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고통과 함께 송영명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그러나 비명을 절반쯤 지르던 그 순간 유진우의 손은 이미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고 그 뒤의 울부짖는 소리를 억지로 막아버렸다.송영명은 숨이 막혀오자 얼굴이 붉어지고 목에 핏대가 서기 시작했다.두 발이 천천히 땅에서 솟아오르고 앞뒤로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죽음의 공포가 일순간에 가슴에 가득 찼다.“나... 날 놓아줘...”송영명이 갈기갈기 갈라진 목소리로 애써 그 몇 글자를 쥐어짜 냈다.“못 이길 것 같으니까 칼부림을 하는데 넌 낯짝도 없냐?”유진우가 손끝에 천천히 힘을 주자 송영명이 두 눈을 부릅떴다.“그만해!”그때, 비명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지고 이윽고 ‘펑’하는 소리와 함께 술병 하나가 유진우의 뒤통수에 날아와 꽂혔다.순간 파편이 튀고 술병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음?”유진우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고 그곳에는 깨진 술병을 들고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안세리가 서 있었다.2초간 멍하니 있던 안세리는 그제야 갑자기 반응하여 “아” 하고 술병을 반쯤 던져버리고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진우 오빠, 미안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난 그저 당신이 송영명을 다치게 하면 오빠에게도 쓸데없는 피해가 생길까 봐 그랬어요. 송영명은 그래도 송씨 집안의 도련님으로 배경이 두텁잖아요... 저... 저는 오빠를 관심해서 그런 거예요.”안세리는 애써 그의 눈을 피하며 여러 가지 해명을 늘어놓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진심이 드러날 뿐이었다.유진우는 뒤통수에 남은 술 자국을 만지며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방금 안세리가 날린 술병이 너무 갑자기 날아오는 바람에 아무런 징후도 느낄 수 없었고 게다가 그 술병은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즉 일반인이라면 이미 바닥에 뻗어버렸을 것이다.비록 위급한 행동이었지만 안세리의 마음속에서 유진우의 지위는 송영명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심지어 송영명을 구하기 위해 유진우를 희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이
“진우 오빠, 방금 행동은 좀 과했어. 영명이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송영명의 목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을 보며 안세리가 마음이 아픈 듯 물었다.“과했다고?”유진우는 비웃으며 반문했다.“상황부터 제대로 파악해. 송영명이 먼저 칼을 휘두르며 위협했고 난 단지 자기방어를 했을 뿐이야. 도대체 누가 과한 건데?”안세리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지며 어색하게 대답했다.“영명이는 그냥 겁을 주려고 했던 거야. 오빠를 진짜로 해치려던 건 아니었어. 근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그래. 다 내 잘못이라는 거지?”유진우는 자조 섞인 표정을 지었다.“내가 괜히 참견해서 방패막이가 된 거고 내가 먼저 도전장을 내민 거야? 아니면 내가 뒤에서 기습해 술병을 깨뜨린 거야?”“그건... 그런 뜻은 아니야.”안세리는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졌다.“방금 술병으로 오빠 머리를 친 건 내 잘못이야. 하지만 난 순간 너무 당황해서 네가 영명이를 다치게 할까 봐 그런 거야. 이해해주길 바라.”하지만 유진우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안세리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결국 내가 죽어야 한다는 거지? 술병으로 내 머리를 쳤으면서 물어보지도 않고 이게 맞는 행동이냐고?’“다시 말할게. 내 잘못도 있지만 오빠도 잘못한 부분이 있어.”안세리는 약간의 원망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싸움을 잘하는 줄 알았으면 내가 괜히 걱정하진 않았을 텐데. 그리고 방금은 좀 과했어. 영명이가 거의 죽을 뻔했잖아.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그럼 내가 고마워해야 하나?”유진우는 비꼬듯이 말했다.“고맙다고 할 필요는 없어. 서로 잘못한 부분이 있으니까. 이쯤에서 그만하고 화해하자. 우리 여전히 좋은 친구로 남는 게 어때?”안세리가 제안했다.“나 같은 사람은 너희 안씨 가문이랑 어울릴 자격이 없어. 그냥 이만 끝내자.”유진우는 고개를 저었다.안세리는 계속 변명만 하고 책임을 회피하려 하며 진심 어린 사과는 한 마디도 없었다.이런 사람과는 도저
‘한낱 가난뱅이가 무슨 자격으로 나 송영명과 여자를 두고 다툰단 말이야? 정말로 주제도 모르는군! 온갖 수를 써서 세리에게 접근했다고 한들 난 간단한 계략만으로도 세리를 쉽게 사로잡을 수 있다고. 이게 너와 나 사이의 차이야.’그렇게 유진우는 식당을 떠나갔다.안세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유진우가 자신을 좋아해서 도와준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떠날 때 그렇게 시원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릴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정말 마음이 아픈 걸까? 아니면 연기였을까?’“유진우,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널 내 세계로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이렇게도 나를 몰라주다니.”“네가 뭘 놓쳤는지 알기나 해? 넌 출세의 기회를 놓쳤어. 더 나은 삶을 누릴 기회를 놓친 거라고.”“이건 너의 선택이니 날 탓할 수 없겠지. 내가 기회를 줬는데 네가 소중히 여기지 않은 거잖아.”“됐어, 됐어. 결국 우린 다른 세상 사람들인 거야.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수준엔 절대 도달할 수 없어.”안세리는 고개를 저으며 점점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예전의 정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유진우는 친구로서의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밤, 안씨 가문의 저택 지하 밀실.한 남자가 온몸에 상처를 입고 기둥에 묶여 있었다.남자의 몸 여기저기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붕대를 하나씩 풀자 이전에 살이 찢어진 상처들에는 이미 검은 딱지가 앉았고 일부 부위는 완전히 회복되어 희미한 자국만 남아 있었다.이 모습을 본 안두천은 기뻐하며 외쳤다.“하하하... 옥로고 정말 신기하군! 이번에 우리가 엄청난 보물을 얻었어!”옥로고의 제조법을 얻은 후, 안씨 가문은 비밀리에 연구를 거듭해 드디어 오늘 아침 옥로고를 완성했다.그리고 즉시 실험에 들어갔다.효과는 놀라울 정도였다.칼에 베인 상처도 몇 시간 만에 급속히 치유되었고 정말이지 놀라운 약이었다.“이미 여러 번 실험해 봤는데 이 옥로고는 부작용이 거의 없어요. 바로 생산에 들어가도 될 겁니다.”송자현은 미소를 지으
