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작검이라고?”허공의 보검을 보자 반유림의 눈동자가 순간 움찔했다.담담하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 무거운 표정이 됐다.용작검은 천하제일의 명검이며 그 주인은 더욱이 검도계의 최강자 검선 백준이었다.“백 선생께서 오셨다면 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오?”반유림의 종소리처럼 웅장한 목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그 말이 끝나자마자 구름 위에서 한 백의 남자가 천천히 하강하여 결국 바위 하나 위에 서서 반유림과 허공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모습을 드러낸 그는 다름 아닌 검선 백준이었다.백준이 등장하자 마치 신선이 인간 세상에 강림한 듯했다. 어떤 위협적인 기운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모든 이의 시선을 끌어당겼다.격렬히 싸우던 유진우와 부규환마저도 저절로 손을 멈추었다.“백 숙부?”그를 발견한 유진우의 마음에 기쁨이 솟구쳤다.유씨 가문의 세 고수 중에서 검선 백준의 실력이 가장 강했고 그의 검술은 모두 백준에게서 배운 것이었다.둘은 비록 스승과 제자라는 명분은 없었지만 실제로는 스승과 제자나 다름없었다.그렇게 따지고 보면 황은아는 백준의 손제자나 다름없었다.“이 괴물이 왜 여기 나타난 거지?”부규환은 눈썹을 찌푸리며 표정이 어두워졌다.검선 백준은 경천 랭킹 3위의 절대자로서 그의 검술은 천하제일이었다.그 누구도 그의 세 번의 검을 버텨낸 적이 없었다.백준의 실력 앞에서는 그와 반유림을 합쳐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백 선생께서 천 리 길을 오셨는데 내가 마중을 못 해 미안하오.” 반유림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반유림, 그 나이까지 먹고서 여기서 어린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게 무슨 능력이란 말이오? 용기 있다면 나와 겨뤄 봅시다? 내 세 검만 쓸 테니 막아낼 수 있다면 목숨은 살려드릴게.”백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이 말을 듣자 반유림의 눈가가 씰룩거렸다.이 말은 그가 전에 황은아를 대할 때 했던 말과 똑같았다.그것은 완전한 멸시였고 심지어 약간의 조롱이 섞인 태도로 상대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이었다.“백 선생
“아!”죽음의 위협 속에서 반유림은 연달아 분노의 울부짖음을 터뜨렸다.체내의 강기가 조수처럼 터져 나와 끊임없이 방어를 보강하고 균열을 메웠다.하지만 금색 거대 검의 위력은 점점 더 강해져 갈라진 틈을 메우자마자 또다시 균열이 생겨났다.반유림은 마치 온몸에 산이 얹힌 듯했고 이 압박을 견디지 못하면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다.이 순간에야 그는 검선 백준의 실력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뼈저리게 깨달았다.“음양 무극! 건곤 차법!”더는 버티기 어려워진 반유림은 자신의 정혈을 끌어내어 기문 비술을 사용했다.그가 맹렬히 발을 구르자 방호막 표면에 갑자기 소용돌이가 생겨나 금색 거대 검의 공포스러운 내리찍는 힘을 미친 듯이 흡수했다.소용돌이가 힘을 가득 채우고 금빛을 뿜어내자 반유림은 이를 악물고 강하게 위로 밀치며 포효했다. “부서져라.”윙!금색 거대 검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하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폭발하여 반짝이는 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그 안의 본체인 용작검은 백준의 앞으로 날아와 허공에 떠올랐다.“헉헉.”간신히 용작검을 밀어냈지만 반유림은 극도로 지친 채 거친 숨을 크게 내쉬었고 온통 땀에 젖은 채 다리까지 후들거렸다.방금 전의 그 일격은 너무나도 무시무시했다.기문 비술로 거대 검의 힘을 빨아들여 다시 반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뭐야? 벌써 지쳤어? 나는 이제 겨우 준비운동 밖에 못햇는데.”백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검지를 다시 들어 올리고 앞을 가리켰다. “두 번째 검 파군.”윙.용작검이 가볍게 울리더니 순간 끝없는 금빛을 폭발적으로 발산했다.금빛이 순식간에 형태를 이루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금빛 신룡으로 변화했다.금룡이 포효하며 위엄 넘치는 기세로 발톱을 휘두르며 반유림을 향해 달려들었다.“음양 무극! 건곤 차법!”반유림은 깜짝 놀라 다시 한번 기문비술을 펼쳐 금룡의 힘을 흡수하고 반사하려 시도했다.하지만 이번 상황은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금룡이 부딪치는 순간 방호막은 유리처럼 순식
