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떠난 후, 이건은 이진이 누운 침대 앞에 앉아 깊이 잠든 이진을 쳐다보았다.이진의 부드럽고 긴 머리는 볼 옆으로 흘러내려, 뽀얀 이마를 그대로 드러냈다.이때 이진의 이마에는 멍이 몇 개 있었고, 어떤 곳은 심지어 살이 약간 벗겨져 상처가 나기도 했다.이건은 이진의 깊이 잠든 얼굴을 보면서 입술을 오므렸는데, 한껏 기가 죽은 이건의 모습은 마치 이 모든 것들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 같았다.‘역시 내 탓이야. 우리가 공항을 나서기 전에 미리 대비책을 세웠어야 했어. 이진이 바로 내 옆에 있었는데 내가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니.’이런 생각을 하자 이건은 가슴이 답답했다.그 후 이건은 줄곧 이진의 침대 옆에 앉아 묵묵히 잠이 든 이진을 지키며, 한 걸음도 떠나지 않은 채 이진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이진은 눈을 뜨자마자 이건이 절박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건의 눈동자에는 온통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이건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는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이런 멍들은 뜨거운 수선으로 찜질하면 바로 나아질 거예요. 모두 작은 상처일 뿐이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이진은 말하면서 일어나 침대 옆에 기대었는데, 한잠 자고 난 탓인지 이진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많이 사라졌고, 방금처럼 허약해 보이지도 않았다.이건이 여전히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진은 침대에 앉은 채 두 발을 흔들며 활기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이건은 이진의 익살스러운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내밀어 이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정말 괜찮은 가 보네. 배고프지? 내가 먹을 것 좀 가져다줄게.”이건은 말을 마친 후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바로 이때, 이진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정희가 걸어온 전화였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정희의 맑고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좀 어때? 괜찮아진 거야? 어디 더 아픈 데는 없어?”“괜찮아, 그냥 이마가 좀
이진이 국수를 다 먹은 후, 이건은 휴지 한 장을 꺼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며 말했다.“금요일 오전 10시, HP 그룹에서 신제품 발표회가 열리는데, 주최 측에서 나한테 초대장을 두 장이나 보냈어. 나랑 함께 가보지 않을래?”“HP 그룹? 후계자가 얼마 전에 외국 연수를 다녀온, 그 HP 그룹인 가요?”HP 그룹에서 후계자에 관한 소식들을 모두 감췄기에, 일주일 전에 돌아온 후계자는 아직까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진도 그 후계자가 누군지 궁금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하정수’인 것만 알고 있었다. 이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이번 발표회를 빌어 후계자가 모습을 드러낸다고 들었어.”이진은 마침 금요일에 별일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같이 참여하기로 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HP 그룹의 신제품 발표회 날이 다가왔다.아침 9시 반, 이진과 이건은 제시간에 발표회 현장에 도착했다.두 사람은 출중한 외모를 가진 것도 모자라 화려한 옷차림을 하였기에, 나타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그 사람들 중에는, 구석에 잠복해 있던 발표회의 주인공인 하정수도 있었다.정수는 이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시선을 옮기지 못했다.이진은 오늘 청색의 보헤미안 스타일의 긴 치마를 입었다. 하이웨이스트 디자인은 이진의 늘씬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고, 그 위의 무늬들은 청신하고 우아하여 이진에게 차분한 느낌을 더해줬다.‘이런 여자는 조용히 구석에서 피어나더라도 아주 눈부신 꽃이 되었을 거야. 어쩐지 윤이건의 마음을 독차지하더라니.’이런 생각을 하던 정수는, 이진의 가냘픈 뒷모습을 보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였다. 정수는 뭔가 생각난 듯이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이진의 곁에 있던 이건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정수는 웨이터를 불러 와인 한 잔을 가지고는 이진 쪽으로 걸어갔다.이건은 잠시 볼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것이라, 떠나기 전에 이진더러 제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당부했다.이건의 모습이 사라진 후
