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우는 좀 웃겼다.“천향루 서비스가 원래 이런가요? 아무 이유 없이 방을 바꾸라고 하면서 이런 태도예요? 당신들 뭐 하는 거죠? 가게가 크다고 손님을 홀대하는 건가요?”아무나 몇 명 온다고 방을 바꾸라고 강요하는 곳에서 식사를 어떻게 하지?“고객님, 도대체 뭘 원하십니까?”부지배인은 좀 언짢아했다.“말을 들어보니 보상을 요구하는 것 같은데. 좋아요. 방을 옮기는 것만 동의하면 제 개인 돈으로 과일 한 접시 올릴게요. 됐죠?”말하고 나서 심지어 너무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우선, 보상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그리고 과일 한 접시로 때우려 하다니. 우리를 뭐로 봐요? 거지 취급하는 거예요?”유진우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식당에서는 손님이 왕인데, 이 여자는 그들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객님, 생트집을 잡지 마시죠. 우리 식당 규칙이 맘에 안 드시면 나가세요. 절대 억지로 잡아두지 않습니다.”부지배인이 몹시 짜증을 냈다.지금 식당이 장사가 잘돼서 손님이 아쉽지 않았다.부도덕한 손님 몇 명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어? 몇 마디 했다고 내쫓는 거예요? 천향루는 정말 위세가 대단하군요.”유진우는 부지배인을 밀쳐내고 곧장 천자 3호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으며 차갑게 말했다.“나는 오늘 꼭 여기 앉아 밥 먹을 거예요. 재간 있으면 나를 쫓아내 봐요.”“당신... 당신들 진짜 억지를 부리는군요.”이쯤 되자 부지배인은 약이 바짝 올랐다.“우리 천향루는 당신들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경고하는데, 당장 나가세요. 안 나가면 경비원을 부르겠습니다.”“불러요, 얼마든지. 이 일이 커지면 당신들이 어떻게 장사를 하는지 두고 볼 거예요.”유진우가 거리낌 없이 차를 한 잔 따랐다.“이 쓰레기 같은 인간들, 진짜 뻔뻔스럽네. 꺼져! 당장 꺼져!”악에 받친 부지배인은 유진우에게 달려들어 끌어내려 했다.하지만 그녀는 손을 들자마자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찰싹! 조선미에게 한 대 맞은 부지배인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고 무슨 상황인지
“으악...”그 순간 여자 부지배인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두 발이 허공에 떠 있었고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죽음의 공포가 서서히 그녀를 덮쳤다.지금까지 줄곧 아무 말 없던 백발의 여자가 한 손으로 그녀를 들어 올릴 만큼 힘이 엄청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상대가 조금만 힘을 가한다면 목이 그대로 부러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죽일 필요까진 없고 뺨 두어 대 정도로 혼 좀 내면 돼.”유진우가 입을 열었다.“알겠어요.”짝, 짝!조홍연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부지배인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그 바람에 부지배인은 머리가 어지러워 비틀거렸고 이가 부러진 건 물론이고 코와 입에서도 피가 흘러내렸다. 다 때린 다음에는 쓰레기 버리듯 밖에 내다 버렸다.“콜록콜록...”부지배인의 얼굴이 벌겋게 퉁퉁 부어올랐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기침을 한참 동안 하다가 겨우 진정했다.“당신들... 정말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절대 가만 안 둬!”부지배인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하면서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계단 입구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부딪혀 곤두박질치고 말았다.“누구야? 눈 어디에 두고...”부지배인은 일어나면서 욕설을 퍼부으려다가 상대를 확인한 순간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알랑거렸다.“청아 씨, 사모님 오셨어요?”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가 얘기했던 귀한 손님들이었다. 이청아를 선두로 옆에 장경화, 단소홍, 장홍매 일행이 함께했다.“뭐야? 눈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야? 우리 들어오는 거 못 봤어? 금방 산 명품 신발이 너 때문에 더러워졌잖아. 재수 없어!”신발에 찍힌 발자국을 보며 장경화는 냅다 욕설부터 퍼부었다.“죄송합니다, 사모님.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바로 닦아드릴게요.”부지배인은 굽신거리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옷소매로 장경화의 신발을 깨끗하게 닦았다. 어찌나 비굴한지 조금 전 유진우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됐어, 그만해. 저리 썩 꺼져!”장경화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우가 천천히 일어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장경화 일행을 발견한 순간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어쩜 밥 먹으러 왔다가 딱 마주치냐.’