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너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한평생 나 보지 않을 예정이야?”배인호는 원망 섞인 말투로 마치 내가 그에게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나는 머뭇거리며 답했다.“그런 건 아니에요. 며칠 전 제가 인호 씨에게 미도 그룹 자료 보냈잖아요?”배인호는 내 대답에 말문이 막힌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도 말이 없어 나는 그가 전화를 끊은 줄 알았다.“너 지금 세상 무서운 거 없지? ”배인호는 이를 갈며 말했다.“또 한 달이 지났어. 너 내가 다친 거 뻔히 알면서도 한 달 동안 미도 그룹 자료 보낸 것 외에 다른 말 한 적 있어? 심지어 내가 괜찮아졌는지도 관심 없고 말이야.”그 말은 되게 낯설게 느껴졌다. 배인호가 지금 내가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고 화를 내다니?이런 상황은 나에게 있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그의 말투에서 내 과거의 모습이 보였으니 말이다.그의 말에 대답하려던 찰나, 전화기 너머로 서란의 소리가 들려왔다.“인호 씨, 저와 밥 먹으러 간다면서요? 안가도 뭐해요? 나 배고파요!”그녀의 청량한 목소리와 애교 섞인 말투에서 그 둘의 친밀한 관계가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분명히 이 모든 게 계획된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 씁쓸함은 감출 수 없었다.배인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내가 혹여나 그들의 대화를 듣고 기분이 나빠질까 봐 끊은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전화를 한 게 들켜 전화를 끊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여 내가 배인호를 탓할 명분 또한 없다. 이 모든 게 내가 선택한 계획이니 말이다.나는 혼란스러움을 뒤로하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업무에만 집중했고, 어떻게 하면 하미선의 금고에서 진명수의 그 파일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지만 생각했다.퇴근 시간까지도 나의 기분은 여전히 다운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는 내 찌푸린 얼굴이 비쳤고, 나는 손을 들어 미간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고, 그제야
배인호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왜? 점심 준비하고 있는데.”“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여기서 멈춰요!”나는 다시 입을 열어 그를 제지했다. 나는 그가 유하가든에서 하마터면 우리 집 주방을 태울 뻔한 일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하여 나는 그가 여기 집 주방도 또 태울까 봐 겁이 났다.배인호는 손에 식칼을 들고 있었고, 그의 건장한 몸매는 우리 집의 그 작은 주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내 앞치마까지 입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에게는 작은 사이즈라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자, 얼른 나와요.”나는 그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배인호는 영문도 모른 채 주방에서 나왔고, 나는 그 손에 들고 있던 식칼을 얼른 뺏었다.“인호 씨 마음만 받을게요. 전 여기 주방까지 태우고 싶지 않거든요. 요리에 재능이 없으면 더 이상 무리하지 마세요. 당신은 요리랑은 거리가 멀고도 머니깐요.”나의 말에 배인호는 전에 주방을 태웠던 일이 떠오른 듯했고, 그 표정은 미세하게 굳어졌다. 배인호는 능력적으로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고, 모든 일도 척척 해결할 수 있는데 요리가 그의 유일한 흠이었다.그는 굳은 얼굴로 한마디 내뱉었다.“그럼 너 이제 임신하면 어떡할 건데?”나는 어이가 없어 그를 바라봤다.“여자가 임신하면 남편이 밥해주는 거 좋아한다던데? 먹고 싶은 거도 마음껏 해주고 말이야.”배인호의 그 진지한 태도에 나는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대체 그런 내용은 어디서 본 거죠?”배인호가 담담하게 답했다.“노성민이 보내준 거야.”“...”나는 말문이 막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앞으로 와이프가 임신했다 해서 모든 걸 다 직접 할 필요는 없어요. 인호 씨 그 많은 돈 벌어서 죽을 때 갖고 가려고 그래요?”나는 이젠 남자를 조련하는 데 꽤 능숙했다.배인호는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조목조목 말을 이어 나갔다.“그래도 직접 하는 음식은 정성과 사랑이 깃든 거라 그런 거랑은 차원이 달라. 임산부가 정
