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배인호가 손을 뻗어 이우범의 앞을 막았다. 배인호의 눈에는 폭풍이 휘몰아쳤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이우범이 차갑게 웃었다.“지영 씨 보러.”그렇게 말하며 돌아서서 나를 가리켰다. 이때 나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속으로 아까 이우범이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민설아가 돌아왔다. 그렇다면 내가 배인호와 재결합을 할 마음이 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하늘에서 나와 배인호의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안된다.“인호 씨, 우범 씨 보내줘요. 내가 이미 분명하게 말했어요.”배인호에게 말 했지만, 그는 무표정으로 내게 물었다.“뭘 분명하게 말했는데?”“내가 지영 씨를 좋아하는 건 지금도 변함이 없어. 그런 나한테 지영 씨가 분명하게 말할 게 뭐겠어?”이우범이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아마 내 연기력이 형편없어 대답을 잘 못할까 봐 그런 것 같았다.그 대답에 배인호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전에 나와 이우범이 계속 얽혀서 배인호와 나는 여러 번 싸웠었다. 결국 오늘 또다시 이우범이 내 앞에 나타났다.예전 같았으면 나는 안절부절못했겠지만 지금 난 민설아와 방금 이우범이 한 말을 생각하면 먼저 화를 내고 싶었다.결국 마지막에 상처받게 될 사람이 또 나라면 먼저 나 자신을 보호하면 안 되는 것일까?“이우범 씨, 먼저 가보세요. 내가 인호 씨한테 잘 설명하면 돼요.”나는 이우범에게 말했다. 이우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배인호도 떠나는 사람을 막지 않았다.거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제야 배인호는 내 앞에 다가오더니 아까 이우범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그의 눈빛에는 나에 대한 불만과 실망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는 현재 나의 마음이 더 짜증 나고 안 좋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긴 정적 끝에 배인호가 먼저 입을 열어 내게 물었다.“이우범은 왜 만난 거야?”“내가 집에 왔을 때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우리 엄마가 지금 나 여기서 지낸다고 알려줬대요.”나는 감정을 조절하며 차분한 표정을
“왜 그래?”배인호는 조금 당황했다.“내가 가 볼게요. 가서 씻어요.”나는 배인호에게 말했다.나의 직감적으로 밖에 있는 사람이 Snow 즉 민설아 같았다. 지난번에 달여온 약을 이미 다 먹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약을 다 먹으면 또 약을 달여 가져다줬다.나는 계속 그녀가 왜 내게 약을 더 주지 않는지 몰랐지만 지금 알 것 같기도 했다.그녀가 서란에 대해 알고 있다면 어떻게 나와 배인호 사이의 일을 모를 수 있을까. 애초에 나와 배인호의 결혼 때문에 그녀는 강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선택했다.그렇기에 그녀는 기회를 만들어 나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을 것이다.“샤워?”배인호는 왜 갑자기 자기에게 샤워하라고 하는지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네, 인호 씨 몸에서 술 냄새나요. 가서 샤워해요. 나 오늘... 배란일이에요.”나는 대충 이유를 둘러대 배인호가 빨리 나의 뜻대로 움직여 주길 바랐다.역시나 나의 말을 들은 순간 배인호의 눈빛이 변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욕망이 깃들어 있었다.“좋아. 기다리고 있어.”“깨끗이 씻어요. 옷은 꼭 입고 나와요.”나는 배인호를 욕실로 밀었다.그를 욕실로 들여보내고 나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욕실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가서 현관문을 열었다. 역시나 민설아였다. 그녀는 올블랙으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지난번처럼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대신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그녀의 눈빛은 차분하고 자연스러웠다. 아마도 내가 그녀를 누군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한약 상자를 내게 건네주었다.“지영 씨, 여기 약이요.”“네, 고마워요.”나는 약을 받았다. 하지만 전처럼 그녀에게 들어와서 앉았다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전에는 그녀를 보면 조금 궁금했지만 지금 그녀를 보니 마음속이 불편했다.“천만에요. 3일 뒤에 침 맞으러 오세요.”민설아는 웃으며 거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 테이블에 시선이 머물렀다.“오늘은 집에 손님이 계신가 봐요?”나는 고개를 돌
