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돈이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고, 집사들은 배인호로부터 넉넉한 금전적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나는 눈을 감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집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집사도 현명하게 더 말하지 않았다.샤워를 마치고 집사의 도움을 받아 편안하고 헐렁한 홈웨어로 갈아입었는데, 속옷이든 홈웨어든 모두 내 사이즈에 아주 잘 맞았다.“씻었어?” 배인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네, 이제 날 다시 데려다줘도 돼요.”나는 침대에 앉아 대답했다.배인호는 나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내가 얘기했잖아. 밥 먹고 다시 얘기하자고.”내가 말을 더 이어가기도 전에 그는 이미 나를 안으려고 다가왔다. 옆에 있던 집사는 이를 보고 알 수 없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침실을 떠났다.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고, 상황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갔다.아래층 식탁에는 호화로운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이미 시간이 너무 늦어서 나는 식사를 할 수 마음이 전혀 없었다.배인호는 나를 내려놓고 내 옆에 앉았다.“오늘 고마웠어요.”나는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했다.“늘 당신 도움을 원하지 않았는데, 사실 당신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냥 서로를 퉁친 정도로 생각해요.”“뭘 퉁친 거야?”배인호는 나에게 물었다.“당신이 나에게 준 상처를 조금 퉁쳤다고 생각하라고요.”나는 배인호의 시선을 침착하게 마주하며 말했다.“너무하진 않죠?”배인호는 나를 몇 초간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찬 몇 점을 짚어 주었다.나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배인호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 어떤 상처들과 퉁칠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마치 초등학생이 금방 수학을 배운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느라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다.저녁 식사 후 다시 돌아가자고 했다. 배인호는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어두운 얼굴로 나를 데리고 문밖으로 나갔다.“우르르 쾅!”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밤하늘에 천둥소리가 들리고, 번
“쯧, 점점 더 협박하기 좋아한다니까.”배인호가 갑자기 일어나 앉더니 몸을 돌려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숨을 참았다.그가 먼저 나를 협박하니 나도 반격을 한 거지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1, 2분간 대치하다가 배인호는 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이 켜지자 바꾸지 않은 배경 화면이 내 눈에 보였다.이혼하기 전의 겨울, 내가 배인호를 협박해 눈사람을 만든 날 밤, 정원의 시시티브이에 찍힌 장면이었다.바탕화면을 바꾸지 않은 건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했고 배인호와 핑크빛 물결이 감도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오래전인데 아직도 안 바꾼 거야?”배인호가 캐물었다.“그냥 배경 화면일 뿐이에요.”내가 담담하게 말했다.“바꾸지 않았다는 건 이미 다 내려놓았다는 거예요. 더 이상 일부러 추억을 외면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배인호는 듣자마자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핸드폰을 던지며 말했다.“난 허락 안 했어.”그건 배인호의 일이었고 내가 상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배인호가 키스를 해왔다. 그는 일부러 내 입술을 힘껏 깨물었고 나는 아파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나는 손을 들어 배인호를 때리고 싶었지만, 배인호가 한발 빠르게 내 손을 움켜잡았고 두발도 다쳐 움직일 수 없는 터라 반항은 할 수 없었다.배인호의 키스는 거센 파도처럼 밀려왔고 부드러움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복수와 징벌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고 이러다간 숨 막혀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드디어 그가 키스를 멈추었지만, 뜨거운 촉감은 목으로 그리고 가슴 쪽으로 번져갔고 나는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짐승!”“보다 못해?”배인호는 일부러 동작을 멈추고 내 말을 받아쳤다. 나는 약이 올라 숨이 턱턱 막혔다.“너 지금 반신불수 상태라 하기가 불편하잖아. 근데 계속 나 자극하면 너도 같이 기분 나빠지게 하는 수밖에.”배인호의 말은 파렴치하고 비겁했다.만약 전생에