검날이 나오기도 전인데 벌써 천지를 쪼개버릴 기세였다. 이번 공격은 앞선 두 번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무서웠다. 반유림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죽음의 공포가 치솟았다. “이런 망할 것들 왜 숨어있는 거야? 어서 나와서 도와줘.” 반유림은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우렁찬 고함이 온 산맥을 울렸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쪽에서 파란 그림자가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더니 번개같이 빠르게 날아왔다. 동시에 북쪽에선 검은 그림자가 숲속에서 튀어나와 검은 안개처럼 휘날리며 다가왔다. 가까이 와서 보니 그제야 알았다, 파란 그림자는 잘생긴 중년 남자였다. 그는 검을 꽉 안은 채 차가운 얼굴로 온몸에서 서릿발 같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풀과 꽃, 나무들이 하얗게 서리로 뒤덮였다. 그가 발을 디딘 곳은 백 미터씩이나 꽁꽁 얼어붙어서 누구도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검은 그림자는 생김새를 전혀 알아볼 수 없었고 몸 주변으로 검은 안개가 계속 모양을 바꾸며 감싸서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분이 안 됐다. “세상에나. 저 사람이 한서성의 성주 한서 아닌가? 어째서 여기에 왔지?” “뭐라고? 한서? 그 경천 랭킹 7위의 고수라고?”“한서뿐만이 아니라 틀림없이 저 검은 안개 속 사람은 블랙 랭킹의 주인이자 경천랭킹 9위의 고혼이야.” “먼저 대내 최고수 부규환 그 뒤엔 진무사 사장 반유림 이어서 검선 백준 이제는 한서와 고혼까지 왔네. 세상에 오늘은 진짜 신들의 한판 승부구나.”“이렇게 유명한 인물들을 한자리에서 보다니 이제 여한이 없어.” 한서와 고혼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경천 랭킹의 인물들은 전부 천하의 최정상급 고수들이었다. 평소엔 구경조차 힘든 인물들인데 한 명만 봐도 횡재인데 이렇게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한서성의 한서다. 검선한테 검술을 배우고자 찾아왔다.” 한서는 검을 품에 안은 채 싸늘하게 말했고 얼음장 같은 표정에는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백준이 경천 랭킹의 세 고수와 함께 산 정상으로 결판을 보러 갔다. 산밑에선 유진우가 여전히 모두의 타깃이었다. 하지만 아까 반유림이 노리고 있던 때보다는 지금 유진우의 부담이 훨씬 가벼워졌다. “은아야, 빨리 이거부터 먹어.” 유진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뒤로 물러나 다친 황은아에게 치료 약을 건네줬다. 황은아는 망설임 없이 삼켰다.창백했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조를 띄었다. 완전히 치료된 건 아니었지만 일단 상처는 잡혔다. “아저씨, 아까 그 백 선생님은 대체 누구시길래 그렇게 강해요?” 황은아가 물었다. “그분이 서경의 검선 백준이야.” 유진우가 설명했다. “정말요? 검선 백준?”황은아는 예쁜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는 강호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검선 백준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외할머니조차 존경하는 인물이었으니까.그의 검술은 천하제일이고 이미 검도의 최고 경지에 올랐으며 예로부터 지금까지 검도에서 백준과 비교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대단했던 이유가 바로 그가 그 유명한 검선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좋아하긴 이릅니다. 한서, 반유림, 고혼까지 다 경천 랭킹의 고수들입니다. 백준 삼촌이 그들을 이기려면 쉽지 않을 거예요. 우리도 아직 안전한 건 아니니까.”유진우는 부규환을 노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은아야, 방금 다쳤으니 더 싸우면 안 돼. 내가 이 사람들 붙잡을 테니 그 틈에 도망가. 절대 싸움에 연연하지 말고.” “아저씨, 날 뭐로 보는 거예요? 어떻게 아저씨 혼자 두고 도망칠 수 있겠어요?” 황은아가 서운한 듯 말했다.“그리고 나 아직 싸울 만해요. 진짜 싸움이 붙으면 아저씨 부담을 좀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잖아요.”“목숨이 제일 중요하니까 더는 위험에 빠뜨릴 수 없어.”유진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황은아가 다친 것도 너무 자책했는데 더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아저씨 내 목숨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가까워지자 그의 손목이 떨리더니 창궁검에서 수많은 검영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하늘을 뒤덮듯 부규환을 향해 공격했다. “노목 금강.” 부규환이 크게 외치자 체내에서 금빛 광채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3장 높이의 금강 법상을 형성했다. 금강 법상은 마치 갑옷처럼 부규환을 보호하고 있었다. 쨍쨍쨍.쏘아낸 하늘 가득한 검영들이 금강 법상에 부딪힐 때마다 마치 강철을 치는 것처럼 수많은 불꽃을 튀기며,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흥! 내 방어도 뚫지 못하면서 날 어떻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부규환이 오만하게 서서 위세를 떨쳤다. 유진우는 아무 말 없이 계속해서 강력한 공격을 이어갔다. 그의 창궁검은 더욱 빠르게 움직였고 쏟아내는 검영도 점점 더 많아졌다. 두 사람이 충돌할 때마다 발생하는 에너지 파동이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점점 더 거센 파도가 일었고 물결이 끊임없이 겹쳤다. 부규환도 단순 방어만 하지 않고 수시로 반격을 가해왔다.