“또 더 있어?”문 앞의 이청아를 보며 조선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아직 조홍연도 떼어내지 못했는데 이청아까지 나타났어? 하늘이시여, 지금 저한테 일부러 이러시는 거죠?”“유진우? 너였어?”자세히 살피던 장경화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너 왜 여기 있어? 우릴 일부러 따라온 건 아니지?”“그럴 리가요. 우린 그저 식사하러 왔어요.”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식사? 흥,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누가 알아?”장경화가 의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집안이 잘 나가는 거 알고 우연을 가장해서 만난 다음에 우리한테 빌붙으려는 수작이지? 너 같은 사람 너무 많이 봤어.”“맞아요!”단소홍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기고만장한 태도로 말했다.“유진우, 경고하는데 우리 이젠 네가 함부로 넘볼 수 있는 그런 신분이 아니야.”“당신들이 무슨 신분이든 나랑 상관없어요. 다른 일 없으면 우리 식사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나가 주세요.”유진우는 대놓고 그들을 내쫓았다.“퉤! 이 룸은 사모님께서 예약하신 룸이야. 당신들이 악의적으로 차지한 거라고!”유혜지가 날카롭게 호통쳤다.“들었어? 여긴 우리가 예약한 룸이야. 나가도 너희들이 나가야지.”장경화가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명령하는데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당장 꺼져!”단소홍이 두 눈을 부릅떴다.“이 방은 우리가 먼저 예약했기 때문에 악의적으로 차지했다느니 뭐니 그런 소리 집어치워요. 그리고 당신들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건데요?”유진우가 싸늘하게 물었다. 어차피 인연을 끊은 마당에 체면을 봐줄 필요도 없었다.“건방진 놈!”장경화가 두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유진우, 아주 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이딴 식으로 나한테 말해? 내 한마디면 너희들 싹 다 감방에 처넣을 수 있어.”문 어르신이
조선미와 이청아는 서로 대치하면서 아주 치열한 눈싸움을 벌였다. 저마다 아리따운 얼굴을 하고서는 엄청난 승부욕을 드러냈다.“선미 씨랑 말싸움하고 싶지 않아요. 잘잘못은 뭇사람이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약한 방을 차지했으니 나가지 않겠다면 경찰에 신고하는 수밖에 없어요.”이청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차분한 말투였지만 카리스마가 넘쳤다.“신고요? 마음대로 해요.”조선미는 전혀 겁먹은 기색이라곤 없이 씩 웃어 보였다.“청아야, 이 사람들 정말 뻔뻔스럽기 짝이 없어. 체면이고 뭐고 봐줄 필요 없이 그냥 싹 다 내쫓아버려!”장경화가 씩씩거리며 말했다.“맞아요! 분명히 우리가 예약했는데 이 사람들이 뭔데 차지해요?”단소홍도 나서서 고함을 질렀다.그때 천향루의 경비원이 천천히 모여들기 시작하자 장경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만히 서서 뭐 해? 당장 저 사람들을 내쫓아!”“못 들었어? 싹 다 내쫓으라고.”유혜지가 큰 소리로 말했다.“싸우자고? 기꺼이 받아주지.”유진우는 두어 걸음 나서면서 조선미의 앞을 막아섰다. 조홍연도 두말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유진우의 한마디면 눈앞의 사람들을 가차 없이 전부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잠깐!”이청아는 손을 들어 경비원들을 제지하더니 유진우를 보며 냉랭하게 말했다.“아직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소란 피우지 말고 나가요. 안 그러면 당신들 결과 책임 못 져요.”“소란?”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면서 코웃음을 쳤다.“회장님,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됐나 본데 우리가 소란 피우는 게 아니라 당신들이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우릴 방해하는 거라고요.”“우리가 예약한 룸을 차지하고서는 어디서 큰소리예요?”이청아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전에 유진우에 대한 인상이 꽤 좋았고 심지어 스카우트 제안까지 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 모습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정확히 말하는데 이 방은 우리가 먼저 예약했고 빼앗으려 한 건 당신들이에요. 그리고 당신들한테 양보하지 않으니까 협박까지 했고요. 대체 막무가내인 쪽이 어느 쪽일까
