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준이 경천 랭킹의 세 고수와 함께 산 정상으로 결판을 보러 갔다. 산밑에선 유진우가 여전히 모두의 타깃이었다. 하지만 아까 반유림이 노리고 있던 때보다는 지금 유진우의 부담이 훨씬 가벼워졌다. “은아야, 빨리 이거부터 먹어.” 유진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뒤로 물러나 다친 황은아에게 치료 약을 건네줬다. 황은아는 망설임 없이 삼켰다.창백했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조를 띄었다. 완전히 치료된 건 아니었지만 일단 상처는 잡혔다. “아저씨, 아까 그 백 선생님은 대체 누구시길래 그렇게 강해요?” 황은아가 물었다. “그분이 서경의 검선 백준이야.” 유진우가 설명했다. “정말요? 검선 백준?”황은아는 예쁜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는 강호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검선 백준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외할머니조차 존경하는 인물이었으니까.그의 검술은 천하제일이고 이미 검도의 최고 경지에 올랐으며 예로부터 지금까지 검도에서 백준과 비교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대단했던 이유가 바로 그가 그 유명한 검선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좋아하긴 이릅니다. 한서, 반유림, 고혼까지 다 경천 랭킹의 고수들입니다. 백준 삼촌이 그들을 이기려면 쉽지 않을 거예요. 우리도 아직 안전한 건 아니니까.”유진우는 부규환을 노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은아야, 방금 다쳤으니 더 싸우면 안 돼. 내가 이 사람들 붙잡을 테니 그 틈에 도망가. 절대 싸움에 연연하지 말고.” “아저씨, 날 뭐로 보는 거예요? 어떻게 아저씨 혼자 두고 도망칠 수 있겠어요?” 황은아가 서운한 듯 말했다.“그리고 나 아직 싸울 만해요. 진짜 싸움이 붙으면 아저씨 부담을 좀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잖아요.”“목숨이 제일 중요하니까 더는 위험에 빠뜨릴 수 없어.”유진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황은아가 다친 것도 너무 자책했는데 더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아저씨 내 목숨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가까워지자 그의 손목이 떨리더니 창궁검에서 수많은 검영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하늘을 뒤덮듯 부규환을 향해 공격했다. “노목 금강.” 부규환이 크게 외치자 체내에서 금빛 광채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3장 높이의 금강 법상을 형성했다. 금강 법상은 마치 갑옷처럼 부규환을 보호하고 있었다. 쨍쨍쨍.쏘아낸 하늘 가득한 검영들이 금강 법상에 부딪힐 때마다 마치 강철을 치는 것처럼 수많은 불꽃을 튀기며,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흥! 내 방어도 뚫지 못하면서 날 어떻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부규환이 오만하게 서서 위세를 떨쳤다. 유진우는 아무 말 없이 계속해서 강력한 공격을 이어갔다. 그의 창궁검은 더욱 빠르게 움직였고 쏟아내는 검영도 점점 더 많아졌다. 두 사람이 충돌할 때마다 발생하는 에너지 파동이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점점 더 거센 파도가 일었고 물결이 끊임없이 겹쳤다. 부규환도 단순 방어만 하지 않고 수시로 반격을 가해왔다.그의 동작은 호방하고 시원했으며 힘이 극도로 강해서 모든 수식마다 산이 붕괴되고 땅이 갈라질 듯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맨손으로도 창궁보검과 맞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싸움터에서 둘은 전투가 이어질수록 더욱 맹렬해져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부규환은 겉으로는 무시하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심하게 놀라고 있었다. 일 년 전과 비교하면 유장혁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예전에는 그의 검을 막는 데 힘의 십 분의 일만 써도 여유롭게 막을 수 있었는데하지만 지금은 부상 없이 방어하려면 팔 할의 힘을 써야만 했다. 이 기간의 실력 차이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다. 유진우가 부규환과 격전을 벌일 때 문관옥은 뒤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유진우에게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그는 망설임 없이 기습 공격을 가하려 했다. 그의 눈에는 목적만 달성하면 수단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도적이 되는 것 이것이 변하지 않는 법칙이었다.“이봐 경고하