민설아의 과거 사건을 종합해 보면 나는 그녀가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이용해서 배인호를 저주했다. 또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리에 해외로 나갔다는 사실이 그녀는 복수심이 정말 강한 여자라는 것을 보여준다.이런 여자가 어떻게 진심으로 옛 연적을 치료해 줄 수 있을까?다음 날 아침 나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서 산부인과 검사를 받았다.하지만 정아를 마주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도 오늘 임산부 검진을 받으러 왔다.“지영아, 너 무슨 검사 하는 거야? 설마 너 임신한 건 아니지?”정아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비록 내가 지금은 대외적으로 싱글이었지만 전에 놀아봤던 정아의 눈에는 옆에 남자가 있어 보였을 것이다. 나는 부인했다.“아니야. 생리가 불규칙해서 검사 해 보려고.”“그래. 배인호 내일 약혼한다고 하는데 너 안 갈 거야?”정아가 또 물었다.“안 가. 굳이 가서 문제 일으키고 싶지 않아.”나는 고개를 저었다.옆에서 노성민이 한숨을 쉬었다.“지영 씨, 사실 인호 형은 아직도 지영 씨를 좋아해요. 정말이에요. 이건 남자의 직감인데...”“닥쳐.”정아가 팔을 들어 노성민을 때렸다. 그녀가 나와 배인호 사이를 깔끔하게 선을 그어주고 있는데 노성민은 옆에서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노성민은 억울한 듯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그는 정아를 걱정했다.“알겠어. 여보 화내지 마. 그냥 해 본 말이야. 아기 놀랄라. 의사 선생님이 3개월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잖아.’“그럼 걱정시킬 일을 만들지 마.”정아가 노성민을 째려봤다.“알겠어. 내도 더 신경 쓰지 않을게. 다 인연이 있는 거겠지.”노성민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정아는 이미 검사를 마쳤기에 그들은 먼저 돌아갔다. 나는 계속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검사 결과는 별 큰 문제가 없었다. 여전히 난임이었지만 더 심각해지진 않았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민설아가 이 상황에서 나를 더 힘들게 한다면 아마 난 미쳐버릴 것이다.시간이
예식장은 혼란스러웠다. 기자들은 마치 오늘의 ‘성대한 행사’를 기록하기 위해 미친 듯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멀리서 지켜보았다.서란은 땅에 쓰러져 울고 있었다. 놀랍게도 하미선과 진명수는 보이지 않았다. 이때 세희가 나를 찾아왔다.“왔어? 하미선하고 진명수는 지금 방에 있어. 배인호가 사람을 보내서 지키고 있거든.”“그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사람들 사이로 서란은 갑자기 무언갈 발견한 듯 일어났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지만, 눈빛에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벌떡 일어나서 나를 향해 달려왔다.다행히 배인호가 빠르게 나를 끌어 자기 뒤로 숨겼다.서란은 산발이 되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배인호, 당신 그동안 허지영과 짜고 날 속인 거야? 날 이용해서 양어머니에게 접근한 거였어? 맞아? 당신이 허지영한테 원하는 서류 가져가게 시켰지 맞지? 난 상상도 못 했어. 당신 같은 신분의 사람이 이런 비열한 방법을 쓸 줄은!”“어떤 사람을 상대하려면 그런 방법을 써야지.”배인호의 목소리에는 한치의 따뜻함도 없었다.“허허... 그래? 내가 당신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정말 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거야?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어?”서란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그녀는 자기의 운명을 느꼈는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눈빛에 분노가 가득한 모습이 미친 것처럼 보였다.나는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에 서란을 만났을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서란이 민설아를 닮아서 반한 것 아니었나?“아니, 난 너한테 흔들린 것 없어. 단지 네 외모가 한 친구와 닮았기 때문이야.”배인호의 대답은 서란에게 너무나 잔인했다. 동시에 나에게도 잔인했다.그 친구가 민설아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이제 민설아도 돌아왔으니 이 일이 끝나면 그와 민설아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닮은 아이까지. 얼마나 잘된 일인가.그때가 되면 나도 엄마의 계획대로 회사를 정리