나는 굳이 서란과 마주하여 기분을 잡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서란 씨, 이제 가보셔도 돼요.”Snow는 서란을 향해 말했고, 그녀의 말투는 왠지 모르게 차갑고 날카로워 보였다.서란은 옆에 내가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Snow에게 애원하며 말했다.“선생님, 저 진짜 다른 치료 방법은 없나요? 저 돈 많아요. 선생님 실력 좋다면서요? 저 잘만 치료해 주시면, 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그 말에 Snow는 서란에게 되물었다.“그 돈은 어디서 난 거예요?”서란은 멈칫하더니 곧바로 답했다.“제 엄마, 아빠가 돈이 많아요. 제가 앞으로 임신해서 애를 낳을 수만 있게 해준다면 원하시는 금액 제가 다 드릴 수 있어요!”서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Snow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섞여 있었지만, 그 또한 아주 차가웠다.“안타깝네요. 만약 반드시 아이를 낳겠다면 죽는 방법밖에 없어요. 선택해요.”서란은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지라 몸 상태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도 나랑 똑같이 아이를 낳고 싶어 했다.그에 비하면 내 상황은 오히려 그렇게 심각한 건 아녔다. 어쨌든 난 내 생명만은 지킬 수 있으니 말이다.그 순간 내 기분은 갑자기 좋아졌다. 나는 내가 아이를 잃었을 때 서란의 그 의기양양했던 모습이 떠올랐고, 이건 하늘이 그녀에게 내린 벌인 듯했다.“당신 지금 나 속이는 거지? 당신은 그냥 돌팔이야!”서란은 눈물을 흘리더니 갑자기 분노에 차올라서는 Snow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애초부터 다른 사람들 말을 믿는 게 아니었어. 그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니 별거 아니네. 당신 기다려. 나 반드시 아이 가지고 말 거야. 그리고 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하게 다시 나타날 거라고!”말을 마친 서란은 가방을 들고 화를 내며 그 자리를 떠났다.Snow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허지영 씨 왔어요?”“제 성이 허 씨인 건 어떻게 아셨
“그건 뭔 약이야?”배인호의 시선은 내 손에 든 한약을 향했다.“어디가 안 좋아?”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답했다.“몸 관리하는 약이에요. 조금 전 그 분은 제 담당 의사고요. 인호 씨 지금 실수한 거예요.”배인호는 내 손에 한약을 덥석 가져가 냄새를 맡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어디 병원 의사야?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약도 보내주고 말이야?”“해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근무 중인 병원이 없어요. 아니면 인호 씨가 나 대신 저분 자료 좀 확인해 주면 안 돼요??”나는 전부터 Snow 신분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다. 하여 그 의구심은 아직도 조금은 있는 상태였고, 배인호가 나 대신 그녀를 조사해주면 어느 정도 수확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가 나의 몸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니,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거도 정상이다. 배인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허지영, 너 미쳤어? 어디 족보도 없는 사람을 찾아 몸 관리를 한다고? 네가 네 명을 재촉하는구나?”만약 정아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나도 Snow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배인호에게 더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줄 수 없어, 묵묵히 한약 봉지를 다시 가져갔다.“조사해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하지, 왜 남의 결정까지 간섭하고 그래요.”나는 한약 봉지를 챙긴 뒤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빨리 가자. 오늘 청담동에 가서 도저 데려온다고 했잖아?”나의 말투에는 짜증이 살짝 섞여 있었지만, 배인호는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는지, 웃어 보이며 내 허리를 팔로 감쌌다.“지금은 왜 그렇게 화를 자주 내는 거야? 쩍하면 내게 화내고 말이야. 그러면 난 어떡하란 거야?” “뭘 어떡해요. 이런 일 처리하는 데 능숙하잖아요?”나는 무표정으로 답했다. 전에 배인호는 아무리 많은 스캔들이 터져도, 그녀들의 입단속 하나만은 제대로 했기에, 그 누가 감히 나와서 뭐라고 번복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예전 일만 언급하면 배인호는 아주 쩔쩔맸다.“그래그래,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해. 전에 그 여자애들은
