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약간 흥미를 보였다. 이전 이의진이 그에게 준 주소에 따르면, 사철수는 바로 구세당 안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구세당은 유공권이 운영하는 의원이었다. 그 당시 유공권은 중상을 입고 죽어가던 사철수를 구한 뒤 그를 숨겨주었다. 사철수가 혼수상태에 빠진 10년 동안, 유공권은 그를 정성껏 돌봤다."알고 말고, 내가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나와 유명의는 생사를 함께한 친구라네. 그는 자주 내 차를 타고 다니지. 네가 진료를 받으러 간다면 내 이름을 대기만 해. 그러면 반드시 할인을 받을 거야!" 대머리 아저씨가 당당하게 말했다."그래요? 유공권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유진우가 다시 물었다."유명의의 인품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 그는 정말로 자비로운 사람이라네!" 대머리 아저씨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진료를 받으러 오면, 거의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약을 주지. 돈을 받더라도 상징적인 약재비만 조금 받는데 그 가격도 정말 놀라울 정도로 저렴하다네. 지금 이렇게 무상으로 사람들을 돕는 명의는 정말 드물지.""당신 말을 들으니, 정말 그 유명의를 만나보고 싶네요." 유진우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공권이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커졌다.대머리 아저씨는 여전히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고, 그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유진우는 아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며, 전혀 응대하지 않았다.약 40분 후, 택시는 마침내 멈춰섰다."젊은이, 구세당에 도착했어."대머리 아저씨가 뒤돌아 소리쳤다.유진우가 눈을 뜨고 보니, 거리 가까이에 고풍스러운 장식의 의원이 있었다. 의원은 규모가 꽤 컸고, 총 3층 건물이었으며, 환자들이 끊임없이 드나들고 있었고 심지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의원 앞 대문 위에는 '구세당'이라는 세 글자가 힘차게 적힌 금빛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맙습니다."주소가 맞는 것을 확인한 후, 유진우는 백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건네고 바
"의사! 의사 어디 갔어?!"몇 명의 호위무사들이 계속 소리쳤고 그들의 사나운 모습에 환자들은 괜히 문제에 휘말릴까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졌다."무슨 일이야?"구세당의 의사 몇 명이 급히 몰려들었다."모두 비켜! 내가 할게!"전기훈은 몇 명의 의사들을 밀쳐내며 자진해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안씨 가문의 안세리 양이신가요?""알고 있다면, 빨리 사람을 살려!" 호위무사 대장이 재촉했다."문제없습니다!"전기훈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했다.안씨 가문은 연경의 8대 가문 중 하나로, 재력이 막대하고 권세가 대단했다. 안씨 가문의 딸인 안세리는 미모와 재력을 겸비한 인물로 유명했다. 이제 이 미인을 구할 영웅이 될 기회가 찾아왔으니, 당연히 놓쳐서는 안 된다.만약 안세리를 치료해 낸다면, 그는 단숨에 인생 역전을 이루고 큰 성공을 거둘지도 모른다!"어떻게 된 일인가요? 안 양이 어디 다치셨나요?"전기훈이 자세히 살펴보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안세리의 얼굴은 푸르스름하게 변했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으며, 호흡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우리 아가씨가 술을 마시고, 방금 차를 몰고 집에 가던 중 실수로 강에 빠졌어. 우리가 구했을 때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어." 호위무사 대장이 빠르게 설명했다."술을 마시고 운전하면 어떡해요? 너무 부주의하잖아요!" 전기훈이 한 마디 불평을 던졌다."말이 많아! 빨리 사람부터 살려!" 호위무사 대장이 소리쳤다."당황하지 마세요, 그저 익수일 뿐이니 금방 해결할 수 있습니다."전기훈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두 명의 학도에게 안세리를 들어올리게 지시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무릎으로 안세리의 배꼽을 누르며 등을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동시에 턱을 살짝 들어올려 배 안의 물이 흘러나오게 했다.안세리의 익수 상태는 심각하지 않아 호흡과 맥박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고, 물만 빼내면 되는 상황이었다. 이전에
“난 그저 잘못된 방법으로 인해 사람 목숨을 해치면 나중에 뼈저리게 후회해도 아무 소용 없다는 걸 너에게 충고해 줄 뿐이야.”유진우는 차갑게 말했다.“흥, 헛소리하지 마!”전기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여 말했다.“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방법은 전부 사부님께서 직접 전수해 준 거야. 그동안 수많은 병환을 치료했는데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어. 아니면, 네가 사부님보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사람을 살리는 방법은 고정불변한 게 아니야. 실제 상황에 맞게 쓸 수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유연하게 구분하고 사용하는 것이 옳아.”유진우는 그의 무식함을 조소하는 듯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닥쳐! 한마디만 더 나불대면 당장 여기서 쫓아낼 거야!”전기훈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난 유공권의 가장 뛰어난 제자이자 미래 구세당의 훈장이야. 이름도 못 들어본 녀석이 주제도 모르고 감히 모두 앞에서 날 가르치려고 해?”