한서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는 검을 배운 이래 모든 적을 물리쳤고 백 번 싸워 백 번 이겼고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운이 좋았군. 하지만 그만큼 안타깝기도 하군.” 백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음과 양의 두 극단이 있고 너무 강하면 쉽게 부러지며 정점에 오르면 반드시 떨어지는 법이다. 이는 영원한 진리지. 당신이 패배를 모른다면 어찌 검도의 극치를 이해할 수 있겠냐?' “너는 패배를 해봤다는 말이냐?” 한서가 되물었다. “물론 아니지.” 백준이 단번에 부정했다. “싸움에선 패배한 적 없지만 인간으로서 완전한 실패자였네.” 백준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전 반생을 오직 검술에만 매달렸고 많은 사람을 무시했고 많은 사람을 저버렸지요. 결국 홀로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후에 신분을 숨기고 전원생활을 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때서야 깨달았다. 인생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걸. 검도 따위는 정말 무의미했지.” “백준, 정말 실망스럽군.”한서가 분노하며 말했다.“검객으로서 검을 미치도록 사랑해야 하거늘 검도가 무의미하다 하니 더 이상 검선이란 두 글자가 어울리지 않다.” “한서, 내려놓거라.” 백준이 진중하게 충고했다. “검을 내려놓고 집착도 내려놓거라.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 자녀를 낳고 살아가는 그런 인생이 검보다 더 의미 있냐.” “그건 당신의 인생이고 나와는 상관없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이를 물리치고 천하제일이 되는 것이다.”한서가 차갑게 말했다. “천하제일이 된들 무슨 소용 있냐? 그저 헛된 이름일 뿐인데.”백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검을 쥔 사람이지 검에 지배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검을 사랑할 순 있어도 자신을 잃어선 안 된다. 뒤돌아보게, 당신 곁에 친족이나 친구가 있나? 속내를 나눌 사람이 있긴 한가?”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싸울 거면 싸우자.” 한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는 검술 시합을 위해 왔지 가르침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었다. 그 위
그 한 검이 갑옷 사천삼백을 부숴버렸다. 천지가 흔들리자 북방 오랑캐 십만 대군이 줄행랑을 쳤다. 그때부터 변방의 작은 성은 한서 성이란 이름을 얻었고 한서는 성주가 됐다. 지금까지도 한서성 백성들은 안락하게 살고 있고 감히 덤비는 자가 없다. 백준은 일찍 유명해졌지만 십 년을 숨어 살아서 예전의 날카로움은 사라졌다. 반면 한서는 딱 반대로 지금이 전성기고 점점 더 강해지는 중이다. 그래서 이번 승부는 누가 이길지 모른다.“강호인은 결국 강호인이라 큰 그림은 모르는군. 그렇게 허세 부리고 싶다면 실력이 어느 정돈지 보여주시지.” 반유림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 한서의 생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백준의 기력을 최대한 소진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물론 둘 다 크게 다치면 그게 최고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불가능에 가까웠다. 백준과 싸워보지 않은 자는 그 절대적인 강함을 절대 알 수 없다.대결 전에는 백준과 백 수는 겨룰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결과는 세 수도 버티지 못했다. 둘 다 경천 랭킹의 고수인데 이 실력 차는 너무 심했다. 한서가 대단하긴 해도 결국 8위에 불과해서 3위인 백준과는 아직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결심했다. 진짜로 구경만 하고 있진 않을 거였다. 백준에게 치명타를 날릴 기회만 오면 주저 없이 움직일 것이다.“백준, 이 검은 천외 한철로 만들었다. 추성이란 이름인데 길이가 4척 3촌 폭이 2촌이며 천하 고수들의 피를 마신 검이다.” 한서가 보검을 꺼내 모두 앞에 보여주었다. 푸른 빛을 내는 검이었고 검신이 길고 예리했으며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훌륭한 검이군.” 백준이 저절로 감탄하고는 한 손을 들어 자신의 검을 가슴 앞에 들며 말했다. “이 검은 용작이라 하지. 나와 20년을 함께했는데 뚫지 못할 것도 깨지 못할 것도 없어.” “천하제일의 명검이 역시 소문대로군.”한서가 천천히 추성검을 들어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쾅!엄청난 소리와 함께 한서의 추성검이 용작검과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두 검 끝이 맞닿자 무시무시한 에너지 파장이 일어났고 마치 바다가 뒤집히듯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지나가는 곳마다 바위가 부서지고 큰 나무들이 쓰러졌다. 멀리 서하사의 담장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절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때 산기슭에서는.모두가 머리 위에서 천둥이 치듯 한 소리를 듣고 올려다보니 하늘에서 빛의 파동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하늘을 가득 메워 별들과 구름이 흩어졌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모두가 무서운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산 정상에서 싸운 게 천만다행이었다.이런 일격이 사람들 사이에서 터졌다면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것이다. 