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보스가 모든 걸 다 털어놓는 걸 본 대머리는 속으로 수많은 욕을 삼켜냈다.남자라면 기개가 있어야 한다며, 흑곰파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죽자던 사람이 갑자기 배신을 해버리고 살 기회까지 빼앗아가 버렸다.“보스, 우리 같이 비밀 지키고 죽기로 했잖아요, 왜 갑자기 배신하신 겁니까?”“너무 내 탓만 하지 마, 난 모셔야 할 부모님도 있고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도 있어. 이렇게 죽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넌 이미 남자도 아닌 게 됐는데 살아서 뭐하겠어, 제수씨는 내가 잘 챙길 테니까 넌 편히 가.”개소리를 정성껏 지껄이는 턱수염에 화가 치밀어오른 대머리는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어 턱수염에게로 달려들었다.하지만 그보다 좀 더 반응이 빨랐던 턱수염의 바닥에 있던 벽돌을 주어 대머리의 머리를 내리찍었다.-펑!묵직한 소리와 함께 벽돌이 부러지고 머리통도 깨지면서 대머리는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쓰러져버렸다.“죽어! 죽으라고!”그럼에도 턱수염은 흉악한 얼굴로 한번 또 한 번 벽돌로 머리를 내리찍었고 대머리는 마침내 숨이 다 끊겨버렸다.그의 머리는 터져버린 수박처럼 빨갛고 하얀 정체 모를 것들이 되어 바닥에 널려 있었는데 턱수염은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을 피하고자 칼을 들어 대머리의 심장에 깊숙이 찔러넣었다.턱수염은 이보다 더 확실하게 죽을 순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칼질을 멈추었다.“동료도 다 죽이고, 참 잔인하네.”“나를 챙길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내가 살려면 저놈을 죽여야죠. 일찍 사회에 나와 목숨 부지하면서 그 정도는 진작에 배웠어요.”유진우의 말에 턱수염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아까 문한성이 시킨 짓이라고 했지. 걔는 지금 어딨어?”유진우가 더 묻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턱수염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그건 저도 몰라요. 그렇게 대단하신 분들이 왜 저희 같은 고용인한테 스케줄을 알려주시겠어요?”“문한성과는 어떻게 연락했어?”“문한성의 직원이라는 사람이 연락을 줬었어요. 일 다 처리하고 사진만 찍어서 보내면 바로
턱수염은 그렇게 몸을 떨더니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지도 못한 채 뒤로 넘어갔다.“너 같은 쓰레기랑 한 약속은 원래 지킬 필요가 없는 거야.”차갑게 말한 유진우는 시체를 넘어 은도 앞으로 다가가서는 밧줄을 풀어주고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로 직접 벗겨주며 다정하게 말했다.“은도 씨,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난 괜찮아요. 진우 씨가 빨리 와서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오늘 저런 놈 때문에 제가 더러워질 뻔했어요.”살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다 겪어봤지만 납치 강간은 생전 처음인 은도가 긴 숨을 뱉어내며 말했다.음란마귀가 씐 놈들의 아지트에 들어와 버렸으니 유진우가 빨리 오지 않았더라면 놈들에게 장난감처럼 휘둘리다가 어디 외국으로 팔려나갔을 것이다.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죽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미안해요, 내 잘못이에요.”문한성이 유진우를 노리고 그와 가까운 은도에게 손을 뻗은 게 분명했기에 유진우는 자책하며 사과를 했다.“무슨 사과를 하고 그래요, 우린 비즈니스파트너잖아요. 힘든 건 같이 감당하고 좋은 것도 같이 나눠야죠.”하지만 은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문한성 잘못인데 그게 진우 씨랑 무슨 상관이에요? 지금 해야 할 건 사과가 아니라 같이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생각하는 거예요.”“문한성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은도 씨는 걱정 마요.”“어떻게 할 생각인데요?”“당연히 이참에 아주 싹을 잘라야죠.”“뭐라고요?”차갑게 말하는 유진우에 은도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진우 씨, 진정해요. 문한성은 문 어르신의 아들이에요.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데 우리가 함부로 달려들면 괜한 일에 휘말려서 죽을 수도 있어요!”“걱정 마요. 깔끔하게 잘 처리할 거예요, 아무도 모르게.”“그리고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한다 해도 그쪽에선 절대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오늘 일 보고도 모르겠어요? 매일매일 가슴 졸이면서 사는 것보다 한 번에 처리해버리고 마음 놓는 게 낫죠.”“근데..