다음 날 아침, 안씨 가문의 어느 객실 안.유진우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수련 중이었다.그때, 갑작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지?”유진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선생님, 저 규찰이에요. 아침 식사를 가져왔습니다.”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 그래.”곧 유진우는 일어나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열다섯,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가냘픈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정성스럽게 준비된 음식상을 들고 있었다.소년의 이름은 규철, 안씨 가문의 하인으로 부모 없이 외롭게 자란 불쌍한 아이였다.유진우가 안씨 가문에 머물기 시작한 어제부터, 규철은 그의 시중을 들며 차를 내고 안부를 묻는 등 성실하게 돌봐주었다.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의 불운한 아이였다.“수고 많았어.”유진우는 살짝 몸을 비켜 규철에게 들어오라고 했다.“아니에요. 당연히 할 일입니다.”규철은 감격스러운 듯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조심스럽게 음식 상자를 내려놓고 테이블에 내려놓고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선생님, 오늘 아침엔 여덟 가지 요리를 준비했습니다.”규철은 요리를 내놓으며 설명했다.“첫 번째 요리는 잡채.”“두 번째 요리는 돼지 갈비찜.”“세 번째 요리는 생선 양념구이.”“네 번째 요리는 더덕구이.”“다섯 번째 요리는 탕평채.”“여섯 번째 요리는 달걀찜.”“일곱 번째 요리는 오이 숙장아찌.”“여덟 번째 요리는 된장찌개입니다.”모든 요리를 다 내놓고 그릇과 젓가락을 준비한 뒤, 규철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한쪽에 물러섰다.“아침부터 이렇게 거하게 차릴 필요 없는데? 그냥 두유나 죽이라도 간단하게 주면 될 텐데.”유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선생님은 저희 안씨 가문의 귀한 손님이십니다. 어르신께서 특별히 정성껏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규철이 대답했다.“아, 맞다. 어르신 상태는 어때? 깨어나셨나?”유진우가 갑자기 물었다.“오늘 아침에 어르신께서 잠시 깨어나셨습니다. 정신도 돌아오셨고... 이
유진우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자, 먹어. 편하게 먹어. 너무 신경 쓰지 말고.”하지만 규철은 여전히 움츠린 채로, 젓가락을 들고도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넌 너무 말랐어. 성장할 시기에 잘 챙겨 먹어야지.”유진우는 생선 한 조각을 집어 규철의 그릇에 넣어주었다.“감... 감사합니다. 선생님.”규철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긴장된 표정을 감추려 했다.“왜 안 먹지? 입맛에 안 맞아?”유진우는 이렇게 말하며 돼지갈비와 잡채도 규철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 같았다.“충분해요. 선생님도 어서 드세요.”규철은 겁에 질린 듯 손이 떨리며 말했다.“난 배가 안 고파서 말이야. 너 먼저 먹어.”유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저도... 저도 배가 고프지 않아요.”그 말에 규철은 얼굴이 굳어졌다.“배고프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맛이라도 보라고.”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재촉했다. 하지만 규철이 여전히 먹지 않자 유진우는 갑자기 말을 꺼냈다.“설마, 내가 음식에 독을 탔을 거라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네?”그러자 순간 규철의 안색이 굳어졌고 아이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어... 어떻게 제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선생님 농담도 참...”“그렇다면 왜 먹지 않는 거야?”유진우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먹을게요... 먹겠습니다...”규철은 침을 삼키며 마침내 생선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그러면서도 유진우를 보며 말하였다.“선생님, 선생님도 드세요. 정말 맛있어요.”유진우는 그 말을 들었지만 그저 미소를 지을 뿐, 규철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선생님, 왜 안 드세요? 이건 주방에서 특별히 준비한 최고의 요리입니다!”규철은 억지로 웃으며 유진우에게 계속 음식을 권했다. 그러나 유진우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규철의 목소리는 점점 다급해지고 얼굴에는 불안이 서렸다.“선생님! 드세요! 어서 먹어보세요! 저 이
“슈욱!”칼날이 번쩍이더니 규철의 목이 단번에 잘려나갔다.곧이어 그의 머리가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며 두 번 구르다가 멈췄다.두 눈은 마치 구리 방울처럼 크게 뜨였고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죽기 직전까지도 규철은 자신이 유진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의부였던 안중기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렇다, 안중기는 그의 의부였다.규철이 가장 궁핍하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안중기가 그를 구해 안씨 가문으로 데려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규철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심껏 안중기를 위해 일해 왔다.그래서 안중기가 유진우를 독살하라고 지시했을 때,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이것이 자신이 의부인 안중기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심지어 유진우의 신뢰를 얻기 위해 자신에게 독을 시험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고 목숨을 내걸었다.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의부 안중기의 치명적인 일격으로 규철은 목숨을 잃게 되었다.정말로 억울하고 분했다....“뭐죠?”규철의 시체를 바라보던 유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안중기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냉담하게 말했다.“안 집사님, 이게 무슨 뜻이죠?”“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방금 많이 놀라셨죠?’안중기는 곧바로 칼을 거두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집안에서 이런 배신자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다행히 제가 제때 발견해서 큰일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그래요? 그럼 내가 집사님께 감사라도 해야 하나요?”유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안중기가 이렇게 빨리 나타난 것은 분명히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했고 조금 전 그 일격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명백히 사람을 없애려는 목적이었다.하지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안씨 가문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는지 말이다.“감사는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니까요.”안중기는 침착하게 대답했다.“사실 이 일은 제
