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 씨, 제가 뭐 잘못했나요? 왜 갑자기 말투가 차가워졌어요?”엄기준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나는 대꾸를 하지 않고 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저녁 11시가 다 되었다. 거리에 북적거리던 사람들도 확 줄어들어 썰렁해 보였다. 배인호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전화를 받으려는데 엄기준이 갑자기 내 팔을 힘껏 부여잡았다. 아까 부드러웠던 모습은 사라지고 분노만 남아 있었다.“따라와요!”“이거 놔요!”나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엄기준의 태도가 이렇게 빨리 변할 줄은 몰랐다. 그의 악력은 대단했고 나는 그 손에 끌려 그의 차로 향했다.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서 돕지 않았다. 나도 이런 돌발 상황은 처음이라 머리가 복잡했고 통화 중인 핸드폰에 대고 크게 여러 번 소리쳤다.“살려줘요!”엄기준이 나를 아무렇게나 차 안에 욱여넣었고 내 손에 들린 핸드폰을 앗아갔다.“꼼짝 말고 있어요!”운전석에는 허겸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를 힐끔 돌아보더니 음침하게 웃었다.“허지영 씨, 놀랍죠?”“허겸? 뭐 하는 거야?”나는 애써 진정하려 했다.“당신 때문에 직장도 잃고 민정이와도 헤어져서 나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죽여도 시원찮을 판에 이렇게 혼내 주지도 않으면 화가 안 풀릴 거 같아요. 이제 무서운 거 없어요. 오늘 열 배로 다시 갚아 줄게요!”허겸이 담배를 휙 버리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얼마나 달렸는지 몰라도 차는 한 부두에 도착했다. 허겸과 엄기준은 나를 컨테이너에 데려갔다. 잘 서지도 못했는데 따귀가 날아왔다. 너무 아파 눈앞이 까매졌다.엄기준이 의자를 하나 가져왔고 허겸은 그 의자에 나를 앉히고는 끈으로 꽁꽁 묶었다. 그러면서도 상스러운 욕을 멈추지 않았다.“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허겸이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첫 번째 선택, 10억을 보상으로 주는 거. 두 번째 선택, 둘한테 몹쓸 짓 당하고 바다에 버려지는 거.”허겸이 이렇게 독한 사람인지 왜 전에는 몰랐을까?“허겸, 민정이랑 그렇게 오래 사
내 머리는 아직도 조금 어지러웠지만, 의식은 있는 상태였다. 나는 민정의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괜찮다며 다독였다.“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잘못은 허겸이 한 거지. 난 그 사람 바람피운 사실을 너한테 말해준 거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 단지 그 쓰레기가 너랑 안 어울리는 거지.”민정이는 더 슬프게 울었다.이때 정아와 세희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그 둘은 나를 보고, 급히 다가와서 괜찮냐며 이것저것 물었다.“지영아, 몸은 어때? 머리는 계속 아픈 거야?”“배는 안 고파? 가서 밥이라도 사 올까?”“온도 더 높여줄까? 안 추워? 감기까지 걸리면 안 되는데!”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배고프지도 춥지도 않아, 그냥 머리가 살짝 어지러울 뿐이지.”정아는 속상해하며 말했다.“우리 불쌍한 지영이, 두 달 동안 어떻게 이런 일만 생겨? 머리 상한 거만 벌써 두 번째야, 혹시 머리 상한 거 때문에 멍청해지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나는 웃으며 말했다.“상관없어, 너희들 한 사람씩 바꿔가면서 나 책임지면 되지 뭐.”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알게 되었다.허겸은 나를 해코지하려고 일부러 엄기준더러 나한테 접근하게 했고, 기회를 찾아 날 납치하고 돈을 갈취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다로 날 내 던진 후, 그 돈을 갖고 해외로 도주할 계획이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배인호한테서 걸려 온 전화로 내가 살 수 있었던 거고, 나의 살려달라는 소리를 들은 배인호는 내 휴대폰 위치추적 후, 나를 구하러 몇 명을 데리고 같이 온 것이었다.“그 뒤로 한참 널 찾았는데 찾지 못해서, 인호 씨가 나한테 또 연락이 온 거야. 나보고 허겸한테 전화 좀 해보라고 해서 전화했더니 허겸이 내 전화 끊어버리더라.”민정이는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얼굴에는 온통 분노로 가득 찼다.“나는 허겸이 이 정도로 독하고 이기적인 사람인 줄도 몰랐고, 본인이 잘못해 놓고는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줄도 몰랐어. 심지어 허겸 부모님은 날 찾아와서 사정하