“저...”유혜지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계속 변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청아가 제대로 화가 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쓸모없는 년!”그때 옆에 있던 장경화가 참다못해 유혜지의 뺨을 후려갈기더니 욕설을 퍼부었다.“방 하나 예약하는 것도 제대로 못 해? 너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사모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유혜지는 따끔거리는 볼을 움켜쥔 채 화를 내기는커녕 굽신거리며 사과했다. 그 모습은 정말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죄송하다고 하면 다야? 룸은 어떻게 해결할 건데? 이따가 귀한 손님 만나야 하는데.”장경화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키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뿐더러 유진우 앞에서 망신까지 당하게 했다.“사모님, 지자 1호룸은 어떤가요? 거기 환경도 괜찮은데.”유혜지가 떠보듯 물었다.짝!장경화는 또다시 따귀를 날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머리가 어떻게 됐어? 우리 신분이라면 천자호에서 식사해야지, 지자호가 우리랑 어울린다고 생각해?”“맞아요! 하나는 하늘이고 하나는 땅인데 비교가 돼요?”단소홍이 팔짱을 끼고 불만을 드러냈다.“유진우 저놈마저 천자호에 들어왔는데 우리더러 지자호에 가라고요? 우리 신분이 저놈보다도 못하다는 거예요?”“그게 아니라... 저...”유혜지는 얼굴을 움켜쥐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이 이 정도로 커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이청아 일행에게 잘 보일 계획이었으나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귀인의 심기를 건드린 건 물론이고 따귀까지 얻어맞았다. 이게 다 유진우의 탓이라는 생각에 유혜지의 눈빛에 원망이 점점 짙어졌다.“됐어요. 지자호로 가야죠, 뭐. 지자호로 바꿔줘요.”이청아는 매우 언짢았지만 더 따지기 귀찮았다.“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겨우 고비를 넘긴 유혜지는 종업원에게 방을 준비하라고 했다.“잠깐!”장경화의 얼굴에 내키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청아야, 이대로 넘어가선 안 되지. 지금 우리 신분 잊었어? 용국에서도 최고로 귀한 신분이야. 어딜 가
안하무인인 장경화를 보고 있자니 유진우는 가소롭기만 했다. 언행과 행실, 그리고 옷차림으로 판단할 때 장경화가 귀인을 만나서 온 가족이 부유해진 게 틀림없었다. 돈이 생긴 건 물론이고 권력과 지위도 함께 생겼다.예전에 아무것도 없을 때도 기고만장한 사람이었는데 이젠 돈도 있고 권력까지 얻었으니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하여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야! 내 말 못 들었어? 얼른 가격 부르라고. 나 바쁜 사람이야, 여기서 너랑 낭비할 시간 없어.”장경화는 두 손가락 사이에 골든 카드를 끼고 재벌 사모님 행세를 했다.“내가 가격을 부르면 줄 능력이 안 될 텐데요?”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줄 능력이 안 된다고?”그의 말에 장경화가 피식 웃더니 마치 바보를 쳐다보듯 했다.“유진우, 사람을 업신여겨도 정도껏 해야지. 우리 신분이 지금 어떤지 알아? 이 안에 얼마 있는지 모르지? 잘 봐, 이거 골든 카드야. 넌 상상도 못 할 금액이라고.”“맞아! 아직도 예전인 줄 알아? 지금 우리 신분과 지위는 넌 평생 노력해도 안 돼. 죽을 때까지 밑바닥에서 우릴 우러러봐야 해.”단소홍이 고개를 쳐들고 오만하게 말했다. 그들의 눈에 유진우는 한낱 보잘것없는 인간이었고 그나마 조선미 덕에 유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지금 문 어르신이 그들을 도와주고 있으니 조선미도 아예 안중에 두지 않았다. 작은 재벌 딸과 문 어르신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양측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됐어. 쓸데없는 얘기 그만해. 내 인내심에도 한계 있어.”장경화가 다그치기 시작했다.“그렇게 돈이 많다면 나도 사양하지 않겠어요. 룸 바꾸고 싶다면 이 정도 주세요.”유진우가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2백만 원?”장경화는 하찮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이렇게 배짱이 없어서야, 이러니까 여자한테나 빌붙어 살지.”“유진우, 너 방금 부자 될 기회를 놓쳤어.”단소홍은 마치 바보를 쳐다보듯 했다.“자, 2백만 원. 갖고 당장 꺼져!”장
“이... 이 파렴치한 놈아!”장경화는 너무도 화가 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원래는 허세 좀 부리려 했지만 유진우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괘씸한 것 같으니라고!’“가격은 이미 불렀고 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 돈을 주든지, 썩 꺼지든지 선택해요.”유진우는 상대의 체면 따위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사람 너무 업신여기지 마!”장경화가 노발대발했다. 지위가 높아진 후로 이런 망신을 당한 적이 없었다.“무슨 일이에요?”그때 양복 차림에 마른 몸매의 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경비원들이 알아서 길을 터주었다. 그 남자가 바로 천향루의 사장 나승엽이었다.“오빠, 왜 인제야 왔어?”나승엽을 보자마자 유혜지의 안색이 밝아지더니 쪼르르 달려갔다. 나승엽은 그녀의 남자 친구이자 든든한 백이었다. 돈과 권력은 물론이고 인맥까지 넓은 그는 합법이든 불법이든 다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얼굴 왜 그래? 누가 때렸어?”유혜지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보며 나승엽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오빠, 난 오빠 요구대로 청아 씨가 쓸 천자호를 준비했는데 이 진상들이 글쎄 기어코 그 룸을 쓰겠다지, 뭐야. 