이진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어갔다.“전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당신의 대시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에요. 하지만 전 하정수 씨와 친구로 지내는 건 괜찮을 것 같네요.” 이 말을 듣자 정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전 이진 씨가 솔로 일 줄 알았는데, 이미 결혼하셨다니 너무 아쉽네요.”이진은 눈썹을 찡긋거리며 웃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정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태도를 바꾸더니,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처럼 이진에게 농담을 했다.“그럼 이진 씨를 훔쳐 간 ‘도둑’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정말 엄청 궁금하네요. 이진 씨는 어떤 남자를 좋아하시나요? 당신의 남편분은 당연히 이진 씨처럼 훌륭하고 눈부신 분이시겠죠?”누군가가 이건을 칭찬하는 말을 꺼내자, 이진은 매우 기쁜 마음에 눈을 반짝였다.이진이 정수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찰나, 이건이 그들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이진은 곧 눈썹을 찡긋거리며 이건의 방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저 사람이 바로 제 남편이에요.”말을 하던 이진의 목소리는 은근히 자랑스러워 보였다.정수가 이진의 눈빛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이건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사실 정수는 진작에 이건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지만, 일부러 못 본 척했을 뿐이다.이건은 빠른 걸음으로 재빨리 이진에게 다가왔다.“자기야, 이 분은?”이진은 웃으며 일어서고는 이건의 팔을 잡고 그에게 소개해 주었다.“이건 씨, 이 분이 바로 PH 그룹의 후계자인 하정수 씨에요. 제가 방금 알게 된 친구이기도 해요.”이진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자, 정수는 슈트를 정리한 뒤 손에 든 술잔을 살짝 들어 예의를 갖췄다. “안녕하세요.”이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수는 이건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는 듯 와인을 마시며 말했다.“방금 아름다운 이진 씨가 혼자 이곳에 외롭게 앉아있으셔서, 당연히 솔로인 줄 알았거든요. 한창 이진 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참에 남편분이 오게 될 줄은
이진과 이건은 발표회가 끝난 후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그들은 익숙한 실루엣이, 그들의 집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을 보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사람은 시우였다.오랜만에 만난 시우는 엄청 피곤해 보였고, 눈 가에 진한 다크서클이 있었는데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모습이었다.이진과 이건은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정희가 이미 돌아온 사실을 아무도 시우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기에, 시우는 아직 정희의 행방을 알지 못해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시우에게 있어서 정희는 실종된 상태나 다름없기에, 그는 며칠 동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두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본 시우는, 한숨을 돌리고는 곧장 그들에게 물었다.“정희 씨한테서 연락 오셨나요?”이진과 이건은 서로 마주 보더니 조금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시우가 자신의 행방을 묻는다면 비밀로 해달라고 정희가 부탁을 했었고, 결국 정희와 약속을 하고 나서야 그녀가 돌아온 거였다.그때 두 사람은 그저 정희의 안전이 걱정되어 약속을 한 것이었기에, 시우가 얼마나 괴로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되지.’시우는 두 사람의 표정을 살펴보더니 한숨을 쉬었다.“됐어, 두 사람의 모습을 봐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것 같네. 이만 가볼 게.”시우는 말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늘 활기가 넘쳤던 친구가 지금은 지쳐 걸을 힘조차 없어 보이자, 지켜보던 두 사람은 차마 사실을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이건이 그를 불러 세웠다.“정희 씨는 이미 돌아오셨어. 얼마 전부터 ‘음악 행성’이라는 프로그램에 특별 멘토로 출연하신다고 들었어.”행방을 알려줬으니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말지는 시우에게 달려 있다.시우는 이 말을 듣자 정신을 차리고는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두 사람에게 손키스를 날리고는 흥분한 채 떠났다.이진은 시우가 떠나는 모습을 보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정말 시우 씨한테 말해줘도 괜찮을까요?”이건은 위로하듯
이진의 말을 들은 이건은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는 트렁크를 닫았다.그리고 자상하게 이진을 촬영장에 가는 차에 태우고는 말했다.“도착하면 바로 연락 줘야 돼. 촬영하면서도 꼭 몸조심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네, 알겠어요.” 차가 대략 서너 시간을 계속해서 달리자, 이진은 드디어 촬영장에 도착했다.이진은 챙겨온 짐들을 여인숙에 놓은 후, 바로 이건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무대 뒤로 가서 정희를 찾았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이진은 이미 수차례 정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연결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진이 보낸 메시지들도 답장이 없었기에 그녀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진은 수소문을 거쳐, 정희가 지금 백스테이지의 27호 대기실에서 메이크업을 지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27호.”