흑곰파가 전멸했다는 소식은 빈민구 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고 전에 유진우를 먹잇감 취급하던 다른 조직원들은 마치 괴물이라도 본 양 유진우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빈민구 내에서 꽤나 큰 조직에 속하던 흑곰파의 엘리트들을 30분 만에 죽인 사람이니 생각이란 게 있다면 유진우에게 덤벼들 수는 없었다.그래서 유진우는 당당히 자신의 차를 끌고 빈민구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이 전쟁의 신의 이야기는 밖으로까지 퍼지기 시작했다.30분 뒤, 유진우의 차는 은도의 개인 별장 앞에서 멈춰 섰다.“진우 씨, 같이 들어갈래요?”차에서 내리던 은도는 유진우를 보고 웃으며 자신의 집으로 그를 초대했다.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어 하얀 다리와 예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지금의 은도는 매혹적이기 그지없었지만 유진우는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다.“아니에요, 시간도 늦었는데 은도 씨 푹 쉬어요.”“근데 나 혼자서는 좀 무서운데... 같이 좀 있어 주면 안돼요? 혹시 나쁜 놈들이 또 찾아와도 진우 씨가 바로 나 지켜줄 수 있잖아요.”“무서우면 사람 보내서 집 앞 지키고 있으라고 할게요.”“모르는 사람들은 믿음이 안 가요.”자신의 핑계가 먹히지 않자 은도는 불쌍한 척을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집안이 저렇게 어두운데 나쁜 놈들이 숨어 있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같이 들어가서 봐주면 안 돼요? 저같이 연약한 여자가 설마 진우 씨를 어떻게 할까 봐 피하는 거예요 지금?”“아...”은도의 말에 잠시 난감해하던 유진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들어가서 확인해 줄게요.”“진작 그랬어야죠, 얼른 와요!”은도는 해맑게 웃으며 집 문을 열었고 유진우도 그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화사한 인테리어가 주된 은도의 별장에는 핑크색이 유독 많이 보여서 한결 더 소녀다워 보였다.곳곳에 인형들이 가득했고 한쪽 벽에는 피규어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모습이 유진우에게는 꽤나 의외였다.평소에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모습만 보여줘서 몰랐는데 집 인테리어를 보니 마음만은
“이미 예쁜데요 뭘.”성인이 된 후 찍은 사진 속의 은도는 청초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미모는 지금과 다를 바 없이 아름다웠기에 유진우는 예의 있게 칭찬을 했다.“옛날 일 자꾸 돌아봐서 뭐하겠어요.”은도는 냉장고 문을 열며 유진우를 향해 물었다.“진우 씨는 뭐 마실 거에요?”“아무거나요.”“알겠어요.”은도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오며 여러 가지 간식들도 테이블 위에 안주 삼아 올려놓았다.“자, 한잔해요 우리.”둘은 냉장고에서 갓 꺼내와 차가운 맥주를 서로 부딪치고 바로 마시기 시작했다.“진우 씨, 나 어때 보여요?”그때 은도가 술을 마시며 웃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유진우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생각하던 대로 짧은 대답을 했다.“이쁘고 착하죠.”은도와 함께 일을 시작한 뒤로 더 느끼는 건데 은도와 유진우는 서로 꽤 잘 맞았다.어떨 때는 좀 장난스럽고 단순해 보이는 은도였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행동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리고 은도도 유진우를 친구로 대해줬기에 둘이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어머, 그래도 괜찮게는 생각하고 있었네요? 나는 진우 씨가 나를 가벼운 사람으로 볼까 봐 사실 좀 걱정했거든요.”“소문은 다 전해질수록 과장되는 법이죠, 나는 내가 봐온 은도 씨의 성품을 믿어요.”은도와 유진우 둘 다 미소를 띤 채로 대화를 이어나갔다.“역시 날 알아주는 사람은 진우 씨뿐이라니까요, 우리 한잔 더 해요!”은도는 잔을 부딪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사실 소문이 다 거짓말인 건 아니에요. 사람들이 나더러 남자나 데려다 키우는 경박한 여자라고 하잖아요. 경박한 건 아닌데 남자를 데려다 키우는 건 맞거든요.”“네?”은도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던 유진우는 표정이 굳어버렸다.“좀 의외죠?”은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더니 말을 이어나갔다.“남자를 집에 들이는 건 뭐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내 명성에 흠이 좀 났으면 해서예요.”“그게 무슨 말이에요?”여자라면 누구나 제 명성을 끔