한 검이 지나가자 한서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즉시 격렬한 공격을 시작했다. 첫 검은 단순한 탐색이었고 이제부터가 진짜 검술 실력을 겨루는 싸움이었다.한서는 한 손으로 검을 쥐고 끊임없이 공격했는데 검을 쓰는 속도가 너무 빨라 잔영만 보일 뿐 움직임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반유림과 고혼도 눈앞이 아찔할 정도였다. 한서의 검법은 너무 빠르고 교묘해서 도저히 방어가 불가능했다. 한 번 찌르는 검에 수백 가지 변화가 있었다. 검법이 완전히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보통의 대종사였다면 한서의 맹렬한 공격에 벌써 패배했을 것이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서의 상대는 명성 높은 검선 백준이었다. 한서가 어떻게 공격해도 백준의 용작검은 손쉽게 막아냈다. 가장 중요한 건 백준이 처음부터 끝까지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검술만으로 용작검을 원격 조종해 한서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점이었다. 누가 강하고 약한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젠장! 백준이 10년이나 묻혀있었는데도 검술이 이렇게 강하다니 한서가 큰일 났군.” 고혼이 음산하게 말했다.“혼자 싸우면 안 된다고 했는데 고집을 부리더니 이제 진퇴양난이군. 어떻게 마무리할지 보자고.” 반유림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백준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니 전혀 진심을 보이지 않고 있
윙!굉음이 울렸다. 육망성진의 정중앙에서 거대한 얼음 검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얼음 검은 길이가 사장 너비가 오척으로 사람의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극한의 한기를 띠고 있어 마치 지옥에서 뽑아낸 듯했다. 한기가 빠르게 퍼져나가 순식간에 수백 미터 밖까지 뻗어갔고 지나가는 곳마다 만물이 얼어붙었다. 반유림과 고혼 같은 강자들도 한기에 침습 당하자 저도 모르게 전율했다. “이게 무슨 검법이지? 이런 건 처음 보는군!” 반유림이 눈을 크게 떴다. 한서의 얼음 검은 강기로 만든 게 아니라 진법으로 불러낸 것이라 위력이 백배는 더 강했다. 그 안에는 천지를 멸할 듯한 힘이 담겨있었다.이 검이 나가면 검선 백준도 막아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 검의 이름은 멸세라고 하지. 내가 극한의 땅에서 꼬박 8년을 보냈는데 바로 언젠가 너를 이기기 위해서였어. 이 검은 단 한 번의 공격만 가능하고 그 후엔 완전히 부서질 것이야.” “백준 내 이 일격을 받아낼 수 있겠나?”한서가 거대한 검 자루를 양손으로 잡자 검 안에 담긴 무시무시한 힘에 그의 두 손이 저도 모르게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일격은 이미 그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다. 한 번 찌르면 성공하거나 목숨을 걸어야 했다. “받아낼 수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찔러봐야 알 수 있지 않겠나?” 백준이 담담히 말했다. “좋다. 그럼 이 멸세검의 위력을 한번 맛보거라.”한서가 고함을 지르며 온몸의 강기를 남김없이 뿜어내어 멸세검에 불어넣었다. 그러고는 양발로 세게 땅을 박차자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바위 지면에 구덩이가 생겼다. 한서는 거대한 멸세검을 밀며 백준을 향해 세차게 돌진했다.검날이 지나가는 곳마다 만물이 정적에 빠졌다. 화초와 나무는 물론 천지의 영기까지 모조리 얼어붙었다.공격의 표적이 된 백준은 멸세검이 접근하기도 전에 무형의 압박감을 느꼈다. 이런 일은 오래간만이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서의 이 일격은 자신이 진심을 보여야 할
폭발 직후 아수라장이 된 산 아래와는 달리 산 정상은 조용하였다. 폭발의 파장이 그치자 마치 강풍이 휘몰아친 것처럼 황지로 되어버린 진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하사는 폐허로 되었고 그 많던 초목도 전부 뿌리째로 사라졌다. 관전하던 반유림과 고혼조차 폭발의 여파에 100여 미터나 뒤로 물러났다. 그 시각 산 정상에서 백준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용작검이 그의 앞에서 이따금 금광을 뿜어냈다. 10여 미터밖에 푸른색의 추성검이 땅바닥에 꽂혀있었고 한서의 안색은 어두웠다. 엄지와 검지 사이가 찢어져 새빨간 피가 바위 우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팔은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한서, 네가 졌다.” 백준이 입을 열었다. “너의 검술은 대단하나 아쉽게도 조금 부족해.” “누가 졌다고 그래?” 한서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결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시도하지 않은 검법이 하나 남았어. 만약 이것도 막을 수 있다면 난 이후 검에서 손을 뗄게!”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백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넌 아직 젊어. 기회가 넘치는데 왜 굳이 자기 자신한테 못되게 구는 거야?” “만약 천하의 일인자가 될 수 없다면 내 삶은 의미가 없어!” 