서 싸울 용기가 없었다.“인여궁이 당신에게 이런 짓까지 했는데 대체 왜 아직도 체념 못 하고 목숨까지 바치는데요? 대체 왜?”유진우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인여궁에서 쫓겨나고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면서도 왜 계속 충성하려는지 유진우는 도무지 이해되질 알았다.“난...”홍청하는 순간 말문이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침묵을 택했다.“인마, 인제 와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봤자 무슨 소용이야?”그때 백수정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청하는 내 제자고 인여궁 사람이야. 그러니 당연히 내 편을 들지. 누굴 탓하려면 어리석은 자신이나 탓해.”“그래! 전투에서는 적을 기만하는 전술을 쓰기도 하잖아. 누가 너더러 여자를 그리 쉽게 믿으라 했어? 쌤통이야 아주!”인여궁 제자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한마디 했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듯 하나같이 우쭐거
두 사람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진 홍청하는 어서 그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다.“이제 시작인걸. 이 자식은 인여궁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연주를 다치게 했으니 이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백수정이 인상을 쓰고 말했다. 유진우가 알고 있는 인여궁의 비밀은 너무도 많았다. 이런 보물은 아무도 아는 사람 없이, 그녀의 소유로만 되어야 했다. 그 때문에라도 그녀는 꼭 그를 죽여 입을 막아야 했다!“사부님, 진우 씨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홍청하는 조금 불안했다. 비록 유진우를 배신했지만 그래도 그가 죽는 것은 원치 않았다.“그래? 내가 언제? 청하야, 무서우면 나가 있어, 그래도 돼.”“사부님! 원하시던 인여경이 손에 들어왔는데, 이제 그만하세요.”홍청하가 싹싹 빌었다. 지금 백수정은 정말 살의를 품고 있었다.“청하야, 똑똑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넌 인여궁 제자니 인여궁의 처지에서 생각해야지. 이번에 공을 세운 건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해. 인여검법을 수련하면 네게도 전수해 줄 거야. 하지만 조건이 있어. 지금 공개적으로 네 충성심을 증명해 봐.”백수정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어떻게요?”“날 대신해 저 자식을 죽여!”백수정은 살의가 넘치는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으로 유진우를 가리켰다.“안 돼요!”홍청하는 깜짝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유진우는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은혜를 어떻게 원수로 갚는단 말인가?“청하야, 저놈을 죽이면 널 수석대제자로 임명할게, 어때?”백수정이 홍청하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 그녀에겐 무엇보다 재미있었다.“수석 안 할 거예요! 전 못 죽여요!”“내 명령에 불복하는 거야?”“사부님, 부탁드려요, 전 정말 그렇게 못 해요!”홍청하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백수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쓸모없는 놈, 남자 놈 하나를 왜 못 죽여 안달이야?”“사부님, 전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살인만 하지 않게 해주세요.”“헛소리 마! 명령대로 안 하면 널 쫓아낼 거야!”