그의 과분한 관심에 놀란 나는 입을 열었다.“저 혼자서도 물 부어 마실 수 있어요.”조금 전까지 온화하던 그의 말투는 순식간에 차갑고 시크하게 변했다.“다쳤으면 그냥 누워나 있지 왜 센 척이야?”그냥 물 하나 부을 수 있다는 게 왜 센 척이라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컵을 받아 들고 말없이 물을 마시며, 속으로는 배인호처럼 시크하고 차가운 남자의 부드러운 섬세함은, 그가 좋아하는 여자만 누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그렇다면 서란은 앞으로 배인호의 그 차가움 뒤에 숨겨진 따뜻함을 매일 누릴 수 있는 행운의 여자겠네?“허겸은 어떻게 됐어요?”나는 물을 마시고 나서 그에게 물었다.“지금 경찰서에 수금돼 있어. 절차 다 밟으면 아마 형을 선고받을 건데, 무기징역은 피할 수 없을 거야.”담담하게 말하던 배인호는 갑자기 대화 화제를 돌렸다.“그리고 그 엄기준, 그 사람은 너 납치 계획까지 다 불었어.”“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행이네요.”배인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뭐가 다행인 건데?”나는 어리둥절했다. 나쁜 사람이 정의의 심판을 받는다는데 그럼 다행인 거지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배인호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남자라 생각했다.그는 계속해 말했다.“술집에서 낯선 남자한테 연락처를 줘서 다행이라는 거야, 아니면 그 사람이랑 영화 보고 고기 먹으러 가게 된 게 다행이라는 거야?”“…”나는 말문이 막혔다. 만약 내가 복수심을 품지 않고, 다른 사람 일에 신경을 껐다면 엄기준과도 이런 일이 없었을 거다.배인호는 이어서 물었다.“왜 말이 없어?”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는 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인호 씨 지금 질투하는 건가요?”나는 강한 질투의 냄새를 맡았지만, 그가 왜 질투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날 전혀 좋아하지도 않고, 각자 즐길 거 즐기고, 내가 만나는 사람이 그의 친구만 아니면 된다고 3계명처럼 항상 말했었기 때문이다.내가 되물은 질문에 배인호는 당황스러운 듯 갑자기 일어서서 차갑게 말했다.“착
이우범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그러면 두 번째 결혼 전에는 안전 조심해요. 머리 맞고 진짜로 바보 되지 말고.”나는 들릴 듯 말 듯 하게 중얼거렸다.“거 참 오지랖 넓네.”이때 간호사가 급히 이우범을 불렀고, 이우범이 떠나자 정아가 돌아왔다. 그녀는 많은 생각이 정리된 듯 신나 보였다.“지영아, 너 지금까지 계속 쫓아다니기만 하다 이제는 별일도 다 있네?!”“아냐, 이혼할 건 해야지.”나는 담담하게 말했다.“나와 이혼할 거라고 배인호가 이미 이우범이랑 서란한테도 말했대.”정아는 순식간에 웃음을 멈췄다.“응?”설사 그녀가 연애 경험도 많고, 연애에서는 고수라 해도 나와 배인호의 변덕에는 다소 어리둥절할 것이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명은 예전과 다르게 도움을 줬다 하고, 한 명은 오해했다고 자책하며 다시 재회할 것처럼 하더니 이제는 또 이혼할 거라고 하니 말이다.하지만 박정아는 역시 박정아였다. 몇 초간 멍하니 있더니 더욱 신나서 말했다.“맞아! 이혼할 거면 빨리해!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잖아? 너 10년 동안이나 배인호 때문에 힘들었는데 이렇게 쉽게 용서해서는 안 되지, 이혼하고 배인호가 너 못 잊어서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어버려!”나는 이런 정아가 너무도 웃겼다. 나와 배인호가 이혼하면, 배인호가 땅을 치며 후회하기보다는 서란과 결혼해서 애까지 낳는 좋은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서란의 존재는 배인호가 나와의 이혼을 승낙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야 그만해, 뭔 끝이 없냐? 나 빨리 밥 좀 사다 줘. 병원 식당에서 파는 가지볶음 맛있던데 그거 좀 사다 주면 안 돼?”나는 웃으며 정아를 재촉했다.“5성급 호텔 요리도 아니고 고작 병원 식당의 가지볶음이라니, 어휴!”정아는 말로는 구시렁거렸지만, 몸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병원 식당으로 향했다. 지금이 정확히 식사 타임이라 아마 줄을 서서 기다려야 될 것이다!정아가 나가고 병실에는 나 혼자 남아 있었다. 얼굴에 미소는 서서히 사라졌고, 그 대신 약간의 상실감이