문자를 보내고 나니 배인호가 껍질을 다 깐 새하얀 계란을 내 앞에 놓아 주고는 다시 팔을 거두었다.“먹어.”“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나는 내가 언변의 왕 기질이 있다는 걸 느꼈다. 배인호가 무엇을 하든 간에 한 번씩은 꼭 반항을 하고 싶었다.배인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럼, 직접 까서 먹어. 먹고 혼자서 걸어나가.”배인호는 내가 손발이 불편한 틈을 타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를 괴롭히고 있다.나는 혼자서 걸어 나갈 수 없는데 이 기사님은 들어올 수 없으니 결국 나는 배인호가 없으면 안 되었다.나는 차오르는 화를 억누르면서 그 계란을 집어 들어 두 입 만에 먹어 치웠다. 그러자 배인호는 샌드위치를 내 쪽으로 밀며 말했다.“잘 먹네. 더 먹어.”“켁켁...”나는 목이 메어 자기도 모르게 기침이 나갔다.배인호의 감시하에 나는 아침을 많이 먹었다. 마지막엔 따듯한 우유까지 한 잔 마셨더니 조금 더부룩한 느낌이었다.어젯밤 나한테 배인호의 좋은 점을 얘기해주던 아줌마가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애매함과 야유가 섞여 있었다.“다 먹었어요. 빨리 나가요.”나는 일부러 그 도우미 아줌마의 시선을 무시하고 배인호를 재촉했다.배인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른 사람의 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를 안아 올리더니 밖으로 걸어 나갔다.밤새 내린 비 때문에 바닥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옷깃을 타고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추위에 목을 움츠렸다. 배인호는 물웅덩이를 밟으며 나를 자신의 차까지 데려다주었다.차가 청담동 밖으로 나오자, 내 차가 보였다. 이 기사님이 차 밖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인호의 차가 서서히 멈춰서자, 이 기사님이 바로 차 문을 열어주었다.“사장님, 무슨 일이에요? 왜 갑자기 휠체어가 필요하신 거예요?”“발을 삐끗해서 걷기가 조금 불편해서요.”나는 이 기사님을 향해 손을 뻗었다.“저 좀 잡아주세요. 차에서 내려 볼게요.”이 기사님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나를 잡아주려고 하는데 배인호가
“어떤 여자들 인생에는 여자들끼리 경쟁하는 것만 있나 봐요. 쯧, 남자 쫓아다니는 건 사실 쪽팔리는 게 아닌데 어떤 여자들은 꼭 사람들 보기에 저급한 수단을 쓰니까 역겨운 거죠.”냥이가 턱을 괴며 말했다.“잉? 근데 전에 폭로된 녹음 파일 들어보니까 서란 씨 너무 잔머리 많이 굴렸다고...”“닥쳐요!”서란이 발끈하더니 이를 악물고 냥이에게 경고했다.냥이는 나를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눈을 찡긋했다. 일부러 서란을 약 올리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냥이는 보면 볼수록 재밌는 여자 같았다. 그러니 배인호도 귀찮아하면서 차단하지 않는 거겠지.민예솔이 서란의 팔을 잡아당겼다. 내 착각인지는 몰라도 민예솔은 서란과 좋은 친구 사이가 된 다음부터 전체적으로 우울해진 것 같았고 하루 종일 축 처진 상태로 보였다.민예솔은 나를 경계하며 서란을 타일렀다.“허지영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자.”“그래, 지훈 오빠도 우리 기다리고 있잖아. 가까운 사람이 기회도 많다고 나도 있는데 인호 씨랑 얘기 나눌 수 있게 기회 많이 찾아줄게. 인연은 꼭 이루어지니까 걱정하지 마.”유정이 가슴을 치며 약속했다.유정의 말이 맞았다. 우지훈이라는 관계가 있는 한 서란은 배인호를 만날 기회가 있다.배인호와 우지훈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라 큰 모순이 없는 한 이 우정을 끊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전에 우지훈이 배 씨 그룹의 라이벌 회사 책임자를 만난 걸 배인호는 알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우지훈은 수상한 점이 많았지만 나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없었다.“가자.”서란이 아무 표정 없이 대답하고는 돌아서더니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았고 비명을 질렀다.이때 배인호와 우지훈 그리고 박준 세 사람이 문 앞에 나타났다. 우리 자리는 꽤 눈에 띄는 자리라 그들은 서란이 쓰러지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우지훈이 제일 급해 보였고 제일 처음으로 달려왔다. 