은도의 속마음 얘기를 다 들은 유진우는 그 인생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돈 많은 집에서 태어나 호의호식하고 자란 만큼 가문의 이익 때문에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게 참 슬픈 현실인 것 같았다.능력이 있어서 집안의 사업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면 예쁜 얼굴을 무기 삼아 다른 재벌가에 시집가서 가문을 위해 힘쓰는 게 그들의 숙명이었기에 은도같이 예쁘고 우수한 여자는 특히나 가문이 발전하는 좋은 디딤돌이었다.그러니 당연히 결혼도 마음대로 못하고 가문의 무게를 두 어깨로 짊어진 채 집안 어르신들이 정해주는 짝과 결혼해야만 했다.그제야 유진우는 왜 은도가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까지 제 명성을 더럽혀왔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은도도 정말 궁지에 몰려서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한잔해요.”이번에는 유진우가 맥주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그래요!”그에 은도도 기분 좋게 웃으며 남은 맥주를 다 털어 넣고는 또 두 캔을 새로 까서 하나는 유진우에게 주고 하나는 자신의 앞에 내려놓았다.“사실 나는 진우 씨를 만난 게 엄청 난 행운 같아요. 진우 씨는 나한테 선택할 기회를 줬잖아요.”은도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옥로고가 대박 나고부터는 집안에서 내 위치도 엄청나게 높아졌어요. 더 이상 나한테 결혼하란 소리도 안 하고요. 이젠 내가 은씨 가문을 손에 꼽히는 재벌가로 만들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이것만 인정받으면 우리 집에서는 내가 왕이에요!”“그래요? 축하해요!”“나도 내가 직접 내 삶을 선택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어요. 다 진우 씨 덕분에 복이 굴러들어온 것 같아요.”“나도 똑같아요. 은도 씨 만나고 나서부터 일이 잘 풀려요.”유진우도 웃으며 은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이제 알았는데 혹시 내 남자친구 안 할래요? 우리 너무 잘 맞는 것 같은데?”뜬금없는 말을 내뱉은 은도는 긴장 반 설렘 반의 마음을 안고 유진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평소에는 장난스레 이런저런 말도 자주 하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하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미는 진국공의 손녀라는 사실이었다.그 신분 하나만으로도 이미 많은 이들이 우러러볼 것 같은데 미모와 몸매까지 받쳐주니 그런 조선미 앞에서 은도의 모든 우세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도였다.그 순간 은도는 자신이 살짝 부끄럽기도 하면서 그렇게 대단한 여자도 맘에 들어 하는 유진우를 자신도 좋아하는 것이니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사실 저도 좀 놀라웠어요. 저랑 선미 씨가 만날 때는 저도 선미 씨가 진국공의 외손녀인 줄은 몰랐거든요.”“그래서 잘됐다고요?”어깨를 움츠리며 말하는 유진우에 은도는 또 놀리듯 받아쳤다.“그런 셈이죠.”“그래요, 그럼 이왕 만난 거 백발노인 될 때까지 잘 살아요, 행복하세요!”어색하게 웃는 유진우를 향해 축하 인사를 건넨 은도는 바로 잔을 집어 들며 건배를 청했다.그렇게 감정이라는 것에서 오는 속박이 없으니 둘은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인생에 여한 없는 사람은 없기에 은도는 유진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로 했다.누굴 좋아한다고 해서 꼭 그 사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가끔씩 만나 이렇게 술 마시면서 얘기하는 걸로도 은도는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렇게 밤이 점점 깊어져 갔고 유진우는 맥주 한 줄을 다 비우고서야 집으로 향했다.유진우를 보내고 스트레칭을 한 은도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좀 아쉽긴 하네.은도가 유진우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있을 때 갑자기 집안 어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여보세요, 삼촌? 지금 시간이 몇신데 내일 다시 얘기하면 안 돼요?”귀찮은 듯 느릿느릿 얘기하는 은도와 달리 은도 삼촌은 다급하게 외쳤다.“은도야, 집에 일이 생겼으니까 빨리 좀 와!”“왜요?”“전화로는 할 수 없는 얘기야, 와보면 아니까 빨리 와.”“알겠어요, 금방 가요.”은도는 어딘가 이상했지만 삼촌이 하도 급해 하니 바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향했다.30분쯤 지나자 은도의 차는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죠, 총알은 절대 빗나가는 법이 없으니까.”