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지나고 며칠 후 나는 퇴원하게 되었다.병원에 있는 건 확실히 지루했고, 게다가 회복도 잘 된 상태라 미리 퇴원 절차를 밟았다.이 기사님은 나를 청담동으로 데려다주었고, 집사 아주머니는 나를 위해 풍성한 점심을 준비했다. 나는 배가 터질 정도로 먹고 나니 기운이 나는 듯했다.갑자기 기선우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누나, 어떻게 된 거예요? 괜찮아요? 병원에 찾아갔는데 누나 이미 퇴원했다면서요!”“선우야, 내가 입원한 병원은 어떻게 알았어?”나는 조금 놀랐다. 왜냐하면, 내가 병원에 입원한 사실을 그 어디에도 올린 적은 없으니 말이다.기선우는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오늘 아침 라니가 알려줬어요.”내가 다친 걸 기선우한테 알려줬다고? 그러고 보니 전에 서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선우가 나를 대하는 느낌이 다른 사람 대하는 거와 다르다고 말이다. 그녀는 일부러 나랑 기선우가 썸이라도 타길 바라는 듯했다.이때 배인호한테서도 전화가 걸려 왔고, 나는 기선우한테 대충 얼버무리고 배인호의 전화를 받았다.그는 나한테 따져 물었다.“퇴원한 거 나한테 왜 말 안 했어?”“병원에 갔어요?”내가 물었다.“말이라고 하는 거야?”배인호는 몹시 화가 나 보였다.“내 시간만 낭비했잖아!”나는 당황스러웠다. 서란은 오늘 아침 배인호가 병원에 나 보러 가는 줄 미리 알고, 기선우한테 내가 입원한 사실을 알려준 거다. 내가 앞당겨 퇴원해서 다행인 거지, 그게 아니면 일부러 어색한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었을 거다.나는 서란이 이렇게까지 할 줄 몰랐다.배인호는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도 다시 전화하지는 않았다.겨울은 낮이 짧고 밤은 긴지라 오후 5시 반도 안 돼서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나는 오후 내내 잠을 자고 일어난 뒤 겉옷을 걸쳐 입고, 홀로 밖에 눈사람을 향해 걸어갔다.요즘 날씨가 눈이 매일 오는 건 아니라서 눈사람의 뚱뚱했던 몸통은 조금 사라졌고, 그 형태는 조금씩 변형이 돼 있었다.“사모님, 밖에 추운데 들어와서 몸 좀 녹여요.”
“죄송해요, 하도 이혼을 미루니까 전 인호 씨가 저를 좋아하게 된 줄 알았어요. 근데 그런 게 아니네요.”나는 차분하게 웃어 보였고, 그 어떠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했다.배인호의 차가운 얼굴에서는 그 어떠한 감정도 엿볼 수 없었고,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아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나는 담배 연기에 숨이 막혀 기침했고, 그걸 본 배인호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이런 부분은 그래도 신사적이라 생각했다.1분 정도 지난 후, 나는 배인호가 전화를 받고 서둘러 떠나는 모습을 창문으로 바라봤다.이때 내 전화도 울렸고, 정아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지영아, 뭐해? 여기 밥 먹으러 와!”그녀는 신비롭게 나한테 말했다.“여기 오면, 네가 예상치 못한 사람도 볼 수 있을 거야.”“그게 누군데?”내가 물었다.“안 알려줄 거야. 위치 보냈으니 얼른 와. 너 안 오면 집까지 찾아간다.!”정아는 신이 나서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시간을 보니 때마침 저녁 시간이었다. 나는 집사들한테 저녁은 나가서 먹을 거라고 말해줬고, 차를 운전해 나갔다.목적지에 도착해 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세희와 민정이도 함께 있었고, 더 생각지 못한 건 문 바로 맞은 편에 30대 초반인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가진, 아주 표준적인 동양형 미남이 앉아있었다.그는 다름 아닌 박정아의 친오빠, 박정환이었다.나를 본 박정환은 잠시 깜짝 놀라다가 금세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한테 인사를 건넸다.“지영아, 오랜만이네.”“정환 오빠, 한국은 언제 들어온 거예요?”나는 마음속의 어색함을 억누르고, 대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정아 옆으로 가서 앉았다.“오후에 금방 도착했어. 정아가 굳이 환영파티 한다고 해서 밥 먹으러 오게 된 거야.”박정환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그는 정아와는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를 갖고 있다.정아의 친언니 박성아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고, 그녀도 웃으며 말했다.“정아가 자리 만들고, 오늘 돈은 네가 계산해.”박정환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누가 하든 똑같지 뭐.”나
