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싶은 게 있어요.”떠나려는데 이우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엄청 중요한 일 같았다.“뭔데요?”나는 살짝 궁금했다.“훗날 내가 서란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이우범이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등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우범도 환생한 게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나의 경악스러운 눈빛을 보더니 이우범이 귀띔했다.“그쪽이 한번 술 마시고 내 차에서 횡설수설한 적이 있는데 서란 포기하라고 배인호랑 뺏지 말라고 그랬거든요. 근데 나는 그게 술기운에 그냥 한 말 같지는 않았어요.”깜짝 놀랐다. 그냥 내가 술 먹고 전생에 일들을 흘린 거였다.다행이라 생각하고는 웃으며 말했다.“그냥 한 소리죠. 그쪽이랑 배인호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좋은 친구인 거 아는데 다 서란한테 빠지면 안 되잖아요. 같은 여자한테 빠진다고 하더라도 우정을 선택할 거 같은데?”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전생에 그들은 물고 뜯고 난리였다. 동물 농장에서 두 사자가 왕 자리를 놓고 싸우는 장면과 매우 흡사했다.이우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럴 수도.”할 말을 끝내고 그는 자신의 차로 향했고 이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나만 주차장에 덩그러니 남은 채 한참을 멍해 있었다.‘그럴 수도라는 게 뭔 말이지? 서란을 사랑하게 된 건 맞는데 애써 억누르고 있다는 건가?’어떻든 간에 이건 그 두 남자 인생에서 꼭 넘어야 할 산이다. 나는 곧 배인호와 이혼할 거고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방관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배인호가 언제 이혼 서류를 보내올지는 알 수 없었다.며칠이고 기다렸지만, 이혼 서류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로 나는 회사까지 들렀지만, 배인호가 요 며칠 회사에 없다는 말만 들었고 그는 보이지 않았다.‘병원에서 미래 장인어른 시중을 드는 건가?’다시 병원으로 향했고 서중석의 병실을 알아내어 그쪽으로 향했다.서중석은 잠들어 있었고 서란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는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에 대고 말했다
엄마랑 좀 더 얘기를 나누고 나는 병실에서 나왔다. 병원에서 나오는 동안 나는 아빠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문자를 확인한 아빠는 바로 전화를 걸어왔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영아. 아빠 진짜 억울하게 당한 거야. 나 진짜 아무 짓도 안 했어. 이제 사실을 알았으니 네 엄마도 그렇게 화나 있진 않겠구나.”“아빠. 아직 사진이 남아 있어요. 그것도 반드시 해결해야 해요.”내가 귀띔했다. 그건 엄마의 화와 관계없이 원본 파일을 손에 넣지 않으면 훗날 다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아빠는 결백하다 해도 그 사진 앞에서는 반박 불가였다.“알지. 나도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아빠가 다시 차분해졌다.“아빠도 너무 급해하지 마세요. 방법 있을 거예요.”나는 아빠와 몇 마디 더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다.청담동으로 돌아왔을 땐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몇 입 먹고는 올라가 반신욕을 즐겼다.어느샌가 욕조에서 잠이 들었고 수온이 점점 떨어지지만 않았으면 나는 계속 잤을 것이다.밤이 깊었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잠옷을 입고 테라스로 향했다. 머리만 살짝 돌리면 대문을 볼 수 있는 자리라 전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기웃거리며 배인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었다.‘이혼 서류만 보내 주면 나도 이곳에서 나가겠지.’청담동은 나에게 너무 비굴한 기억만으로 가득했다. 이혼 후 계속 여기서 사는 건 마음고생을 사서 하는 거다. 그럴 거면 배인호에게 온전히 돌려주어 남은 물건들을 보면서 나를 떠올리게 하는 게 나았다. 어차피 늘 나에게 차가운 그였고 나를 떠올린다고 해도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오래 서 있었더니 바람이 춥게 느껴졌고 방으로 들어갔다. 뒤척거리며 잠을 못 이루던 차에 정아가 전화를 걸어왔고 열정적으로 나를 불러냈다.“지영아, 빨리 나와.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잖아. 여기 잘생긴 오빠들 많아. 고르기가 힘들 정도야!”“안 가. 씻고 이제 막 누워서 자려고.”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렇게 추운 날 이불속이 나의 최종