서란은 내가 더는 대꾸하지 않자, 가방을 집어 들며 일어났다.“지영 언니, 들어보니 언니 이혼할 때 일전 한 푼도 안 받는다면서요? 그거 너무... 바보 같은 짓 아닌가요? 10년 동안의 젊은 시절은 보상받아야죠. 여자한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젊음이잖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나는 너무나 화가 났다. 상간녀 주제에 본처한테 위자료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본인이 착한 사람이라도 된 줄 아나?게다가 그녀는 내가 10년 동안 배인호를 좋아했다는 거도 알고 있었다!그녀한테는 분명히 기쁨과 동정심이 공존할 것이다. 나는 10년이란 시간을 배인호한테 바쳤는데 그녀는 몇 달도 안 돼서 배인호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배인호가 본인한테 더 잘해주는 거도 분명히 알고 있을 거다.배인호가 그녀한테 말했겠지?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사람들한테 한두 번 웃음거리가 된 거도 아니니, 서란 한 명 더 늘었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으니 말이다.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난리를 치면 아마 내 꼴만 더 우스워질 것이다. 나는 이혼까지 참았다가 그 뒤에는 세계 여행이나 할 계획이다. 어쨌든 시간은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 줄 수 있으니 말이다.“가지볶음 도착이요!”정아는 포장해 온 음식을 들고는 신이 나서 돌아왔다. 하지만 내 안색이 심상치 않은 걸 보고는 걱정되는 듯 물었다.“왜? 뭔 일 있어? 낯빛이 너무 안 좋은데?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너한테 들려줄 게 있어.”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며, 방금 녹음 내용을 들려줬다.녹음본을 들은 정아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져서는 욕설을 퍼부었다.“이거 완전 미친년이잖아, 지금 너 죽이려고 한 거 맞지? 아 안 되겠어. 나 당장이라도 그년 쫓아가 싸대기라도 날려야 될 것 같아!”“정아야, 하지 마.”나는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걔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뭘 어떻게 쫓아간다는 거야?”“그년 서울대 성악과 아냐? 사람 시켜서 걔 학교에 커다
새해가 지나고 며칠 후 나는 퇴원하게 되었다.병원에 있는 건 확실히 지루했고, 게다가 회복도 잘 된 상태라 미리 퇴원 절차를 밟았다.이 기사님은 나를 청담동으로 데려다주었고, 집사 아주머니는 나를 위해 풍성한 점심을 준비했다. 나는 배가 터질 정도로 먹고 나니 기운이 나는 듯했다.갑자기 기선우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누나, 어떻게 된 거예요? 괜찮아요? 병원에 찾아갔는데 누나 이미 퇴원했다면서요!”“선우야, 내가 입원한 병원은 어떻게 알았어?”나는 조금 놀랐다. 왜냐하면, 내가 병원에 입원한 사실을 그 어디에도 올린 적은 없으니 말이다.기선우는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오늘 아침 라니가 알려줬어요.”내가 다친 걸 기선우한테 알려줬다고? 그러고 보니 전에 서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선우가 나를 대하는 느낌이 다른 사람 대하는 거와 다르다고 말이다. 그녀는 일부러 나랑 기선우가 썸이라도 타길 바라는 듯했다.이때 배인호한테서도 전화가 걸려 왔고, 나는 기선우한테 대충 얼버무리고 배인호의 전화를 받았다.그는 나한테 따져 물었다.“퇴원한 거 나한테 왜 말 안 했어?”“병원에 갔어요?”내가 물었다.“말이라고 하는 거야?”배인호는 몹시 화가 나 보였다.“내 시간만 낭비했잖아!”나는 당황스러웠다. 서란은 오늘 아침 배인호가 병원에 나 보러 가는 줄 미리 알고, 기선우한테 내가 입원한 사실을 알려준 거다. 내가 앞당겨 퇴원해서 다행인 거지, 그게 아니면 일부러 어색한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었을 거다.나는 서란이 이렇게까지 할 줄 몰랐다.배인호는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도 다시 전화하지는 않았다.겨울은 낮이 짧고 밤은 긴지라 오후 5시 반도 안 돼서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나는 오후 내내 잠을 자고 일어난 뒤 겉옷을 걸쳐 입고, 홀로 밖에 눈사람을 향해 걸어갔다.요즘 날씨가 눈이 매일 오는 건 아니라서 눈사람의 뚱뚱했던 몸통은 조금 사라졌고, 그 형태는 조금씩 변형이 돼 있었다.“사모님, 밖에 추운데 들어와서 몸 좀 녹여요.”