한서는 더는 말을 하지 않고 땅 위에 꽂혀있는 추성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찔렀다. 그가 공격하는 순간 그의 몸 표면에서 농후한 피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강대한 힘이 들어있는 피안개는 주위의 천지 영기를 끊임없이 빨아들였다. 순간 한서의 분위기가 돌변하였다. 속도와 힘도 눈에 띄게 강해졌고 강기의 두터움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을 보였다. 마치 경계를 타파한 듯하였다. “세상에! 한서 이거 목숨을 걸었네!” 이 장면에 고혼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고혼! 준비해, 우리의 기회가 왔어!” 반유림은 놀라워하는 대신 기쁨에 흥분하였다. 백준과 정면승부하여 그를 이기기는 너무나 힘들다. 그러기에 그들은 반드시 기습하는 수단으로 그한테 치명타를 주어야만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
두 검날이 부딪친 순간 한서의 혈색 장검이 터지면서 피안개로 변하여 소실되었다. 인검합일에 이른 한서는 그와 동시에 튕겨 나갔다. 안색은 창백하였고 뜨거운 피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용작검도 10여 미터 바깥으로 튕겨 나가 챙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바위에 꽂혔다. “좋은 기회다! 지금이야!” 용작검이 잠시 공제를 잃은 모습에 반유림의 눈이 번쩍였다. 그는 두말하지 않고 공격에 나섰다. 그는 얼른 활을 겨눈 뒤 온몸의 강기를 이용하여 기운이 일렁이는 검은 화살을 만들어내었다. 검은 화살은 광택이 일렁이었고 차가운 기운이 내뿜어져 나왔다. 그는 재빠르게 활을 겨눠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검은 빛으로 변화하여 순식간에 백준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이 화살은 빠르고 날쌔서 아무런 징조도 없었거니와 시기도 딱 알맞았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기습이었다. “네가 이러고도 안 죽나 보자!” 반유림의 입가에는 음습한 미소가 어렸다. 백준의 어검술은 대단하나 한 가지 큰 약점이 있다. 바로 근전싸움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방금의 충격에 용작검이 잠깐 공제를 잃었다. 백준의 손에 아무런 무기도 없어 그의 전투력도 따라서 많이 줄어들었다. 반유림은 바로 그걸 노려서 한방에 백준을 무너뜨릴 생각이다! “스스스...”반유림이 기습을 하자 고혼도 손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검은 안개로 변하더니 땅 밑으로 스며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이미 백준의 뒤에 위치하였다. 검은 안개 속에서 날카로운 강철 발톱이 백준의 등을 할퀴였다. 소리 소문 없으나 살기로 충만하였다. “쉬익!” 검은 화살이 백준의 가슴에 꽂히려는 찰나 백준이 갑자기 두 손가락으로 그 화살을 가볍게 집었다. “윙!” 거대한 힘을 가진 검은 화살은 순식간에 그대로 멈추었다. 화살 뒤의 깃털은 요란하게 요동치었으나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손가락으로 검은 화살을 집은 동시에 백준은 몸을 돌려 고혼이 휘두르는 강철 발톱도 잡았다. 이 둘이 앞뒤로
고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며 바로 땅에 무릎을 꿇고 세 번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비록 똑같이 연기였지만 조군영보다는 훨씬 진실되어 보였다.“표기대장군 도착하셨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곧이어 금빛 갑옷을 입고 기상이 비범한 중년 남자가 급하게 걸어 들어왔다.이 사람이 바로 일품 표기대장군 유태범이었다!유태범은 표기대장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만수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유태범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고 천부적 재능이 있어 모든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만약 유만수가 없었다면 분명 유씨 가문의 가장 빛나는 천재였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만수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유태범을 보자 조군영과 고원은 즉시 가식적인 표정을 거두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그들 둘은 모두 유태범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진정한 측근 장수들이었다.마치 유만수와 석태혁의 관계처럼 영광도 함께 하고 손실도 함께했다.“형님!”유태범은 두 심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당에 들어서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떨리며 얼굴에는 비통함과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어찌 이럴 수가? 우리 형님이 어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짓입니까?!”유태범이 붉은 눈으로 연달아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호룡각의 잔당들입니다. 그들이 자객을 부내에 잠입시켜 어젯밤 어르신을 암살했습니다.” 이의진의 얼굴이 흐리멍덩했다.“호룡각?”유태범이 이를 갈며 분노에 차 있다가 즉시 고함쳤다. “누구 없느냐! 즉시 군대를 집결시켜 전 성을 수색하라. 반드시 범인을 체포해야 한다!”“잠깐만요!”이의진이 갑자기 나서서 제지했다.“태범 씨, 매우 비통한 것을 알지만 지금은 아직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습니다.”“형님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무