역시 내가 진명수와 하미선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두 사람이 잡힌 뒤 한 명은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다른 한 명은 외국 국적의 신분이었기에 자세하게 어떤 처벌을 받게 하기가 어려웠다.하지만 제일 기쁜 일은 아빠가 드디어 풀려 나신 것이었다. 기선우의 죽음도 다시 수사가 재개되고 결국 서란의 짓으로 밝혀졌다.기선우는 그대 서울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란이 그와 마지막으로 만나자고 했고 그는 만나러 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기선혜는 자기 동생의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자, 서란을 죽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란은 이미 잡혀갔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녀를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기선우의 일 뿐만 아니라 서란의 떳떳하지 못한 흑역사들이 모두 유정이 내게 건넨 USB에 담겨 있었기에 모두 폭로했다. 그녀가 살아있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 죽을 것이다.“아빠!”나와 엄마는 교도소 문 앞에서 아빠가 나오시길 기다렸다. 아빠의 모습이 보이자 나는 목이 메었지만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엄마는 눈시울이 붉어 지시면서 나와 함께 앞으로 가서 아빠를 맞았다.“우리 딸, 여보...”아빠는 나와 엄마를 보시고 설렘을 감추지 못하시더니 두 팔을 벌려 우리 둘을 품에 안으셨다. 이 순간 나는 우리 가족이 다시 완전해진 것을 느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최근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아빠에게 말씀드렸다.아빠는 모두 들으신 뒤 미간을 찌푸리셨다.“지영아, 너 배인호와... 다시 합치는 거니?”엄마도 한숨을 쉬셨다.“나도 반대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억울함을 풀고 나올 수 있었던 건 배인호의 도움이 켰어요. 지영이가 귀국한 뒤에 배인호가 계속 지영이를 찾아와서 합치자고 했대요. 그래서 난 지영이 알아서 선택하라고 했어요.”“지영아, 네 마음은 어때?”아빠는 네게 물었다.그동안 나와 배인호는 계속 연락하고 있었다. 민설아가 나타난 뒤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연락이 끊기진 않았지만, 전에보다 연락하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그도 빈이가 자기
나와 부모님 명의로 된 집은 대부분 좋은 위치에 있는 부동산이었기에 빠르게 처분할 수 있었다.“지영아, 엄마하고 친구들한테 인사하러 가려고. 가서 작별 인사는 하고 와야지. 너도 같이 갈래?”떠나는 날짜가 가까워지자, 아빠는 엄마와 함께 외출하시며 내게 물었다.“아빠 난 안 갈래요.”나는 드라마를 보며 무심코 대답했다.“그래.”아빠는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엄마와 함께 나가셨다.기선혜도 오늘 부모님을 뵈러 가서 지금 난 혼자 도저와 함께 집에 있었다. 도저는 바닥에 엎드려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드라마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고 핸드폰 화면을 무심하게 보고 있었다.“멍 멍 멍.”갑자기 도저가 일어나 문을 향해 꼬리를 흔들며 신나게 짓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바로 몸을 일으켜 문밖을 살폈다.초인종이 울리자 가서 보니 배인호였다.나와 배인호는 연락은 하고 있었지만 민설아가 나타난 그날부터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이렇게 식은 것이다. 이우범의 말이 결국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그런데 그가 오늘 왜 나를 찾아온 거지?나는 문을 열었다. 굳이 그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무슨 일이에요?”나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물었다.“전에 민설아한테서 치료받았어?”배인호의 표정은 진지했다. 미간을 마치 열리지 않는 자물쇠처럼 찌푸리고 있었다.민설아가 그에게 말했나? 의사로서의 윤리 의식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고작 이 짧은 시간 사이에 배인호에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내가 난임이라는 사실을 바로 배인호에게 알리지 않은 것일까? 그랬다면 나와 배인호 사이는 더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그녀에게 더 유리했을 것이다.나는 몸을 돌려 거실에 가서 앉았다. 도저는 열정적으로 배인호에게 달려가 안겼다. 배인호도 어쩔 수 없이 쓰다듬었고 도저는 그제야 만족했다.“민설아가 내가 치료받았다는 걸 말했으면 내가 무슨 치료를 받았는지도 알려줬겠네