먼저 유정에게 괜찮은지 확인하고는 서란을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서란 씨, 괜찮아요?”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바로 길가에 차를 세웠다.“갑자기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나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이우범에게 죄책감으로 가득했는데 말이다.도시아는 너무 급해서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나도 모르겠어요. 3일 전쯤에 가족이랑 크게 싸우고 집을 나가서는 연락이 안 돼요. 어딨는지도 모르고!”이우범은 절대 쉽게 집에서 가출할 성격은 아니었다. 아마도 3일 전에 가족이랑 엄청 심하게 다투었기에 그랬을 것이다.나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이우범이 너무 많은 부담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이우범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도 책임이 있었다.“연락되는지 시도해 볼게요. 시아 씨도 계속 사람 보내서 전에 살던 아파트나 일했던 병원 쪽으로 찾아보세요.”내가 대답했다.도시아가 울먹이면서 고맙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회사에 갈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우선 이우범을 찾는 것이었다.이우범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은 꺼져있는 상태였다. 카톡으로 문자를 보내고 영상통화를 걸어봐도 대답이 없었다. 아예 증발해 버린 사람 같았다.다음은 그가 살았던 아파트였다. 이우범은 전에 자기 아파트 카드키와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려준 적이 있었다. 나는 차에서 그 카드키를 찾아 들고는 그의 아파트로 한걸음에 달아갔다.아파트 현관문을 열었지만, 이우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구에도 얇게 먼지가 덮여 있었다.한 바퀴 더 찾아보고 이우범이 전에 일하던 병원에도 찾아가 봤지만, 그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밤이 어두워졌지만, 나는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나는 노성민에게 전화를 걸어 이우범이 사라진 소식을 그에게 알려 주었고 같이 찾자고 했다.“그래요. 연락할 방법 생각해 볼게요.”노성민은 요새 이우범과 잘 연락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에는 사이가 좋았던 터라 진짜 가만히 지켜볼 사람은 아니었다.까놓고 말하면 결국 나 때문에 이우범은 배인호와 등을 지게 되었고 제일 친한 친구들과 멀어지게
나는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씁쓸한 기분이 마음속을 맴돌고 있었다.“그래요, 잠깐만 기다려요.”나는 전화를 끊고 그 반지를 찾아서 끼고는 급히 이우범을 찾으러 내려갔다.북쪽 게이트 밖에 이우범의 차가 세워져 있었지만, 안에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차 밖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이우범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니 그가 내 뒤에 서 있었다.날씨가 많이 추워졌는데 이우범은 아직도 얇은 그레이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하얀 피부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불그스름해졌다. 특히는 코끝이 더 빨갰다.“요새 어디 간 거예요? 우범 씨 집에서 애타게 찾고 있어요. 나도 병원이랑 아파트 다 가봤는데, 없던데.”이우범을 보자 조여왔던 마음이 다시 풀리는 듯했다. 아무 일 없이 무사하면 된 거다.“반지는요?”이우범은 그저 머리를 숙이고 내 손을 보고 있었다.나는 반지를 낀 손을 들어 그에게 보여주었다.“여기요.”내 손은 매우 예쁜 편이었다. 가늘고 긴 손은 어떤 반지를 끼나 다 괜찮아 보였다.이우범이 내 손을 살며시 잡더니 자세히 관찰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쁘네요, 사진 한 장 찍어도 돼요?”나는 그의 이런 요구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된다고 했다. 고작 사진 한 장인데 말이다.이우범이 사진을 찍더니 그 사진을 배경 화면으로 설정하고는 나에게 물었다.“혹시 신경 쓰여요?”“괜찮아요. 그냥 다시 가출만 하지 마요. 이러면 우범 씨 부모님이 너무 상심이 크잖아요. 그러면서 내가 가출하라고 한게 하닌가 오해할 수도 있어요.”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다독였다.이우범의 표정이 살짝 차가워졌다.“집에서 도시아랑 약혼하라고 하는데 내가 거절했어요. 그래서 바람 좀 쐬러 나온 거예요.”이우범 집안은 도시아를 확실히 아주 좋아했다. 집안도 잘 맞고 아직 미혼이니 나보다는 훨씬 좋은 선택이었다.나는 이우범 집안의 이런 행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지