이 말이 나오자 조군영과 고원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두 사람이 오늘 온 것은 본래 기세를 과시하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의진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입을 열자마자 반역이라는 죄명을 들이대다니.이런 죄가 뒤집어씌워진다면 그들은 아마 왕부의 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마마, 농담 마십시오. 반역은 사형감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런 일은 감히 못 하지요!” 고원이 연달아 해명했다.“맞습니다. 저희는 왕께 항상 충성을 다해왔는데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조군영도 따라서 부인했다.비록 두 사람 모두 그런 야심이 조금은 있었지만 명백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반역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갑옷을 입고 부내에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규칙도 모르십니까?” 이의진이 조금도 봐주지 않고 꾸짖었다.그저 이품 장군일 뿐인데 군권이 조금 있다고 감히 왕부 안에서 눈깔을 찌푸리고 있다니.유만수가 살아있을 때 이 둘은 감히 이러지 못했다.“아이고! 제 정신 좀 보세요, 왕부의 규칙을 잊었네요.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군영이 헛웃음을 지었다.이어서 갑옷을 벗고 차고 있던 칼을 내려 왕부의 경비에게 건넸다.“저희가 급히 오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으니 개의치마시지요.” 고원이 웃으며 말했고 즉시 갑옷과 칼을 벗었다.이 광경을 보고 이의진의 안색이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지만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왕께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저희 둘이 특별히 문안드리러 왔습니다.”고원이 가식적으로 말했다.“소식통이 꽤나 빠르군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늦었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두 사람이 의아한 척했다.이의진은 설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영당으로 향했다.왕부 밖은 비록 동정이 없었지만 왕부 안에는 이미 흰 만장이 가득
“알겠습니다. 제가 경비병 신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손도운이 결국 타협했다.비록 위험이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오 무렵, 서경 왕부 안.비록 유만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봉쇄되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관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어떤 이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을 왔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보국대장군 도착!”“운미대장군 도착!”왕부 문 앞에서 두 번의 외침이 들렸다.곧이어 갑옷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중년 남자 둘이 각각 친병들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왔다.이 친병들은 모두 허리에 장도를 차고 있었고 보기에도 험상궂었다.온 이들은 바로 이품 관직인 보국대장군 조군영과 운미대장군 고원이었다.“두 분, 왕부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갑옷과 무기를 해제하셔야 합니다.”한 왕부 친위가 조군영과 고원을 막아서며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흥! 난 밖에 나올 때 갑옷을 벗지 않아. 꺼져!” 조군영이 노하여 꾸짖었다.“조 장군, 이건 왕부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시기 바랍니다.”왕부 친위가 말했다.“규칙? 나한테 감히 규칙을 운운한 건가?”조군영이 왕부 친위의 얼굴을 때리며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규칙을 들먹이며 나를 압박하느냐? 죽고 싶나?”“조 장군, 소인도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것뿐입니다.” 왕부 친위는 동요하지 않았다.“헛소리 작작 하고 비켜.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벨 것이다!”조군영이 갑자기 칼을 뽑아 왕부 친위의 목에 겨누었고 그의 모습은 매우 포악하고 극도로 횡포했다.“제 머리를 베신다 해도 규칙은 지켜야 합니다.” 왕부 친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 개자식! 관짝을 보기 전에는 정신을 못 차리겠구나!”조군영은 마침내 화를 내며 칼을 거세게 들어 왕부 친위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멈추세요!”이때 한 소리의 여성의 호통이 울렸다.삼베 흰옷을 입은 이의진이 석태혁 일행을 데