안 된다고 하니까 주먹까지 쓰더라고. 내 얼굴 봐봐, 이 진상들이 이렇게 만들었어!”유혜지는 훌쩍거리면서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했다.그녀의 말에 나승엽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천향루를 오픈한 이래 지금까지 이곳에서 소란을 피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어떤 놈이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청아 씨, 사모님, 다친 데 없으시죠?”나승엽은 바로 화를 내지 않고 이청아 일행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나 사장, 마침 잘 왔어. 여기 어떤 놈이 우리 룸을 빼앗으려 해서 지금 기분이 몹시 안 좋아. 어떡하면 될까?”장경화는 팔짱을 낀 채 씩씩거렸다.“사모님, 정말 죄송합니다. 다 제 불찰이에요. 앞으로 저희 가게에서 하시는 식사는 전부 무료로 해드릴게요.”그 소리에 적지 않
나승엽은 거칠게 몰아붙였고 상대의 체면 따위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좋게 좋게 해결하려 했던 유진우는 나승엽의 말에 표정이 확 차가워졌다.‘어쩐지 직원들도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더라니 다 사장한테서 배운 거구나.’“이봐, 못 들었어? 꺼지라잖아!”유혜지가 뒤에서 건방을 떨며 소리를 질렀다.“천향루 위세가 아주 대단하네. 감히 손님을 내쫓아? 가게 문 닫고 싶어서 안달 난 모양이구나.”유진우의 말투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가게 문 닫는 게 아니라 당신들 안 받겠다는 거야.”나승엽이 당당하게 말했다.“천향루는 내 구역이야. 이곳에서는 내 말이 곧 법이라고. 지금 당신들 엄청 거슬리니까 1분 내로 싹 다 꺼져. 안 그러면 가만 안 둬!”그의 말에 사람들도 맞장구를 치면서 유진우 일행을 내쫓았다.“유진우, 어떻게 할 거야? 사장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끝까지 버텨? 창피하지도 않아?”장경화는 팔짱을 낀 채 대놓고 비웃었다. 말싸움도 안 되고 따져서 이기지 못할 바에는 그냥 억지로 밀어붙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흥! 아무리 내쫓아도 안 나가다니, 정말 낯짝도 두껍다니까요.”단소홍이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그러게 말이야. 자기 신분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우리한테 덤벼? 정말 제 주제도 모르는 놈이야.”장홍매의 얼굴에 깔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에게는 지금 문 어르신이라는 든든한 백이 있기에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억지 부리기 시작하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나승엽을 쳐다보는 유진우의 눈빛이 매우 싸늘했다.“그러겠다면?”나승엽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사모님의 심기를 건드린 건 내 체면을 봐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야. 그러니 당연히 내쫓아야지.”그가 손을 흔들자 가만히 지켜보던 경비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호시탐탐 노렸다. 심지어 어떤 경비원은 삼단봉까지 꺼냈는데 당장이라도 덤빌 기세였다.“유진우, 눈치껏 행동해. 지금의 넌 우리랑 아예 레벨이 달라.”장경화가 턱을 치켜들고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권력이 뭔지,
“사철수 씨, 아직도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예요? 사진이라도 찍어줘요? 빨리 보물 지도를 찾아내세요.”불만으로 꼴 독 찼던 유태범은 못마땅한 얼굴로 사철수에게 화풀이했다.“알겠어요. 서두를게요.”유태범의 말에 사철수는 즉시 합금으로 되어 있는 대문 앞으로 다가가 채원진의 부러진 손을 들어 중간 부분에 있는 감응 위치를 살짝 눌렀다.띵 하는 소리와 함께 두터운 대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리자, 금속으로 만든 금고가 드러났다.금고는 약 33제곱미터 정도의 크기였고 한가운데에는 골드바가 사람의 키보다 더 높게 쌓여 있었다.골드바 외에도 그 주변에는 다양하면서도 진기한 보물들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비싸고 귀중한 물건들이었다.“이곳은 채원진의 개인 금고예요. 채원진은 마음에 드는 모든 물건을 전부 이곳에 수집했어요.”사철수가 설명했다.“보물들이 어마어마하네요.”유천우는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했다.“이것들을 전부 가지고 나가면 성을 하나 사고도 남겠네요.”“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호룡각의 다른 세 보물 창고에 비하면 눈앞에 있는 것들은 새 발의 피죠.”사철수가 설명했다.“정말이에요?”유천우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당신 말대로라면 호룡각의 보물을 전부 모으면 산더미가 되겠는데요?”“제가 직접 본건 아니지만 수십 년 동안 쌓아왔으니, 산더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거예요.”사철수는 진지하게 말했다.“좋아요. 아주 좋아요! 빨리 모든 보물을 긁어모으고 싶네요.”유천우는 정신이 번쩍 들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보물 지도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유태범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여기 있어요.”사철수는 맨 안쪽 선반으로 가서 위에 놓여있는 정교한 박달나무 상자를 꺼내 조심스럽게 유진우에게 건넸다.유진우가 열어보니 안에는 양피지 3장이 들어있었다. 모든 양피지에는 상세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지도 중앙에는 보물 창고의 위치가 금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보물 지도가 진짜라면, 지도에 그려져 있는
