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어때? 이래도 인정 못 하겠어?”셋째 제자는 도발 섞인 눈빛으로 유진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인제 몸놀림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겠지? 앞으로 잘 배워둬.”“인마, 놀랐지? 또 누가 1분 내로 통과할 수 있겠어?”근육남이 자랑스럽게 말했다.“맞아! 몸놀림 면에서 우리 셋째 선배를 따라올 자가 없어!”뚱뚱한 여자가 위세를 떨치며 우쭐거렸다.두 사람은 너도나도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세력을 등에 업고 유진우를 업신여겼다.“매화장을 통과하는데 이렇게나 오래 걸렸으면서 우쭐거리기는.”유진우는 어이가 없었다. 암살 무기를 몇 차례 피했다고 이 정도로 기고만장하다니,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가 따로 없었다.“아이고? 큰소리치는 거 보니까 아직도 인정 안 하나 보네? 자, 재간 있으면 너도 한번 해봐.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겠어.”근육남은 유진우를 마음껏 비웃었다.“흥! 입만 살아서는. 그럼 직접 보여줄 것이지, 왜 뒤에 숨고 그래? 겁쟁이 같은 것.”뚱뚱한 여자가 아니꼬운 말투로 말했다. 셋째 제자보다 몸놀림이 더 뛰어난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전부 다 우물 안의 개구리들이야.”더는 그들과 쓸데없는 얘기를 섞고 싶지 않았던 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은 후 곧장 매화장 앞으로 걸어갔다.“인마! 네가 첫 번째 공격만 피해도 인정해줄게.”근육남은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다섯째 선배, 저 자식을 너무 과대평가한 거 아니에요? 3초만 버텨도...”뚱뚱한 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징 소리가 쨍하고 울렸다.유진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슉!잔영이 눈앞에서 갑자기 휙 스쳐 지나갔다. 속도가 너무 빨라 사람들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고 잔영이 사라졌을 때 유진우는 이미 출발점을 지나 결승점에 도착해있었다.유진우가 지나가는 동안에 암살 무기들이 한 발도 쏘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속도가 너무 빨라 기계가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금 전의 징 소리마
“말... 말도 안 돼. 너... 너 대체 어떻게 했어?”뚱뚱한 여자는 놀란 나머지 입을 쩍 벌렸다.순식간에 휙 지나간 바람에 지금까지도 정신을 채 차리지 못했다.“왜? 또 내가 속임수를 썼다고 모함하려고?”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나...”뚱뚱한 여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첫 번째 라운드에서 힘을 테스트할 때는 내공을 썼다고 우길 수 있었지만 두 번째 라운드는 몸놀림 테스트라 내공을 금지하지 않았다. 매화장을 순리롭게 통과만 하면 성공이었다. 하여 유진우가 속임수를 썼다고 우기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다만 이런 통과 방식이 너무도 놀라워 사람들이 한순간에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다.“흥! 속도가 빠르면 뭐? 잔꾀로 통과했을 뿐인데!”둘째 제자는 인정하지 않는 눈치였다.“세 번째 내공 테스트도 통과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어!”“맞아! 무사의 실력이 강한지 약한지는 내공을 봐야지. 속도가 빨라도 내공이 형편없으면 여전히 실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겉만 번지르르해서 무슨 소용이겠어.”뚱뚱한 여자가 뻔뻔스럽게 몰아붙였다.“너 이 자식 우리 둘째 선배와 내공을 겨룰 자신 있어? 네가 이기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근육남은 또다시 도발하기 시작했다.그 순간 그들은 모든 희망을 둘째 제자에게 걸었다.본투비 레벨 고수인 둘째 제자의 내공이 매우 깊었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하여 내공 테스트에서 잃었던 체면을 다시 찾아야 했다.“아직도 포기하지 않으니 데리고 노는 수밖에.”유진우는 웃을 듯 말 듯 했다. 어차피 테스트는 끝까지 해야 하니 재미 삼아 즐긴다고 생각했다.“그래! 어디 한번 붙어보자!”둘째 제자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세 번째 테스트 장소로 향했다.이번 세트장은 매우 간단했다. 가운데 돌 탁자가 놓여있었고 돌 탁자 위에 세숫대야만한 크기의 크리스털 볼이 놓여있었다.새하얀 크리스털 볼은 그 어떤 잡질도 섞여 있지 않아 아주 예뻤다.“시험관님, 이건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뚱뚱한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그 시각 크리스털 볼이 절반 가까이 금색으로 변했다. 조금만 더 버틴다면 완전한 금색이 될 수 있다.“으악!”둘째 제자는 이를 악물고 끊임없이 진기를 불어넣었다. 진기를 많이 소모한 탓에 얼굴은 이미 땀에 흠뻑 젖었고 안색마저 창백해졌다.몇 초가 더 지나자 크리스털 볼이 윙 소리를 내더니 드디어 전부 금색으로 변했다.둘째 제자는 마치 탈진한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너무 잘했어요! 성공이에요!”“하하... 역시 둘째 선배님은 대단하세요.”사람들은 기쁨에 겨워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역시 대단하십니다. 다음 라운드로 진출한 걸 축하드려요.”무도 연맹 직원은 웃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크리스털 볼을 단숨에 금색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무도 연맹의 젊은 세대 중에서도 손꼽히는 존재였다.“인마, 어때? 이젠 인정하겠어?”근육남의 시선이 유진우에게 향했고 또다시 도발했다.“봤어? 이게 바로 우리 둘째 선배님의 실력이야. 아주 손쉽게 기준을 초과하여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다고. 