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란 얘기만 하면 배인호의 성욕은 조금 사라지는 듯했다.“서란이 암만 쿨하다 해도, 걔가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한 감정 앞에서 쿨한 여자는 없어요.”나는 계속해서 그를 설득했다.“설마 걔가 슬퍼하는 걸 보고 싶어서 이래요? 만약 우리 둘이 관계를 맺었다는 걸 서란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그는 이성을 찾고 내가 한 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했다.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찰나, 그는 마치 방금 내가 한 말이 전부 헛소리였던 것 마냥 다시 나한테 키스를 했다.이런 감정 도덕도 따지지 않는 인간한테 감정적인 도리로 설득하려 했던 나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언제까지 엎치락뒤치락했는지 나는 눈을 뜨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배인호는 아직도 쌩쌩했고, 나는 졸린 상태로 말했다. “저 이제 좀 자게 해줘요. 저 퇴원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내 몸에서 움직이던 그의 큰 손은 멈춰 섰고, 그는 뒤에서 나를 껴안은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완전히 깊은 잠에 빠지기 전, 배인호가 입술로 내 어깨에 키스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격렬한 운동을 한 결과 다음 날 머리가 너무 아팠고, 배인호는 이미 방에 없었다.공기 중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냄새가 남아 있었고, 나는 더욱 머리를 움켜잡았다.'건강이 최우선'이라는 원칙에 따라, 나는 아침도 먹지 않고 재검사를 위해 이 기사님한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신기하게도 이우범이 또 내 담당 선생님이었다.“혈압 재게 소매 걷어 올리세요.”그는 나랑은 전혀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냉담하게 말했다.나는 머뭇거리다 두꺼운 겉옷을 벗었다. 하지만 목도리도 그와 동시에 같이 떨어졌고, 나는 급격히 목도리를 다시 목에 둘렀다. 하지만 이우범의 눈빛은 변해 있었고, 두 눈은 내 목을 응시하고 있었다.거기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어젯밤 배인호가 남긴 각종 흔적으로 가득했다.나는 몸에 달라붙는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상위에 팔을 얹으며 어색하게 말했다.
나는 푹 자고 일어났고, 깨어났을 때도 여전히 배인호 품속이었다.그는 아직 자고 있었고, 나는 살며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옷은 의자에 걸쳐있었고, 냄새를 맡아보니 술 냄새가 진동했다. 역시 어제저녁에 많이 마셨나 보다.이때 내 핸드폰 진동 알림이 울렸고, 또 아빠의 전화였다.나는 거실로 나가서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지영아, 인호랑 언제 올 거니? 네 엄마가 음식도 다 사다 놨고, 오늘 직접 요리한대!”아빠는 아주 많이 들떠 보였고, 사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아빠, 오늘 나랑 인호 씨 아마 못 갈 거 같아요...”아빠는 지금까지 이 정도로 사위를 기다려 본 적이 없었고, 나는 차마 이어서 말할 수 없었다.오늘 배인호는 세화 쪽에 가봐야 한다고 했고, 가끔 가서 현장도 살펴보곤 했다.내 말을 듣고 난 아빠는 역시나 불쾌해하셨다.“왜 못 온다는 거야? 너 인호한테 말하지 않은 거니? 아니면 인호가 오고 싶지 않대?”우리가 결혼한 첫해에, 우리 집에서는 집에 종종 밥 먹으러 오라고 했었고 배인호는 항상 거절해 왔다. 그는 우리 엄마, 아빠 생일이나 대명절 때만 예의상으로 방문하는 정도였다.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엄마·아빠도 그의 뜻을 알아채고 다시는 우리를 부르지 않았으며, 배인호에 대한 감정의 골도 더욱 깊어지게 된 것이다.나는 그가 회사 문제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내 핸드폰을 뺏어 갔다.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배인호가 어느새 잠에서 깬 상태로 내 핸드폰을 뺏어 들고는 우리 아빠한테 말하는 것이었다.“아버님, 저희 이따 갈 수 있습니다.”그의 이 한마디에 아빠는 만족해하며 전화를 끊었다.배인호는 핸드폰을 다시 나한테 건네주었고, 내가 멍하니 그를 보고 있자,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뭘 봐?”“오늘 세화 쪽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나는 얼른 핸드폰을 건네받으며 말했다.“오후에 가도 괜찮아.”배인호는 네이비 컬러의 라운드넥 스웨터를 입었고, 넓은 어깨 때문에 스웨터가 아주 잘 어울렸