이 순간 유진우의 눈이 피를 뿜을 듯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살기가 솟구쳤다.비록 예전에 아버지와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그동안 품었던 그 작은 분노마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단지 호룡각의 일을 완전히 해결한 후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에 효도를 제대로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둘이 만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암살당해 돌아가셨다. 이 충격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창공!” 유진우가 갑자기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손을 뻗어 창공보검을 불러들이고는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호룡각의 잔당들을 모조리 섬멸해야만 했다!“전하! 제발 진정하십시오!” 유진우가 이성을 잃을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손도운이 급히 그를 막아서며 침착하게 조언했다. “호룡각은 준비를 하고 온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렇게 무모하게 뛰쳐나가신다면 복수는커녕 오히려 자신까지 위험에 빠뜨리실 수 있습니다!”“비키세요!” 유진우의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창공검의 칼날을 손도운의 목에 바로 겨누었다. 예리한 기운이 피부를 스치며 상처를 내자 피가 천천히 배어 나왔다.“전하! 저를 죽이시더라도 전 전하를 막아야만 합니다. 제가 어찌 전하께서 죽으러 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왕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전하께 더 이상의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손도운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유진우 앞을 가로막은 채 죽음도 불사하는 자세를 취했다.유진우는 이를 악물었고 그의 손에 든 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몇 초간의 대치 끝에 그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마침내 검을 내렸다.손도운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지금 냉정해져야만 했다. 유만수가 죽었으니 왕부가 분명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이때
다른 처녀들도 모두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진심 어린 간청을 했다.이 광경을 본 유진우는 넋이 나갔다.노란 옷 처녀의 말은 그의 귀를 때리는 듯했다.지옥 같은 일을 겪고도 이 아이들이 자신이 아닌 천하의 모든 약자들을 생각하다니... 상상도 못 했다.이런 원대한 뜻과 깨달음은 그조차도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이청성이 말했듯, 이들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을 향하는 처녀들이었다.귀하고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누가 여자가 남자만 못하다 했는가?진정한 대의 앞에서 이 여자들이야말로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었다.이런 의로운 용사들이 있는데 어찌 서경이 부흥하지 않을까? 어찌 천하가 평안하지 않을까?“오빠, 결정해요. 받아주지 않으면 저 애들은 살아갈 희망조차 잃을 거예요.” 이청성이 진지하게 말했다.“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어요?” 유진우가 엄숙하게 물었다.“절대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모든 소녀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요! 허락하죠!”유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부터 특별 훈련을 시작할 거예요. 견뎌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의 원대한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지만 견디지 못한다면 편한 곳에서 평안히 살도록 해요.”“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노란 옷의 소녀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소녀들도 따라 외쳤다.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청성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네가 돌봐. 내일 저애들의 거처를 정하도록 해.”“알겠어요.”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으며 소녀들을 데리고 떠났다.일행이 막 나가자 손도운이 급하게 달려 들어왔다.그의 표정이 매우 당황스러워 보였고 큰일이라도 난 듯했다.“전하! 큰일 났습니다!”유진우를 보자마자 손도운은 ‘쿵’하고 무릎을 꿇고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왕부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왕께서 자객의 암살로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요?”이 말을 듣자 유진우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잠시 후 정신을 차린 유