넌 할 수 있어?”뚱뚱한 여자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흥! 속도가 빠른 게 뭔 대수야? 무사의 근본은 내공이지. 인제 너와 나의 차이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겠어?”둘째 제자는 뒷짐을 진 채 오만방자하게 말했다. 마스터의 풍채가 조금 풍기기도 했다.아주 힘든 건 사실이지만 허세도 부려야 했다.“차이?”유진우는 가소롭기만 했다.“내가 아직 나서지도 않았는데 왜 이리 건방을 떨어?”“왜? 너도 마지막 발악을 해보려고?”둘째 제자가 싸늘하게 웃었다.“금색이 됐다는 건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뜻이야. 설마 날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해보면 알게 되겠지.”유진우는 두말없이 크리스털 볼에 손을 올렸다.“흥! 자기 주제도 모르는 놈.”“감히 둘째 선배 앞에서 큰소리를 쳐? 정말 굴욕을 자초하는구나.”사람들은 유진우를 비웃으며 마치 하찮은 인간을 쳐다보듯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이 사라
펑!갑자기 폭발한 크리스털 볼을 본 둘째 제자는 넋이 나갔고 근육남과 뚱뚱한 여자뿐만 아니라 현무문의 모든 제자들이 꼼짝하지 않고 멍해졌다.조금 전까지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고 그 대신 경악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둘째 제자가 금색을 가득 채웠기에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금색 다음으로 붉은색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리고 더 무서운 건 유진우가 붉은색을 가득 채운 후 크리스털 볼이 버티지 못하고 폭발했다는 것이다.대체 내공이 얼마나 깊으면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사람들은 놀란 나머지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둘째 제자의 안색이 잿빛이 되었고 충격을 여간 받은 게 아니었다. 그동안 늘 자랑스럽게 여겼던 진기가 유진우의 앞에서는 거론할 가치조차 없을 줄은 몰랐다.“이래도 내가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해?”유진우는 웃을 듯 말 듯 했고 눈빛에 조롱이 담겨 있었다.“어...”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볼 뿐 말을 잇지 못했다.힘, 몸놀림, 내공 테스트 모두 유진우가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하면서 순조롭게 통과했다.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바보라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한 가지만 잘하는 건 그렇다 쳐도 세 가지 모두 특출나게 잘한다는 건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바로 실력이 매우 강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보다도 훨씬 강하다는 것이다.절대적인 실력 앞에서 그들은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현무문의 고수도 별거 아니네, 뭐. 허세만 잔뜩 부리더니 결과는? 아주 참패를 당했잖아.”공요가 불쑥 한마디 했다. 전에는 그들이 도발했으니 이젠 반대로 마음껏 비웃어줘야지.“너!”뚱뚱한 여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세 라운드의 테스트를 거친 결과 그들은 확실히 참패하고 말았다.“아직 기뻐하긴 일러. 우린 완전히 지지 않았어.”그때 둘째 제자가 뻔뻔스럽게 말했다.“응? 지지 않았다고? 그럼 어떻게 져야 제대로 진 건지 말해봐 봐.”공요는 그저
둘째 제자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저 녀석의 실력이 강하다는 건 인정해. 속도, 힘, 몸놀림, 그리고 내공까지 흠잡을 데 없어.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무사는 없어. 분명 약점이 있을 거야. 자세히 생각해봐, 속도가 왜 그렇게 빠르고 몸놀림도 왜 그렇게 빠르겠어? 원인은 간단해. 장점을 발양하고 단점을 피했기 때문이야. 만약 내 추측이 맞는다면 방어력이 바로 약점일 거야. 방어력이 부족하니까 속도라도 올려서 피하는 거지. 네 번째 압력 테스트는 마침 몸의 방어력을 시험하는 거야. 우리 중에서 방어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 넷째 후배잖아. 금강불괴 신공이 일곱 번째 레벨까지 도달했어. 칼과 총으로 뚫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에 닿아도 끄떡없어. 방어력이 장점인 넷째 후배가 이번 테스트에 나선다면 아주 쉽게 이길 수 있을 거야.”그의 말에 사람들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조금 전 얼굴에 드리워졌던 먹구름이 순식간에 가셨다.‘그래, 저 녀석의 속도가 빠르고 힘이 세다고 해서 몸의 방어력까지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약 금강불괴 신공을 이용하여 상대와 방어력을 겨룬다면 이길 가능성이 있다.“둘째 선배의 말이 일리가 있어요. 이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죠. 저 자식의 약점이 바로 방어력일 거예요.”뚱뚱한 여자는 두 눈이 번쩍 뜨였다.“맞아요! 넷째 선배는 금강불괴 몸이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요.”근육남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그들은 다시 새로운 희망을 본 듯했다. 절대 이대로 현무문의 명성이 바닥까지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라운드는 이겨야 했다.“넷째 후배, 어떻게 생각해?”둘째 제자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힘과 속도, 그리고 몸놀림은 제가 부족하지만 방어력은 저를 따라올 자가 없죠.”넷째 제자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십여 년 동안의 수련이 절대 빈 이름뿐인 아니었다.“우리 모두 너에게 희망을 걸었어.”둘째 제자가 진지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말고 저에게 맡겨요.”넷째 제자는 가슴팍을
