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처음부터 Snow에 대해 조사하려고 생각은 했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를 이우범 입에서 들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그녀의 정체는 바로 민설아였다. 그 죽은 지 몇 년 되었다는 민설아! 나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왜요? 받아들이기 힘들어요?”이우범이 나를 향해 물었다.“전에 죽었다 하지 않았어요?”내가 되물었다.“아니요. 서란이 이식받은 그 심장, 민설아 심장 아니에요. 몇 년 동안 민설아는 계속 해외에 있었고요.”이우범이 흥미진진하게 말했다.“내가 이 일에 대해 알게 된 것도 하미선과 서란 때문에 알게 된 거예요. 전에 나한테 민설아가 임신한 사실에 대해 찾아봐달라고 부탁했었는데, 나도 이렇게 찾아낼 줄은 몰랐네요.”알고 보니 전에 민설아가 임신한 그 자료들은 이우범이 찾은 거였다. 그때 당시 이우범과 서란은 확실히 같은 배에 탄 사람이었다. 진짜 단지 나와 배인호에 복수하기 위해서였을까?이 순간의 내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이게 괴로운 건지 의외인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 내 머릿속은 아무 생각도 없이 텅 빈 상태였다.“근데…다시 돌아온 건 어떻게 알았어요?”한참 뒤에야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지영 씨가 Snow에 대해 찾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나도 찾아봤죠. 나와 민설아는 예전부터 아는 사이라, 미간만 봐도 전 알아볼 수 있거든요.”이우범은 느릿느릿 나에게 답했다. 인터넷에서 그렇게 흐릿한 사진 몇 장을 가지고도 민설아인걸 알아채다니…지난번 민설아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배인호는 소파에 앉아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도 알아보지 못했었다. 비록 그녀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한 사람의 목소리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배인호가 일부러 모른 척한 건지 아니면 못 알아본 건지는 나도 잘 모른다. 게다가 다들 민설아가 죽었다고 믿고 있기에, 배인호도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한 것 같았다. 기껏해야 민설아와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서.”배인호가 손을 뻗어 이우범의 앞을 막았다. 배인호의 눈에는 폭풍이 휘몰아쳤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이우범이 차갑게 웃었다.“지영 씨 보러.”그렇게 말하며 돌아서서 나를 가리켰다. 이때 나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속으로 아까 이우범이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민설아가 돌아왔다. 그렇다면 내가 배인호와 재결합을 할 마음이 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하늘에서 나와 배인호의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안된다.“인호 씨, 우범 씨 보내줘요. 내가 이미 분명하게 말했어요.”배인호에게 말 했지만, 그는 무표정으로 내게 물었다.“뭘 분명하게 말했는데?”“내가 지영 씨를 좋아하는 건 지금도 변함이 없어. 그런 나한테 지영 씨가 분명하게 말할 게 뭐겠어?”이우범이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아마 내 연기력이 형편없어 대답을 잘 못할까 봐 그런 것 같았다.그 대답에 배인호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전에 나와 이우범이 계속 얽혀서 배인호와 나는 여러 번 싸웠었다. 결국 오늘 또다시 이우범이 내 앞에 나타났다.예전 같았으면 나는 안절부절못했겠지만 지금 난 민설아와 방금 이우범이 한 말을 생각하면 먼저 화를 내고 싶었다.결국 마지막에 상처받게 될 사람이 또 나라면 먼저 나 자신을 보호하면 안 되는 것일까?“이우범 씨, 먼저 가보세요. 내가 인호 씨한테 잘 설명하면 돼요.”나는 이우범에게 말했다. 이우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배인호도 떠나는 사람을 막지 않았다.거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제야 배인호는 내 앞에 다가오더니 아까 이우범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그의 눈빛에는 나에 대한 불만과 실망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는 현재 나의 마음이 더 짜증 나고 안 좋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긴 정적 끝에 배인호가 먼저 입을 열어 내게 물었다.“이우범은 왜 만난 거야?”“내가 집에 왔을 때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우리 엄마가 지금 나 여기서 지낸다고 알려줬대요.”나는 감정을 조절하며 차분한 표정을