서란의 얼굴에는 당황함이 가득했다. 그 시선은 갈 곳을 잃었고, 그녀는 머리를 숙여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그녀가 앞에서 보여준 순진하고 갈팡질팡한 행동을, 그녀가 실제로 한 일에 비하면 그건 천차만별이다.배인호는 그녀의 당혹감을 느끼고는, 날 일부러 보라고 그런 것인지, 진심으로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우리 앞에서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배인호!”박정환의 목소리는 많이 불쾌한듯했다.“정환 오빠, 오빠 예전보다 더 멋있어진 거 같네요!”나는 박정환의 말을 가로채고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큰 소리로 칭찬했다.엘리베이터 가장 문 앞에 선 민정이는 빠르게 닫기 버튼을 눌렀고, 배인호의 뜨거운 시선을 뒤로하며 엘리베이터 문은 닫혔다.일부러 나 보라고 그런 거 아닌가? 그렇다면 나도 참을 수 없지.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쑥스러웠고, 박정환의 팔을 놓으며 말했다.“죄송해요, 방금 오빠 팔 좀 빌리게 됐네요.”그걸 들은 박성아가 입을 열었다.“뭐가 미안한데, 저놈 속으로 좋아서 난리였을걸?”정아도 활짝 웃었고, 그 두 자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맞아, 나 진짜 너무 행복했어.”박정환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앞으로 이런 좋은 일은 내가 책임질게.”“정환 오빠는 점점 유머러스해지네요.”나는 못 말린다는 듯 말했다.박정환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우리 일행은 호텔을 떠나 근처 노래방으로 향했다.이왕 노래하러 왔으니, 나는 마음속 스트레스를 노래로 전부 발산했다. 비록 내가 악기를 전공했지만, 발성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노래 실력이 좋다 할 수는 없지만, 어디 가서 괜찮게 부른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세희는 회사 직원들과 전에 여기서 회식한 적 있다 했으며 그때 카드를 만든 적 있다고 했다. 그 카드에는 술 두 박스를 킵한 적 있었고, 우리는 그 킵한 중에서 한 박스를 시켜 먹었다.“자, 지영아 너 우리 오빠랑 이 노래 좀 같이 해봐!”정아
서란 얘기만 하면 배인호의 성욕은 조금 사라지는 듯했다.“서란이 암만 쿨하다 해도, 걔가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한 감정 앞에서 쿨한 여자는 없어요.”나는 계속해서 그를 설득했다.“설마 걔가 슬퍼하는 걸 보고 싶어서 이래요? 만약 우리 둘이 관계를 맺었다는 걸 서란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그는 이성을 찾고 내가 한 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했다.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찰나, 그는 마치 방금 내가 한 말이 전부 헛소리였던 것 마냥 다시 나한테 키스를 했다.이런 감정 도덕도 따지지 않는 인간한테 감정적인 도리로 설득하려 했던 나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언제까지 엎치락뒤치락했는지 나는 눈을 뜨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배인호는 아직도 쌩쌩했고, 나는 졸린 상태로 말했다. “저 이제 좀 자게 해줘요. 저 퇴원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내 몸에서 움직이던 그의 큰 손은 멈춰 섰고, 그는 뒤에서 나를 껴안은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완전히 깊은 잠에 빠지기 전, 배인호가 입술로 내 어깨에 키스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격렬한 운동을 한 결과 다음 날 머리가 너무 아팠고, 배인호는 이미 방에 없었다.공기 중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냄새가 남아 있었고, 나는 더욱 머리를 움켜잡았다.'건강이 최우선'이라는 원칙에 따라, 나는 아침도 먹지 않고 재검사를 위해 이 기사님한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신기하게도 이우범이 또 내 담당 선생님이었다.“혈압 재게 소매 걷어 올리세요.”그는 나랑은 전혀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냉담하게 말했다.나는 머뭇거리다 두꺼운 겉옷을 벗었다. 하지만 목도리도 그와 동시에 같이 떨어졌고, 나는 급격히 목도리를 다시 목에 둘렀다. 하지만 이우범의 눈빛은 변해 있었고, 두 눈은 내 목을 응시하고 있었다.거기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어젯밤 배인호가 남긴 각종 흔적으로 가득했다.나는 몸에 달라붙는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상위에 팔을 얹으며 어색하게 말했다.