그녀의 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은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한 검은 총구와 잔인한 표정의 사람들을 마주했다.“당신들은 누구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은씨 가문 구역에서 난동을 부려?”은도가 매섭게 소리쳤다.“아가씨, 너무 화내진 마세요. 저희는 단지 명령을 따를 뿐이니까요.”총을 든 남자가 무덤덤하게 말했다.“명령이라고? 누구의 명령이지?”은도가 물었다.“당연히 제 명령이죠.”그 순간, 깡마른 체형에 차가운 인상을 가진 남자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문씨 가문의 문한성이었다.“당신이었어?!”문한성을 발견한 은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은도는 우여곡절 끝에 빈민가를 탈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문한성을 다시 만나게 됐다.“또 만나네요, 은도 씨.”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문한성은 손가락을 뻗어 은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저도 마음이 흔들릴 정도예요.““이봐요, 문한성 씨. 당신이랑 나랑은 별 원한이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은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아무런 원한도 없다고요?”그 말에 문한성이 웃으며 대답했다.“당신들이 옥로고를 팔아 그렇게 엄청난 매출을 내놓고도 나랑은 계약할 생각이 없잖아요, 그게 원한이라면 원한 아닌가?”“한성 씨, 사업 얘기라면 서로 말로 풀어도 되는 거 아닐까요? 굳이 이렇게 서로 불쾌한 상황을 만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요.”은도는 최대한 상대를 진정시키려 애썼다.“사업이 무슨 대수라고. 그냥 당신들보다 돈 좀 덜 벌면 되는 일이잖아요. 제가 정말 짜증 났던 건, 개업하던 그 날에 당신들이 날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거야!”문한성의 표정이 갑자기 살벌하게 바뀌더니 말을 이었다.“나, 엄연한 문씨 가문의 아들인 내가 당신들한테 한낱 개 따위처럼 농락을 당하고, 모욕을 당했어. 오늘 이 원한 못 갚으면 난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아갈 거야!
비록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문한성의 모습은 누가 봐도 좋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도대체 뭘 시키려는 거죠?”갑자기 불안해진 은도가 물었다.“간단해요. 내일 은도 씨가 아무 핑계나 대고 유진우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면서 이 병에 든 약을 술에 타는 겁니다. 약효가 퍼지면 은도 씨는 자리를 뜨면 되는 거예요. 남은 일은 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문한성은 검은색의 약병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그 안에는 십향연근제라고 하는 약이 들어있었다. 그 약은 주로 무도 고수를 상대할 때 사용하는 약이다.만약 마스터 계급이 아니라면 이 약을 먹는 순간, 온몸의 힘이 다 빠져 꼼짝도 못 하고 도살을 기다리는 양이라도 된 듯 무력해진다.“문한성 씨, 적당히 좀 하죠.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은도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문한성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지나가던 개라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유진우에게 약을 먹인다면 은도 역시 문한성과 공범이 된다.“이렇게까지?”문한성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의 미소에는 조롱의 기운이 함께 서려 있었다.“은도 씨, 이게 뭐가 심해요? 난 더한 짓도 할 수 있는데. 보여줄까요? 예를 들면, 당신네 집안 하나 파탄시키는 거, 아니면 당신 가족들한테 누명 씌워서 다 감방에 처넣는 거. 어때요?”“문한성 씨! 정말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연경에도 법이라는 게 존재합니다!”화가 치밀어오른 은도가 소리쳤다.“법이라고요?”그 말에 문한성이 배를 잡고 깔깔댔다.“은도 씨, 어린 애 아니잖아요. 어떻게 그딴 순진한 소리나 해댈 수 있는 거죠? 정말 실망입니다.”자고로 법이란 것은 권력과 지위가 있는 사람들만 보호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권력 없는 사람들은 그저 법이라는 존재에 의해 억압만 받을 뿐이다.평민이 범죄를 저지른다면 가차 없이 감옥으로 보내지지만, 귀족은 범죄를 저질러도 여전히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다.이 세상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쭉 이래왔다.