이진은 번호를 따라 찾기 시작했다.이진은 27호 대기실의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남녀가 서로 껴안은 채 키스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그들의 숨결은 이미 뒤섞여졌고, 대기실 안은 두 사람으로 인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그 남녀는 이진이 엄청나게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바로 정희와 시우다.이진은 이런 경험을 수없이 해왔지만, 직접 보게 되자 여전히 낯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하지만 그동안 걱정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게 되어, 이진은 두 사람이 눈치채기 전에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이진이 그곳을 떠나려는 순간, 대기실 안에 있던 정희는 갑자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와 동시에 정희는 문 앞을 스쳐 지나간 익숙한 실루엣을 보게 되었다.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린 정희는 단번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데, 정희의 아름답고 작은 얼굴에는 놀라움과 수줍음이 스쳤다.“이진아!”이진의 모습이 사라지려고 하자, 정희는 급한 마음에 얼른 두 손을 뻗어 시우를 힘껏 밀어버렸다.“비키세요!”정희는 말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이진을 찾으러 가려고 했다.시우는 정희의 행동에 기분이 좀 언짢아졌다.‘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오랫동안
이런 생각에 이진은 무심코 정희가 사라진 후에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했다.“네가 말도 없이 사라져 시우 씨가 얼마나 널 걱정했는지 알아? 며칠 사이에 살이 엄청 빠진 것 같지 않아? 눈 밑의 진한 다크서클과 부어오른 얼굴을 보고 판다인 줄 알았어. 나와 이건 씨가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 우리를 보자마자 꺼낸 첫 마디가 네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거였어.”전엔 정희의 기분을 고려하여, 이진과 이건은 시우에 관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오늘 전부 말해주는 것은, 정희가 시우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길 바랐기 때문이다.이진의 예상했던 대로, 정희는 이 말을 듣자 짐을 정리하던 동작을 늦추더니, 혹시라도 중요한 이야기를 빠뜨릴까 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이때 이진은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시우 씨는 분명 널 엄청 좋아하고 있을 거야. 그저 너한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것뿐이야.”정희는 사실 시우의 마음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이 갔었다.“그렇다고 해도, 난 시우 씨를 못 받아들이겠어.”정희는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마침내 이진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이런 감정은 너무 허무해서 도저히 확신이 생기지 않아. 시우 씨는 엄청나게 좋은 분인데, 이렇게 좋은 남자가 내 곁을 둘러싸주고 있으니, 정말 꿈을 꾸는 것만 같아.”정희는 이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정희는 틀림없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충격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차라리 지금처럼 그 선을 넘지 않는다면, 각자 잘 지낼 수는 있을 것이다.이진은 정희의 마음이 이해되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시우를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그럼 당분간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모두 시간에게 맡기는 게 좋을 거야.”“응!”정희는 심호흡을 하고 빠르게 마음을 가다듬었다.눈길을 돌리자 정희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기획서를 보게 되었다. 그 위에는 ‘음악 행성’ 네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기에, 정희는
“당신이 이진이에요?”문혁은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이진이 고개를 돌리자 문혁은 도발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돈을 얼마나 들여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신 거죠?”이진은 문혁의 터무니없는 도발과 모욕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는, 아무 자리나 찾아 앉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휴게실 안을 둘러보고는, 정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이진이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자, 문혁은 오히려 득의양양하더니 더욱 비꼬듯이 말하기 시작했다.“참, 돈 주고 들어온 거면서 잘난 척하기는.”문혁은 자기가 이진보다 잘났을 것이라고 확신하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어차피 나중에 무대에 올라가면 다 들통나겠죠, 그 정도 재능으로는 이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실 거예요.”