홍청하는 검을 들고 복잡한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유진우에게 다가갔다. 절반쯤 갔을 때 그녀가 든 검이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졌다.“사부님... 전 못 해요. 전 정말 못 해요!”홍청하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백수정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비참함과 자책이 섞여 있었다.백수정은 어두운 표정으로 홍청하의 뺨을 내리쳐 그녀를 쓰러뜨렸다.“쓸데없는 놈! 남자 하나도 못 죽이는 주제에 뭘 하려고 그래?”“사부님! 제가 할게요!”사람들 틈에서 차연주가 절뚝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녀는 원한 서린 눈길로 유진우를 쏘아보았다. 맞은 건 그렇다 쳐도 자신의 미모를 무시하는 일은 참을 수 없었다.“좋아. 네가 죽여.”백수정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대제자가 마음에 들었다.“유진우, 이런 날이 있을 줄은 몰랐지? 개 같은 놈, 날 배신해? 오늘 널 공개 처형할 거야!”차연주는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유진우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갖지 못하는 건 다른 사람도 가질 수 없었다.‘날 좋아하지 못하겠다면 그냥 죽어.’“멋대로 하다가는 다른 한 쪽 다리도 날려버릴 거야.”“하하하... 죽을 때가 돼서도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 거야? 네 부하들은 모두 약에 중독됐어. 제일 센 그 노인네도 지금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간들간들해. 아직도 네가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해보시든지.”“지랄. 너 같은 놈은 약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어!”말을 맺은 차연주는 발을 굴러 뛰어오르고는 유진우의 하체를 공격했다.“하.”유진우는 책상을 쿵 쳤다. 젓가락 한 개가 날아오르더니 그의 손길에 따라 화살처럼 날아가 차연주의 무릎을 관통했다.“아악!”차연주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녀가 쓰러지기도 전에 손바닥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강타했다. 마찰음과 함께 그녀가 몇 미터 뒤로 날아가 철퍼덕 엎어졌다.“어?”그 모습을 본 인여궁 제자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차연주는 비록 한쪽 다리를 절지만 그래도
차연주는 귀신 들린 듯 소리를 질러댔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듯했다.“청하야, 어떻게 된 거야? 약을 탄 게 아니었어?”백수정은 곱지 않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특제 약은 마스터 급 아래의 사람들은 당해낼 수 없었다.“탔는데요, 술에 분명히 탔어요.”홍청하가 급히 대답했다. 분명 술을 마셨는데 왜 아직도 멀쩡하지?“운 좋게 빠져나갔나 보군.”백수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직접 검을 뽑았다.“본투비 레벨까지 다다른 것도 이미 천재적인 거야. 하지만 난 천재 죽이는 일이 가장 재미있다? 내 손에 죽는 걸 영광으로 알아.”“누가 죽을지는 아직 모르지. 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꿇어앉아 사과해. 그럼 살려는 줄게.”그 말을 들은 모두가 크게 놀라더니 깔깔 웃어댔다.“야! 너 미쳤어? 네가 뭔데 큰소리야?”“나쁜 놈! 사부님은 반보 마스터 급 강자신데 그 앞에서 설치다니, 죽고 싶나 봐?”“어떤 꼴을 당할지 두고 보자!”인여궁 제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던졌다.백수정은 인여궁 궁주, 반보 마스터 급 강자로서 연경시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다. 그런 사람에게 유진우 따위는 상대도 안 될 것이다.“자식,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해? 나더러 빌라고? 네가 감히?”백수정이 이상한 눈길로 유진우를 쏘아보았다. 20대의 청년이 그녀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못 믿겠으면 직접 실험해 보든지.”유진우는 백수정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했다.“건방진 놈, 널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무시당한 백수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주저 없이 검을 뽑아 들고 유진우를 향해 돌진했다. 검의 위력은 실로 강력해 주변의 책상과 술병들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녀가 지나간 길 위에 칼자국이 주욱 그어졌다.“검과 한 몸이 됐어!”“역시 사부님이야, 마스터 급이 아닌 사람들은 이 검을 받아칠 수 없을 거야.”“사부님 손에 죽는다는 게 어디야.”인여궁 제자들은 정신이 번쩍 들어 연신 감탄했다. 그녀들에게 유진우는 이미 죽은
“아...”벽에 매달린 백수정을 본 인여궁 제자들은 매우 놀랐다.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백수정은 그들의 사부였고, 인여궁 궁주였고, 반보 마스터급 강자였고, 최고의 검술 고수였다. 그런 사람이 유진우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말도 안 돼!“이...이럴 수가? 사부님이 지다니?”“내 착각일 거야. 사부님이 질 리가 없어.”“왜? 왜 이런 건데?”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사람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강하게만 보였던 백수정이 이렇게 패배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너... 대체 누구야?”풍자 할멈은 표정이 금세 변해 안절부절못했다. 백수정의 상처가 다 낫지 않았다지만 일반인에게 질 정도는 아니었다.“내 땅에서 설치고 다니면서 내가 누구냐니?”유진우는 살기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그럴 리 없어! 넌 사부님한테 안 돼. 비열한 방법을 쓴 거지?”정신을 차린 차연주가 유진우를 질책했다.“맞아! 사부님이 왜 너한테 지겠어? 급습이라니 정말 비겁하다.”인여궁 제자들이 그에 맞장구를 쳤다. 방금 일어난 일은 너무 빨라서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하기에 유진우가 비겁한 방법을 썼을 거라 단정지은 것이다.그리고 백수정의 상처가 채 회복되지 않았고, 적을 쉽게 봤기에 이런 상황이 생겼을 것으로 생각했다.생각을 정리한 그들은 안정을 회복했고, 유진우라는 적을 더욱 괄시하게 되었다.이때 벽의 돌들이 조금 떨어지며 벽에 박힌 백수정도 정신을 회복했다. 그녀는 어지러운 머리를 털며 볼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입을 벌리자, 치아 몇 개가 떨어져 나왔다. 피로 얼룩진 얼굴은 보기 흉했다.“감히 날 때려? 네가 감히?”백수정은 이를 악물었다. 사람에게 맞고 벽에 박히기까지 하다니, 인여궁 궁주로서 오늘보다 창피한 날은 없었다. 그녀의 위엄과 체면이 모두 깨져버렸다.“넌 죽었어, 너와 네 가족까지 모두 죽여버릴 거야!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백수정은 생각할수록 화가 나 고함을 지르며 유진우에게 달려들었다