“믿든지 말든지.”유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사람부터 살려!”호위무사가 재촉하였다.전기훈은 치미는 화를 억누르고 구조하는 데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무릎으로 배를 누르는 방법이 소용없자 그는 즉시 여러 가지 배수 방법을 바꾸며 시도해 보았다. 뛰고 흔들고 때려도 보며 한참을 뒤척였지만 여전히 아무 소용 없었다.안세리의 얼굴빛은 청자색이 더욱 짙어졌고 호흡은 완전히 끊겼으며 맥박마저 멈추었다.“멈춰! 멈추라고!”호위무사는 상황이 심상치 않자 급히 전기훈에게 동작을 멈추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다가가 안세리의 맥박을 살펴보더니 순간 벼락을 맞은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소리쳤다.“ 없... 없어... 호흡이 없어... 아가씨가 이미 숨이 멎었다고!”이 말이 나오자 온 장내가 경탄으로 떠들썩했다.안세리가 그렇게 오랜 구조를 받고도 호전되기는커녕 목숨마저 잃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전기훈은 멍하니 넋을 잃고 얼어붙은 듯
“잠깐...”이때 정신을 차린 전기훈이 급히 말했다.“이 녀석의 말을 정말 믿으려고 하는 건 아니죠...? 이놈은 우리 구세당 사람이 아니에요. 절대 속으면 안 돼요!”“속여?”호위무사는 유진우를 위아래로 샅샅이 훑더니 의심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넌 의사가 아니라고?”“비록 이 구세당 의사는 아니지만 의술은 조금 아는 편입니다.”유진우는 태연하게 말했다.“흥, 구세당도 못 구한 사람을 네 놈이 좀 수작 부린다고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전기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네가 못 살린 거지 나라면 살릴 수 있어. 전에 말했잖아, 너의 방법이 틀렸다고.”유진우는 여전히 태연했다.“개소리하지 마! 난 유 명의의 가장 훌륭한 제자야. 네가 뭔데 감히 나랑 같은 취급해?”전기훈은 약이 바싹 올라 허둥대며 소리쳤다.“너랑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비켜, 사람 구하는데 방해되지 않게.”유진우는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자신이 못 구했으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이 구하는 걸 막아? 이런 인간은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건지 유진우는 이해가 안 갔다.“이놈아, 내가 경고하는데 이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안씨 가문의 아가씨이셔. 너 잘못 처리했다가 목숨이 열 개라 해도 속죄하기엔 모자랄 거야!”전기훈이 위협했다.이 말이 나오자, 군중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이 봐 자네, 무리하지 말게. 구세당의 의사도 어쩔 수 없다는데 자네가 올라가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그래, 애들 놀음도 아니고 한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네가 나설 때가 아니야!”“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세상 물정을 모른다더니 쥐똥만큼 한 걸 배웠다고 감히 자신을 내세우려 하고... 사람 목숨은 전혀 눈에 두지 않는구나!”구경하던 어르신과 아주머니들은 저마다 혀를 놀리기에 바빴다. 그중에는 설득과 의심, 그리고 경고의 뜻도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구세당은 주변 몇십 리 이내 가장 좋은 의원이었다. 평소에 어떤 두통과 발열, 여러
유진우가 손을 휘휘 젓자 모두 뒤로 물러서서 충분한 공간을 내주었다.“부축하시죠.”유진우는 호위무사에게 안세리를 부축하라고 지시한 다음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에 넣더니 두 손가락으로 혀를 집어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고는 온몸의 내공을 한 손바닥에 모아 그녀의 등을 향해 힘껏 쳤다.“쿵!”손바닥이 등에 부딪히는 소리가 쩌렁쩌렁했다.안세리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머리를 쳐들고‘와’하는 소리와 함께 대량의 물을 내뿜었다.모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보니, 뿜어낸 그 여울의 토사물 속에 뜻밖에도 물고기 한 마리가 섞여 있었다.“어머나! 안 아가씨의 입에 어찌하여 물고기가 있습니까?”“혹시 이 물고기가 목에 걸려서 숨을 못 쉬었단 말입니까?”“어쩐지 전 의사의 방법이 통하지 않더라니, 물고기에 걸린 것이었군요! 참 재수가 없어도...”“...”바닥에 있는 작은 물고기를 보며 어르신과 아주머니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수군거렸다.안 아가씨가 질식한 원인이 그제야 드러났다.“그... 그럴 리가!”전기훈은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술에 취해서 운전하다 호수에 빠지고 마침 물고기가 목에 걸릴 확률은 너무 낮잖아!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어!“우리 아가씨는 이물질과 물을 배출했는데도 왜 아직 숨을 쉬지 않는가?”호위무사는 기뻐하다 말고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안세리는 많은 것을 토해냈지만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심장이 멎었으니 호흡이 없는 건 정상입니다. 하지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세 바늘이면 깨어날 것입니다.”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흥, 정말 뻔뻔하다 못해 답이 없는 놈이야. 넌 자신이 신선이라도 된 줄 알아?”전기훈은 그가 잘되는 꼴을 못 보듯 바로 비아냥거렸다.‘이미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린다고 그래?’“넌 의학에 대해 깊게 연구하지도 못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해.”유진우가 되받아쳤다.“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큰소리는 잘 쳐. 네가 정말 세 바늘만으로 안 아가씨를 살릴 수 있다면 난 땅에 있는 이