바로 이때, 정희가 안으로 뛰어들어오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방금 뭐라고 하신 거죠?”정희의 얼굴은 화가 나다 못해 빨갛게 달아올랐고, 두 눈은 세게 찌푸려졌다. 그녀는 분명 문혁이 한 말을 모두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난 것이다.정희는 누군가가 근거 없이 이진을 비꼬는 것을, 절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얘가 누군지 제대로 알고 말씀하신 거예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우리 이진이가 당신보다 더 주목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당신!”문혁은 정희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줄곧 옆에 앉아 침묵하고 있던 이진을 차갑게 노려보더니,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당신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반드시 알아낼 거야! 다신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내가 널 이 바닥에서 없애 버릴 거야!”문혁은 이 말을 마치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휴게실을 나섰다.“당신이야말로 이 바닥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정희는 화가 나서 따라가 따지려고 했지만 이진이 그녀를 막았다.정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진을 쳐다보았다.“이진아, 저 사람한테 본때를 보여줘야겠어! 팬들 앞에서는 착한 척하더니, 뒤에서는
이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핸드폰 스크린을 보더니, 이진은 얼른 핸드폰을 들고 옆으로 걸어가 수신 버튼을 누르고는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이건 씨? 무슨 일 있어요?”전화 너머의 사람은 잠시 망설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니, 그냥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저도요, 금방 돌아갈 테니 집에서 밥 잘 먹고 일찍 자야 돼요!”“응.”두 사람 모두 표현이 서툴렀기에 몇 마디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이진이 핸드폰을 거두고 고개를 들자, 정희가 히죽거리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이건 씨인가 보네? 아이고, 정말 한시도 너와 떨어지기 싫으신 가 보네. 정말 부러워 죽겠어!”정희는 부러워하는 말투로 말했지만, 히죽거리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그나저나 네가 떠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벌써 보고 싶다고 하는 거야? 보고 싶다는 이유로 연락을 하시다니!”정희는 말하면서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계속 고개를 저었다.“정말 못 봐주겠네!”이진은 정희의 이런 모습을 보자 웃음을 터뜨렸고, 곧 곁눈질로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왜? 부부끼리 그런 말도 못 해?”“쳇, 재미없어!”한편 진 감독은 연습생들을 열심히 훈련시키고 있는 문혁을 찾으러 갔다.“밥은 제대로 먹은 거야? 이 다리와 허리를 곧게 펴라고 말했잖아!”진 감독이 들어섰을 때, 문혁은 마침 한 남자 연습생을 엄하게 훈계하고 있었다.그 남자 연습생은 고개를 숙인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다행히 진 감독이 제때에 나타나 그 연습생을 구한 셈이다.“사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나와주실래요?”문혁은 그 남자 연습생을 매섭게 노려보고는, 연습실을 나서며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진 감독을 보았다.“무슨 일이죠?”문혁의 이런 태도에 진 감독은 어이가 없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는 그의 비위를 맞춰가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이 선생님과 트러블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건가요?”이진을 언급하자 문혁의 안색은 더욱 보기 흉해졌다.“저한테
결혼식 날짜는 8월 초로 정해졌으며, 국내와 해외에서 각각 한 차례씩 진행될 예정이다.웨딩드레스 가게에서 청혼한 이건의 이야기는 곧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이건이 바라던 대로,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진이 윤이건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의 결혼식은 더욱 화려하고 시끌벅적했다.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 사람은 친한 지인들 외에 회사 직원들만 초대했다.윤이건의 가족들은 보기 드물게 모두 현장에 참석했지만, 이진 쪽은 텅 비어 있었다.한편 이씨 가문은 여전히 다툼이 지속되고 있었다.“이것 봐! 내가 애초에 뭐라 그랬어? 이진 그년이 양심 없는 년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이제 알겠지? 그년은 결혼식처럼 중요한 날조차 아버지인 당신을 부르지 않았어. 이기태, 정말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백윤정은 노발대발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에게는 예전의 자애로운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앞으로 달려들어 이기태를 때리려고 들었다.이기태는 화가 난 마음에 백윤정을 밀어냈다.“좀 저리 꺼져!”