“제후님께서 도련님이 오실 걸 알고 저더러 미리 나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늙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고요?”유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옆에 있는 유진우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은성종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제갈영군이 전화로 알렸거나 유태범의 사자가 먼저 와서 선수를 친 것이다.“도련님, 제후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늙은 집사가 허리를 굽히면서 손짓으로 안내했다.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여기까지 온 이상 중간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뚫고 나가야 했다.일행은 늙은 집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시설을 지난 후 식당에 도착했다.식당 안에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었다.유천우 일행은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도련님,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늙은 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제후님은요?”유천우가 물었다.“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늙은 집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손짓했다.“너희들, 얼른 와서 먹어.”“네.”근위병 몇 명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훈련을 잘 받은 근위병들은 3일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음식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유천우 대신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항상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은성종이 음식에 약을 넣었다면 그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모든 음식을 다 맛본 후에야 근위병들은 유천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
해 질 무렵,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은 변경 요새 도시인 태평에 도착했다.태평은 회음 제후 은성종의 영역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은성종의 통치 아래 짧은 10여 년 만에 서경에서 5위 안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의료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태평이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은성종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 덕이었다.만약 제갈영군이 난세의 영웅이라면 은성종은 세상을 다스린 명신이었다.그 시각 회음 제후 저택 밖.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길가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일행이 잇달아 내렸다.“형, 여기가 마지막 목적지예요.”유천우는 저택 간판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회음 제후 은성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의협심도 강해요. 게다가 제갈영군의 편지까지 있으니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은성종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유만수조차도 은성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어. 아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혹시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태범이 이미 제갈영군과 연락했으니까 분명히 은성종과도 접촉했을 거야. 은성종이 유태범한테 설득당해서 유태범의 진영에 합류할까 봐 걱정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야.”유진우가 분석했다.유태범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표기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지혜와 용맹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유태범도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유천우 일행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유태범이 아니었다.전에 제갈영군을 끌어들이려고 도시 두 개를 제시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장범규는
제갈영군의 날카로운 눈빛과 창을 바라보면서도 유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제후님, 도시 두 개의 유혹이 매우 큰 건 사실입니다. 저였더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제후님이 제 목숨으로 도시 두 개를 바꾸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아?”제갈영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아니면 내가 감히 널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죽는 건 당연히 두렵습니다. 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지 않아요.”유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르시면서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다 죽였죠. 그런 분이 저의 목숨 따위 가져가는 건 순간일 것이고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죽는 게 두렵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제갈영군은 조금 의아해했다.“죽는 걸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했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이 정말로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갈 수도 없어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재밌는 녀석이군.”제갈영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창을 내려놓았다.“피는 못 속인다더니 오늘 보니까 맞는 말 같군. 유씨 가문에는 쓸모없는 자식이 하나도 없어.”“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됐어. 농담 그만할게. 유태범의 부하들이 날 찾아온 건 맞지만 이미 내가 다 죽였어.”제갈영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몇 명의 호위병이 시신을 끌고 와 유천우의 발밑에 던졌다.“자, 얘네들이 유태범이 보낸 사람들이야.”제갈영군은 발로 시신을 툭툭 치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후님, 유태범이 주겠다는 도시 두 개를 포기하겠단 겁니까? 전 그렇게 좋은 걸 드릴 수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