“죄송해요, 하도 이혼을 미루니까 전 인호 씨가 저를 좋아하게 된 줄 알았어요. 근데 그런 게 아니네요.”나는 차분하게 웃어 보였고, 그 어떠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했다.배인호의 차가운 얼굴에서는 그 어떠한 감정도 엿볼 수 없었고,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아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나는 담배 연기에 숨이 막혀 기침했고, 그걸 본 배인호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이런 부분은 그래도 신사적이라 생각했다.1분 정도 지난 후, 나는 배인호가 전화를 받고 서둘러 떠나는 모습을 창문으로 바라봤다.이때 내 전화도 울렸고, 정아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지영아, 뭐해? 여기 밥 먹으러 와!”그녀는 신비롭게 나한테 말했다.“여기 오면, 네가 예상치 못한 사람도 볼 수 있을 거야.”“그게 누군데?”내가 물었다.“안 알려줄 거야. 위치 보냈으니 얼른 와. 너 안 오면 집까지 찾아간다.!”정아는 신이 나서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시간을 보니 때마침 저녁 시간이었다. 나는 집사들한테 저녁은 나가서 먹을 거라고 말해줬고, 차를 운전해 나갔다.목적지에 도착해 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세희와 민정이도 함께 있었고, 더 생각지 못한 건 문 바로 맞은 편에 30대 초반인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가진, 아주 표준적인 동양형 미남이 앉아있었다.그는 다름 아닌 박정아의 친오빠, 박정환이었다.나를 본 박정환은 잠시 깜짝 놀라다가 금세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한테 인사를 건넸다.“지영아, 오랜만이네.”“정환 오빠, 한국은 언제 들어온 거예요?”나는 마음속의 어색함을 억누르고, 대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정아 옆으로 가서 앉았다.“오후에 금방 도착했어. 정아가 굳이 환영파티 한다고 해서 밥 먹으러 오게 된 거야.”박정환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그는 정아와는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를 갖고 있다.정아의 친언니 박성아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고, 그녀도 웃으며 말했다.“정아가 자리 만들고, 오늘 돈은 네가 계산해.”박정환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누가 하든 똑같지 뭐.”나
서란의 얼굴에는 당황함이 가득했다. 그 시선은 갈 곳을 잃었고, 그녀는 머리를 숙여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그녀가 앞에서 보여준 순진하고 갈팡질팡한 행동을, 그녀가 실제로 한 일에 비하면 그건 천차만별이다.배인호는 그녀의 당혹감을 느끼고는, 날 일부러 보라고 그런 것인지, 진심으로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우리 앞에서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배인호!”박정환의 목소리는 많이 불쾌한듯했다.“정환 오빠, 오빠 예전보다 더 멋있어진 거 같네요!”나는 박정환의 말을 가로채고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큰 소리로 칭찬했다.엘리베이터 가장 문 앞에 선 민정이는 빠르게 닫기 버튼을 눌렀고, 배인호의 뜨거운 시선을 뒤로하며 엘리베이터 문은 닫혔다.일부러 나 보라고 그런 거 아닌가? 그렇다면 나도 참을 수 없지.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쑥스러웠고, 박정환의 팔을 놓으며 말했다.“죄송해요, 방금 오빠 팔 좀 빌리게 됐네요.”그걸 들은 박성아가 입을 열었다.“뭐가 미안한데, 저놈 속으로 좋아서 난리였을걸?”정아도 활짝 웃었고, 그 두 자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맞아, 나 진짜 너무 행복했어.”박정환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앞으로 이런 좋은 일은 내가 책임질게.”“정환 오빠는 점점 유머러스해지네요.”나는 못 말린다는 듯 말했다.박정환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우리 일행은 호텔을 떠나 근처 노래방으로 향했다.이왕 노래하러 왔으니, 나는 마음속 스트레스를 노래로 전부 발산했다. 비록 내가 악기를 전공했지만, 발성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노래 실력이 좋다 할 수는 없지만, 어디 가서 괜찮게 부른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세희는 회사 직원들과 전에 여기서 회식한 적 있다 했으며 그때 카드를 만든 적 있다고 했다. 그 카드에는 술 두 박스를 킵한 적 있었고, 우리는 그 킵한 중에서 한 박스를 시켜 먹었다.“자, 지영아 너 우리 오빠랑 이 노래 좀 같이 해봐!”정아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