나는 푹 자고 일어났고, 깨어났을 때도 여전히 배인호 품속이었다.그는 아직 자고 있었고, 나는 살며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옷은 의자에 걸쳐있었고, 냄새를 맡아보니 술 냄새가 진동했다. 역시 어제저녁에 많이 마셨나 보다.이때 내 핸드폰 진동 알림이 울렸고, 또 아빠의 전화였다.나는 거실로 나가서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지영아, 인호랑 언제 올 거니? 네 엄마가 음식도 다 사다 놨고, 오늘 직접 요리한대!”아빠는 아주 많이 들떠 보였고, 사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아빠, 오늘 나랑 인호 씨 아마 못 갈 거 같아요...”아빠는 지금까지 이 정도로 사위를 기다려 본 적이 없었고, 나는 차마 이어서 말할 수 없었다.오늘 배인호는 세화 쪽에 가봐야 한다고 했고, 가끔 가서 현장도 살펴보곤 했다.내 말을 듣고 난 아빠는 역시나 불쾌해하셨다.“왜 못 온다는 거야? 너 인호한테 말하지 않은 거니? 아니면 인호가 오고 싶지 않대?”우리가 결혼한 첫해에, 우리 집에서는 집에 종종 밥 먹으러 오라고 했었고 배인호는 항상 거절해 왔다. 그는 우리 엄마, 아빠 생일이나 대명절 때만 예의상으로 방문하는 정도였다.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엄마·아빠도 그의 뜻을 알아채고 다시는 우리를 부르지 않았으며, 배인호에 대한 감정의 골도 더욱 깊어지게 된 것이다.나는 그가 회사 문제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내 핸드폰을 뺏어 갔다.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배인호가 어느새 잠에서 깬 상태로 내 핸드폰을 뺏어 들고는 우리 아빠한테 말하는 것이었다.“아버님, 저희 이따 갈 수 있습니다.”그의 이 한마디에 아빠는 만족해하며 전화를 끊었다.배인호는 핸드폰을 다시 나한테 건네주었고, 내가 멍하니 그를 보고 있자,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뭘 봐?”“오늘 세화 쪽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나는 얼른 핸드폰을 건네받으며 말했다.“오후에 가도 괜찮아.”배인호는 네이비 컬러의 라운드넥 스웨터를 입었고, 넓은 어깨 때문에 스웨터가 아주 잘 어울렸
나는 서란이 배인호가 아닌 다른 남자를 데리고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상대는 서란의 남자친구는 아니고, 그녀를 현재 쫓아다니는 남자였다.서란은 그와 함께 자리에 앉았고, 윤선은 그들에게 물을 따라 줬다. 서중석은 반대편에 앉아 유심히 그 남자를 살펴보았다. 나는 그 옆에 앉아있었고, 혼란으로 가득 찼다.한참 후 서란이 나를 향해 말했다.“지영 언니, 저 언니한테 할 말 있어요.”“그래.”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와 함께 침실로 향했다.서란은 문을 닫으며 망설임 없이 말했다.“언니, 제가 집에 데리고 온 사람이 배인호 사장님이 아니라서 언니가 놀라신 거 같더라고요. 근데 제가 사장님한테 마음은 흔들렸어도, 상간녀가 되는 건 저 스스로 용서할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배인호 사장님한테 분명하게 말했고, 진수 씨랑 만나보려고요. 이 얘기 하려고 언니 부른 거예요.”진수 씨는 바로밖에 있는 저 남자이다.“그 사람이 동의했어?”나는 서란이 배인호한테 맞서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되어 괜히 미심쩍었다. 배인호가 동의하지 않는 한 그녀는 다른 남자와 좋은 결과를 바랄 수가 없으니 말이다.“동의하든 안 하든 그건 그 사람 일이죠.”서란은 마치 결심이라도 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나는 어떤 부분이 찝찝한지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일단 서란이 집에 데려온 남자는 배인호가 아니었다.나는 침실에서 나온 후 더는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아, 저녁을 먹고 가라는 제안도 거절했다. 윤선은 지은 약을 나한테 가져다주면서 주의 사항과 복용 횟수를 알려 주었다. 서란은 옆에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엄마, 저건 뭐예요?”윤선은 얼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괜히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넌 어린애가 별걸 다 알려고 하니?”“내가 이모님한테 부탁한 약이야.”나는 오히려 공개적으로 서란한테 말했다.“나랑 인호 씨한테 애가 안 들어서서 내가 예전에 윤 이모님한테 약 좀 부탁드린 적 있거든. 효과가 괜찮긴 한데 그래도 노력해야지.”서란이 이젠 배인호를 완전히 거부