“왜 그래?”배인호는 조금 당황했다.“내가 가 볼게요. 가서 씻어요.”나는 배인호에게 말했다.나의 직감적으로 밖에 있는 사람이 Snow 즉 민설아 같았다. 지난번에 달여온 약을 이미 다 먹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약을 다 먹으면 또 약을 달여 가져다줬다.나는 계속 그녀가 왜 내게 약을 더 주지 않는지 몰랐지만 지금 알 것 같기도 했다.그녀가 서란에 대해 알고 있다면 어떻게 나와 배인호 사이의 일을 모를 수 있을까. 애초에 나와 배인호의 결혼 때문에 그녀는 강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선택했다.그렇기에 그녀는 기회를 만들어 나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을 것이다.“샤워?”배인호는 왜 갑자기 자기에게 샤워하라고 하는지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네, 인호 씨 몸에서 술 냄새나요. 가서 샤워해요. 나 오늘... 배란일이에요.”나는 대충 이유를 둘러대 배인호가 빨리 나의 뜻대로 움직여 주길 바랐다.역시나 나의 말을 들은 순간 배인호의 눈빛이 변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욕망이 깃들어 있었다.“좋아. 기다리고 있어.”“깨끗이 씻어요. 옷은 꼭 입고 나와요.”나는 배인호를 욕실로 밀었다.그를 욕실로 들여보내고 나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욕실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가서 현관문을 열었다. 역시나 민설아였다. 그녀는 올블랙으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지난번처럼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대신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그녀의 눈빛은 차분하고 자연스러웠다. 아마도 내가 그녀를 누군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한약 상자를 내게 건네주었다.“지영 씨, 여기 약이요.”“네, 고마워요.”나는 약을 받았다. 하지만 전처럼 그녀에게 들어와서 앉았다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전에는 그녀를 보면 조금 궁금했지만 지금 그녀를 보니 마음속이 불편했다.“천만에요. 3일 뒤에 침 맞으러 오세요.”민설아는 웃으며 거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 테이블에 시선이 머물렀다.“오늘은 집에 손님이 계신가 봐요?”나는 고개를 돌
민설아의 과거 사건을 종합해 보면 나는 그녀가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이용해서 배인호를 저주했다. 또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리에 해외로 나갔다는 사실이 그녀는 복수심이 정말 강한 여자라는 것을 보여준다.이런 여자가 어떻게 진심으로 옛 연적을 치료해 줄 수 있을까?다음 날 아침 나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서 산부인과 검사를 받았다.하지만 정아를 마주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도 오늘 임산부 검진을 받으러 왔다.“지영아, 너 무슨 검사 하는 거야? 설마 너 임신한 건 아니지?”정아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비록 내가 지금은 대외적으로 싱글이었지만 전에 놀아봤던 정아의 눈에는 옆에 남자가 있어 보였을 것이다. 나는 부인했다.“아니야. 생리가 불규칙해서 검사 해 보려고.”“그래. 배인호 내일 약혼한다고 하는데 너 안 갈 거야?”정아가 또 물었다.“안 가. 굳이 가서 문제 일으키고 싶지 않아.”나는 고개를 저었다.옆에서 노성민이 한숨을 쉬었다.“지영 씨, 사실 인호 형은 아직도 지영 씨를 좋아해요. 정말이에요. 이건 남자의 직감인데...”“닥쳐.”정아가 팔을 들어 노성민을 때렸다. 그녀가 나와 배인호 사이를 깔끔하게 선을 그어주고 있는데 노성민은 옆에서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노성민은 억울한 듯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그는 정아를 걱정했다.“알겠어. 여보 화내지 마. 그냥 해 본 말이야. 아기 놀랄라. 의사 선생님이 3개월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잖아.’“그럼 걱정시킬 일을 만들지 마.”정아가 노성민을 째려봤다.“알겠어. 내도 더 신경 쓰지 않을게. 다 인연이 있는 거겠지.”노성민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정아는 이미 검사를 마쳤기에 그들은 먼저 돌아갔다. 나는 계속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검사 결과는 별 큰 문제가 없었다. 여전히 난임이었지만 더 심각해지진 않았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민설아가 이 상황에서 나를 더 힘들게 한다면 아마 난 미쳐버릴 것이다.시간이