“가주님, 듣기로는 어르신께서 깨어나셨다면서요?”유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에서 미묘하게 바뀐 호칭이 느껴졌다.“맞네. 아버지께서 깨어나셨지만 아직 몸이 많이 허약하고 정신도 불안정해. 한동안은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군.”안두천이 대답했다.“걱정 마세요. 후유증일 뿐이라 곧 회복될 겁니다.”유진우는 말하다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말했다.“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전에 약속했던 금수옥과 빙심연,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그건...”안두천은 잠시 머뭇거리며 옆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그러자 송자현이 대화를 이어받으며 차분하게 말했다.“우리 안씨 가문은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킨다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우리도 바빠서 진우 씨 한 사람만을 위해 일할 수는 없거든.”“사모님, 거래할 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요.”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최고급 영약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소식이 있으면 곧바로 알려줄게.”송자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기다리라고요? 계속 기다리다간 내 목숨이 먼저 날아갈지도 모르겠군요.”유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의 대화를 통해 그는 안씨 가문이 이미 그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확신했다.그 이유는 아마도 옥로고 제조법 때문일 것이다. 이런 귀중한 비법은 안씨 가문이 사람을 제거할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기다릴 수 없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어.”송자현은 냉담하게 말했다.“됐습니다. 더는 기대할 수 없겠군요. 그렇다면 이만 작별하시죠.”유진우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고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멈춰!”그때, 송자현이 갑자기 소리쳤다.“사모님, 더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유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뒤돌아보았다.만약 안씨 가문이 진짜로 대립각을 세우려 한다면 그는 결코 이곳을 가만히 떠나지 않을 작정이었다.“진우 씨, 우리 할아버님께서는 몸이 허약해 보양식이 필요해. 전에 준 용혈삼이 최고의 보양식인데... 그걸 돌려주셨
“뭐죠? 지금 이 상황에서 손을 쓰겠다고요?”유진우는 앞뒤를 둘러보며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나는 여러분들의 딸을 구했고 그 후에는 약제를 전해 주었으며 어제는 어르신을 저승 문턱에서 끌어내 왔습니다. 이토록 많은 일을 해왔는데 안씨 가문은 감사는커녕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하다니... 이 사실이 밖으로 알려진다면 안씨 가문의 체면과 명성이 어떻게 될 것 같으십니까?”이 말에 안두천을 포함한 모두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안두천은 가문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규철에게 독을 쓰게 했던 것이다.그렇게 하면 만일 문제가 생기더라도 규철을 희생양으로 삼아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제 규철이 죽은 상태에서 공공연히 문제를 일으킨다면 어떤 비난을 받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살인과 배신,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소문이 퍼지면 안씨 가문의 신뢰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 분명했다.심사숙고 끝에 안두천은 일단 물러나기로 결정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 선생은 우리 안씨 가문에 큰 은혜를 베푸신 분인데 어찌 그리 무례하게 굴 수 있단 말이야? 정말 예의가 없군! 어서 물러서!”안두천은 송자현을 꾸짖으며 길을 막고 있던 무도 고수 둘을 밀어내고 유진우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정말 미안하네. 우리 아내가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다 보니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져 말이 지나쳤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라네.”이 부부는 상황에 따라 서로 역할을 나눠 하나는 위협하고 다른 하나는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상례였다.위협이 통하면 좋고 통하지 않더라도 완전히 체면을 잃지는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안씨 가문에도 이성을 가진 사람이 있군요. 아예 체면은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습니다.”유진우는 비꼬듯이 웃으며 말했다.“너...!” 송자현은 곧바로 반발하려 했지만 안두천의 눈빛에 의해 멈췄다. 그리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우 씨의 은혜, 우리 안씨 가문은 결코 잊지 않을 거야.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말만 해. 할
“제후님께서 도련님이 오실 걸 알고 저더러 미리 나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늙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고요?”유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옆에 있는 유진우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은성종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제갈영군이 전화로 알렸거나 유태범의 사자가 먼저 와서 선수를 친 것이다.“도련님, 제후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늙은 집사가 허리를 굽히면서 손짓으로 안내했다.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여기까지 온 이상 중간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뚫고 나가야 했다.일행은 늙은 집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시설을 지난 후 식당에 도착했다.식당 안에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었다.