1분 후, 압력기의 금속 문이 열렸고 유진우가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어찌나 차분하고 느긋한지 100배 압력을 버틴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은 듯했다.“시험관님, 이 정도면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겠죠?”유진우가 덤덤하게 물었다.“물... 물론이죠.”잠깐 넋을 잃고 멍하니 있던 무도 연맹 직원이 놀란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100배 압력을 1분이나 버티다니, 철로 만들어진 몸이란 말인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세상에나! 정말 괴물이야!”그때 공요도 저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었다.힘, 속도, 내공, 방어 네 가지 테스트는 나름 전면적이고 철저한 테스트이다. 일반 사람이라면 한 가지 테스트조차 통과하기 어렵다.그런데 유진우는 네 가지 모두 뛰어날 뿐만 아니라 최고치를 기록했고 그 어떤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이게 괴물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역시 진우 오빠는 대단하다니까.”조홍연이 보기 드문 웃음을 지었고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유진우가 활약하니 그녀도 기분이 좋았다.“도규현이 진 게 그리 억울한 일도 아니네.”황보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유진우가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어떤 약점도 없을 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다. 실로 놀라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람과 적이 아니라 벗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난 통과했고 인제 너희들 차례야. 들어가.”유진우는 현무문의 사람들을 쳐다보며 안으로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이게 대체...”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볼 뿐 말을 잇지 못했다.들어가자마자 압력을 100까지 끌어올렸으니 누가 감히 버틸 수 있겠는가?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주검이 되어 나올지도 모른다.“넷째 선배가 한번 들어가 볼래요?”뚱뚱한 여자가 떠보듯 물었다.넷째 제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는데 당장이라도 욕설을 퍼부을 것만 같았다.‘X발, 왜 저렇게 눈치가 없어? 들어가자마자 압력을 최대치로 올렸는데 내가 들어가서 무슨 소용이야?’지금 그의 실력으로는 기껏
두 시험관은 서로 쳐다보더니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당신은 테스트할 필요 없어요. 통과입니다.”“통과요?”유진우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조금 전 당신의 활약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어요. 우리는 당신의 상대가 아니에요. 그러니 바로 통과입니다.”한 시험관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될지 기대되네요. 이번 무도대회에서 당신 분명히 다크호스로 떠오를 겁니다.”다른 한 시험관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앞서 네 가지 테스트에서 유진우는 매번 기록을 깼다. 그의 대단한 실력에 두 시험관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유진우는 웃으며 두 손을 다시 가슴 앞에 맞잡고 예를 표하고는 링 아래로 내려왔다.두 시험관이 그래도 나름 눈치는 있었다. 괜히 무리하여 나섰다가 된통 얻어맞을 게 분명했다.“젠장! 테스트도 하지 않고 바로 통과라니,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어쩔 수 없어. 실력이 너무 강하니까 시험관들도 두려워하잖아.”“나 같았어도 덤비지 못했어. 주먹 한 방에 십만 근의 괴력을 누가 버티겠어?”“그리고 무엇보다 힘, 속도, 방어력, 내공 모두 뛰어나다는 거야. 이런 강자라면 당연히 존중받을만 하지.”무사들은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유진우를 쳐다보는 눈빛에 경외감이 짙어졌다.세간에서는 실력을 가장 중요시 한다. 출신이 어떻든 실력만 강하면 존경을 받을 수 있다.“테스트 다 끝났어. 우리 어디 가서 맛있는 거 먹자.”유진우는 조홍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행과 함께 여유롭게 떠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현무문의 제자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X발, 훌륭한 명예를 지닌 우리가 저런 놈에게 지다니. 분통이 터져서 원.”근육남이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첫째 선배가 있었더라면 저 녀석의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었을 텐데.”뚱뚱한 여자도 내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사부와의 관계 때문에 첫째 제자는 다섯 가지 테스트를 건너뛰고 바로 마지막 테스트에 참여하게 되었기에 오늘 모습을 드러