“보물 지도는 어디 있나요?”유진우가 추궁했다.“채원진의 지하 밀실에 있어요. 내가 직접 세자 전하를 모시지요.”사철수가 말했다.“지하 밀실?”유천우는 실눈을 뜨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속으로 다른 꿍꿍이를 꾸미는 건 아니죠? 나중에 나를 악랄하다고 탓하기 싫으면 그런 생각은 빨리 접는 게 좋을 거예요.”밀실 같은 건물에는 함정과 암기가 많이 설치되어 있는데 유천우는 사철수가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저는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아닙니까.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사철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앞서서 안내하세요.”유진우가 두 근위병에게 눈치를 주자 근위병 두 명이 와서 사철수를 일으켜 세웠다.“잠깐만요. 밀실에 있는 보물 상자를 열려면 채원진의 손이 필요해요.”사철수가 갑자기 말했다.“그건 쉽죠.”유천우는 즉시 칼을 빼 들어 채원진의 오른손을 잘라 사철수에게 건네며 말했다.“자. 선물이에요.”사철수는 징그러웠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채원진의 손을 받아 들고 앞장섰다.유진우와 몇몇 사람은 사철수를 따라 기지로 들어갔고 마침내 지휘실 입구까지 도착했다.사철수는 문을 열고 벽 쪽으로 다가간 다음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하나를 떼어냈다.그림 뒤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전혀 알아차리기 어려운 하나의 버튼이 있었다.사철수가 손을 내밀어 버튼을 누르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벽 전체가 갑자기 양쪽으로 열리더니 안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드러났다.사철수가 유진우를 포함한 몇 명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올라탄 뒤 스위치를 누르자 문이 닫히더니 천천히 지하로 내려갔다.반 시간 남짓 지나자 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몇 명 사람들의 눈에는 넓고 호화로운 지하 밀실이 들어왔다.말이 밀실이지 사실 호화 저택에 가까웠다. 안에는 없는 것 없이 다양한 생활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었고, 많은 물과 식량도 수집되어 있었는데 수십 년 동안 혼자 생활하기에는 충분한 수량이었다.“핵 방지
“유진우?”무릎을 꿇은 채 냉정한 표정을 한 유진우를 바라보는 사철수의 얼굴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놀라움과 기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더욱 컸다.흑용군이 매복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사철수는 이미 호룡각의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호룡각의 기지는 파괴되었고 채원진은 목숨을 잃었으며 사철수는 유진우한테 체포되었다. 하지만 사철수는 어쩌면 이게 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비록 사철수가 호룡각의 사람이긴 했지만, 서경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서경은 이미 사철수한테는 고향 같은 곳이었고 주변에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사철수가 저질렀던 많은 일들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했던 거라 마음이 늘 불편했었다.오늘,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모두 사철수의 업보였고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였다.“아저씨,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죠? 채원진이 패했으니, 당신도 패한 것과 마찬가지예요. 이제 와서 더 할말이 남았나요?”유진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기면 영웅이고 지면 도적이 되는 법이지요. 세자 전하께서 죽이시든 벌을 주든 저는 다 괜찮습니다. 다만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사철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했다.“당신이 지금 나한테 그런 조건을 내세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유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세자 전하, 죄인인 저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하지만 제 아내와 딸은 죄가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용서해 주십시오.”