그의 동작은 호방하고 시원했으며 힘이 극도로 강해서 모든 수식마다 산이 붕괴되고 땅이 갈라질 듯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맨손으로도 창궁보검과 맞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싸움터에서 둘은 전투가 이어질수록 더욱 맹렬해져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부규환은 겉으로는 무시하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심하게 놀라고 있었다. 일 년 전과 비교하면 유장혁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예전에는 그의 검을 막는 데 힘의 십 분의 일만 써도 여유롭게 막을 수 있었는데하지만 지금은 부상 없이 방어하려면 팔 할의 힘을 써야만 했다. 이 기간의 실력 차이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다. 유진우가 부규환과 격전을 벌일 때 문관옥은 뒤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유진우에게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그는 망설임 없이 기습 공격을 가하려 했다. 그의 눈에는 목적만 달성하면 수단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도적이 되는 것 이것이 변하지 않는 법칙이었다.“이봐 경고하
한서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는 검을 배운 이래 모든 적을 물리쳤고 백 번 싸워 백 번 이겼고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운이 좋았군. 하지만 그만큼 안타깝기도 하군.” 백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음과 양의 두 극단이 있고 너무 강하면 쉽게 부러지며 정점에 오르면 반드시 떨어지는 법이다. 이는 영원한 진리지. 당신이 패배를 모른다면 어찌 검도의 극치를 이해할 수 있겠냐?' “너는 패배를 해봤다는 말이냐?” 한서가 되물었다. “물론 아니지.” 백준이 단번에 부정했다. “싸움에선 패배한 적 없지만 인간으로서 완전한 실패자였네.” 백준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전 반생을 오직 검술에만 매달렸고 많은 사람을 무시했고 많은 사람을 저버렸지요. 결국 홀로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후에 신분을 숨기고 전원생활을 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때서야 깨달았다. 인생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걸. 검도 따위는 정말 무의미했지.” “백준, 정말 실망스럽군.”한서가 분노하며 말했다.“검객으로서 검을 미치도록 사랑해야 하거늘 검도가 무의미하다 하니 더 이상 검선이란 두 글자가 어울리지 않다.” “한서, 내려놓거라.” 백준이 진중하게 충고했다. “검을 내려놓고 집착도 내려놓거라.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 자녀를 낳고 살아가는 그런 인생이 검보다 더 의미 있냐.” “그건 당신의 인생이고 나와는 상관없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이를 물리치고 천하제일이 되는 것이다.”한서가 차갑게 말했다. “천하제일이 된들 무슨 소용 있냐? 그저 헛된 이름일 뿐인데.”백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검을 쥔 사람이지 검에 지배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검을 사랑할 순 있어도 자신을 잃어선 안 된다. 뒤돌아보게, 당신 곁에 친족이나 친구가 있나? 속내를 나눌 사람이 있긴 한가?”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싸울 거면 싸우자.” 한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는 검술 시합을 위해 왔지 가르침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었다. 그 위
그 한 검이 갑옷 사천삼백을 부숴버렸다. 천지가 흔들리자 북방 오랑캐 십만 대군이 줄행랑을 쳤다. 그때부터 변방의 작은 성은 한서 성이란 이름을 얻었고 한서는 성주가 됐다. 지금까지도 한서성 백성들은 안락하게 살고 있고 감히 덤비는 자가 없다. 백준은 일찍 유명해졌지만 십 년을 숨어 살아서 예전의 날카로움은 사라졌다. 반면 한서는 딱 반대로 지금이 전성기고 점점 더 강해지는 중이다. 그래서 이번 승부는 누가 이길지 모른다.“강호인은 결국 강호인이라 큰 그림은 모르는군. 그렇게 허세 부리고 싶다면 실력이 어느 정돈지 보여주시지.” 반유림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 한서의 생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백준의 기력을 최대한 소진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물론 둘 다 크게 다치면 그게 최고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불가능에 가까웠다. 백준과 싸워보지 않은 자는 그 절대적인 강함을 절대 알 수 없다.대결 전에는 백준과 백 수는 겨룰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결과는 세 수도 버티지 못했다. 둘 다 경천 랭킹의 고수인데 이 실력 차는 너무 심했다. 한서가 대단하긴 해도 결국 8위에 불과해서 3위인 백준과는 아직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결심했다. 진짜로 구경만 하고 있진 않을 거였다. 백준에게 치명타를 날릴 기회만 오면 주저 없이 움직일 것이다.“백준, 이 검은 천외 한철로 만들었다. 추성이란 이름인데 길이가 4척 3촌 폭이 2촌이며 천하 고수들의 피를 마신 검이다.” 