노성민이 시작 버튼을 눌렀고 은색 침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멈춘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었고 계속 노성민 옆에 앉아 있었다. 젊어 보였고 강은지가 데려온 사람 같았다.“제가 지목할게요!”그녀가 흥분하며 손을 들었고 우리를 한 바퀴 둘러보며 누구를 지목할지 고민했다.최종 지목된 사람은 박준이었다. 처음으로 지목된 그는 도전을 선택했다.“모르는 남자한테 가서 작업 걸어요. 그러면서 당신 입술 너무 섹시한데 라고 해요.”요구를 들은 박준이 심장마비가 온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웃기 시작했다. 상남자인 그에게 이 요구는 죽으라는 말과도 같았다.그는 이를 악물고 그 여자를 보며 또박또박 내뱉었다.“술 마실게요!”그러고는 술 한 병을 원샷 했다.이번엔 박준이 시작 버튼을 눌렀고 이우범에서 멈췄다.이우범은 하얀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표정이 덤덤했다.“진실.”박준이 괴상하게 웃으며 말했다.“우범아, 아직도 총각인 거 확실해?”이 문제는 우리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이우범은 이 무리 중에 흔치 않은 예외였다. 종래로 여자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고 스님처럼 아무런 욕구가 없어 보였다.하지만 이건 다 겉 포장일 뿐이다.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는 숨기기 나름이다.배인호도 흥미롭다는 듯 이우범을 쳐다보고 있었다.나는 이우범이 술을 선택할 줄 알았다. 하지만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던 이우범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의 대답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몇몇 여자들의 눈이 순간 빛나는 게 보였다. 먹이를 노리는 사자처럼 시선은 그에게 꽂혀 있었고 지금이라도 저 절벽에 핀 꽃과도 같은 남자를 차지하려고 하는 듯 보였다.사람을 잘못 보진 않은 것 같다. 순정남이 맞았다.게임은 다시 시작되었고 천천히 내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우범을 보며 말했다.“진실 선택할게요.”“배인호 말고 다른 남자한테 흥미를 느껴본 적 있어요?”이우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까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하던 룸이 순간 정적이 흘렀
그때의 기세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내가 복권에라도 당첨된 줄로 생각했을 것이다.내 정신은 접촉 불량으로 깜빡깜빡하는 전등처럼 돌아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배인호의 모습이 여러 개로 겹쳐 보였고 너무나도 흐릿했다. 머리를 돌려보니 배인호뿐만 아니라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유령처럼 형상이 흔들렸다.“지영아, 이리 와. 내가 데려다줄게.”세희가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아마도 이 사람 중에 내가 제일 많이 마셨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내 차례가 올 때마다 술을 선택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진심과 도전을 조금씩 섞었다.민정이도 내가 계속 배인호와 실랑이를 버릴까 봐 무서운지 세희와 좌우로 흑기사처럼 나를 부축했다.“지영아, 이제 가자!”나는 비틀거리며 두 사람의 팔을 뿌리쳤고 박준에게로 달려들었다.“안되지. 아직 도전 못 했잖아...”취하긴 했어도 배인호를 난처하게 해야 한다는 건 시종일관 기억하고 있었다.박준은 내가 귀신이라도 되는 양 이리저리 나를 피했고 노성민 곁에 바싹 붙었다. 노성민도 힘껏 그를 안아주었고 그 모습이 재난 영화에서의 형제 같았다.이를 본 이우범이 일어서서 나를 막았다. 나의 팔을 잡았고 부드럽게 말했다.“돌아가요. 한잠 푹 자면 돼요.”“우범 씨 왜 그렇게 나빠요?”내가 힘껏 눈을 치켜뜨고는 그를 쳐다봤다.“아까 게임할 때 계속 나 못살게 굴고. 내일 병원 가서 클레임하는 수가 있어요! 환자 학대한다고 할 거예요. 그래서 평생 의사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집안 사업 물려받게 할 거예요...”“그래요.”이우범이 어쩔 수 없다는 웃으며 말했다.“돌팔이! 돌팔이!”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주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전에도 배인호가 집에 오지 않으면 혼자서 종종 술을 마셨고 많이 마시면 난동을 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허공에 대고 혼자서 중얼거릴 뿐 아무도 대꾸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이우범의 얼굴에 계속 먹칠하려는데 갑자기 몸이 기우는 게 느껴졌고 힘 있는 손 하나가 내 허리를 휘어 감았다