배인호는 내 눈빛 따위는 외면한 채 거실로 들어갔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가 조금 전 그 남자애를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비록 조금 전 내 말에 부인하긴 했지만, 이젠 다 큰 성인으로서 조금의 의심은 들것이다.“네, 도저 데리러 왔어요. 아주머니, 저 기사님 좀 불러 줄 수 있을까요?”나는 여기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배인호의 지금 상태를 보아하니, 나를 집까지 데려다줄 것도 같지 않았다.“점심이라도 먹고 가. 점심 먹고 인호더러 너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할게.”배인호 어머니는 내 손을 잡으며 나를 거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밖에 날씨는 무척 뜨거운데 거실은 아주 시원했다. 배인호는 손에 물 한 잔을 든 채 소파에 앉아, 마치 생각에 빠진 듯했다.나는 그 옆에 앉아 말이 없는 그를 바라보았다.그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와 눈빛을 마주했다. 그의 눈에는 한줄기 냉기가 스쳐 지났다.“아직도 나 의심하는 거야?”“아니요. 지금은 오히려 인호 씨가 혼자서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내가 담담하게 답했다.우리가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는 배인호 어머니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왜? 뭘 의심한다는 거야?”나는 머리를 저었다.“별거 아니에요. 그냥 업무상의 일이에요.”배인호는 굳이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고 그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나에게 말했다.“Snow에 대해서 내가 제대로 조사할 거니까, 그때 되면 모든 걸 다 알 수 있겠지.”그 남자애가 자기 애가 아니란 걸 밝히기 위해 그는 snow를 제대로 조사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결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처음부터 Snow에 대해 궁금했는데, 배인호가 기껏 나서준다면 나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다.배인호 어머니는 더는 묻지 않고, 그 공간을 나와 배인호에게 남겨줬다. 그러고는 주방에 들어가서 나를 위한 점심상을 준비했다.“진명수가 우리를 의심하기 시작했을 거야.”갑자기 배인호가 건넨 그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가능한 한 빨리 파일을 손에 넣어야 해.”
내 말에 배인호 어머니는 당황해하며 내 손을 끌어당겼다.“지영아, 인호 그거 나쁜 새끼야. 걔는 아직도 세상에서 누가 자기랑 가장 어울리는지를 몰라. 너 인호한테 조금만 더 시간 주면 안될까?”“아주머니, 저 말고도 인호 씨 좋다는 여자들 많아요. 그러니 너무 안 그러셔도 돼요.”나는 살며시 배인호 어머니의 손을 풀며 말했다.“아주머니, 만약 기사님을 부르기 어려우시면, 저 그냥 이 기사님한테 연락해 볼게요.”“아니야, 잠깐 기다려봐.”나의 강경한 태도에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뒤, 기사님에게 연락했다.나는 도저를 데리고 차에 탄 뒤,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났다. 집에 도착 후, 나는 도저에게 먹이를 주고는 다시 업무에 열중하며, 미도 그룹과 샤인 코스메틱의 파일을 찾아봤다.배인호와 서란의 약혼식에 이 파일의 정리 결과와 하미선 금고의 그 자료들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해 버릴 예정이다.얼마 후, 배인호와 서란의 약혼 소식이 들려왔다. 모두 그들의 변덕스러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하지만 서란 쪽 언론에서는 그 변덕스러움을 두 사람이 역경 속에서 마침내 서로에 대한 진심을 알았다고 수정했다.나는 이미 배인호와 계획한 일인지라 그 소식에 무덤덤했다. 하지만 오히려 친구들이 더 난리였다.“지영아, 배인호가 앞으로 너 다시 찾아오면 그냥 발로 뻥 차버려!”얼마 전에 둘째를 금방 가진 정아는 감정이 더 격해졌다. 나는 얼른 그녀더러 진정 좀 하라고 말렸다.“배인호 진짜 쓰레기다? 서란년이랑 그렇게 자주 얽히더니 결국은 이 사고를 내네!”곧 출산예정일이 다가온 임산부 민정이도 똑같게 화를 내며 말했다.나는 그녀들 몸에 혹시 뭔 문제라도 생길까 봐, 얼른 그녀들을 진정시켰다.그녀들을 진정시키고, 계속 업무를 보려고 하던 찰나, 비서가 들어왔다.“대표님, 서란 씨 왔어요. 대표님과 뵙고 싶다는데요.”요즘 서란은 감정적으로 굉장히 여유로운 상태라 더는 나에게 찾아와 존재감을 찾지 않았다. 그러다 지금 오늘 갑자기 나를 찾아온 이유