한서가 보검을 꺼내 모두 앞에 보여주었다. 푸른 빛을 내는 검이었고 검신이 길고 예리했으며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훌륭한 검이군.” 백준이 저절로 감탄하고는 한 손을 들어 자신의 검을 가슴 앞에 들며 말했다. “이 검은 용작이라 하지. 나와 20년을 함께했는데 뚫지 못할 것도 깨지 못할 것도 없어.” “천하제일의 명검이 역시 소문대로군.”한서가 천천히 추성검을 들어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쾅!엄청난 소리와 함께 한서의 추성검이 용작검과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두 검 끝이 맞닿자 무시무시한 에너지 파장이 일어났고 마치 바다가 뒤집히듯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지나가는 곳마다 바위가 부서지고 큰 나무들이 쓰러졌다. 멀리 서하사의 담장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절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때 산기슭에서는.모두가 머리 위에서 천둥이 치듯 한 소리를 듣고 올려다보니 하늘에서 빛의 파동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하늘을 가득 메워 별들과 구름이 흩어졌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모두가 무서운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산 정상에서 싸운 게 천만다행이었다.이런 일격이 사람들 사이에서 터졌다면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것이다. 한 검이 지나가자 한서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즉시 격렬한 공격을 시작했다. 첫 검은 단순한 탐색이었고 이제부터가 진짜 검술 실력을 겨루는 싸움이었다.한서는 한 손으로 검을 쥐고 끊임없이 공격했는데 검을 쓰는 속도가 너무 빨라 잔영만 보일 뿐 움직임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반유림과 고혼도 눈앞이 아찔할 정도였다. 한서의 검법은 너무 빠르고 교묘해서 도저히 방어가 불가능했다. 한 번 찌르는 검에 수백 가지 변화가 있었다. 검법이 완전히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보통의 대종사였다면 한서의 맹렬한 공격에 벌써 패배했을 것이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서의 상대는 명성 높은 검선 백준이었다. 한서가 어떻게 공격해도 백준의 용작검은 손쉽게 막아냈다. 가장 중요한 건 백준이 처음부터 끝까지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검술만으로 용작검을 원격 조종해 한서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점이었다. 누가 강하고 약한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젠장! 백준이 10년이나 묻혀있었는데도 검술이 이렇게 강하다니 한서가 큰일 났군.” 고혼이 음산하게 말했다.“혼자 싸우면 안 된다고 했는데 고집을 부리더니 이제 진퇴양난이군. 어떻게 마무리할지 보자고.” 반유림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백준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니 전혀 진심을 보이지 않고 있
“사철수 씨, 아직도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예요? 사진이라도 찍어줘요? 빨리 보물 지도를 찾아내세요.”불만으로 꼴 독 찼던 유태범은 못마땅한 얼굴로 사철수에게 화풀이했다.“알겠어요. 서두를게요.”유태범의 말에 사철수는 즉시 합금으로 되어 있는 대문 앞으로 다가가 채원진의 부러진 손을 들어 중간 부분에 있는 감응 위치를 살짝 눌렀다.띵 하는 소리와 함께 두터운 대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리자, 금속으로 만든 금고가 드러났다.금고는 약 33제곱미터 정도의 크기였고 한가운데에는 골드바가 사람의 키보다 더 높게 쌓여 있었다.골드바 외에도 그 주변에는 다양하면서도 진기한 보물들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비싸고 귀중한 물건들이었다.“이곳은 채원진의 개인 금고예요. 채원진은 마음에 드는 모든 물건을 전부 이곳에 수집했어요.”사철수가 설명했다.“보물들이 어마어마하네요.”유천우는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했다.“이것들을 전부 가지고 나가면 성을 하나 사고도 남겠네요.”“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호룡각의 다른 세 보물 창고에 비하면 눈앞에 있는 것들은 새 발의 피죠.”사철수가 설명했다.“정말이에요?”유천우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당신 말대로라면 호룡각의 보물을 전부 모으면 산더미가 되겠는데요?”“제가 직접 본건 아니지만 수십 년 동안 쌓아왔으니, 산더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거예요.”사철수는 진지하게 말했다.“좋아요. 아주 좋아요! 빨리 모든 보물을 긁어모으고 싶네요.”유천우는 정신이 번쩍 들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보물 지도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유태범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여기 있어요.”사철수는 맨 안쪽 선반으로 가서 위에 놓여있는 정교한 박달나무 상자를 꺼내 조심스럽게 유진우에게 건넸다.유진우가 열어보니 안에는 양피지 3장이 들어있었다. 모든 양피지에는 상세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지도 중앙에는 보물 창고의 위치가 금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보물 지도가 진짜라면, 지도에 그려져 있는