“이것들이 죽으려고.”몰려드는 무장병사들을 보며 유천우는 순식간에 분노를 터트렸다.그는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고 칼을 들고 인파 속으로 돌진했다.지금의 그는 이미 무도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랐고 게다가 수년간 전장을 누빈 덕에 쌓은 전투 경험 또한 풍부했다.혼자서 적진을 누비는데도 아무도 막지 못할 정도로 용맹했다.“도련님을 지키고 놈들을 죽여라!”이의진이 검을 하늘 높이 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있던 유만군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전부 죽여버려.”석태혁이 장검을 휘두르며 백여 명의 유만군을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했다.유만군의 수는 적었지만 모두 엄청난 실력을 지닌 고수였고 게다가 훈련도 잘되어 있었다.무도 마스터인 석태혁의 지휘 아래 그들은 파죽지세로 적진을 휘저으며 나아갔다.백여 명의 부대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수만 명에 달하는 대군의 심장을 찔러 가차 없이 죽여버렸다.혹시라도 암살당할까 봐 4대 제후는 친위대의 보호 아래 즉시 전장에서 멀리 도망쳤다.“왕부 안에 저런 정예 부대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가차 없이 적을 베어버리는 유만군을 보며 진승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다행히 백여 명밖에 안 되는군요. 수가 적어서 망정이지, 안 그러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노정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추측건대 저들이 바로 유만군일 겁니다. 유만수가 흑용군의 정예 병력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고수들을 뽑아 만든 부대인데 전부 뛰어난 실력을 지녔습니다.”강윤기가 말했다.“그렇군요. 어쩐지 엄청 대단하더라니.”하원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숫자가 적어서 우리한테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해요. 지금은 용맹해 보이지만 체력이 고갈되면 목숨을 내놓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진승민이 말을 이었다.“혹시 무슨 변수가 생기진 않겠죠?”노정한이 갑자기 물었다.“무슨 변수요? 왕부가 포위된 이상 함락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왕성 밖에도 우리 대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면 즉시 알아차릴 수 있어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걸 본 이의진은 반가워하다가 이내 다시 표정이 굳어졌다.왜냐하면 아들이 갈 때와 마찬가지로 몇 명만 왔을 뿐 군대는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혹시 실패했어?”마음이 무거워진 이의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바로 남쪽 4대 제후를 설득하여 북쪽 4대 제후와 맞서는 것인데 지금 상황을 봐서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은 듯했다.“간덩이가 부은 것들! 감히 왕부로 쳐들어와? 모두 죽고 싶어?”유천우가 호통쳤다. 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마치 천둥처럼 현장 전체가 크게 울렸다.4대 제후의 수만 병사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도련님께서 돌아오셨군요.”진승민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희 4대 제후는 왕부 안에 진범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위왕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부득이하게 들어가서 수색해야 하니 길을 비켜주십시오.”“수색은 무슨 수색.”유천우가 냉담하게 외쳤다.“왕부가 어떤 곳인데 함부로 수색하겠다고 난리야? 저리 썩 꺼지지 못해?”“도련님, 저희는 진심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움직이는데 이렇게 계속해서 방해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진승민이 태연하게 물었다.“흥. 내 앞에서 가식 떨지 마! 너희들의 속셈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없어.”유천우가 차갑게 말했다.“도련님, 당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진승민이 말했다.“진승민, 한 번만 기회를 줄게. 만약 지금이라도 떠난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 너희들은 여전히 서경 제후이고 여전히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다.”유천우는 말하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하지만 만약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반역을 하려 한다면 내가 장담하는데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도련님, 저희는 대국을 생각해서 이러는 것이니 부디 길을 비켜주십시오.”진승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나머지 세 사람 역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노려보며 조금도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그들은 물러설 이유가