나는 서란이 배인호가 아닌 다른 남자를 데리고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상대는 서란의 남자친구는 아니고, 그녀를 현재 쫓아다니는 남자였다.서란은 그와 함께 자리에 앉았고, 윤선은 그들에게 물을 따라 줬다. 서중석은 반대편에 앉아 유심히 그 남자를 살펴보았다. 나는 그 옆에 앉아있었고, 혼란으로 가득 찼다.한참 후 서란이 나를 향해 말했다.“지영 언니, 저 언니한테 할 말 있어요.”“그래.”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와 함께 침실로 향했다.서란은 문을 닫으며 망설임 없이 말했다.“언니, 제가 집에 데리고 온 사람이 배인호 사장님이 아니라서 언니가 놀라신 거 같더라고요. 근데 제가 사장님한테 마음은 흔들렸어도, 상간녀가 되는 건 저 스스로 용서할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배인호 사장님한테 분명하게 말했고, 진수 씨랑 만나보려고요. 이 얘기 하려고 언니 부른 거예요.”진수 씨는 바로밖에 있는 저 남자이다.“그 사람이 동의했어?”나는 서란이 배인호한테 맞서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되어 괜히 미심쩍었다. 배인호가 동의하지 않는 한 그녀는 다른 남자와 좋은 결과를 바랄 수가 없으니 말이다.“동의하든 안 하든 그건 그 사람 일이죠.”서란은 마치 결심이라도 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나는 어떤 부분이 찝찝한지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일단 서란이 집에 데려온 남자는 배인호가 아니었다.나는 침실에서 나온 후 더는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아, 저녁을 먹고 가라는 제안도 거절했다. 윤선은 지은 약을 나한테 가져다주면서 주의 사항과 복용 횟수를 알려 주었다. 서란은 옆에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엄마, 저건 뭐예요?”윤선은 얼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괜히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넌 어린애가 별걸 다 알려고 하니?”“내가 이모님한테 부탁한 약이야.”나는 오히려 공개적으로 서란한테 말했다.“나랑 인호 씨한테 애가 안 들어서서 내가 예전에 윤 이모님한테 약 좀 부탁드린 적 있거든. 효과가 괜찮긴 한데 그래도 노력해야지.”서란이 이젠 배인호를 완전히 거부
마라탕 먹으며 온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기선우의 재치 있는 말로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그리고 서울시에서 가장 큰 공원인 누리공원으로 갔다. 공원에는 큰 인공 호수가 있었고 여름에는 연꽃이 만발해서 아름답고 겨울에는 얼음층으로 덮여 있었다. 얼음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이 있는데 그 앞에 멈춰서 관광객들이 빵을 으깨서 버리면 쪼아 먹었다.기선우도 빵 두 개를 사서 나에게 하나를 주었다. "누나, 새들한테 먹이로 줘보세요.""알았어." 빵을 뜯어 손으로 으깨서 호수에 던졌더니, 곧바로 새 몇 마리가 와서 쪼아먹는 모습이 아주 생기 넘쳐 보였다.빵을 먹인 후 둘이 다시 공원을 산책했다. 나는 평소에 산책은 거의 하지 않았다. 날씨가 상당히 추웠지만 너무 행복했다.마침내 우리는 가금산 산기슭에 이르렀다. 돌계단은 비교적 깨끗했다. 산 위의 눈은 산을 오르러 온 사람들에 의해 짓밟혀 거의 녹아 있었다.산을 오르는 길에 기선우는 갑자기 나에게 서란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남자를 부모님에게 소개해 주려고 집에 데리고 갔는데, 누나 남편은 아니라고 들었어요."이 말이 참 아이러니했다. 나는 잠시 멈춰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배인호가 나중에 서란을 찾으러 왔었고, 나는 그때 우연히 서란네 집에 있었어.""서란의 집에 있었다고요??" 기선우는 깜짝 놀랐다."어, 서란의 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했었어. 아주 열성적으로 한약을 지어다 주셔서 내가 가지러 갔었어." 나는 일들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기선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산을 계속 올랐다. 산 정상에 오를 때쯤에는 땀을 많이 흘려 재킷을 벗었더니 찬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가금산의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니 정말 아름다웠다. 산기슭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시는 마치 겨울왕국 같았고 맑은 햇살 아래에서 빛났다."누나, 사진 찍어 드릴게요." 기선우는 배낭을 내려놓고 뚱뚱한 오렌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이걸 들고 사진을 찍는 건 어때요?"나는 가드레일에 기대어 뚱뚱한 오렌