“보물 지도는 어디 있나요?”유진우가 추궁했다.“채원진의 지하 밀실에 있어요. 내가 직접 세자 전하를 모시지요.”사철수가 말했다.“지하 밀실?”유천우는 실눈을 뜨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속으로 다른 꿍꿍이를 꾸미는 건 아니죠? 나중에 나를 악랄하다고 탓하기 싫으면 그런 생각은 빨리 접는 게 좋을 거예요.”밀실 같은 건물에는 함정과 암기가 많이 설치되어 있는데 유천우는 사철수가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저는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아닙니까.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사철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앞서서 안내하세요.”유진우가 두 근위병에게 눈치를 주자 근위병 두 명이 와서 사철수를 일으켜 세웠다.“잠깐만요. 밀실에 있는 보물 상자를 열려면 채원진의 손이 필요해요.”사철수가 갑자기 말했다.“그건 쉽죠.”유천우는 즉시 칼을 빼 들어 채원진의 오른손을 잘라 사철수에게 건네며 말했다.“자. 선물이에요.”사철수는 징그러웠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채원진의 손을 받아 들고 앞장섰다.유진우와 몇몇 사람은 사철수를 따라 기지로 들어갔고 마침내 지휘실 입구까지 도착했다.사철수는 문을 열고 벽 쪽으로 다가간 다음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하나를 떼어냈다.그림 뒤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전혀 알아차리기 어려운 하나의 버튼이 있었다.사철수가 손을 내밀어 버튼을 누르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벽 전체가 갑자기 양쪽으로 열리더니 안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드러났다.사철수가 유진우를 포함한 몇 명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올라탄 뒤 스위치를 누르자 문이 닫히더니 천천히 지하로 내려갔다.반 시간 남짓 지나자 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몇 명 사람들의 눈에는 넓고 호화로운 지하 밀실이 들어왔다.말이 밀실이지 사실 호화 저택에 가까웠다. 안에는 없는 것 없이 다양한 생활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었고, 많은 물과 식량도 수집되어 있었는데 수십 년 동안 혼자 생활하기에는 충분한 수량이었다.“핵 방지
“유진우?”무릎을 꿇은 채 냉정한 표정을 한 유진우를 바라보는 사철수의 얼굴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놀라움과 기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더욱 컸다.흑용군이 매복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사철수는 이미 호룡각의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호룡각의 기지는 파괴되었고 채원진은 목숨을 잃었으며 사철수는 유진우한테 체포되었다. 하지만 사철수는 어쩌면 이게 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비록 사철수가 호룡각의 사람이긴 했지만, 서경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서경은 이미 사철수한테는 고향 같은 곳이었고 주변에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사철수가 저질렀던 많은 일들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했던 거라 마음이 늘 불편했었다.오늘,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모두 사철수의 업보였고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였다.“아저씨,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죠? 채원진이 패했으니, 당신도 패한 것과 마찬가지예요. 이제 와서 더 할말이 남았나요?”유진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기면 영웅이고 지면 도적이 되는 법이지요. 세자 전하께서 죽이시든 벌을 주든 저는 다 괜찮습니다. 다만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사철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했다.“당신이 지금 나한테 그런 조건을 내세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유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세자 전하, 죄인인 저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하지만 제 아내와 딸은 죄가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용서해 주십시오.”사철수는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머리를 세게 박으며 유진우에게 절을 올렸다.