“오빠, 급한 건 알지만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아가씨들은 지금 오빠만 믿고 있고 목숨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어요. 받아들이면 좋은 점이 많을 거예요. 예를 들어, 오빠가 외로울 때...”“농담하지 말고 요점이나 말해요!” 유진우가 짜증스럽게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솔직히 말할게요.”이청성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장혁 씨, 사실 이 처녀들은 보기 드문 인재예요. 제가 이미 선별했는데 모두 영리하고 의지가 강해요. 조금만 가르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예요.”“무슨 뜻이에요?” 유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밀사의 중요성은 잘 아실 거예요. 특히 여자 밀사는 어떤 면에서 타고난 장점이 있죠. 이 처녀들을 밀사로 키우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이청성이 말했다.“말은 쉽지, 밀사 하나 키우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전 지금 제 몸 하나도 챙기기 힘든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요?” 유진우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그는 이 처녀들이 평온하게 살기를 바랐지, 이용당하거나 장기말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충성심인데 그들은 이미 그걸 가지고 있어요. 장혁 씨가 그들을 구해줬고 장혁 씨의 빛이 그들의 어두운 세상을 비춰줬죠. 저애들은 장혁 씨를 신처럼 여기고 있어요.”“시간과 노력은 걱정하지 마요. 장혁 씨가 직접 가르칠 필요 없이 좋은 스승만 찾아주면 돼요. 장혁 씨 곁의 손도운이라면 아주 적합할 것 같은데요.” 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었다.“그건 청성 씨 생각이고 저 애들한테는 물어봤어요?” 유진우가 물었다.“당연히 물어봤죠. 모두 하겠대요. 필요하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요.” 이청성이 말했다.“불쌍한 사람들인데 그럴 필요까지야...” 유진우가 눈썹을 찌푸렸다.“장혁 씨, 어둠 속에 있어도 빛을 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세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발 저희를
“마마의 뜻은 내통자를 찾으라는 것입니까?”석태혁이 물었다.“아니요, 내통자와 범인 수사는 이미 홍 장군에게 맡겼습니다. 석 장군께선 더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이의진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경은 최근 몇 년간 불안정했어요. 전에는 어르신이 계셔서 소인배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했지만 이제 어르신께서 돌아가셨으니 서경이 혼란에 빠질 것이고 우리 왕부가 가장 먼저 모든 이의 표적이 될 겁니다.”“제가 유만군을 소집한 것은 왕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누구든 왕부를 해하려 한다면 즉시 처단하세요. 자비를 베풀 필요 없습니다!”“알겠습니다!” 석태혁이 대답했다.비상시기에는 비상조치가 필요했다. 왕이 돌아갔으니 왕부가 곧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상황을 진압하지 못한다면 왕부가 위험할 뿐 아니라 서경이 사분오열되어 제후들이 각자의 영토를 차지하려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천하가 대란에 빠질 것이다!“석 장군, 장군께선 어르신의 심복이자 우리 왕부의 기둥입니다. 앞으로의 일은 모두 장군께 달렸습니다.” 이의진이 깊은 뜻을 담아 말했다.“소신, 충성을 다해 왕부를 지키겠습니다!” 석태혁의 표정이 결연했다.왕이 암살당한 것은 친위대장인 자신의 책임이었다. 왕부가 지금 사람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다면 자결로 죄를 갚았을 것이다.“석 장군, 전 이미 소식을 봉쇄했습니다. 어르신의 서거를 아는 이가 많지 않아요. 조금 후 조문 오는 자들을 잘 살피세요. 대부분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올 테니 누구든 방자히 굴면 즉시 체포하세요!” 이의진이 다시 명령했다.“알겠습니다!” 석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왕의 죽음은 모두에게 숨길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흉심을 품은 자들은 이미 왕부에 첩자를 심어두었을 거고 왕의 서거를 알면 반드시 방문을 빌미로 허실을 탐색하거나 심지어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오늘부로 왕부는 평온할 수 없을 것같았다....서쪽에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에서.유진우가 막 기상하여 문을 열자 밖에 십여 명의 꽃다운 처녀들이