“그럼 왕부에 들어가기 전에 나부터 죽이고 가!”이의진은 검을 든 채 꼿꼿이 서서 강력한 기세로 홀로 대문을 지켰다.그녀의 무공은 그리 강하지 않았고 고작 선천 무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뿜어내는 기세는 무도 마스터보다 훨씬 강했다.일반 병사들은 물론이고 진승민조차도 압도되어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다른 세 제후에게 눈짓을 보낼 뿐이었다.위협은 위협이고 압박은 압박이지만 적어도 명분은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의 조롱을 받고 만민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다.그들은 살인범을 추적한다는 명분으로 왕부를 포위했다. 비록 행동이 과격하긴 하지만 나중에 슬픔에 북받쳐 잠시 이성을 잃은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하지만 압박 과정에서 왕비를 죽인다면 아무리 변명하고 이유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다.그때가 되면 사람들의 공분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그뿐만 아니라 서경 각지의 세력들이 동요할 것이고 심지어 연경에서도 군사를 보내 진압할 것이다.어찌 됐든 이의진은 서경 왕비이자 용국의 공주이기도 하니까.그런 신분을 가진 그녀 앞에서 그들은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간단히 말해 왕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일 수 있어도 이의진만은 절대 건드려선 안 되었다. 하여 이의진이 함께 죽자는 듯한 태도를 보인 순간 오히려 그들이 당황했던 것이었다.“세 분,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요?”진승민은 옆에 선 세 제후를 보며 낮게 물었다.“이미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이유가 없죠.”노정한이 차갑게 말했다.“맞습니다. 이제 한 걸음만 더 가면 성공인데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강윤기가 맞장구를 쳤다.“물론 압니다. 제 말은 왕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겁니다.”진승민이 낮게 말했다.“왕비의 목숨만 해치지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하원휘가 불쑥 한마디 던졌다.“제후님 뜻은... 묶어놓자는 말입니까?”진승민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른 방법이 있나요?”하원
무거운 왕부 대문이 쿵쾅거리면서 진동했다.매번 쿵쾅거릴 때마다 마치 거대한 망치가 심장을 강타하는 듯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문 열어.”이의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면서 사람들에게 대문을 열라고 명령했다.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대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던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이런 상황에서는 대문을 굳게 닫고 방어에 힘써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알아서 문을 열어?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다른 함정이라도 있나?’“진승민, 노정한, 강윤기, 하원휘. 나와!”이의진이 칼을 든 채 꼿꼿이 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강렬한 기세에 문밖의 병사들은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그녀가 부른 네 명은 북쪽 4대 제후이자 이번 반란의 주요 세력들이었다.“뭐야? 일을 저질러 놓고 이제 와서 숨으려고? 4대 제후라는 사람들이 모두 쥐새끼처럼 숨어다니는 졸개들이야?”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이의진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차고 힘찬지 왕부 안팎으로 울려 퍼졌다.잠시 후 왕부 앞에 있던 병사들이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넓은 길을 터주었다.곧이어 갑옷을 입고 망토를 걸친 각기 다른 모습의 중년 남자 네 명이 나란히 걸어왔다. 그들이 바로 북쪽 4대 제후였다.“진승민, 왕비님께 문안드립니다.”“노정한, 왕비님께 문안드립니다.”“강윤기, 왕비님께 문안드립니다.”“하원휘, 왕비님께 문안드립니다.”네 사람은 문 앞으로 다가가더니 동시에 몸을 숙여 예를 올렸다.“흥, 너희들 눈에 내가 왕비로 보이긴 하느냐?”이의진이 싸늘하게 말했다.“왕비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루 왕비는 영원한 왕비십니다.”진승민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만약 너희들이 나를 왕비로 생각했다면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았겠지.”이의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왕비님, 오해하셨습니다. 저희는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 왕실을 구원하러 온 것입니다.”진승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습니다.”옆에 있던 노정한
깊은 밤, 서경왕부 대문 앞.수많은 무장병사들이 거대한 왕부를 물샐틈없이 에워쌌다. 멀리서 바라보면 검은 무리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는데 그 수가 자그마치 수만 명에 달했다.이들은 단지 선봉 부대일 뿐이었고 사실 왕성 밖에는 북쪽 4대 제후의 군대와 유태범의 친위대까지 위장한 채 주둔하고 있었다.그 시각 왕부 안.이의진은 상복을 입은 채 차가운 표정으로 살기등등하게 대문 앞에 서 있었다.손에 날카로운 검을 들고 있었는데 온몸에서 풍기는 위엄과 살기는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왕부의 생사가 위기에 처하자 왕비인 이의진은 망설임 없이 맨 앞에 나섰다. 그녀의 뒤에는 석태혁과 갑옷을 입은 유만군이 서 있었다.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왕부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이었다.유만군의 뒤에는 왕부의 병사들과 식솔들이 서 있었다.병사들은 칼을 들었고 식솔들은 몽둥이를 들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듯 굳건한 자세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그리고 뒤쪽 내원으로 들어가면 왕부의 노약자와 부녀자들이 상복을 입고 무기를 든 채 멀리 떨어진 대문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만약 유만군이 쓰러지고 병사들과 식솔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들 역시 망설임 없이 달려나가 왕부와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아빠... 엄마... 무서워요...”