“당신 말대로 그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죠. 하지만 못난 남편과 아비 때문에 그들도 죄인이 된 겁니다. 설마 당신은 어리석게도 그렇게 큰 죄를 지어 놓고 가족은 아무 일 없이 무사할 거로 생각한 겁니까?”유진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세자 전하, 공을 세우는 거로 저의 죄를 보상하면 안 될까요? 세자 전하께서 소가 되라면 소가 될 것이고 말이 되라면 말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때 조무진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무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자 완전 무장을 한 군부가 보였는데 족히 수만 명은 되는 것 같았다.검은 갑옷을 입고 긴 칼을 허리에 찬 병사들은 기세가 매우 위풍당당했다.얼핏 보면 마치 강철로 되어 있는 호수 같았는데 멀리서부터 강한 압박감을 주는 이 부대는 바로 서경의 최강 정예 부대 흑용군이었다.“보아하니 사철수는 이미 체포된 것 같네요.”이청성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 흥용군의 리더는 바로 유천우였다.당시 유천우는 명령에 따라 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호룡각의 정예 부대를 미리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만든 뒤 절대적인 병력 우세로 오천여 명의 적을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체포했다.쿵 쿵 쿵!수만 명의 흑용군이 가까워질수록 그 압박감은 점점 더 강해졌다. 성벽 위에 있던 백호군들도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소문에 의하면 흑용군은 용국의 최강 군부로서 창시 이래 백전백승을 이뤘고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어떠한 군부도 흑용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없다고 했다.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그 소문은 거짓이 아닌듯했다. 흑용군의 강렬함과 살벌함은 충분히 다른 군부를 경시할 만했다.“형! 임무를 완성했어요. 호룡각의 남은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잡아들였어요.”유천우가 먼저 앞으로 다가와 보고했다.“잘했어.”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쪽은 어떻게 됐어요? 채원진은 죽었어요?”유천우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말했다.“머리가 잘렸는데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조무진은 발로 채원진의 머리를 슬쩍 건드리며 말했다.채원진의 머리는 축구공처럼 땅바닥에서 굴러 유천우의 발밑에 멈추었다.“뭐야! 이렇게 못생겼다고? 어쩐지 맨날 가면을 쓰고 다니더라니.”유천우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하고 서경을 해친 놈을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채원진은 이미 죽었고 밑에 있던 정예들은 모두 체포되었으니, 호룡각은 이제 완전히 멸망한 셈이에요.
채원진은 죽고 호룡각 기지는 함락되었다. 이로써 호룡각은 조직 전체가 완전히 멸망했고 남은 사람이라고는 흩어져 있는 병사들뿐이라 크게 위험이 되지는 않았다.하지만 유진우는 방심하지 않고 호룡각이 관련된 모든 사람은 전부 체포하라고 명을 내렸다. 만약 그들이 자진해서 항복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지만 끝까지 저항한다면 남은길은 죽음뿐이었다.“형, 드디어 이 재앙 같았던 놈을 처리했네. 축하해!”조무진은 앞으로 걸어가 채원진의 시신을 발로 차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미소를 지었다.“다 네 덕분이야. 네가 20만 명의 백호군을 데리고 채원진의 퇴로를 끊어놓지 않았다면 채원진은 또 다른 기회를 찾아 연명했을지도 몰라.”유진우가 말했다. 그는 채원진을 죽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다. 결국 채원진은 죽었고 그는 승리했다.“난 별로 한 게 없어. 고마워할 거면 공주마마께 고마워해야지.”조무진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있는 이청성을 보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공주마마께서 형을 돕는다고 엄청 바쁘셨어.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독촉하느라 발등에 불이 붙을 뻔했다니까.”“조무진 씨!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이청성은 앞으로 걸어 나오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별거 아니에요. 공주마마께서 학식과 도리가 깊고 외모와 지혜가 뛰어나다고 칭찬하고 있었어요.”조무진은 아첨하며 웃음을 지었다.“흥!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요.”이청성은 조무진을 흘겨보며 말했다.“공주마마, 감사합니다.”유진우는 공수하며 말했다.“뭘 그렇게 예의를 갖춰요?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끝까지 도와줬을 뿐이에요.”이청성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게다가 채원진은 우리 공공의 적이잖아요. 유진우 씨뿐만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전체적으로 보면 백성을 위해 나쁜 놈을 제거 한 거죠.”“공주마마의 대의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이 얘기는 그만하죠. 비록 채원진이 죽었다고 하