마라탕 먹으며 온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기선우의 재치 있는 말로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그리고 서울시에서 가장 큰 공원인 누리공원으로 갔다. 공원에는 큰 인공 호수가 있었고 여름에는 연꽃이 만발해서 아름답고 겨울에는 얼음층으로 덮여 있었다. 얼음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이 있는데 그 앞에 멈춰서 관광객들이 빵을 으깨서 버리면 쪼아 먹었다.기선우도 빵 두 개를 사서 나에게 하나를 주었다. "누나, 새들한테 먹이로 줘보세요.""알았어." 빵을 뜯어 손으로 으깨서 호수에 던졌더니, 곧바로 새 몇 마리가 와서 쪼아먹는 모습이 아주 생기 넘쳐 보였다.빵을 먹인 후 둘이 다시 공원을 산책했다. 나는 평소에 산책은 거의 하지 않았다. 날씨가 상당히 추웠지만 너무 행복했다.마침내 우리는 가금산 산기슭에 이르렀다. 돌계단은 비교적 깨끗했다. 산 위의 눈은 산을 오르러 온 사람들에 의해 짓밟혀 거의 녹아 있었다.산을 오르는 길에 기선우는 갑자기 나에게 서란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남자를 부모님에게 소개해 주려고 집에 데리고 갔는데, 누나 남편은 아니라고 들었어요."이 말이 참 아이러니했다. 나는 잠시 멈춰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배인호가 나중에 서란을 찾으러 왔었고, 나는 그때 우연히 서란네 집에 있었어.""서란의 집에 있었다고요??" 기선우는 깜짝 놀랐다."어, 서란의 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했었어. 아주 열성적으로 한약을 지어다 주셔서 내가 가지러 갔었어." 나는 일들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기선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산을 계속 올랐다. 산 정상에 오를 때쯤에는 땀을 많이 흘려 재킷을 벗었더니 찬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가금산의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니 정말 아름다웠다. 산기슭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시는 마치 겨울왕국 같았고 맑은 햇살 아래에서 빛났다."누나, 사진 찍어 드릴게요." 기선우는 배낭을 내려놓고 뚱뚱한 오렌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이걸 들고 사진을 찍는 건 어때요?"나는 가드레일에 기대어 뚱뚱한 오렌
나는 정아의 머리를 때리며 말했다.“기회 없다고 이미 말했어. 난 너희 오빠하고 남녀 사이에 그런 감정이 없어.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둬!”정아는 머리를 잡고 불쌍하게 대답했다.“만나 보기도 전에 아무 느낌이 없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어? 지영아, 날 믿어봐. 우리 오빠 진짜 좋은 남자야. 만약 너랑 만나면서 너한테 못되게 굴거나 바람이라도 피우면 내 손에 죽을 거야! 약속할게!”박정환은 확실히 좋은 남자였다. 집안과 외모 모두 출중했고, 인품과 성격 면에서도 참으로 좋은 사람이다. 만약 감정이 억지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나도 그와 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감히 시도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만약 서로 알아간 끝에 나와 맞지 않는다고 느껴 헤어지기라도 하면 나와 정아의 사이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정아의 친오빠인 만큼, 백 퍼센트의 확신 없이는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정아야, 내 걱정은 하지 마! 난 그래도 결혼이라도 한번 해봤지만, 넌 남자친구도 없잖아! 빨리 네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고!”나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어떤 남자가 좋은데? 안정적인 남자는 어때? 내가 우리 아빠한테 알아봐 달라고 할까?”자신의 얘기를 꺼내자, 정아는 시선을 피하며 움츠러들었다.“됐어! 난 카르페 디엠이야! 결혼은 나의 자유로운 영혼을 구속할 뿐이라고.”갑자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고 나를 보며 말했다.“지영아, 나 술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적당히 마셔.”나는 어쩔 수 없이 한마디 당부했다.“알겠어!”정아는 백을 들고 서둘러 빠져나갔다.그녀가 떠나고 난 뒤 나는 위층에 올라가서 계속 물건을 정리했다. 재판이 열리기 전에 나는 청담동에서 나가고 싶었고, 행동으로 나의 결심을 보여주고 싶었다.옷과 액세서리가 너무 많아 캐리어 5개에 넣어 챙긴 뒤, 첼로와 악보를 챙기기 위해 연습실로 향했다.악보를 찾고 있다가 나는 먼지가 쌓인, 오래된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안에는 내가 작곡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