예식장은 혼란스러웠다. 기자들은 마치 오늘의 ‘성대한 행사’를 기록하기 위해 미친 듯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멀리서 지켜보았다.서란은 땅에 쓰러져 울고 있었다. 놀랍게도 하미선과 진명수는 보이지 않았다. 이때 세희가 나를 찾아왔다.“왔어? 하미선하고 진명수는 지금 방에 있어. 배인호가 사람을 보내서 지키고 있거든.”“그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사람들 사이로 서란은 갑자기 무언갈 발견한 듯 일어났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지만, 눈빛에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벌떡 일어나서 나를 향해 달려왔다.다행히 배인호가 빠르게 나를 끌어 자기 뒤로 숨겼다.서란은 산발이 되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배인호, 당신 그동안 허지영과 짜고 날 속인 거야? 날 이용해서 양어머니에게 접근한 거였어? 맞아? 당신이 허지영한테 원하는 서류 가져가게 시켰지 맞지? 난 상상도 못 했어. 당신 같은 신분의 사람이 이런 비열한 방법을 쓸 줄은!”“어떤 사람을 상대하려면 그런 방법을 써야지.”배인호의 목소리에는 한치의 따뜻함도 없었다.“허허... 그래? 내가 당신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정말 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거야?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어?”서란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그녀는 자기의 운명을 느꼈는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눈빛에 분노가 가득한 모습이 미친 것처럼 보였다.나는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에 서란을 만났을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서란이 민설아를 닮아서 반한 것 아니었나?“아니, 난 너한테 흔들린 것 없어. 단지 네 외모가 한 친구와 닮았기 때문이야.”배인호의 대답은 서란에게 너무나 잔인했다. 동시에 나에게도 잔인했다.그 친구가 민설아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이제 민설아도 돌아왔으니 이 일이 끝나면 그와 민설아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닮은 아이까지. 얼마나 잘된 일인가.그때가 되면 나도 엄마의 계획대로 회사를 정리
역시 내가 진명수와 하미선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두 사람이 잡힌 뒤 한 명은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다른 한 명은 외국 국적의 신분이었기에 자세하게 어떤 처벌을 받게 하기가 어려웠다.하지만 제일 기쁜 일은 아빠가 드디어 풀려 나신 것이었다. 기선우의 죽음도 다시 수사가 재개되고 결국 서란의 짓으로 밝혀졌다.기선우는 그대 서울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란이 그와 마지막으로 만나자고 했고 그는 만나러 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기선혜는 자기 동생의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자, 서란을 죽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란은 이미 잡혀갔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녀를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기선우의 일 뿐만 아니라 서란의 떳떳하지 못한 흑역사들이 모두 유정이 내게 건넨 USB에 담겨 있었기에 모두 폭로했다. 그녀가 살아있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 죽을 것이다.“아빠!”나와 엄마는 교도소 문 앞에서 아빠가 나오시길 기다렸다. 아빠의 모습이 보이자 나는 목이 메었지만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엄마는 눈시울이 붉어 지시면서 나와 함께 앞으로 가서 아빠를 맞았다.“우리 딸, 여보...”아빠는 나와 엄마를 보시고 설렘을 감추지 못하시더니 두 팔을 벌려 우리 둘을 품에 안으셨다. 이 순간 나는 우리 가족이 다시 완전해진 것을 느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최근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아빠에게 말씀드렸다.아빠는 모두 들으신 뒤 미간을 찌푸리셨다.“지영아, 너 배인호와... 다시 합치는 거니?”엄마도 한숨을 쉬셨다.“나도 반대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억울함을 풀고 나올 수 있었던 건 배인호의 도움이 켰어요. 지영이가 귀국한 뒤에 배인호가 계속 지영이를 찾아와서 합치자고 했대요. 그래서 난 지영이 알아서 선택하라고 했어요.”“지영아, 네 마음은 어때?”아빠는 네게 물었다.그동안 나와 배인호는 계속 연락하고 있었다. 민설아가 나타난 뒤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연락이 끊기진 않았지만, 전에보다 연락하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그도 빈이가 자기