열 살 남짓한 한 소년이 두 손에 칼을 들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온 소년이 언제 이런 끔찍한 상황을 겪어봤겠는가.왕부가 포위당하고 밖에 수만 명의 대군이 매복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소년은 왕부의 운명이 다했고 오늘 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걸 직감했다.“쓸모없는 녀석.”한 중년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소년에게 호통쳤다.“우리 유씨 가문의 사나이는 전장을 누비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 겁쟁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네가 오늘 한 발짝이라도 물러선다면 네놈을 먼저 베어버리는 수가 있어.”“아빠...”겁에 질린 소년은 덜덜 떨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울
“그건...”유진우는 망설이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세자 전하.”은성종이 갑자기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말했다.“제가 재주는 부족하지만 세자 전하를 위해 가시밭길이라도 기꺼이 헤쳐나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 절 믿어주신다면 이 일은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제가 은밀히 충신들한테 연락하여 빠르게 힘을 모으겠습니다. 때가 되어 세자 전하께서 신호만 주신다면 반드시 성공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제후님은 역시 의로운 분이시네요. 정말 진심으로 존경합니다.”유천우가 진심으로 감탄했다.“그렇다면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유진우도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하게 인사했다.“세자 전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건 저의 영광입니다.”은성종이 말했다.“제후님, 큰일 났습니다.”그때 한 병사가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와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서경왕부가 대군에 포위당해서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합니다.”“뭐? 포위당했다고?”이 말을 들은 순간 유진우와 유천우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들이 떠난 지 이틀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변고가 닥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말해봐.”유천우가 다급하게 물었다. 병사는 은성종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북쪽의 4대 제후들이 정예 부대를 이끌고 어젯밤 몰래 왕성에 잠입했는데 왕성 호위대의 장교급 군관들이 모두 인질로 잡힌 바람에 군 전체가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틈에 북쪽의 4대 제후들이 왕실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왕부를 포위했어요. 겉으로는 간신배들을 처단하고 서경왕의 복수를 하겠다고 하지만 실상은 군사를 일으켜 권력을 빼앗으려는 겁니다.”쾅.유천우가 화를 내면서 상을 세게 내리쳤다. “이것들이 아주 제대로 미쳤구나. 감히 서경왕부를 포위해?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절대 이럴 수가 없어.”그는 설령 4대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기껏해야 성문 앞에 병력을 주둔시켜서 압박을 가하는 정도일 것이라고
“아직 절 기억해주고 계셔서 감사합니다. 저 아직 살아있습니다.”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성종의 과거사를 몰랐던 터라 갑자기 흥분한 모습을 보니 조금 의아했다.“살아있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은성종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벌써 10년이나 지났어요. 그사이 세자 전하께서 이렇게 성장하시다니...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그러네요. 10년 동안 많은 게 변했습니다.”유진우는 감탄하며 말했다.10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10년 후에는 아버지가 암살당했다. 10년 사이에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웠다.“제후님, 아까 제 형을 보면 서경왕부를 전폭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지금 형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약속을 어기진 않으실 거죠?”유천우가 떠보듯 물었다.“만약 세자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시겠다고 한다면 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자 전하가 왕의 자리에 앉도록 도와줄 거야.”은성종이 진지하게 말했다.조금 전까지 냉정하고 덤덤했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투지가 넘쳤고 온몸에서 전에는 본 적 없는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좋습니다. 제후님은 역시 약속을 잘 지키시네요.”유천우는 웃어 보이고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역시 형이 나서야 했어.’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은성종을 설득하지 못했는데 유진우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모든 게 쉽게 해결되었다.비록 10년이 흘렀지만 유씨 가문 천재라는 명성은 여전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고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제후님, 제가 서경에 돌아온 사실을 아직 외부에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때까지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요.”