반면 채원진은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십여 미터나 날아가 끊임없이 피를 토했다. 팔 전체가 파열되었고 용담적염창도 튕겨 나갔으며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채 바닥에 누워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도련님, 괜찮으십니까?”홍복홍은 재빨리 달려가 떨고 있는 유진우를 부축했다.“괜찮아요.”유진우는 몸에 기혈이 들끓고 팔이 저리고 검도 제대로 잡지 못할 것 같았다.비록 채원진이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방금 전력으로 내뿜은 일격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힘이었고 결국 유진우도 피를 토하고 말았다.채원진의 몸에 있는 멸신독이 퍼지지 않았다면 오늘 그를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다.“왜? 이럴 수 없어. 절대 이럴 수는 없어...”땅에 엎드려 맥 빠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채원진의 두 손은 긴 손가락 자국을 남긴 채 땅바닥에 푹 꺼져 있었다.안 그래도 흉측하던 얼굴이 더욱 흉측해 보였다.“남길 유언이라도 있나?”유진우는 창궁검을 손에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채원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한 세대의 효웅이었던 채원진은 마치 죽음을 앞둔 늙은 개처럼 낭패와 처참함 그리고 빨리 죽기 위해 발악하는 듯한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유진우! 이 비열한 새끼야! 네가 이런 모함을 꾸미지 않았다면 내가 패할 가능성은 절대 없었고 이 지경까지 되지도 않았을 거야. 인정 못 해. 죽어도 인정 못 해!”채원진은 미친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그의 상대는 용국의 지존인 서경 왕 유만수처럼 천하를 뒤흔든 거물이었는데,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 몇 명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채원진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비열?”유진우는 콧방귀를 뀌고 말을 이었다.“이런 단어가 네 입에서 나오니까 정말 어이없구나. 사람을 시켜서 내 아버지를 암살하고 이간질로 삼촌을 유혹하여 반역을 도모해 서경을 혼란에 빠뜨리고. 네가 했던 일 중에 어느 하나 비열하지 않은 일이 없어. 죽을 때가 되니 이제 와서 도리를 따지는 거야? 쪽팔리지도 않아? 그리고 네가 인정하든 못하든 난
“채원진, 나라와 백성을 해친 네 죄가 극악무도하니 인제 그만 포기하고 꼼짝 말거라. 반항한다면 사살할 것이다.”이청성은 손에 황권을 상징하는 금색 영패를 쥔 채 차가우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청성이 이번에 유진우를 따라 서경에 온 이유는 바로 호룡각에 남아있는 잔당을 대처하기 위해서였고 여러 가지 경우를 대비해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병력을 이동하라는 칙령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이성민이 직접 내린 거였고 그 덕분에 20만 명의 백호군을 움직여 이번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왜?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이청성을 본 채원진은 절망하는 얼굴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그의 입과 코에서는 검붉은 피가 더욱 많이 흘러내렸다.“채원진, 넌 이제 끝났어. 판을 뒤집을 가능성은 절대 없으니 그만 포기해. 오늘이 지나면 호룡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어둠 속에 숨어 살던 추악한 놈들은 자기가 했던 행동에 책임지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유진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난 아직 패한 거 아니야! 절대 그럴 수 없어!”채원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내가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이제 겨우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너희 같은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들 때문에 무너질 거 같아?”오랜 세월을 참고 견뎌 호룡각의 각주가 된 채원진은 이제 곧 막강한 권세를 누릴 줄 알았는데, 겨우 며칠도 안 돼 큰 타격을 입고 궁지까지 내몰리고 말았다.채원진은 단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어린 녀석들을 감당하지 못해 실패하고 죽는다는 게 달통 되지 않았다.“채원진, 아직도 모르겠어?”조무진은 담담하게 말했다.“용맥이 잘려서 사라질 때부터 호룡각 말살은 시작된 거야. 그때 너희들은 이미 대세와 기운을 잃었어. 만약 너희들이 어둠 속에 숨어서 연명한다면 몇 년 더 살 수는 있겠지만 그런 탐욕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니까 서경왕부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지. 그 결정을 내리는 순간부터 넌 이미