나는 정아의 머리를 때리며 말했다.“기회 없다고 이미 말했어. 난 너희 오빠하고 남녀 사이에 그런 감정이 없어.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둬!”정아는 머리를 잡고 불쌍하게 대답했다.“만나 보기도 전에 아무 느낌이 없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어? 지영아, 날 믿어봐. 우리 오빠 진짜 좋은 남자야. 만약 너랑 만나면서 너한테 못되게 굴거나 바람이라도 피우면 내 손에 죽을 거야! 약속할게!”박정환은 확실히 좋은 남자였다. 집안과 외모 모두 출중했고, 인품과 성격 면에서도 참으로 좋은 사람이다. 만약 감정이 억지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나도 그와 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감히 시도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만약 서로 알아간 끝에 나와 맞지 않는다고 느껴 헤어지기라도 하면 나와 정아의 사이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정아의 친오빠인 만큼, 백 퍼센트의 확신 없이는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정아야, 내 걱정은 하지 마! 난 그래도 결혼이라도 한번 해봤지만, 넌 남자친구도 없잖아! 빨리 네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고!”나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어떤 남자가 좋은데? 안정적인 남자는 어때? 내가 우리 아빠한테 알아봐 달라고 할까?”자신의 얘기를 꺼내자, 정아는 시선을 피하며 움츠러들었다.“됐어! 난 카르페 디엠이야! 결혼은 나의 자유로운 영혼을 구속할 뿐이라고.”갑자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고 나를 보며 말했다.“지영아, 나 술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적당히 마셔.”나는 어쩔 수 없이 한마디 당부했다.“알겠어!”정아는 백을 들고 서둘러 빠져나갔다.그녀가 떠나고 난 뒤 나는 위층에 올라가서 계속 물건을 정리했다. 재판이 열리기 전에 나는 청담동에서 나가고 싶었고, 행동으로 나의 결심을 보여주고 싶었다.옷과 액세서리가 너무 많아 캐리어 5개에 넣어 챙긴 뒤, 첼로와 악보를 챙기기 위해 연습실로 향했다.악보를 찾고 있다가 나는 먼지가 쌓인, 오래된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안에는 내가 작곡한
나는 아빠를 제지했다.“가지 마세요, 아빠. 제가 수년간 억울하게 당하며 살았다는 거 아시잖아요. 이제 다 내려놓았어요. 차라리 이혼하는 게 모두에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아빠가 그러시면 저희 가문에 좋지 않을 거예요. 이런 문제로 더 큰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나는 이런 일을 이미 한번 겪었기에 이성적이었다.설득 끝에 아빠는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셨고, 나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요구를 제시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만약 배인호와 서란이 들키기 전에 내가 이혼을 제기했다면 양가 부모님 모두 나를 설득하려 하셨을 것이다. 내가 이혼 소송을 하는 사실을 아직 몇 명이 모를 때 일이 밝혀진 것은 정말 하늘이 도운 것이다.통화가 끝나고 나는 고민하다가 이우범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 있어요?”이우범은 조금 걱정하는 듯했다.“시어머님이 서란을 찾아내 만난 건 알고 있어요?”“네, 알고 있어요. 인호 씨가 전화 와서 서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던데요.”나는 접시에 채소를 골라 먹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우범 씨도 내가 시어머니한테 서란의 일을 말씀드렸다고 생각해요?”이우범과 배인호는 좋은 친구이니 당연히 배인호의 편을 들 것이다. 그들 마음속에서 나는 쭉 배인호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원망스러운 여자였을 것이다.이우범은 재빨리 대답했다.“아니요. 지영 씨가 말하지 않았다는 거 알고 있어요.”나는 놀라서 물었다.“날 믿어요?”“네, 이혼하고 싶어 하잖아요? 지영 씨가 시어머니한테 말씀드리면 결국 일이 더 복잡해질 텐데요.”이우범은 대답했다.“우범 씨가 나를 믿어줄지는 몰랐네요. 고마워요.”나는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이우범은 또 물었다.나는 이미 이혼소송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니, 전화기 반대편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침대에서 뒤척이는 듯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정말이에요?”나는 웃으며 말했다.“거짓일 리가