전생의 비극이 떠올랐다. 아빠 엄마의 그 불쌍하고 처량한 모습이 떠올라 서글퍼졌고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부모님을 그렇게 만든 게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랑에 눈이 멀어 허우적대는 모자란 딸을 낳은 게 그들의 큰 죄였다.울어서 그런지 언어 구사 능력도 떨어진 거 같았다. 사진을 붙잡고 울기만 했고 한마디도 제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환생 후 처음으로 배인호 앞에서 이렇게 슬프게 울어 본다. 눈물로 흐릿한 시선 속에 배인호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는 망설이다가 손을 들어, 내 얼굴을 감싸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왜 울어?”배인호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이혼하자 해서 그러자고 했잖아요!”나는 애써 북받쳐 오르는 서러움을 억제하며 말했다.“뭘 더 어쩌라는 거예요? 위자료 덜 줘도 돼요... 쓸데도 없어요... 끅... 이걸로 아빠 엄마한테까지 손댈 필요는 없잖아요! 아직 인호 씨 장인 장모인데!”“이혼은 네가 하자고 했지.”배인호가 내 말의 흠을 잡아 주었다. 목소리에도 기분 나쁨이 좀 묻어 나왔다.“여태까지 난 이혼하자고 한 적 없어. 네가 여러 번 얘기했지.”“내가 이혼하자고 한 건 인호 씨가 원하는 게 그거니까 그런 거죠!”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서란 사랑하는 거 아니에요? 서란한테 명분도 줘야 할 거 아니에요! 하루라도 빨리 이혼해서 서로 체면 지키는 게 좋지 않겠어요?”배인호가 머리를 숙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는 사람을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사람을 볼 때 그 눈빛은 늘 냉랭했고 온도가 잘 없었다.“대답할 필요 없어요. 이 사진 갖고 협박할 필요도 없고요. 위자료 안 받으면 되잖아요. 부모님이 나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어요.”배인호의 침묵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더 이상 이곳에 있기가 싫었고 말이 끝나자 내 방으로 올라가 외투를 챙겨 나가려고 했다.현관에서 신을 갈아 신으면서 거실에 서 있는 배인호를 힐끔 쳐다보았다. 코 막
“이 빌어먹을 여편네가 이제 좀 재수가 붙는가 싶었는데 죽고 싶어? 집으로 얼른 꺼져! 여기서 눈꼴 사납게 굴지 말고!”유기봉이 욕설을 퍼부었다.조수연은 한참을 바닥에 널브러진 채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도박장 사람들은 늘 있는 일 인양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나는 아직도 가슴이 떨려 왔고 정아를 데리고 빨리 자리를 떴다.이 기사가 차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보고 다정하게 말했다.“사모님, 어디 불편하세요?”“아니에요, 다시 서울로 가요.”나는 아직도 얼얼한 목을 매만졌고 정아도 가까이 와서 자세히 봐주었다.“빨개진 거 봐. 그 여자 진짜 너무 독한 거 아니야?”정아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말했다.“조수연이 한 말 무슨 뜻이지?”하지만 내 생각은 온통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누가 유기봉을 매수한 거지?”“나도 모르겠어. 유기봉은 도박 중독자라 빚이 엄청 많을 텐데 누군가가 갚아 주는 대신 와이프를 잡아 오라고 했다? 역시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이 상대해야 해.”정아가 감탄하며 말했다.“근데 그 사람 누구지?”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전에 내가 고용한 탐정도 유기봉을 찾은 적 있거든. 근데 유기봉은 와이프의 외도 사실에 꿈쩍도 안 했다고 했거든.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유기봉이랑 조수연 사전에 이미 판을 짜 놓은 걸 수도 있어. 조수연이 잘사는 사람한테 빌붙어서 돈을 가져오면 유기봉 도박 빚 갚고. 근데 조수연은 반대로 이 기회를 이용해서 유기봉과 이혼하고 싶은 거고.”정아가 몇 초 정도 생각하더니 눈이 점점 커졌다.“배인호는 아니겠지...?? 배인호 집에서 그 사진들 봤다면서?”마음이 덜컹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중얼댔다.“그 사진들 여기서 가져온 건가?”그럼, 그 사진들이 원본 사진이다. 나는 배인호를 잘 안다. 일을 하면 깔끔하게 하고 돈을 썼으면 그 가치를 최대한으로 뽑은 사람이다. 원본 사진이 아니라면 배인호가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이혼 서류에 사인하고 그 사