나와 부모님 명의로 된 집은 대부분 좋은 위치에 있는 부동산이었기에 빠르게 처분할 수 있었다.“지영아, 엄마하고 친구들한테 인사하러 가려고. 가서 작별 인사는 하고 와야지. 너도 같이 갈래?”떠나는 날짜가 가까워지자, 아빠는 엄마와 함께 외출하시며 내게 물었다.“아빠 난 안 갈래요.”나는 드라마를 보며 무심코 대답했다.“그래.”아빠는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엄마와 함께 나가셨다.기선혜도 오늘 부모님을 뵈러 가서 지금 난 혼자 도저와 함께 집에 있었다. 도저는 바닥에 엎드려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드라마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고 핸드폰 화면을 무심하게 보고 있었다.“멍 멍 멍.”갑자기 도저가 일어나 문을 향해 꼬리를 흔들며 신나게 짓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바로 몸을 일으켜 문밖을 살폈다.초인종이 울리자 가서 보니 배인호였다.나와 배인호는 연락은 하고 있었지만 민설아가 나타난 그날부터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이렇게 식은 것이다. 이우범의 말이 결국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그런데 그가 오늘 왜 나를 찾아온 거지?나는 문을 열었다. 굳이 그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무슨 일이에요?”나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물었다.“전에 민설아한테서 치료받았어?”배인호의 표정은 진지했다. 미간을 마치 열리지 않는 자물쇠처럼 찌푸리고 있었다.민설아가 그에게 말했나? 의사로서의 윤리 의식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고작 이 짧은 시간 사이에 배인호에게 말했다.하지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내가 난임이라는 사실을 바로 배인호에게 알리지 않은 것일까? 그랬다면 나와 배인호 사이는 더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그녀에게 더 유리했을 것이다.나는 몸을 돌려 거실에 가서 앉았다. 도저는 열정적으로 배인호에게 달려가 안겼다. 배인호도 어쩔 수 없이 쓰다듬었고 도저는 그제야 만족했다.“민설아가 내가 치료받았다는 걸 말했으면 내가 무슨 치료를 받았는지도 알려줬겠네
배인호가 떠나고 난 뒤, 나는 그가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나와 민설아 사이에서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함께했던 나를 더 아쉬워하지 않을까?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던 그의 마음이 민설아 때문에 쉽게 바뀌는 걸까?진실에 나는 실망했다. 이사하는 날 배인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이삿짐센터에서 드나들며 빌라에 있는 모든 짐을 옮겼다. 부모님은 옆에서 살피고 계셨다. 나는 도저와 함께 정원의 벤치에 앉아 눈을 감은 채 휴식했다.“이 선생님?”갑자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눈을 뜨자 정원 입구에 서 있는 이우범이 보였다. 흰색 티에 하늘색 바지를 입은 모습이 여전히 청량하고 심플한 스타일이었다.그가 왜 왔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짐들은 거의 다 옮겼기 때문에 엄마는 이우범에게 차 한 잔도 권할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셨다. 아쉬운 대로 그에게 정원 벤치에 앉으라고 한 뒤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시다 이삿짐센터의 직원이 엄마를 불렀다. 나와 이우범 둘만 남았다.햇빛 아래에서 조금 더워 얼굴에 땀이 살짝 흘렀다. 이우범은 티슈를 내게 건넸다.“얼굴에 땀 닦아요.”나는 티슈를 건네받은 뒤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닦았다.“왜 왔어요?”“회사까지 넘기고 이사할 줄은 몰랐어요. 가족 모두 함께 여기를 떠나는 거예요?”이우범은 아무런 감정도 티 내지 않은 채 차분하게 내게 물었다.“네, 우리 가족 일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두니 감동이네요.”아마도 내가 떠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인지, 엄마가 더 이상 이우범을 만나라고 강요하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인지 그에 대한 나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이렇게 큰일인데 당연히 신경 써야죠. 신경 쓸 시간이 없으면 모를 거예요.”이우범은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침묵했다. 맞다, 신경 쓸 시간이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 것이다. 배인호는 요즘 민설아를 챙겨주느라 우리 집 일에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유일하게 나를 찾아온 것도 민설아에게서 내가 난임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