“무슨 헛소리야! 호룡각의 사람이 아니면, 서경왕부의 사람이라도 된다는 거야?”채원진은 눈이 시뻘게져 소리쳤다.“맞아. 내 사람들이야.”유진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네가 부대를 이끌고 우리를 매복시키려 할 때 내 병마들은 그 허점을 틈타 이미 너의 기지를 점령했어. 그러니까 이제 이곳은 내 소유야.”“유장혁! 그런 헛소리를 내가 믿을 거 같아?”채원진은 험악한 얼굴로 소리쳤다.“아무리 내가 많은 정예병들을 데리고 나갔다고 하지만, 기지 내에 적어도 3만 명의 병마가 있었고 각종 방어 조치까지 더해져 10만 명 이상의 병력이 없다면 감히 공격도 못해. 서경의 흑용군은 모두 내 감시하에 있었는데 만약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잖아.”“누가 그래? 내가 흑용군을 호출했다고?”유진우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생각하는 걸 나라고 생각 못 할 것 같아? 너의 잔당들을 토벌하기 위해 이번에 특별히 지원군들을 불렀지.”어젯밤, 유천우한테 최대한 빠른 속도로 서신을 전하게 한 이유가 바로 구원병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구원병이 제때 도착해 유진우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될 수 있었다.“지원병? 무슨 지원병?”채원진은 왠지 불안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서경과 가장 가까운 부대는 서남 지역에 있는 백호군이고, 백호군의 사령관은 전쟁의 신 조무진이야.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무진은 나와 아주 친한 사이라 도움을 좀 받았지.”유진우의 담담한 대답에 채원진은 못 믿겠다는 듯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백호군? 조무진? 그럴 리가 없어. 헛소리 하지 마!”“못 믿겠으면 뒤돌아봐.”유진우는 설명 대신 채원진의 뒤를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뭔가를 느낀 듯한 채원진이 뒤를 돌아보니 성벽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은색 갑옷을 입은 준수한 외모의 한 젊은 남자가 정예 장병들과 함께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젊은 남자는 다름 아닌 전쟁의 신 조무진이었다.“채원진, 어때? 이제 현실이 좀 받아들여져
“거의 거의 다 왔어. 곧 도착이야.”채원진은 정혈을 끌어 연소시키며 겨우 도망쳤다. 도중에 끊임없이 피를 토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한바탕 전력 질주 끝에 드디어 채원진의 눈에는 기지 앞의 높은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성벽만 넘으면 그는 안전할 수 있었다.채원진은 기지 안에 많은 영단 묘약이 있으니, 그의 독을 치료할 약이 기필코 있을 거로 생각하며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성문을 열어라! 어서 빨리 성문을 열어!”성벽 지하까지 돌진한 채원진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비틀거리며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얼굴은 짙은 보라색으로 변해있었고 입과 코에서는 여전히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슝 슝 슝.채원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벽 위에서 갑자기 팔뚝 굵기의 쇠뇌가 몇 대 발사되었는데 10만여 근의 힘을 숨기고 있는 쇠뇌의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놀란 채원진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팡 팡 팡.몇 대의 쇠뇌는 채원진의 눈앞에 떨어지며 엄청난 위력과 함께 뒤쪽 끝을 조금 남긴 채 반이 넘게 땅바닥 깊이 박혀 들어가며 굉음을 냈다.“야! 너희들 미쳤어? 나 호룡각의 객주야! 눈 똑바로 뜨고 잘 봐!”채원진이 성벽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은 오히려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무기를 들어 채원진에게 겨누었다.각종 중화력 무기도 가동되었고 수많은 포구와 총구가 동시에 성벽 아래에 있는 채원진을 겨누었다.누군가의 명령이 내려지기만 하면 채원진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었다.“눈은 멋으로 붙이고 다니는 거야? 나도 못 알아봐? 당장 성문을 열어! 안 그러면 전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화가 치밀어 오른 채원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되려 집 문 앞에서 막힐 줄이야.‘이 녀석들, 도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채원진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채원진, 너한테 남은 건 죽음뿐이야.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면 고통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