‘그래봤자 이진이는 내 친 딸인데, 지금 일이 이 지경이 된 건 모두 백윤정 때문이잖아. 백윤정이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진이를 그렇게 대했겠어? 백윤정이 자꾸 끼어들어 모순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이진도 날 이렇게까지 미워하진 않았을 거야.’물론 이기태의 눈에는 그저 이익밖에 없다. 그가 후회하는 건 오직 이진을 통해 이건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뿐이다.지금의 이기태는 백윤정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매일 싸우기 바빴다.이기태는 결혼식이 끝날 때가 되자 뻔뻔스럽게 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진아.”“이기태 씨, 전에 제가 전화를 끊을 때 했던 말을 잊으신 거예요?”이기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 너머 들려왔다. 그는 등골이 서늘해지더니 그제야 기억난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진, 너!”
보통 사람이라면 분명 시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하지만 이진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이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을 듣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윤이건 씨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시언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리고 힘겹게 한 마디 물었다.“제가 몇 년 더 빨리 나타났다면.”“그래도 결과는 똑같아요.”이진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말을 마친 뒤, 이진은 더 이상 시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건을 향해 걸어갔다.애초에 이진은 시우가 이 연회를 통해 정희와의 결혼 소식을 발표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이진은 마침내 시우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피곤했던 이진은 이건의 가슴에 기대어 말했다.“이건 씨, 저 해외여행 가고 싶어요.”“해외여행?”이건은 원래 뭔가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얼마 후 이진을 데리고 출국할 생각이었다.이진이 먼저 제기한 이상, 이건도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이진을 껴안고 말했다.“그래,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이를 위해 이건은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모든 일들 미뤘다. 하지만 이건의 원래 계획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YS그룹에는 이건이 직접 처리해야 될 큰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이건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이진을 데리고 해외로 여행을 간 것이다.이 소식을 전해 들은 YS그룹의 고위층들은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건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어쨌든 프로젝트는 끝내고 가야지.하지만 이건의 대답은 그저 한마디뿐이었다. 결혼식을 마친 후.결혼식을 마친 후, 이건은 분명 이진과의 아이를 돌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그러기에 앞으로 일에 전념하는 시간은 점점 적어질 게 뻔했다.옆에 있던 이진은 한쪽에 놓인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리는 것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내가 너무 충동적인 건 아니겠지? 이건 씨는 날
이진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남학생을 꼬드겼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는 데다가, 시우 씨의 동생인 건 아예 모르던 일이야. 도대체 이 일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이진은 화를 내며 이건을 노려보았다.“제가 언제 그런 행동을 했다고 그래요. 전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거든요.”“정말이야?”이건은 일부러 장난친 거다. 사실 메시지를 보고 불쾌한 기분이 조금 들었는데, 이진의 반응은 그를 매우 기쁘게 했다.이건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그렇다면 자기 마음속에는 나밖에 없다는 거지?”‘그럼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겠네. 시우 이놈은 겁도 없네, 감히 내 아내더러 자기 사촌 동생을 위로해달라는 거야?’이건은 차갑게 웃으며 이진의 핸드폰을 가지고 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시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진 씨, 제가 보낸 메시지를 보셨나요? 저도 어쩔 수 없어서 연락을 드린 거예요. 이 녀석이 술에 취해 밤새 이진 씨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또.”“또 뭐 했는데?”이건은 그의 말을 끊은 뒤 질투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네 사촌 동생이 대단한 사랑꾼인가 봐.”‘윤이건?’전화 너머의 시우는 하마터면 심장이 터질 뻔했다.“이건아, 이진 씨 핸드폰이 왜 네 손에 있는 거야? 난.”“나랑 이진이가 부부인 걸 잊은 거야?”이건은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 아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럼 내 아내를 좋아하는 사람마다 직접 가서 위로해 줘야 되는 거야? 내가 동의할지 말지는 둘째 치고, 이진이 정말 간다고 해도 네 동생이 괜찮아질 리는 없어.”마침 뭔가 생각난 이건은 잠시 망설이더니 협박하듯이 말했다.“술에서 깨면 네 동생한테 전해. 어제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이건은 다른 남자들이 자신의 아내에게 들러붙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이