사철수는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머리를 세게 박으며 유진우에게 절을 올렸다.“당신 말대로 그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죠. 하지만 못난 남편과 아비 때문에 그들도 죄인이 된 겁니다. 설마 당신은 어리석게도 그렇게 큰 죄를 지어 놓고 가족은 아무 일 없이 무사할 거로 생각한 겁니까?”유진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세자 전하, 공을 세우는 거로 저의 죄를 보상하면 안 될까요? 세자 전하께서 소가 되라면 소가 될 것이고 말이 되라면 말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때 조무진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무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자 완전 무장을 한 군부가 보였는데 족히 수만 명은 되는 것 같았다.검은 갑옷을 입고 긴 칼을 허리에 찬 병사들은 기세가 매우 위풍당당했다.얼핏 보면 마치 강철로 되어 있는 호수 같았는데 멀리서부터 강한 압박감을 주는 이 부대는 바로 서경의 최강 정예 부대 흑용군이었다.“보아하니 사철수는 이미 체포된 것 같네요.”이청성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 흥용군의 리더는 바로 유천우였다.당시 유천우는 명령에 따라 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호룡각의 정예 부대를 미리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만든 뒤 절대적인 병력 우세로 오천여 명의 적을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체포했다.쿵 쿵 쿵!수만 명의 흑용군이 가까워질수록 그 압박감은 점점 더 강해졌다. 성벽 위에 있던 백호군들도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소문에 의하면 흑용군은 용국의 최강 군부로서 창시 이래 백전백승을 이뤘고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어떠한 군부도 흑용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없다고 했다.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그 소문은 거짓이 아닌듯했다. 흑용군의 강렬함과 살벌함은 충분히 다른 군부를 경시할 만했다.“형! 임무를 완성했어요. 호룡각의 남은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잡아들였어요.”유천우가 먼저 앞으로 다가와 보고했다.“잘했어.”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쪽은 어떻게 됐어요? 채원진은 죽었어요?”유천우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말했다.“머리가 잘렸는데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조무진은 발로 채원진의 머리를 슬쩍 건드리며 말했다.채원진의 머리는 축구공처럼 땅바닥에서 굴러 유천우의 발밑에 멈추었다.“뭐야! 이렇게 못생겼다고? 어쩐지 맨날 가면을 쓰고 다니더라니.”유천우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하고 서경을 해친 놈을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채원진은 이미 죽었고 밑에 있던 정예들은 모두 체포되었으니, 호룡각은 이제 완전히 멸망한 셈이에요.
채원진은 죽고 호룡각 기지는 함락되었다. 이로써 호룡각은 조직 전체가 완전히 멸망했고 남은 사람이라고는 흩어져 있는 병사들뿐이라 크게 위험이 되지는 않았다.하지만 유진우는 방심하지 않고 호룡각이 관련된 모든 사람은 전부 체포하라고 명을 내렸다. 만약 그들이 자진해서 항복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지만 끝까지 저항한다면 남은길은 죽음뿐이었다.“형, 드디어 이 재앙 같았던 놈을 처리했네. 축하해!”조무진은 앞으로 걸어가 채원진의 시신을 발로 차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미소를 지었다.“다 네 덕분이야. 네가 20만 명의 백호군을 데리고 채원진의 퇴로를 끊어놓지 않았다면 채원진은 또 다른 기회를 찾아 연명했을지도 몰라.”유진우가 말했다. 그는 채원진을 죽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다. 결국 채원진은 죽었고 그는 승리했다.“난 별로 한 게 없어. 고마워할 거면 공주마마께 고마워해야지.”조무진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있는 이청성을 보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공주마마께서 형을 돕는다고 엄청 바쁘셨어.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독촉하느라 발등에 불이 붙을 뻔했다니까.”“조무진 씨!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이청성은 앞으로 걸어 나오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별거 아니에요. 공주마마께서 학식과 도리가 깊고 외모와 지혜가 뛰어나다고 칭찬하고 있었어요.”조무진은 아첨하며 웃음을 지었다.“흥!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요.”이청성은 조무진을 흘겨보며 말했다.“공주마마, 감사합니다.”유진우는 공수하며 말했다.“뭘 그렇게 예의를 갖춰요?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끝까지 도와줬을 뿐이에요.”이청성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게다가 채원진은 우리 공공의 적이잖아요. 유진우 씨뿐만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전체적으로 보면 백성을 위해 나쁜 놈을 제거 한 거죠.”“공주마마의 대의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이 얘기는 그만하죠. 비록 채원진이 죽었다고 하