“으~!”안세리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질식한 것처럼 힘겹게 신음을 내었다.이어 그는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 공기를 탐욕스럽게 들이마시기 시작했다.얼굴빛은 어두운 청자색으로부터 점차 붉어지고 윤기가 돌았다.“이럴 수가!”갑작스러운 변고에 모두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방금까지만 해도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누워있던 안 아가씨가 갑자기 살아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이다.“깨... 깼어? 설마 시체가 움직이는 건 아니겠지?”“세상에! 죽은 사람을 살렸어? 이게 말이 돼?”“신의! 과연 신의시다!”무리 지어 구경하던 어르신과 아주머니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비록 그들은 세상 물정에 대해 견문이 넓고 못 들어 본 이야기나 소식이 거의 없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분명히 이미 죽은 사람이었고 호흡도, 심장도 멎었지만 유진우는 세 침만으로 죽은 사람을 회생시켰다.이렇게 신기한 의술은 모두에게 금시초문이었다.그러자 순식간에 유진우를 바라보는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이미 죽은 사람을 살린다니 말이 안 되잖아!”전기훈은 이 사실을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움에 넋을 잃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침 세 개로 살린다면 진짜 살리고, 어떻게 그렇게 신기한 일이...“살았어, 살았어! 아가씨가 살아나셨다!”안씨 가문의 호위무사들은 멈칫하더니 덩달아 얼굴에 화색이 돌아 기쁨에 젖어 환호하며 외쳤다.만약 안세리가 정말 죽는다면 그의 호위무사들은 무조건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고 분명 불운도 뒤따를 것이었다.이제 안세리가 드디어 생명의 위험을 벗어났으니, 그들은 마침내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아가씨! 몸은 어떠십니까? 어디 아픈 곳은 없으십니까?”호위무사는 급히 몸을 웅크리고 앉아 상황을 묻기 시작했다.“어떻게 된 거야?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안세리는 주위를 망연하게 둘러보며 어리둥절했다.그녀의 기억은 차를 몰다가 강물에 빠져
“이 신의는 운이 참 잘 따라주네. 하필이면 안 아가씨의 목숨을 구해주다니, 정말 귀인을 만난 거와 다름없어.”그 천만 원짜리 수표를 보면서 어르신과 아주머니들은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이 돈은 그들이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기엔 충분했다.“빌어먹을!”전기훈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이 횡재는 본래 그의 것이어야 하는데 뜻밖에 나타난 유진우에게 먼저 빼앗겼다.현재의 밑바닥에서 위층으로 뛰어들 수 있는 기회를 이 녀석이 전부 망쳤다.“고맙네요.”유진우는 사양하지 않고 수표를 받았다.그는 돈을 위해 사람을 구하는 건 아니지만 남이 주는 돈 또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유신의, 난 아직 볼일이 남았으니 다음에 또 만납시다.”“기억해 두세요, 무슨 일이 있거든 안씨 가문에 저를 찾아오십시오.”안세리는 작별 인사를 건네고는 빠른 걸음으로 이곳을 떠났다.방금 강에서 건져내어 이미지 손상이 이만저만이 아니니 서둘러 돌아가 빗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야!”호위무사는 갑자기 전기훈을 부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좀 전에 유신의가 세 침만으로 우리 아가씨를 살릴 수 있다면 바닥에 있는 걸 전부 먹는다고 말했었지? 이제 먹어도 돼.”“네?”땅 위의 토사물을 바라보며 전기훈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이것들은 모두 위에서 토해낸 것으로 징그럽고 끈적끈적했으며 죽은 물고기도 한 마리 들어있었다.이걸 먹는다고? 어떻게?“어서!”호위무사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고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온몸을 감쌌다.그의 뒤로 몇 명의 호위무사가 앞으로 나서서 전기훈을 호시탐탐 노리며 언제든 출동할 준비가 되어있었다.전기훈이 감히 안 먹겠다는 말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모두에게 한 대 얻어맞았을 것이다.“먹... 먹을게요...”전기훈은 어쩔 수 없이 울상을 지으며 바닥에 있는 토사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웠다.그는 몇 번이나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나 토할 뻔했지만 결국 억지로 삼켰다.안 그러면 자신이 토
“유명의? 유명의께서 오셨다고?”유공권이 들어 온 것을 본 사람들이 단번에 우르르 몰려들자, 유진우는 졸지에 반대로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유진우가 조금 전 보여준 실력도 당연히 좋았으나, 유공권에 비하면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필경 유공권은 세간에 떨친 명망도 있을뿐더러 오랜 시간 민심도 깊이 얻어왔기 때문이다.그 지위는 누구도 흔들 수 없을 것이다.“유명의! 드디어 와 주셨군요, 구세당이 하마터면 큰 봉변을 볼 뻔했습니다!”“그래요, 그래요! 방금 사람이 죽는 줄 알았다니깐요, 신의 님이 도와주셔서 다행히 구 세당의 간판은 지켰네요!”“유명의, 저 신의님이 설마 새로 들인 제자는 아니겠죠?”“……”어르신과 아주머니들의 열정 가득한 목소리가 가십의 본색을 충분히 보여줬다.시끌벅적한 상황에 갓 문을 열고 들어온 유공권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여러분, 침착하십시오…… 침착하십시오……”유공권이 손을 내리누르며, 뭇사람들이 차차 조용해지는 것을 보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천천히 말해 주시죠, 급한 것 없습니다.”“저요, 제가 말하죠! 이래 봬도 예전엔 저기 다리 밑에서 이야기꾼을 해왔었다니까요! ”한 어르신이 자처해 방금 일어 난 일을 구구절절 과장을 보태어 연설 해댔다.유진우가 어떻게 사람을 구했는지, 죽어 가던 사람이 어떻게 기사회생했는지, 어떤 수로 구세당을 구했는지 줄줄이 영웅담을 늘어놓았다.어찌나 생동하고 흥미진진한지, 주위에 서 있던 아주머니들이 연달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 어르신을 보는 시선에도 존경의 눈빛이 역력했다.이런 입담으로는 곧바로 먼저 짝을 지을 선택권이 주어질 게 분명했다.“그런 일이 있었군요.”다 듣고 난 유공권은 홀연히 머리를 끄덕이고는 유진우의 앞에서 미소를 지었다. “젊은이, 도와줘서 고맙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 정도의 의술을 갖고 있다니, 영웅이 따로 없군 그래.“유명의, 과찬입니다. 한참 모자란 실력일 뿐입니다.” 유진우가 겸손히 말했다