‘윤이건? 윤이건이 어떻게?’시언은 도저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와 시우는 사촌 형제이기에, 이건과 시우가 친한 친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소문에 의하면 이건은 이미 결혼했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설마.’시언은 갑자기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건과 이진이 어떤 사이든, 이진이 이건을 얼마나 의지하든, 그는 자신이 이진을 좋아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시언은 몸 옆에 늘어진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이때 정신을 차린 그는 앞으로 나아가, 이건의 앞길을 막고 환한 미소를 선보였다.“윤 대표님, 전 민시언입니다. 시우 형의 사촌 동생이에요. 시우 형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너무 영광입니다. 혹시 이진 씨랑은.”“이건 씨, 나 돌아가고 싶어요.”시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진은 취기를 못 이겨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다.이건의 차가운 표정은 순식간에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이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숙여 이진을 안았다. 그리고 시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이진을 조수석에 태웠다. 세심하게 안전벨트를 맨 후 무심코 뒤쪽을 스쳐보자, 시언은 방금 자세를 유지한 채 제 자리에 서 있었다.“이건 씨, 얼른 돌아가요.”이진은 아직도 이건에게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이건은 시선을 돌려 이진의 희고 정교한 얼굴을 보자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그동안 결혼식 하나 제대로 치르지 못했는데, 반드시 전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선물해 줄게.’이건이 직접 이진을 데려간 것을 목격한 시언은, 정신을 잃은 듯이 축 처진 채로 시우의 아파트를 찾았다. “민시언?”시우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언을 보자 조금 놀란 듯했다.“네가 이곳엔 왜 온 거야?”시언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형, 술 한잔하실 래요?”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났기에 술 한잔하는 것쯤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하지만 시우는 정희와 함께 임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최근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시언의 상
하룻밤 푹 자고 난 뒤, 다음날 아침 이진은 호텔에서 출발해 학교로 갔다.서현도 마찬가지로 이번 만남을 무척 중시하였다. 그녀는 이진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수업을 오후로 미뤘다.카페에 앉은 서현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이 대표님, 제가 오만해 보이긴 해도, 평범한 작가들과 비슷한 꿈을 꾸고 있거든요. 제가 쓴 시나리오를 대중들에게 알려, 널리 선보이는 게 제 꿈이에요. 하지만 제가 글을 쓸 때에는 저만의 요구가 있기에,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서현의 요구는 별로 지나치진 않았다. 그저 세훈이 제기했던 요구처럼 원칙적인 문제에 관한 것들이다. 이 방면의 문제는 서현이 말하지 않아도 이진이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이진이 바로 동의하자 서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이진의 시원시원한 성격은 전에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과 사뭇 달랐다.서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제 너무 지나친 행동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안 그러면 이진 씨처럼 훌륭하신 분을 놓치게 되었을 지도 몰라.’ 세부사항을 토론한 후, 이진은 세훈과 서현을 데리고 원작자를 찾아가 판권을 따냈다.그 후 배우의 캐스팅으로부터 촬영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였다. 배우들의 캐릭터 소화는 물론, 배우들 사이의 호흡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몇 달 후, 영화는 이건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상영되었다.의 원작 팬이 워낙 많았고, 호기심으로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영화관을 나설 때 모두 영화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개봉 첫날, 전국의 영화관 티켓은 모두 매진되었다.심지어 대부분 영화관에서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영화를 예정했던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상영하였다.개봉한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는 수십 년간 1위를 차지했던 영화를 뛰어넘기도 했다.이 영화의 촬영 제작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도 엄청난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그들은 마치 다크호스처럼 갑자기 대중들의 시선 속에 나