테스트 통과 후 유진우 일행은 무맹분타를 떠났다.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한 통 받은 조홍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그래, 알았어.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간단히 두어 마디만 한 후 조홍연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녀석아, 왜 그래?”유진우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연경에서 걸려온 전화인데 누군가 내가 군대를 거느리고 지위를 강화하여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고 신고했대요. 아무래도 돌아가서 설명 좀 해야겠어요.”조홍연이 덤덤하게 말했다.“반역요? 누가 그런 헛소리를 지껄여요?”그녀의 말에 공요가 순간 노발대발했다.“장군님께서 변방에서 나라를 지키면서 피 흘리며 싸우느라 얼마나 고생이신데. 연경의 그 쓸모없는 자식들은 할 일도 없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로 장군님을 모함하다니, 정말 너무하네요.”“확 죽여버려도 시원치 않은 놈들!”줄곧 침묵하던 유란이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반역죄는 참수를 당할만한 큰 죄이다. 그들이 아무리 한 점 부끄럼없이 떳떳하다고 해도 명성에 누가 될 것이고 사람들이 이런저런 추측을 늘려놓게 된다.“너의 신분이라면 사소한 일이라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또 계속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생기면 크게 떠들어 대거든.”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진작 예상했었다. 공로를 많이 세운 사람은 늘 이러했다.용국의 전쟁 여제인 조홍연은 삼십만의 범표사를 거느리고 있고 지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다. 이젠 왕이 될 일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엄청난 병권을 손에 쥔 데다가 출신까지 평범하지 않아 사람들이 질투하고 적대시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진우 오빠, 아무래도 돌아가 봐야겠어요. 이런 일이 터졌으니 개미 새끼 몇 마리를 죽이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요.”조홍연이 말했다.“그래. 급한 일부터 해결해야지.”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일을 절대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온몸에 똥물이 튈지도
“제후님께서 도련님이 오실 걸 알고 저더러 미리 나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늙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고요?”유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옆에 있는 유진우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은성종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제갈영군이 전화로 알렸거나 유태범의 사자가 먼저 와서 선수를 친 것이다.“도련님, 제후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늙은 집사가 허리를 굽히면서 손짓으로 안내했다.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여기까지 온 이상 중간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뚫고 나가야 했다.일행은 늙은 집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시설을 지난 후 식당에 도착했다.식당 안에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었다.유천우 일행은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도련님,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늙은 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제후님은요?”유천우가 물었다.“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늙은 집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손짓했다.“너희들, 얼른 와서 먹어.”“네.”근위병 몇 명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훈련을 잘 받은 근위병들은 3일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음식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유천우 대신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항상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은성종이 음식에 약을 넣었다면 그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모든 음식을 다 맛본 후에야 근위병들은 유천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
해 질 무렵,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은 변경 요새 도시인 태평에 도착했다.태평은 회음 제후 은성종의 영역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은성종의 통치 아래 짧은 10여 년 만에 서경에서 5위 안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의료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태평이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은성종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 덕이었다.만약 제갈영군이 난세의 영웅이라면 은성종은 세상을 다스린 명신이었다.그 시각 회음 제후 저택 밖.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길가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일행이 잇달아 내렸다.“형, 여기가 마지막 목적지예요.”유천우는 저택 간판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회음 제후 은성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의협심도 강해요. 