나는 Snow가 나와 배인호의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녀의 질문을 들어보니, 우리 사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적지 않은 듯했다.“시간이 오래됐으니, 놓아줄 수 있는 거죠.”나는 차분히 답했고, Snow는 그 말에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에 저도 공감하는 바에요. 긴 시간 동안 감정 소모를 했으면 그래도 쉽게 놓아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짧은 시간의 감정이 더 놓아주기 어려운 것 같고요.”그녀의 이런 사고회로가 나는 살짝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짧은 시간의 감정이 오히려 놓아주기 더 어렵다고? 이게 맞는 건가?긴 시간을 들인 감정이 오히려 더 놓아주기 어려운 것 아닌가?가끔 Snow의 생각은 나와 많이 달랐고, 그런 그녀의 사고회로에 나는 이해가 가지 않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게다가 배인호와 내 사이의 일은 그녀에게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아예 화제를 돌렸다.“아드님은 지금 어디 있어요?” “게임 하고 있을 거예요.. 요즘 다닐 학교를 찾는 중인데 어디가 좋은지 모르겠네요. 일단은 여름방학 기간이니 맘껏 쉬라고 하죠. 뭐.”Snow는 나에게 자기 아들에 관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매번 내가 아들에 관해 질문을 하면 아주 자세하게 답해줬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녀 아들의 이름이 뭔지는 알려주지 않았고, 그냥 “빈이”라고만 했다. 빈이의 한국어 실력은 좋지 못했고, 그냥 간단한 대화만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성격은 가끔은 밝고, 가끔은 사람을 상대조차 하기 싫어했다. 그리고 평소의 취미는 게임인 듯 했다. 내가 매번 치료받으러 올 때마다 게임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애가 배인호와 무척 닮은 걸 알기에 나는 그 애에게 가까이하여 찬찬히 보고 싶었지만,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아 볼 수가 없었다. “애 아빠는 찾았어요?”내가 이어서 물었다.“아직이요. 애 아빠랑 좋지 않게 끝나서 아마 다시 화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Snow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 보니 지
Snow는 의사인 데다 능력도 뛰어난 거로 알고 있는데 왜 자기 아들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은 걸까? 아들의 건강에 대해서는 관리를 하지 않는 건가?나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았다.빈이의 기대가 가득한 눈빛에 나는 마음이 약해져 하마터면 그의 말에 동의할 뻔했다..하지만 Snow가 나에게 부탁하고 갔으니, 일단은 약해진 마음을 다시 되잡았다. 괜히 다른 사람의 애를 데리고 나갔다가 일이라도 생기면 그 모든 책임의 화살은 나 자신을 향할 것이니 말이다.나는 그런 상황까지는 가고 싶지 않아 빈이에게 말했다.“다음에 같이 가자. 마미가 다음에 동의하면 아줌마가 빈이 데리고 놀러 나갈게. 어때?”나는 부드럽게 물었다.“싫어!!”빈이는 화가 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터뜨렸다.“다 거짓말쟁이야. 다 나가!”말이 끝나기 바쁘게 빈이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있는 힘껏 방문을 닫았다. 그 자리에 혼자 남겨진 나는 초조함과 의문을 가지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렇게 나는 한 시간을 기다렸고, 그제야 Snow가 돌아왔다. 그녀는 운 듯 두 눈이 빨갰다.“빈이 봐줘서 고마워요. 3일 뒤에 다시 봐요.”그녀는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네.”나는 더는 묻지 않았다. 게다가 그 순간의 내 마음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그렇게 별말 없이 나는 그 자리를 떠났고, 운전하여 집으로 돌아왔다.도착해보니, 이우범이 우리 집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집안에서 도저의 짖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마 낯선 기운이 느껴진 듯했다.“강아지는 언제부터 기르기 시작한 거예요?”이우범이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언제부터 기르던지 이우범 씨와는 상관없잖아요.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예요?”나는 집에 오면서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던지라 그를 대하는 태도도 자연스레 차가웠다.이우범은 손에 작은 박스를 들고 있었고, 그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아주머니가 알려주셨어요.”우리 엄마의 서포트로 인해, 이우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