유천우 일행은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도련님,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늙은 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제후님은요?”유천우가 물었다.“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늙은 집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손짓했다.“너희들, 얼른 와서 먹어.”“네.”근위병 몇 명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훈련을 잘 받은 근위병들은 3일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음식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유천우 대신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항상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은성종이 음식에 약을 넣었다면 그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모든 음식을 다 맛본 후에야 근위병들은 유천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
해 질 무렵,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은 변경 요새 도시인 태평에 도착했다.태평은 회음 제후 은성종의 영역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은성종의 통치 아래 짧은 10여 년 만에 서경에서 5위 안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의료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태평이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은성종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 덕이었다.만약 제갈영군이 난세의 영웅이라면 은성종은 세상을 다스린 명신이었다.그 시각 회음 제후 저택 밖.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길가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일행이 잇달아 내렸다.“형, 여기가 마지막 목적지예요.”유천우는 저택 간판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회음 제후 은성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의협심도 강해요. 게다가 제갈영군의 편지까지 있으니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은성종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유만수조차도 은성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어. 아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혹시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태범이 이미 제갈영군과 연락했으니까 분명히 은성종과도 접촉했을 거야. 은성종이 유태범한테 설득당해서 유태범의 진영에 합류할까 봐 걱정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야.”유진우가 분석했다.유태범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표기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지혜와 용맹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유태범도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유천우 일행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유태범이 아니었다.전에 제갈영군을 끌어들이려고 도시 두 개를 제시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장범규는
제갈영군의 날카로운 눈빛과 창을 바라보면서도 유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제후님, 도시 두 개의 유혹이 매우 큰 건 사실입니다. 저였더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제후님이 제 목숨으로 도시 두 개를 바꾸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아?”제갈영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아니면 내가 감히 널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죽는 건 당연히 두렵습니다. 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지 않아요.”유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르시면서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다 죽였죠. 그런 분이 저의 목숨 따위 가져가는 건 순간일 것이고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죽는 게 두렵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제갈영군은 조금 의아해했다.“죽는 걸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했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이 정말로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갈 수도 없어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재밌는 녀석이군.”제갈영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창을 내려놓았다.“피는 못 속인다더니 오늘 보니까 맞는 말 같군. 유씨 가문에는 쓸모없는 자식이 하나도 없어.”“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됐어. 농담 그만할게. 유태범의 부하들이 날 찾아온 건 맞지만 이미 내가 다 죽였어.”제갈영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몇 명의 호위병이 시신을 끌고 와 유천우의 발밑에 던졌다.“자, 얘네들이 유태범이 보낸 사람들이야.”제갈영군은 발로 시신을 툭툭 치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후님, 유태범이 주겠다는 도시 두 개를 포기하겠단 겁니까? 전 그렇게 좋은 걸 드릴 수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