반면 채원진은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십여 미터나 날아가 끊임없이 피를 토했다. 팔 전체가 파열되었고 용담적염창도 튕겨 나갔으며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채 바닥에 누워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도련님, 괜찮으십니까?”홍복홍은 재빨리 달려가 떨고 있는 유진우를 부축했다.“괜찮아요.”유진우는 몸에 기혈이 들끓고 팔이 저리고 검도 제대로 잡지 못할 것 같았다.비록 채원진이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방금 전력으로 내뿜은 일격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힘이었고 결국 유진우도 피를 토하고 말았다.채원진의 몸에 있는 멸신독이 퍼지지 않았다면 오늘 그를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다.“왜? 이럴 수 없어. 절대 이럴 수는 없어...”땅에 엎드려 맥 빠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채원진의 두 손은 긴 손가락 자국을 남긴 채 땅바닥에 푹 꺼져 있었다.안 그래도 흉측하던 얼굴이 더욱 흉측해 보였다.“남길 유언이라도 있나?”유진우는 창궁검을 손에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채원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한 세대의 효웅이었던 채원진은 마치 죽음을 앞둔 늙은 개처럼 낭패와 처참함 그리고 빨리 죽기 위해 발악하는 듯한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유진우! 이 비열한 새끼야! 네가 이런 모함을 꾸미지 않았다면 내가 패할 가능성은 절대 없었고 이 지경까지 되지도 않았을 거야. 인정 못 해. 죽어도 인정 못 해!”채원진은 미친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그의 상대는 용국의 지존인 서경 왕 유만수처럼 천하를 뒤흔든 거물이었는데,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 몇 명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채원진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비열?”유진우는 콧방귀를 뀌고 말을 이었다.“이런 단어가 네 입에서 나오니까 정말 어이없구나. 사람을 시켜서 내 아버지를 암살하고 이간질로 삼촌을 유혹하여 반역을 도모해 서경을 혼란에 빠뜨리고. 네가 했던 일 중에 어느 하나 비열하지 않은 일이 없어. 죽을 때가 되니 이제 와서 도리를 따지는 거야? 쪽팔리지도 않아? 그리고 네가 인정하든 못하든 난
“채원진, 나라와 백성을 해친 네 죄가 극악무도하니 인제 그만 포기하고 꼼짝 말거라. 반항한다면 사살할 것이다.”이청성은 손에 황권을 상징하는 금색 영패를 쥔 채 차가우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청성이 이번에 유진우를 따라 서경에 온 이유는 바로 호룡각에 남아있는 잔당을 대처하기 위해서였고 여러 가지 경우를 대비해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병력을 이동하라는 칙령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이성민이 직접 내린 거였고 그 덕분에 20만 명의 백호군을 움직여 이번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왜?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이청성을 본 채원진은 절망하는 얼굴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그의 입과 코에서는 검붉은 피가 더욱 많이 흘러내렸다.“채원진, 넌 이제 끝났어. 판을 뒤집을 가능성은 절대 없으니 그만 포기해. 오늘이 지나면 호룡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어둠 속에 숨어 살던 추악한 놈들은 자기가 했던 행동에 책임지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유진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난 아직 패한 거 아니야! 절대 그럴 수 없어!”채원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내가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이제 겨우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너희 같은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들 때문에 무너질 거 같아?”오랜 세월을 참고 견뎌 호룡각의 각주가 된 채원진은 이제 곧 막강한 권세를 누릴 줄 알았는데, 겨우 며칠도 안 돼 큰 타격을 입고 궁지까지 내몰리고 말았다.채원진은 단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어린 녀석들을 감당하지 못해 실패하고 죽는다는 게 달통 되지 않았다.“채원진, 아직도 모르겠어?”조무진은 담담하게 말했다.“용맥이 잘려서 사라질 때부터 호룡각 말살은 시작된 거야. 그때 너희들은 이미 대세와 기운을 잃었어. 만약 너희들이 어둠 속에 숨어서 연명한다면 몇 년 더 살 수는 있겠지만 그런 탐욕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니까 서경왕부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지. 그 결정을 내리는 순간부터 넌 이미