배인호가 떠나고 난 뒤, 나는 그가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나와 민설아 사이에서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함께했던 나를 더 아쉬워하지 않을까?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던 그의 마음이 민설아 때문에 쉽게 바뀌는 걸까?진실에 나는 실망했다. 이사하는 날 배인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이삿짐센터에서 드나들며 빌라에 있는 모든 짐을 옮겼다. 부모님은 옆에서 살피고 계셨다. 나는 도저와 함께 정원의 벤치에 앉아 눈을 감은 채 휴식했다.“이 선생님?”갑자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눈을 뜨자 정원 입구에 서 있는 이우범이 보였다. 흰색 티에 하늘색 바지를 입은 모습이 여전히 청량하고 심플한 스타일이었다.그가 왜 왔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짐들은 거의 다 옮겼기 때문에 엄마는 이우범에게 차 한 잔도 권할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셨다. 아쉬운 대로 그에게 정원 벤치에 앉으라고 한 뒤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시다 이삿짐센터의 직원이 엄마를 불렀다. 나와 이우범 둘만 남았다.햇빛 아래에서 조금 더워 얼굴에 땀이 살짝 흘렀다. 이우범은 티슈를 내게 건넸다.“얼굴에 땀 닦아요.”나는 티슈를 건네받은 뒤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닦았다.“왜 왔어요?”“회사까지 넘기고 이사할 줄은 몰랐어요. 가족 모두 함께 여기를 떠나는 거예요?”이우범은 아무런 감정도 티 내지 않은 채 차분하게 내게 물었다.“네, 우리 가족 일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두니 감동이네요.”아마도 내가 떠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인지, 엄마가 더 이상 이우범을 만나라고 강요하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인지 그에 대한 나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이렇게 큰일인데 당연히 신경 써야죠. 신경 쓸 시간이 없으면 모를 거예요.”이우범은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침묵했다. 맞다, 신경 쓸 시간이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 것이다. 배인호는 요즘 민설아를 챙겨주느라 우리 집 일에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유일하게 나를 찾아온 것도 민설아에게서 내가 난임이라는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지금 짐 옮기고 있어. 조금 있다가 주소 보내줄게.”나는 창밖을 한 번 바라보았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아직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듯했다.“알겠어. 나 먼저 잘게. 주소 보내주는 거 잊지 마.”정아는 내게 굿나잇 인사를 했다.전화를 끊고 나는 나에 관한 기사를 검색했다. 역시 난임에 관한 기사가 떴다. 그리고 나와 배인호가 원래 재결합 하려고 했지만 그 문제 때문에 내가 차였다는 기사도 있었다. 마침 민설아가 돌아왔고 나는 비참하게 버림받았다는 내용이었다.이런 과장된 기사들을 보면 나는 그저 웃겼다. 하지만 또 맞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지영아, 거의 끝났어. 방으로 가서 쉬렴.”엄마가 차창으로 다가와서 내게 말씀하셨다.“네, 금방 갈게요.”나는 대답하며 차에서 내리려다가 다시 멈췄다. 그리고 핸드폰에 있는 배인호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했다. 그리고 이우범도 차단했다.찰나 온 세상이 다 깨끗해진 느낌이었다. 이제부터 여기서 남은 인생을 평화롭게 살아갈 것이다.주택은 꽤 괜찮았다. 방들은 한옥 느낌이 났다. 나는 샤워를 한 뒤 자려고 주웠다. 이때 예상 밖으로 냥이에게서 전화가 왔다.냥이의 소식은 오랫동안 듣지 못했다. 마치 나와 배인호의 세상에 갑자기 나타나더니 또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나는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았다. 그때는 배인호에게 기회를 주기로 계획했다. 우리가 재결합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배인호가 굳이 냥이를 만날 필요가 있었을까?발신자 번호를 바라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지영 언니, 배인호하고 다시 합치는 거 아니었어요?”냥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그리고 조금 놀란 것 같았다.“응, 합치지 않았어. 너는? 오랫동안 네 소식을 못 들은 것 같아.”내가 물었다.“아빠 건강이 좀 안 좋아 지셔서요. 뭐 다 나 때문이죠. 그동안 얌전히 아빠 옆에 있었어요. 그리고 선도 보고요. 짜증 나지만 어쩔 수 없죠.”냥이는 말을 마친 뒤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