“네 말은 누군가 4대 제후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게 조종하고 있단 말이야?”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맞아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지금 서경에서 4대 제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죠.”“유태범!”이의진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야심이 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4대 제후의 손을 빌려서 우리가 병부를 내놓게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유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분석했다.“만약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4대 제후는 반란을 일으켜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게 압박한 다음 유태범이 중간에서 방해하면서 우리한테 불리하게 할 겁니다. 우리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면 서경왕부의 위엄이 크게 손상될 거예요. 그러다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질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백성들을 구하고 4대 제후를 제압할 계획인 거죠. 그때가 되면 유태범은 만인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왕이 될 겁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유태범이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서경왕이 되겠죠. 아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네요.”유천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유태범이 꾸민 건 음모가 아니라 공공연한 모의였다. 하지만 상대가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공공연한 모의의 무서운 점이다.“그렇다면 유태범이 진작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네.”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지금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고 설득도 불가능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나머지 4대 제후와 아버지의 옛 부하들과 손을 잡아야만 유태범과 겨룰 수 있을 겁니다.”유천우가 대답했다.“일리 있어.”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나머지 4대 제후를 모셔오도록 할게. 같이 모여서 상의하는 게 좋겠어.”“어머니, 제가 직접 갈게요. 그래야 성의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죠.”유천우가 직접 나섰다. 나머지 4대 제후
“형, 난 진짜 안 돼요.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유천우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드러났다.“됐어. 왕위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안팎으로 불안이 끊이지 않아.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야.”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형이 나서서 이끌어준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난 지금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어.”그러자 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유태범 일당이 아직 내가 서경으로 돌아온 걸 모르고 있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어. 내가 돌아온 걸 몰라야 유태범이 무슨 꿍꿍이라도 꾸민다면 제때 해결할 수 있지. 그리고 호룡각의 잔당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기회를 봐서 싹 다 일망타진할 거야.”“그런 거였군요.”유천우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알겠어요. 그럼 서경왕부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나한테 맡기고 형은 보이지 않는 음모들을 해결해주세요.”“그래. 그렇게 하자.”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참. 그리고 이거.”유천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금색 영패 하나를 꺼내 유진우에게 건넸다.“이건 내 군령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내 결사대원 800명을 동원할 수 있고 필요한 순간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그의 결사대원 800명은 모두 엄선해서 뽑은 고수들이었다.