이진은 말을 마친 후 정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떠났다.“이진아, 넌 저분이 동의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한참을 걸은 뒤 정희가 호기심에 물었다.이진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현이 딱 봐도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재능이 있는 작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데, 굳이 모욕을 당하면서 저 여자를 선택할 필요는 없잖아.’정희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내가 연예계에 아는 사람이 꽤나 있는데, 그냥 이서현 말고 다른 작가 소개해 줄까?”“아직은 필요 없어.”이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아마 날 거절하지 않을 거야.”이진이 거절한 이상 정희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정희가 포기한 채 택시를 잡으려던 찰나, 앞에서 엄청난 비주얼을 가진 키 큰 남학생이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예쁜 누나들,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두 사람을 향해 한 말이지만, 남학생은 줄곧 이진을 훔쳐보고 있었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정희는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왜요? 학생, 지금 대시하는 거예요?”생각이 들통난 남학생은 부인하기는커녕 겸연쩍은 듯 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누나들은 저희 학교 학생이 아닌 것 같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연락처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두 사람 연락처를 모두 받아 가시려는 거예요? 생각보다 욕심이 많으시네요.”정희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장난을 쳤다.그러자 남학생은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용기를 내어 이진에게 핸드폰을 건넸다.“누나, 전화번호 주시면 안 될까요? 절대로 귀찮게 굴진 않을 게요!”‘지금 충분히 귀찮은 것 같은데.’이진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깔끔하게 거절했다.“죄송하지만, 안될 것 같네요.”난생처음 대시를 시도해 본 남학생은, 자신이 이렇게 무자비하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남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옆에 있던 정희는 차마 이대로 지나치기 힘들어, 가방에서 이진의 명함을 한 장 꺼내 남학생의 손에 쥐여 주었다.“연락처는
이진은 자신의 가장 진실된 생각을 전한 것은 물론, 판권을 반드시 따내려는 결심으로 원작자를 두 번이나 찾아갔다. 결국 원작자는 그녀에게 한 번 만날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진은 이번 기회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 전에 조사한 자료들을 들고 사람을 찾으러 대학으로 향했다.그녀 스스로 배역을 연구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했기에, 이진은 전문적인 작가를 찾아야 했다. 현재 대학교 교수인 이서현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출발하기 전에 이진은 특별히 학교의 포털 사이트를 통해, 서현의 수업시간표를 찾았다. 그리고 교장에게 부탁하여 수업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이진의 신분을 알게 된 교장은, 단번에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두 손 두 발 들어 환영했다.한편 이 일을 알게 된 정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애초에 이진이 연예계에 투자할 의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 경제 뉴스밖에 안 보던 이진이 정말 영화를 찍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진심이었던 거야? 왜 갑자기 영화를 찍으려는 거지?’정희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진아, 네가 의 판권을 따내 영화로 제작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사실이야?”“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비행기 탑승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기에, 이진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나중에 다시 얘기해, 지금.”“너 지금 공항이야?”눈치 빠른 정희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침 한가하던 정희는 이진을 따라 서현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우리 이진이가 갑자기 영화를 찍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정희는 결정을 내린 듯이 말했다.“이진아, 좀만 기다려 금방 갈게!”정희는 줄곧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성격이라, 이진은 핸드폰을 거두고 방금 정희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비행기는 한 시간도 안 되어 착륙했다.이진은 택시를 타고 바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사전에 알아보았던 수업시간표를 따라 강의실을 찾았다. 분명 수업이 시작되기까지 시간