한참 후 냥이가 고맙다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대화가 끝난 셈이었다.나는 저릿한 목을 돌려 풀어주고는 물건을 정리해 퇴근했다.“지영아, 우리 집 와서 해물 샤부샤부 먹자, 빨리!”회사에서 나오는데 마침 정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그래.”나는 단번에 동의했다. 지금 집에 가도 별 의미가 없었다. 텅 빈 집은 외로운 기운으로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요즘은 틈만 나면 정아와 애들을 찾아서 모이려고 했다. 그러면 혼자서 잡생각을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세희는 얼마 전 이모건과 사귀게 되었고 민정은 결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아네 가족도 따듯하고 화목해 보였다. 셋 다 행복한데 나만 불쌍한 느낌이었다.“성민 씨는?”인사를 하고는 집을 둘러봤는데 노성민이 보이지 않아 물었다.“배인호 씨가 불러서 나갔어. 무슨 일인지는 몰라.”정아가 답답한 듯 말했다.“어젯밤에 이우범 찾느라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아침에 이우범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문자를 받았다고 그러더라고.”배인호는 아까 샤인 코스메틱트로 갔는데 노성민까지 불러낸 거 보면 진짜 무슨 일 생긴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마음속 깊이 샤인 코스메틱에서 또 이상한 짓거리를 해서 우리 회사에 영향 주지 않을까 걱정되었다.“인호 형, 아마 가짜일 거예요...”정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노성민은 이렇게 말하며 나타났다. 그러더니 테이블에 앉은 우리를 발견하고 멈칫했다.뒤따라 들어오는 배인호의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였다. 그는 짜증이 담긴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노성민이 절반쯤 말하다 말았다. 그는 외투를 벗으며 헤헤 웃었다.“아, 다들 밥 먹으러 온 거구나. 우리 자기가 말 안 해줘서 몰랐네요.”정아가 나와 배인호를 번갈아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난 배인호 씨 오는 줄 몰랐어.”요새 배인호와 만날 기회가 많아지면서 밥 한 끼 같이 먹는 건 아주 평범한 일이 되었다. 나는 현실을 잘 파악해야 했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상, 그리고 같은 계층에 있
내 말에 서란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그녀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배인호가 나한테 적극적이라는 것이었다.하미선은 그나마 괜찮았다. 서란의 손을 토닥거리더니 상냥한 어머니의 말투로 말했다.“라니야, 너 왜 이렇게 속이 좁아? 허지영 씨 배인호 씨 전처인데 이혼해도 서로 친구 하는 건 정상이잖아. 오늘 너도 여기 왔고.”맞는 말이다. 전에 서란은 유하가든에 와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들어올 수 있다는 건 무조건 배인호가 허락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의미는 그들의 사이에 변화가 생겼다는 거다.배인호는 여전히 이랬다저랬다 변덕스러웠다. 나는 도무지 그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알겠어요, 엄마.”서란은 하미선의 말을 참 잘 들었고 바로 착한 딸의 모습으로 돌아와 고분고분 대답했다.나는 하미선 말속의 자랑을 신경 쓰지 않았다. 곁눈질로 배인호가 걸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우리 집 정원으로 들어갔다.서란의 상큼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기쁜 듯했다.“인호 씨!”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 빠르게 거실로 들어가 “쾅”하고 문을 닫아버렸다.옆집에서 어떤 시나리오가 펼쳐질지는 생각하기조차 귀찮았다.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벌거숭이 나무는 이 겨울밤에 더 시려 보였다. 나는 와인 한 잔을 따랐다. 마시고 바로 잘 생각이었다.“딩동!”핸드폰이 울렸다. 냥이가 보내온 메시지였다.확인하기도 전에 냥이의 음성통화가 날아왔다.전화를 받자, 냥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지영 언니, 인호 씨 전에 머리 다친 적 있죠? 어떻게 서란과 하미선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할 수가 있어요?”“어떻게 알았어?”나는 놀라서 물었다.“저 서란 씨 인스타 있잖아요. 인스타에 올렸더라고요. 진짜 답답해요.”냥이가 이렇게 화내는 건 드문 일이었다. 언성도 많이 높아져 있었다.털털한 성격이라 거의 충동적이고 격렬한 태도가 없었다. 있는 집 딸이라 있어야 할 기본 매너는 있었다.배인호의 이번 행보가 진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