유천우의 말은 강력한 힘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만약 서경이 무너진다면 8대 제후, 각 지역의 고위급 관료, 수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다들 서경에 뿌리 박고 사는 사람들이라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천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항상 앞뒤를 생각하거든. 만약 반란을 진압하다가 군대를 다 잃으면 어떡해?”주한휘는 여전히 망설였다.“제후님, 혹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서경왕부에서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한휘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실질적인 이득을 원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거나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기에 혹시라도 실패하면 큰 손실은 면할 수 없으니까.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천우야,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말로만 해선 안 돼.”주한휘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원하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큰소리치며 장담했다. 이 정도면 성의를 충분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알았어. 천우 네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이네.”주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내 딸인데 올해 25살이 됐는데도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만약 천우 너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다면 참 좋을 텐데.”“저요?”유천우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주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딸 해린이 절세미녀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얼굴도 나름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 만약 해린이를 아내로 들인다면 내조도 엄청 잘하는 현모양처가 될 거야.”현재 그에게는 돈과 인맥 모두 충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하늘보다 높은 권력이었다.서경왕이 죽은 지금 유천우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만약 딸이 유천우와 결혼한다면 나중에 서경의 왕비가 될 것이고 주한휘의 신
유천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예의를 갖춰서 설득하다가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만약 반란을 일으킨 4대 제후가 서경왕부에 굴복한다면 서경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때가 되면 서경왕부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4대 제후와 서경의 많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반역자들을 몰살할 것이다.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유천우의 말을 들은 장범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 덕이야. 반란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감사합니다. 제후님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 어려움을 꼭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말했다.“이건 내 제후령이야. 제후령만 있으면 가진의 병사를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장범규는 갑자기 병부를 꺼내 유천우에게 건넸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보여주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이건...”되레 유천우가 망설였다. 장범규가 이토록 통쾌하게 병부를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행동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사양하지 마. 비상시국이잖아. 이 제후령이 있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장범규는 병부를 유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봐.”장범규가 손을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일행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오늘 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30분도 채 안 되어 평양 제후 장범규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령마저 받았다.만약 이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
가진은 서경의 변방 도시이자 평양 제후 장범규의 영역이었다.무장 출신인 장범규는 서경왕 유만수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고 세운 공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 평양 제후가 된 후 서경의 변방을 지켰다.수년 동안 장범규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해왔다.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갑자기 평양 제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등 몇 명이 나란히 내렸다.“형, 여기가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네 저택이에요.”유천우가 간단하게 소개했다.“장범규는 그래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에요. 가진을 수년 동안 관리하면서 직무와 책임을 다했거든요.”“밖에 누구야?”저택 입구를 지키던 호위병 두 명이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유천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패를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서경왕의 둘째 아들 유천우다.”“도련님?”두 호위병은 유천우의 신분패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나머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유천우가 신분패를 거두어들였다.“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평양 제후님을 뵈러 왔어. 들어가서 보고 좀 올려줄래?”“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가서 제후님께 말씀드릴게요.”그중 한 호위병이 대답하고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부하들과 함께 부랴부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였다.“안녕하세요, 제후님.”유천우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서경왕의 둘째 아들이긴 해도 눈앞의 장범규는 제후이기에 신분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장범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일이었다.“천우야,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왔어?”장범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제후님, 서경왕부에 변고가 생겨서 제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변고가 생겼다고? 무슨 일인데?”장범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