이진은 별장을 나선 뒤 홀로 국장의 집으로 향했다.공교롭게도 여태껏 이진을 만나보고 싶어 하던 가정의도 국장의 집에 있었다.하지만 연이은 실패로 가정의도 이진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이진은 엄청 겸손한 데다가 이건의 아내다. 그녀가 어떤 신분이든 간에, 외부에 자신의 실력을 알릴 생각이 없다면, 가정의도 더 이상 묻진 않을 것이다.두 사람은 자리에 앉은 후, 국장의 건강에 대해 자세히 토론하기 시작했다.옆에 있던 국장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때때로 몇 마디 맞장구를 치자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이진은 경계심을 내려놓고 많은 의견을 제기하였다. 국장은 모든 의견들을 자세히 기록하였다.모든 이야기를 마친 후, 국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글썽였다.“모두 이진 씨 덕분이에요. 이진 씨가 아니었다면 이 늙은이가 고질병 때문에 죽을 때까지 고생했을 거예요.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국장님, 곧 괜찮아질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이진은 국장의 말을 얼른 끊은 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게다가 할아버지의 친구분이시니, 제가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에요. 전엔 제가 생각이 짧은 데다가 일 때문에 바쁘다 보니, 줄곧 시간을 내지 못했는데 너무 탓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탓하다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나한테 이렇게 큰 도움을 줬는데, 고마워하기도 모자랄 판에 탓할 리가 있겠어?’마을의 개발 프로젝트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이진도 마찬가지로 세훈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이 대표님,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워낙 조건이 후해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더라고요.”진심 어린 이야기를 마친 후, 세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저한테 특별한 요구가 하나 있는데, 이 대표님께서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어떤 요구죠?”이진은 호기심에 눈썹을 찡긋거렸다.세훈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께서 절 좋게 봐주시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영화가 방영되었을 때 괜한 추측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방
오 감독은 전략을 바꾸기로 결정 내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진에게 사과하기로 한 것이다.이진은 전에 말했던 대로 마음에 들었던 감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작품마저 몇 개 없는 신인 감독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 감독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나처럼 유명한 감독을 마다하고 신인 감독과 합작한다는 거야? 내가 그동안 받은 상이 얼마인데! 이진 그년은 분명 사람 보는 눈이 삐뚤어진 거야! 신인 감독 주제에 얼마나 잘 찍을지 똑똑히 지켜봐야겠어.’오 감독은 불만이 가득했으나 자신의 앞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진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모두 이진이 예상했던 대로다. 전화를 받은 순간, 이진은 만만에게 눈빛을 보내 모 플랫폼에서 생방송을 시작했다.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오 감독은, 애써 웃으며 이진의 용서를 구하는 척했다.“이진 씨, 전엔 제가 너무 무례한 행동을 보였던 것 같네요. 의 촬영을 양세훈한테 맡길 생각인 거죠? 제가 양 감독을 소개해 줄 테니, 실시간 검색어의 글들을 내려 주시면.”“글을 내려달라고요?”이진은 오 감독이 뜻밖의 비장 카드라도 쥐고 있는 줄 알았다. 그가 이 정도로 파렴치한 인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지금 말 같지 않은 조건으로 나와 협상하려는 거야?’이진은 마음속으로 차갑게 비웃고는 비꼬듯이 입을 열었다.“오 감독님, 본인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 잊으신 거예요? 지금 저한테 조건을 제기할 것이 아니라 사과를 하셔야죠. 제가 양세훈 감독님을 선택한 건 사실이지만, 제 방식대로 촬영에 참여하도록 설득시킬 것이니, 당신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요.” “당신,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넘어가지 그래?”오 감독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모욕을 당했기에, 이대로 참고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위선적인 모습을 집어치우더니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내가 굽신거려주니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모두 윤이건 덕분이라는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마 윤 대표한테 들러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