타이틀이 꽤 많아서 다 읽기가 힘들었다. 내용을 잠깐 읽다가 댓글만 읽었다.「젠장, 우리 여대생들 창피하게 하지 말아줄래? 세컨드가 신데렐라가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하나?」「이 여자 꽤 예쁘네. 유부남 만나지 않아도 다른 돈 많은 싱글남들 만날 수 있을 듯.」「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가 미친 것처럼 나만 좋아한다면 나도 빠져들 수밖에 없을 듯. 여자는 원래 자기보다 강한 사람을 좋아하니까. (부모님 다 계시고 남친도 있고 결혼은 안 했고 바람피운 적 없습니다. 그저 인간의 어두운 면에 대해 말했을 뿐. 욕하지 마세요.)」「배인호 와이프는 누구지? 매번 스캔들 날 때마다 침묵을 지키네. 어릴 때부터 도라도 닦으셨나요?」서란을 욕하는 사람도 있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나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와 배인호의 지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나조차도 모르는 다양한 ‘비밀’을 쓴 사람도 있었다. 나는 눈이 어지러워서 결국 댓글 창을 닫았다.이번 일에 관심이 이렇게 뜨거운 줄 몰랐다.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잠잠해졌지만 아빠도 기사를 보신듯했다. 오늘은 인기 검색어에 올라 주변 지인들이 다 볼 것 같았다.어젯밤 서란이 뛰어내린 다음 배인호가 그녀를 구하려 뛰어드는 장면이 촬영되어 화제를 모았다. 역시나 친구들에게서 문자가 쏟아졌다.정아는 문자를 보냈다「젠장, 배인호 이 인간쓰레기! 세컨드 구하려고 바다에 뛰어들어!」「지영아, 이번에 이혼소송 꼭 끝까지 가. 이런 남자 갖고 뭘 하겠어?」민정이가 문자를 보냈다.「이혼소송? 난 왜 몰랐지?」세희가 잘했다고 문자를 했다.「잘했어. 바람을 저렇게 당당하게 피우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이상하다 싶었는데. 누가 배인호가 서란을 구하는 걸 타이밍 좋게 찍을 수 있어? 내가 이상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서란이 다 계획하고 생쇼 한 거 아니야?」정아는 바로 감탄하며 문자를 보냈다.「!!!! 맞아!!! 며칠 전 지영이 시어머님이 그 불여시를 만났어. 걔 이런 방법으로 지영이 시어머니한테 보여 주려는 거야. 배인호가 자
전화를 끊고 박정환에게 가려는데 서란의 친구가 내 옆을 지나가며 어깨를 일부러 세게 부딪쳤다.“거기서!”나는 도저히 참아 줄 수 없어 그녀의 팔을 잡고 차갑게 말했다.“눈이 없어? 사과해.”나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친구들이 달려와 그녀를 불렀다.“유정아!”유정은 친구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나의 손을 힘껏 쳐냈다.“아줌마, 나 왜 잡아요?”그녀는 서란과 같은 나이일 텐데 날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왜? 무슨 일이야?”유정의 친구가 물었다.“이 늙은 여자가 바로 서란을 자살하게 만든 사람이야.”유정은 직접적으로 나에게 책임을 돌렸다.그녀의 친구도 나를 보는 눈빛이 적대적으로 변했다. 나는 기가 차서 웃었다.“내가 서란을 자살하게 했다고? 잘못한 게 없으면 왜 자살하겠어? 읽은 책들은 다 개들 먹이로 줬나 봐? 예의도 윤리 의식도 없어?”“란이는 계속 당신 남편을 거절했어!”유정은 분노하며 말했다.“그쪽 남편이 계속 매달린 건데 왜 남편한테는 뭐라고 안 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쪽 부부 사이에 아무 감정 없이 그저 이익 관계라는 거 다들 알고 있어. 늙은 여자가 남편 사랑 못 받으니깐 마음이 비뚤어진 거 아니야?”멀지 않은 곳에 있던 박정환은 내가 다른 사람과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다가왔다. 그는 나의 옆에 서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유정은 박정환을 보며 잠시 놀라는 것 같았다. 저 나이 때 여자애들은 당연히 잘생긴 남자에게 쉽게 끌린다. 아까 연주할 때도 나를 보며 옆에 있는 박정환을 쳐다보았다. 사람이 모여 있는 상태였으니 그녀는 나와 박정환이 모르는 사이인 줄 알았나 보다.“두 동생이 친구를 위해 싸우고 있어요.”나는 웃으며 말했다.“그 친구는 오빠도 알 거예요. 요즘 배인호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그 여자요.”박정환은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며 불쾌한 눈빛을 하고 나의 손을 잡았다.“끼리끼리 모인다고, 이런 것들이랑 무슨 말을 해?”그의 말에 격분한 유정은 우리 앞을 막으며 당당하게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