“무슨 헛소리야! 호룡각의 사람이 아니면, 서경왕부의 사람이라도 된다는 거야?”채원진은 눈이 시뻘게져 소리쳤다.“맞아. 내 사람들이야.”유진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네가 부대를 이끌고 우리를 매복시키려 할 때 내 병마들은 그 허점을 틈타 이미 너의 기지를 점령했어. 그러니까 이제 이곳은 내 소유야.”“유장혁! 그런 헛소리를 내가 믿을 거 같아?”채원진은 험악한 얼굴로 소리쳤다.“아무리 내가 많은 정예병들을 데리고 나갔다고 하지만, 기지 내에 적어도 3만 명의 병마가 있었고 각종 방어 조치까지 더해져 10만 명 이상의 병력이 없다면 감히 공격도 못해. 서경의 흑용군은 모두 내 감시하에 있었는데 만약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잖아.”“누가 그래? 내가 흑용군을 호출했다고?”유진우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생각하는 걸 나라고 생각 못 할 것 같아? 너의 잔당들을 토벌하기 위해 이번에 특별히 지원군들을 불렀지.”어젯밤, 유천우한테 최대한 빠른 속도로 서신을 전하게 한 이유가 바로 구원병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구원병이 제때 도착해 유진우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될 수 있었다.“지원병? 무슨 지원병?”채원진은 왠지 불안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서경과 가장 가까운 부대는 서남 지역에 있는 백호군이고, 백호군의 사령관은 전쟁의 신 조무진이야.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무진은 나와 아주 친한 사이라 도움을 좀 받았지.”유진우의 담담한 대답에 채원진은 못 믿겠다는 듯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백호군? 조무진? 그럴 리가 없어. 헛소리 하지 마!”“못 믿겠으면 뒤돌아봐.”유진우는 설명 대신 채원진의 뒤를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뭔가를 느낀 듯한 채원진이 뒤를 돌아보니 성벽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은색 갑옷을 입은 준수한 외모의 한 젊은 남자가 정예 장병들과 함께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젊은 남자는 다름 아닌 전쟁의 신 조무진이었다.“채원진, 어때? 이제 현실이 좀 받아들여져
“거의 거의 다 왔어. 곧 도착이야.”채원진은 정혈을 끌어 연소시키며 겨우 도망쳤다. 도중에 끊임없이 피를 토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한바탕 전력 질주 끝에 드디어 채원진의 눈에는 기지 앞의 높은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성벽만 넘으면 그는 안전할 수 있었다.채원진은 기지 안에 많은 영단 묘약이 있으니, 그의 독을 치료할 약이 기필코 있을 거로 생각하며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성문을 열어라! 어서 빨리 성문을 열어!”성벽 지하까지 돌진한 채원진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비틀거리며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얼굴은 짙은 보라색으로 변해있었고 입과 코에서는 여전히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슝 슝 슝.채원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벽 위에서 갑자기 팔뚝 굵기의 쇠뇌가 몇 대 발사되었는데 10만여 근의 힘을 숨기고 있는 쇠뇌의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놀란 채원진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팡 팡 팡.몇 대의 쇠뇌는 채원진의 눈앞에 떨어지며 엄청난 위력과 함께 뒤쪽 끝을 조금 남긴 채 반이 넘게 땅바닥 깊이 박혀 들어가며 굉음을 냈다.“야! 너희들 미쳤어? 나 호룡각의 객주야! 눈 똑바로 뜨고 잘 봐!”채원진이 성벽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은 오히려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무기를 들어 채원진에게 겨누었다.각종 중화력 무기도 가동되었고 수많은 포구와 총구가 동시에 성벽 아래에 있는 채원진을 겨누었다.누군가의 명령이 내려지기만 하면 채원진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었다.“눈은 멋으로 붙이고 다니는 거야? 나도 못 알아봐? 당장 성문을 열어! 안 그러면 전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화가 치밀어 오른 채원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되려 집 문 앞에서 막힐 줄이야.‘이 녀석들, 도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채원진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채원진, 너한테 남은 건 죽음뿐이야.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면 고통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