“어르신!”“깨어나세요! 제발 깨어나세요!”이의진은 숨이 끊어진 유만수를 보며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모든 일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그가 자신의 품에서 이렇게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소식을 듣고 모여든 왕부의 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쏟아냈다. 유만수는 왕부의 하늘이자 서경의 하늘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하늘이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다.시간이 흘러 날이 밝았다.서경 왕부 전체가 비통한 분위기에 잠겼고 전에 정무를 보던 대청은 이제 영당이 되어 사방에 흰 만장이 걸렸다. 정교하게 조각된 검은 관이 중앙에 놓였고, 그 안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유만수가 평온한 얼굴로 누워있었다.영당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릎 꿇고 있었는데 대부분 왕부의 신임 장수들과 유씨 가문의 자제들로, 모두 상복을 입고 슬픔에 잠겨있었다. 이의진은 맨 앞에서 유만수의 영정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홍복홍이 들어와 영정 앞에 절을 올리고 이의진 앞으로 와서 깊이 절했다.“왕비마마, 왕의 장례는 분부대로 처리했습니다. 소식을 봉쇄하고 조용히 진행하여 민심이 동요치 않게 했습니다.”“범인은 잡았습니까?” 이의진이 눈물을 닦으며 살기를 뿜었다.남편이 눈앞에서 피살당했으니 그녀는 범인을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범인의 무공이 너무 높아 추적에 실패했습니다.”“호룡각 잔당의 소행이에요. 즉시 수사하세요. 범인을 반드시 잡아오되, 필요하다면 흑용군을 동원해도 좋습니다!”“네.” 홍복홍은 물러갔다.“천우는 언제 오나?” 이의진이 고개를 돌려 여자 호위병에게 물었다.“도련님께서 변방 훈련 중이라 전갈을 보냈으니 오후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여자 호위병이 대답했다.“왕부 경계를 엄중히 하고 아무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게 해.”이의진이 또 명령을 내렸다.“네!” 호위병이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났다.“어르신, 제가 반드시 원수를 갚겠습니다!” 이의진은 유만수의 영정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영당을 나와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후원에
“물러가겠습니다.”이의진이 예를 갖추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대청의 지붕이 무너져 내렸고 까만 인영 하나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검은 복면의 자객이었다.“조심하세요!”이의진이 순간 얼어붙었다가 외쳤다.“유만수! 죽어!”흑의인이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검을 내지르자 섬광이 스치더니 검은 유만수의 가슴을 관통했다.한 줄기 빛처럼 빠른 검세에 누구도 반응할 틈이 없었다.유만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가슴을 꿰뚫은 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문간에 있었던 이의진도 충격에 빠져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왕부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어떻게 자객이 들어왔단 말인가?하필 홍복홍과 석태혁이 공무로 나간 때를 노린 것이, 마치 미리 계획된 듯했다.“유만수! 이것이 호룡각에 맞선 대가다!”흑의인이 거칠게 검을 뽑자 유만수의 가슴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그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주저앉았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사람 살려! 자객이야! 자객이 들었어!” 이의진이 소리쳤다.순식간에 서경 왕부 전체가 발칵 뒤집혔고 호위병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흑의인은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즉시 지붕으로 도약해 달아났고 왕부의 고수들은 연이어 공중으로 날아올라 최대한 빠르게 추격했다.“어르신! 어르신!”이의진이 급히 유만수 앞으로 달려갔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유만수는 가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고 말을 하려다 격렬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어르신! 말씀하지 마세요! 괜찮으실 거예요! 꼭 괜찮으실 거예요!”이의진은 한 손으로 유만수의 상처를 누르며 다른 손으로 문 밖을 향해 외쳤다. “의원! 의원은요? 어서 와서 어르신을 살려주세요!”“의진아...” 유만수가 떨리는 손으로 이의진의 팔을 붙잡고 힘없이 말했다. “의진아... 나는 이제 끝에 다다랐어. 잘 들어... 내가 죽으면 서경이 크게 혼란스러워질 거야. 네가 왕비로서 사태를 안정시켜야 해. 내 신임하는 장수들이 널 도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