유천우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의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몰래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힘을 비축했다.20년이 지난 지금 결사대원 800명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알았어. 영패는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줄게.”유진우도 거절하진 않았다.지금 이청성의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호룡각의 잔당들에 비하면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젠 유천우의 결사대원 800명이 더해졌으니 싸울 힘이 생겼다.“천우야!”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조금 전 나갔던 이의진이 다시 다급하게 빈소로 들어왔다. 유진우는 재빨리 가면을 쓰고 근위병인 척 옆에 섰다.유천우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형제끼리의 믿음 때문이
“형?”유천우는 인피 가면을 벗은 남자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기쁨에 겨워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경왕부에 위장 잠입한 유장혁이었다.“많이 컸구나, 천우야. 이젠 혼자서도 일을 척척 해내고.”유진우는 배다른 동생 유천우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사실 조금 전 유천우와 이의진의 얘기를 전부 다 들었다. 유천우가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이의진이 걱정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지금까지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형제끼리 물고 뜯고 부자끼리 서로 죽이는 걸 수두룩하게 봐왔다. 자기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형, 서경에는 언제 왔어요?”유천우가 물었다.“이틀 정도 됐어.”유진우가 대답했다.“아버지 돌아가신 거 알았어요?”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진우는 빈소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부자는 1년 전 강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유진우는 빈소에 서 있었고 유만수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유진우는 관 앞으로 걸어가 반쯤 열린 관뚜껑 사이로 그 안에 누워있는 유만수를 보았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니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하지만 어찌 된 건지 그렇게 미워했던 유만수의 얼굴을 본 순간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내가 만약 서경에 빨리 돌아왔더라면, 빨리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유진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형, 사실 최근 2년 사이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특효약으로 연명하셨어요. 의사는 아버지가 천인오쇠라고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천천히 쇠약해져서 죽는 것보다 이 결과가 아버지한테는 오히려 해방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유천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범인은 잡았어?”유진우가 돌아서서 물었다.“홍복홍이 지금 조사하고 있어요.”유천우가 대답했다.“서경왕부에 숨은 스파
그래야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라도 지킬 수 있다.지금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표기 대장군 유태범밖에 없었다.첫째로 유태범은 유씨 가문 사람이라 왕족에 속했기에 명분이 정당했다. 둘째로 표기 대장군으로서 서경의 절반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셋째로 유태범은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인맥, 위신, 공로 모두 왕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현재 유태범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적지 않은 관원들은 애도를 표한 후 바로 대장군 저택으로 가서 유태범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서경왕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의진은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어머니, 벌써 종일 여기 계셨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이러다가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수심과 피곤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유천우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어.”이의진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더 조심해야죠. 서경왕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왕비인 어머니가 버티셔야 합니다. 절대 쓰러져선 안 돼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이의진은 뭐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유천우가 가로챘다.“어머니,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주세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아버지 곁을 지켜도 괜찮아요.”이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천우는 도우미 두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너희 둘, 어머니를 방으로 모시고 잘 보살펴드려.”“알겠습니다.”두 도우미는 대답한 후 이의진을 부축했다. 무릎을 하도 오랜 시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린 나머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천우야, 너도 몸 잘 챙겨. 절대 방심해선 안 돼.”이의진이 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가는 걸 본 후에야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다들 돌아가. 여긴 나 혼자 지키면