유천우의 말은 강력한 힘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만약 서경이 무너진다면 8대 제후, 각 지역의 고위급 관료, 수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다들 서경에 뿌리 박고 사는 사람들이라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천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항상 앞뒤를 생각하거든. 만약 반란을 진압하다가 군대를 다 잃으면 어떡해?”주한휘는 여전히 망설였다.“제후님, 혹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서경왕부에서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한휘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실질적인 이득을 원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거나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기에 혹시라도 실패하면 큰 손실은 면할 수 없으니까.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천우야,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말로만 해선 안 돼.”주한휘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원하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큰소리치며 장담했다. 이 정도면 성의를 충분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알았어. 천우 네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이네.”주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내 딸인데 올해 25살이 됐는데도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만약 천우 너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다면 참 좋을 텐데.”“저요?”유천우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주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딸 해린이 절세미녀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얼굴도 나름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 만약 해린이를 아내로 들인다면 내조도 엄청 잘하는 현모양처가 될 거야.”현재 그에게는 돈과 인맥 모두 충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하늘보다 높은 권력이었다.서경왕이 죽은 지금 유천우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만약 딸이 유천우와 결혼한다면 나중에 서경의 왕비가 될 것이고 주한휘의 신
유천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예의를 갖춰서 설득하다가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만약 반란을 일으킨 4대 제후가 서경왕부에 굴복한다면 서경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때가 되면 서경왕부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4대 제후와 서경의 많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반역자들을 몰살할 것이다.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유천우의 말을 들은 장범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 덕이야. 반란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감사합니다. 제후님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 어려움을 꼭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말했다.“이건 내 제후령이야. 제후령만 있으면 가진의 병사를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장범규는 갑자기 병부를 꺼내 유천우에게 건넸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보여주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이건...”되레 유천우가 망설였다. 장범규가 이토록 통쾌하게 병부를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행동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사양하지 마. 비상시국이잖아. 이 제후령이 있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장범규는 병부를 유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봐.”장범규가 손을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일행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오늘 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30분도 채 안 되어 평양 제후 장범규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령마저 받았다.만약 이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
가진은 서경의 변방 도시이자 평양 제후 장범규의 영역이었다.무장 출신인 장범규는 서경왕 유만수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고 세운 공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 평양 제후가 된 후 서경의 변방을 지켰다.수년 동안 장범규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해왔다.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갑자기 평양 제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등 몇 명이 나란히 내렸다.“형, 여기가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네 저택이에요.”유천우가 간단하게 소개했다.“장범규는 그래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에요. 가진을 수년 동안 관리하면서 직무와 책임을 다했거든요.”“밖에 누구야?”저택 입구를 지키던 호위병 두 명이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유천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패를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서경왕의 둘째 아들 유천우다.”“도련님?”두 호위병은 유천우의 신분패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나머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유천우가 신분패를 거두어들였다.“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평양 제후님을 뵈러 왔어. 들어가서 보고 좀 올려줄래?”“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가서 제후님께 말씀드릴게요.”그중 한 호위병이 대답하고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부하들과 함께 부랴부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였다.“안녕하세요, 제후님.”유천우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서경왕의 둘째 아들이긴 해도 눈앞의 장범규는 제후이기에 신분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장범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일이었다.“천우야,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왔어?”장범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제후님, 서경왕부에 변고가 생겨서 제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변고가 생겼다고? 무슨 일인데?”장범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