“지영 씨, 제가 뭐 잘못했나요? 왜 갑자기 말투가 차가워졌어요?”엄기준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나는 대꾸를 하지 않고 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저녁 11시가 다 되었다. 거리에 북적거리던 사람들도 확 줄어들어 썰렁해 보였다. 배인호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전화를 받으려는데 엄기준이 갑자기 내 팔을 힘껏 부여잡았다. 아까 부드러웠던 모습은 사라지고 분노만 남아 있었다.“따라와요!”“이거 놔요!”나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엄기준의 태도가 이렇게 빨리 변할 줄은 몰랐다. 그의 악력은 대단했고 나는 그 손에 끌려 그의 차로 향했다.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서 돕지 않았다. 나도 이런 돌발 상황은 처음이라 머리가 복잡했고 통화 중인 핸드폰에 대고 크게 여러 번 소리쳤다.“살려줘요!”엄기준이 나를 아무렇게나 차 안에 욱여넣었고 내 손에 들린 핸드폰을 앗아갔다.“꼼짝 말고 있어요!”운전석에는 허겸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를 힐끔 돌아보더니 음침하게 웃었다.“허지영 씨, 놀랍죠?”“허겸? 뭐 하는 거야?”나는 애써 진정하려 했다.“당신 때문에 직장도 잃고 민정이와도 헤어져서 나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죽여도 시원찮을 판에 이렇게 혼내 주지도 않으면 화가 안 풀릴 거 같아요. 이제 무서운 거 없어요. 오늘 열 배로 다시 갚아 줄게요!”허겸이 담배를 휙 버리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얼마나 달렸는지 몰라도 차는 한 부두에 도착했다. 허겸과 엄기준은 나를 컨테이너에 데려갔다. 잘 서지도 못했는데 따귀가 날아왔다. 너무 아파 눈앞이 까매졌다.엄기준이 의자를 하나 가져왔고 허겸은 그 의자에 나를 앉히고는 끈으로 꽁꽁 묶었다. 그러면서도 상스러운 욕을 멈추지 않았다.“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허겸이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첫 번째 선택, 10억을 보상으로 주는 거. 두 번째 선택, 둘한테 몹쓸 짓 당하고 바다에 버려지는 거.”허겸이 이렇게 독한 사람인지 왜 전에는 몰랐을까?“허겸, 민정이랑 그렇게 오래 사
내 머리는 아직도 조금 어지러웠지만, 의식은 있는 상태였다. 나는 민정의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괜찮다며 다독였다.“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잘못은 허겸이 한 거지. 난 그 사람 바람피운 사실을 너한테 말해준 거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 단지 그 쓰레기가 너랑 안 어울리는 거지.”민정이는 더 슬프게 울었다.이때 정아와 세희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그 둘은 나를 보고, 급히 다가와서 괜찮냐며 이것저것 물었다.“지영아, 몸은 어때? 머리는 계속 아픈 거야?”“배는 안 고파? 가서 밥이라도 사 올까?”“온도 더 높여줄까? 안 추워? 감기까지 걸리면 안 되는데!”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배고프지도 춥지도 않아, 그냥 머리가 살짝 어지러울 뿐이지.”정아는 속상해하며 말했다.“우리 불쌍한 지영이, 두 달 동안 어떻게 이런 일만 생겨? 머리 상한 거만 벌써 두 번째야, 혹시 머리 상한 거 때문에 멍청해지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나는 웃으며 말했다.“상관없어, 너희들 한 사람씩 바꿔가면서 나 책임지면 되지 뭐.”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알게 되었다.허겸은 나를 해코지하려고 일부러 엄기준더러 나한테 접근하게 했고, 기회를 찾아 날 납치하고 돈을 갈취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다로 날 내 던진 후, 그 돈을 갖고 해외로 도주할 계획이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배인호한테서 걸려 온 전화로 내가 살 수 있었던 거고, 나의 살려달라는 소리를 들은 배인호는 내 휴대폰 위치추적 후, 나를 구하러 몇 명을 데리고 같이 온 것이었다.“그 뒤로 한참 널 찾았는데 찾지 못해서, 인호 씨가 나한테 또 연락이 온 거야. 나보고 허겸한테 전화 좀 해보라고 해서 전화했더니 허겸이 내 전화 끊어버리더라.”민정이는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얼굴에는 온통 분노로 가득 찼다.“나는 허겸이 이 정도로 독하고 이기적인 사람인 줄도 몰랐고, 본인이 잘못해 놓고는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줄도 몰랐어. 심지어 허겸 부모님은 날 찾아와서 사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