그 시각 서경왕부 문 앞.유태범 등 3인은 한 무리의 근위병들을 이끌고 서둘러 걸어 나왔다.서경왕부를 떠난 후 조군영이 참다못해 물었다.“대장군님, 이의진 모자가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데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당연히 내버려 둘 순 없지. 하지만 너무 대놓고 움직여서도 안 돼. 흑용군의 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서경왕부에 충성해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유태범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조군영이 또 물었다.“대놓고 움직일 수 없다면 몰래 압력을 가해야지.”유태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경에 내란이 일어서 서경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이간질시킬게요. 백성들의 원한이 커져서 서경왕부도 감당이 안 될 때 대장군님이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경의 백성들은 대장군님께 고마워할 것이고 새로운 서경왕으로 모시겠죠.”눈치가 참 빠른 조군영이었다.“맞아. 아주 영특하구나, 너. 나중에 내가 서경왕 자리에 앉으면 표기 대장군 자리는 네 것이 될 거야.”유태범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대장군님.”조군영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얼른 움직여. 빠를수록 좋아. 절대 그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된다는 거 명심해.”유태범이 신신당부했다.“알겠습니다.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조군영은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대장군님, 일반적인 내란이라면 서경왕부의 뿌리를 흔드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반드시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고원이 귀띔했다.“그건 나도 알고 있어.”유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난 내 사람을 몰래 키워왔어. 8대 제후 중에 절반이 내 사람이야. 내 명령 한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날 도와줄 거야.”“진작 준비하고 계셨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고원이 웃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서경왕이 되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유태범은 오랫동안 야심을 숨겨왔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이 기회에 무조건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겁니다. 이 일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맞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해도 뒤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거야. 앞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해.”이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형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유천우가 한탄하듯 말했다.“천우야, 네 능력도 네 형 못지않아. 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이의진이 그를 격려했다.“어머니,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어요. 형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이의진이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장례식이 끝난 후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너한테 왕위를 물려주게 할 거야. 앞으로 서경왕은 너고 그 중책을 맡아야 해.”“어머니, 왕위는 형 거예요. 전 그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서경왕은 형만이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천우야, 다른 일은 남한테 양보해도 이건 절대 안 돼!”이의진이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에 그리는 자리인지 알아?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저한테 있어서 권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버지처럼 매일 애쓰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왕이 되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걱정거리만 태산일 텐데. 그럴 바엔 맨날 먹고 놀면서 편히 살겠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이 녀석아, 일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전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가 있어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아무 권력도 손에 쥐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