게다가 제갈영군의 편지까지 있으니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은성종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유만수조차도 은성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어. 아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혹시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태범이 이미 제갈영군과 연락했으니까 분명히 은성종과도 접촉했을 거야. 은성종이 유태범한테 설득당해서 유태범의 진영에 합류할까 봐 걱정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야.”유진우가 분석했다.유태범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표기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지혜와 용맹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유태범도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유천우 일행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유태범이 아니었다.전에 제갈영군을 끌어들이려고 도시 두 개를 제시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장범규는
제갈영군의 날카로운 눈빛과 창을 바라보면서도 유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제후님, 도시 두 개의 유혹이 매우 큰 건 사실입니다. 저였더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제후님이 제 목숨으로 도시 두 개를 바꾸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아?”제갈영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아니면 내가 감히 널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죽는 건 당연히 두렵습니다. 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지 않아요.”유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르시면서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다 죽였죠. 그런 분이 저의 목숨 따위 가져가는 건 순간일 것이고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죽는 게 두렵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제갈영군은 조금 의아해했다.“죽는 걸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했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이 정말로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갈 수도 없어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재밌는 녀석이군.”제갈영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창을 내려놓았다.“피는 못 속인다더니 오늘 보니까 맞는 말 같군. 유씨 가문에는 쓸모없는 자식이 하나도 없어.”“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됐어. 농담 그만할게. 유태범의 부하들이 날 찾아온 건 맞지만 이미 내가 다 죽였어.”제갈영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몇 명의 호위병이 시신을 끌고 와 유천우의 발밑에 던졌다.“자, 얘네들이 유태범이 보낸 사람들이야.”제갈영군은 발로 시신을 툭툭 치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후님, 유태범이 주겠다는 도시 두 개를 포기하겠단 겁니까? 전 그렇게 좋은 걸 드릴 수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
유천우의 말은 강력한 힘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만약 서경이 무너진다면 8대 제후, 각 지역의 고위급 관료, 수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다들 서경에 뿌리 박고 사는 사람들이라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천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항상 앞뒤를 생각하거든. 만약 반란을 진압하다가 군대를 다 잃으면 어떡해?”주한휘는 여전히 망설였다.“제후님, 혹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서경왕부에서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한휘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실질적인 이득을 원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거나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기에 혹시라도 실패하면 큰 손실은 면할 수 없으니까.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천우야,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말로만 해선 안 돼.”주한휘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원하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큰소리치며 장담했다. 이 정도면 성의를 충분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알았어. 천우 네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이네.”주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내 딸인데 올해 25살이 됐는데도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만약 천우 너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다면 참 좋을 텐데.”“저요?”유천우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주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딸 해린이 절세미녀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얼굴도 나름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 만약 해린이를 아내로 들인다면 내조도 엄청 잘하는 현모양처가 될 거야.”현재 그에게는 돈과 인맥 모두 충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하늘보다 높은 권력이었다.서경왕이 죽은 지금 유천우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만약 딸이 유천우와 결혼한다면 나중에 서경의 왕비가 될 것이고 주한휘의 신