유진우가 당부했다.“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겠습니다.”은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좋은 그는 당연히 유장혁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위왕이 호룡각의 잔당들에게 살해당했고 유태범은 왕위를 빼앗으려 혈안이 되어있었다. 정말 여러 가지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왕위를 이을 생각이 없다면서 왜 싸우려는 건데?”은성종이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전 서경왕이 될 자격이 부족하지만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유태범보다 더 어울려요.”유천우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그게 누군데?”은성종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제 형님 유장혁입니다.”유천우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유장혁?”은성종은 실눈을 뜨더니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세자 전하께서 서경왕이 되는 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실종된 지 10년이 넘었고 감감무소식이라는 거야.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왕위를 이을 수 있겠어?”“제 형님은 죽지 않았고 이미 서경에 돌아왔습니다. 서경왕의 자리에 앉을 사람은 형님밖에 없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말로만 해서는 안 돼. 증거가 있어?”은성종이 물었다.만약 유장혁이 정말로 서경에 돌아왔다면 벌써 서경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하여 유천우가 단지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핑계를 대는 것이라 생각했다.“제후님, 증거를 드릴 수는 있는데 그 전에 물을 게 있어요. 만약 제 형님이 왕위를 물려받는다면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실 겁니까?”유천우가 되물었다.“그건...”은성종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유천우가 하도 자신감이 넘쳐서 오히려 확신이 없어졌다.“제후님, 서경에는 좋은 왕이 필요합니다. 제 형님보다 더 서경왕에 적합한 사람은 없어요. 제후님도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유천우가 말했다.“그래. 만약 내가 직접 세자 전하를 만난다면 널 도와줄게. 만나지 못하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야 할 거야.”은성종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약속하는 겁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유진우를 돌아보았다.“형, 이젠 형이 나설 때가 됐어요.”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 없이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본모습을 드러냈다.“당신은...”은성종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믿을
은성종은 유천우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자신과 유천우에게 술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리고 잔을 가볍게 부딪친 후 술을 단숨에 마셨다.“좋은 술이군.”은성종은 혀를 차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유천우도 다그치진 않고 술을 다 마신 다음 은성종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기다렸다.“유태범이 나한테 손을 잡자고 하더라고. 엄청난 이익을 약속했지만 모두 거절했어.”이 말을 들은 유천우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이어진 은성종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아직 너무 기뻐하진 마. 유태범의 제안을 거절하긴 했지만 너도 도울 생각은 없어.난 전쟁을 싫어해서 중립을 선택할 거야.”은성종이 솔직하게 말했다.“중립이라고요?”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바로 설득했다.“제후님, 서경의 일원으로서 서경이 무너지는 걸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난 능력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어.”은성종이 고개를 내저었다.“그리고 난 야심이 없어서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어. 이런 권력 다툼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아. 내가 가진 작은 땅만 잘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은성종이 잠깐 멈칫하다가 또 말을 이었다.“솔직히 말해서 너랑 표기 대장군 모두 유씨 가문의 핏줄이라 누가 서경왕이 되든 나한테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말이 반란이지, 그저 왕위 다툼일 뿐이야.”“그건...”유천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천우야, 난 성격이 솔직한 편이라 혹시 불쾌한 점이 있다면 부디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은성종이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제후님이 평화를 바라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제후님도 무사하지 못해요.”유천우가 다시 설득했다.“태평은 변경의 작은 도시이고 가난하고 가진 게 없어서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여기까지 쳐들어올 일은 없어.”은성종이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미 유태범과도 합의했어. 내가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태평에는 절대 쳐들어오지 않겠다고.”“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