유천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예의를 갖춰서 설득하다가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만약 반란을 일으킨 4대 제후가 서경왕부에 굴복한다면 서경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때가 되면 서경왕부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4대 제후와 서경의 많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반역자들을 몰살할 것이다.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유천우의 말을 들은 장범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 덕이야. 반란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감사합니다. 제후님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 어려움을 꼭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말했다.“이건 내 제후령이야. 제후령만 있으면 가진의 병사를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장범규는 갑자기 병부를 꺼내 유천우에게 건넸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보여주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이건...”되레 유천우가 망설였다. 장범규가 이토록 통쾌하게 병부를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행동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사양하지 마. 비상시국이잖아. 이 제후령이 있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장범규는 병부를 유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봐.”장범규가 손을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일행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오늘 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30분도 채 안 되어 평양 제후 장범규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령마저 받았다.만약 이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
가진은 서경의 변방 도시이자 평양 제후 장범규의 영역이었다.무장 출신인 장범규는 서경왕 유만수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고 세운 공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 평양 제후가 된 후 서경의 변방을 지켰다.수년 동안 장범규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해왔다.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갑자기 평양 제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등 몇 명이 나란히 내렸다.“형, 여기가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네 저택이에요.”유천우가 간단하게 소개했다.“장범규는 그래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에요. 가진을 수년 동안 관리하면서 직무와 책임을 다했거든요.”“밖에 누구야?”저택 입구를 지키던 호위병 두 명이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유천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패를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서경왕의 둘째 아들 유천우다.”“도련님?”두 호위병은 유천우의 신분패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나머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유천우가 신분패를 거두어들였다.“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평양 제후님을 뵈러 왔어. 들어가서 보고 좀 올려줄래?”“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가서 제후님께 말씀드릴게요.”그중 한 호위병이 대답하고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부하들과 함께 부랴부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였다.“안녕하세요, 제후님.”유천우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서경왕의 둘째 아들이긴 해도 눈앞의 장범규는 제후이기에 신분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장범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일이었다.“천우야,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왔어?”장범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제후님, 서경왕부에 변고가 생겨서 제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변고가 생겼다고? 무슨 일인데?”장범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